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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년 요24강(19:1-42) 다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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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8회 작성일 21-09-07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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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24 강 
말씀 | 요한복음 19:1-42
요절 |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때 후회를 많이 합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마음껏 사랑하지 못한 것,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한 것,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시작은 거창하게 하지만 끝은 흐지부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죽으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며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한 자들이 누그러지기를 기대하며 퉁 치고자 한 것입니다. 채찍질은 죄수의 옷을 벗기고 기둥이나 말뚝에 묶은 뒤 여러 명의 고문자들이 지쳐 녹초가 되고, 죄수의 살점이 갈가리 찢겨 피를 흘릴 때까지 계속해서 때립니다. 채찍에는 보통 긴 못이나 뼈 조각들 혹은 사슬 모양으로 연결된 납조각을 단 가죽끈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절차를 시행하는 동안 죄수들이 실신하고 죽는 것은 놀랍거나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채찍질이 끝난 후에 더 잔학한 행위가 뒤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로마 군인들의 노리개가 되었습니다.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그들의 경멸과 증오는 거의 무한한 것이었는데 그들의 손에 유대인의 ‘왕’이 넘겨진 것입니다. ‘흥, 왕이라고? 그러면 이 자를 왕으로 만들어 주자!’ 그래서 예수님은 심문을 받으며 대관식을 치룹니다. 왕이라면 왕관이 필요하지. 군인들이 길이가 30센티미터나 되는, 대추야자의 커다랗고 들쭉날쭉하고 뾰족한 가시들을 엮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아프게 쑤셔 박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마에서 핏방울이 나오더니 이마를 타고 눈언저리와 광대뼈와 귀 뒤쪽으로 흘러 내렸습니다. 그들은 낡은 자색 천 조각을 찾아서 겉옷을 삼았습니다. 왕좌로는 상자나 긴 의자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군인들이 막대기 하나를 그 분의 손에 쥐어 주어 왕을 상징하는 홀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황제에게 인사를 할 때 ‘아베 가이사’를 의도적으로 바꾸어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인사하고는 침을 뱉었습니다. 손바닥으로 때리고, 주먹으로 쳤습니다. 그들이 막대기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쳤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신데 실제로는 이런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 22:6).” “그는 …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예수님은 감추어진 왕이십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인데 때로는 예수님이 겪으셨던 것과 같이 삶의 환경들이 우리의 주장과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이라는 부와 건강은 어디가고 가난과 질병, 수치와 고통, 외로움으로 뒤범벅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상하신 것은 나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함입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주님이 내 대신 고통을 당하십니다. 주님은 나의 고난을 아시며 나누실 수가 있습니다. 그 분과 고난의 교제를 나눌 때 우리는 놀라운 해방과 평강을 누립니다. 우리의 깨어진 관계 속에서 주님의 위로를 받고 용서하고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히 12:3 새번역).”

  빌라도는 다시 밖으로 나가 말합니다.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빌라도가 하는 말이지만, 빌라도를 통해서 저자가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이 예수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이 말을 듣고’ 빌라도는 극도의 불안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돌을 깐 뜰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14). 유대인들은 정오부터 해질녘까지 유월절 어린 양을 잡고 삶아서 저녁에 먹는데 그 양 잡는 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언도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이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고자 합니다. 빌라도는 형량을 선고하는 대신 유대인들에게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주권을 선포해버립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경멸하였지만 그가 알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진리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자 즉시 분노가 폭발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피로 맺은 언약을 산산조각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 신성한 약속을 깨버리고 가공할 만한 배교를 선언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왕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내가 왕이요 주인이요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신성 모독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이사를 왕으로 영접함으로써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우상숭배의 결과가 어떠합니까? 그들이 자기들의 왕이라고 주장한 가이사는 40년 후에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하고 50만 명의 유대인들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악행을 벌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결과요 세상 왕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당국이 제기한 참람죄와 빌라도의 재판에서 반역죄로 고소를 당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왜곡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죄는 모든 인간 범죄의 핵심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너희가 … 하나님 같이 되어(창 3:5)”라는 사탄의 말에 속아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인 체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무죄하신 예수님을 대신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셨고 빌라도의 심문에 침묵하셨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예수님은 ‘입이 막혀진 사람들을 대신하여(롬 3:19)’ 즉 우리를 대신하여 정죄를 받으십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 대신 심문을 받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방면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유대인들의 억지와 위협으로 인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줍니다. 빌라도는 재판관으로서 공정한 재판을 해야 마땅하지만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무죄한 예수님을 죽음에 몰아넣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정치 생명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가장 큰 죄입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이 비극적인 순간을 잊지 못해서 괴로워하다가 5년 후 유배지에서 자살을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맡으매 예수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운데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습니다. 죄패는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습니다. 로마의 라틴어는 법과 제도의 언어이고, 헬라는 문화의 언어, 히브리어는 종교를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왕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12:32)’는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왕이시면서 우리 개인의 왕이십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도우셨고 지금도 인격적으로 내 안에 거하시며 돕고 내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의 두 손목과 두 발목에 길이 18Cm 둘레 7cm가 넘는 대못을 박았을 때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나고 사지가 뒤틀렸습니다. 시편 22:14,15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왜 이런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을까요? 신명기 21장 23절은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든지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53:5).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증언했습니다(벧전2:24). 군병들이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실은 나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나의 교만과 허무와 정욕과 이기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나의 미움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나의 불순종과 반발심과 탐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심으로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무서운 정죄와 심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세계에서 빛과 생명의 세계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는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칼이 그 마음을 찌르듯” 했을 것입니다(눅 2:35).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들이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는 시므온의 예언이 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에게 이르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육신의 동생들이 있지만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가족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삼으시고 끝까지 책임을 지며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다 빠져나갔으므로 목이 마릅니다. 목마름은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목마름을 체험하시며 그 목마름을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영접할 때 사랑에 대한 우리의 목마름이 해갈됩니다. 영혼의 갈증에 대한 목마름이 해갈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 테테레스타이! 이게 상업 용어입니다. 돈 꿔줬는데 그 사람이 다 갚으면, 마지막 빚을 다 갚아주면 딱 도장을 찍어주는데 테텔레스타이에요. 갚아야 되는 거 다 갚았다. 이게 완료수동태로서 그때부터 현재까지 효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게 가능했던 것은 그는 무한하신 하나님이시고 완전하신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 죄값을 치루기 위해서 오셨고, 우리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만족이 됐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구원을 선물해 주시는 길이 생겨버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을 때에 다 이루었다고 말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다 이루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더 자세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모든 죄 값을 완전히 치르신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의 대가는 반드시 죽음입니다.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죄로 인해서 무서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속죄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구약에서 그것은 인간 대신에 짐승의 피를 흘려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것입니다. 이는 피 흘림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이죠(히9:22). 그래서 이때까지는 죄를 범할 때마다 짐승을 잡아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도 믿음으로 드릴 때 용서받고 정결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효력이 일시적이어서 죄를 지을 때마다 또 다시 짐승의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는 날 동안 계속해서 범죄 하기 때문에 빈번하게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제사 제도는 장차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참된 속죄 제사의 그림자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참되고 완전한 속죄 제사를 통해서 인류 구원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흠 없는 속죄 제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거룩한 몸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창에 찔려 피와 물을 다 쏟으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흠 없고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의 피이기 때문에 단 한 번에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를 이룹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순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살 길이 완전하게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의 다 이루었다” 혹은 “99% 이루었기 때문에 1%는 네가 알아서 해라”고 말씀하시 않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죄 값을 100% 완전히 치루신 것이죠.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구원을 위해서 내가 뭔가 해야 되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반복해서 죄를 지을 때 깊은 불의에 빠져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너무 염치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우리가 지은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십자가에서 모두 대속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나의 죄를 고백하면 됩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가 죄를 짓고 치루어야 할 대가는 수치와 정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불과 유황이 타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해방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정죄에서 해방시킵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임종자리에서 천사가 천국으로 데리고 가려고 그럴 때 어쩌면 사탄이 아니 이 사람을 왜 천국에 데리고 갑니까? 이 사람이 이런 짓도 하고 저런 짓도 해서 천벌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인데 어떻게 천국에 갑니까? 이 사람은 천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장하겠죠. 그러면 예수님이 옆에 계시다가 그럴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천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 천벌을 대신 받았습니다. 내가 다 갚았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우리는 함부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죄 짓는 것을 쉽게 생각하고 안일에 빠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힘쓰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의 빚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조금이나마 갚고자 힘쓰게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사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승리의 외침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이루었을 때 예수님은 기뻤습니다. 홀가분했습니다. 참 만족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탄식이 아니라 사명을 완수한 자의 승리의 외침입니다. 조금의 후회나 아쉬움이 없는 기쁨의 외침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가장 위대한 한 마디입니다. 온 인류에게 해방을 선언하는 가장 힘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는데 ‘마쳤다’는 단어도  ‘다 이루었다’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17장 4절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때까지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때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그의 뜻을 성취하고자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서 마지막 사명까지 완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완수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계시하셨고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 일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죽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정말 복되고 위대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다 이루었다는 뜻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성취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사랑을 나타냅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성취하였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 뱀을 든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들림으로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완전히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3:16).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그들은 담대히 자신들의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니고데모가 드린 침향 섞은 몰약의 양은 34Kg으로서 왕에게 드리는 분량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왕이심을 다시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시고 장사지냈습니다. 본래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시체는 도시 바깥에 있는 범죄자용 매장지에 묻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사야 53장 부자의 무덤에 묻힌다는 말씀의 성취로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는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함께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임이요 택하신 모든 사람들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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