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1년 요23강(18:1-40) 내가 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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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23 강
말씀 | 요한복음 18:1-40
요절 | 요한복음 18:37
내가 왕이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에 체포되고 심문을 받으십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이 상황을 주도하십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 분명히 증거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체포되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왕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십니다. 우리가 왕 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 백성으로서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충성을 다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습니다. 그곳은 가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모이는 곳이므로 가룟 유다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숨기지 않고 잡히고자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기도하셨습니다. 자기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때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얻은 아랫 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무장을 하고 많은 군대를 이끌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당할 일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아가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십니다.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심으로 상황을 주관하십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하자 ‘내가 그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장한 군인들이 물러가서 추풍낙엽처럼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하자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피할 길을 열어 주시고 하나도 잃지 않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보스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오늘날도 우리를 물어뜯고자 달려드는 자들이 있습니다. 비판의 음성, 과거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두려움, 교묘하게 거짓말을 해서 우리의 돈을 빼내 가고자 하는 보이스 피싱 등으로부터 예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저는 지난 주 딸의 이름으로 접근하는 보이스 피싱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빠 나 핸드폰 먹통 돼버려서 에이에스(AS)센터에 맡기고 컴퓨터로 문자 하고 있어, 확인 되면 답장 줘. ... 핸드폰 액정보험 신청하는데 지금 폰 없어서 인증 받을 수가 없어서 아빠 껄로 잠깐 폰 인증 받아도 돼? 응” 이렇게 해서 악한 놈은 제 스마트 폰으로 연결을 하고 핸드폰 약정보험신청을 하고 환불을 받아야 하니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때 보이스 피싱이구나 깨닫고 스마트 폰을 꺼버렸습니다. 제가 딸과 평소에 하던 대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이 악한 놈의 공격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탄의 음성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은 평소에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으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를 여러 모양의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심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때 베드로는 도망가지 않고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충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열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그르칠 수 있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다 칼로 망합니다. 욱하는 감정을 참지 못해서 주먹을 날리거나 언어폭력을 휘두르면 상대방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관계는 깨지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칼을 휘두르면 사탄이 좋아라고 칼춤을 추게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더러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은 무엇일까요? 그 잔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고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의 잔을 적들이 아니라 자신의 손에 받아들고 다 마시고자 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결국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이 마침내 ‘다 이루었다’는 말로 바뀔 때까지 한 방울도 남김없이 그 잔을 다 마십니다.
유사무엘 선교사님은 1992년에 우간다에 KOICA 파견의사로 나아가 10년 간 개척 역사를 섬기면서 두 번의 좌절을 겪었다고 합니다. 5년 단위로 온갖 수고를 다해 섬긴 제자들이 떠나가는 아픔을 두 번씩이나 겪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큰 딸 주은이가 말라리아로 사경을 헤매었고, 자신도 에이즈 감염환자의 주사바늘에 찔려서 감염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너무 낙심되어 한국으로 귀국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명의 양과 마지막으로 공부하면서 받은 말씀이 요한복음 18장 11절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그 말씀에 기초해서 사명의 잔을 끝까지 마셨을 때 우간다와 이디오피아에서 아름다운 개척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고 체포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당시 실세인 안나스에게 데려갔습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한 사람 즉 사도요한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요한은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 요한이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얼떨결에 “나는 아니라”고 말하여 예수님과의 친분을 부인하였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같이 있었기 때문에 이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기록하였습니다. 그 때가 추워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는데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었습니다. 베드로는 끼지 않을 곳에 끼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다고 응답하셨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고 이단적인 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쳐서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고 응수하셨습니다. 죄가 확정되기 전에 사람을 때리는 것은 불법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셨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는데 사람들이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또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아니라.”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말고의 친척이었습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합니다. 그가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었습니다. 요한은 심문하는 자들에게 맞서서 아무 것도 부인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과 질문을 던지는 자들 앞에서 위축되어 모든 것을 부인하는 베드로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공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철저하게 깨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가증스러운 배신을 자각하자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눅 22:62).
이 밤은 가장 어둡고 침울한 밤이었습니다. 안나스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유대인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애굽에서 해방되고, 홍해가 갈라지고 가나안 백성들을 정복하였습니다. 모세와 사무엘과 다윗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과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을 조상으로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율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아를 사형시키기 위해서 안나스는 자신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는 것은 큰 슬픔입니다.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 빛나는 별들이 떠 있듯이 우리는 빛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두움 속에도 임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가야바도 자신의 목적 가운데 사용하십니다. 그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하던 자입니다(11:49,50). 주님께는 흑암과 빛이 일반입니다(시 139:11,12).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기 때문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돕는 일을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히 4:15,16, 5:2, 2:18).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부르시고 수제자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산상수훈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물 위를 걸어가시고, 변화산 상에서 변화되신 예수님을 보았고 중풍병자가 자기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것도 보았고 나병환자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공개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그 때에 그는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어두움은 지금도 가끔가다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를 볼 때 그의 인생 전체가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보입니다. 희망은 사라지고 어두움만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자기를 과신하는 문제를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강한 자아가 이때 비로소 깨졌습니다. 그는 버림을 받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는 잘 아십니다. 그가 자기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도 아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베드로를 부활하신 후에 다시 찾아오셔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 쓰십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의 충만을 받은 몇 주일 후에 그들에게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b)”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실패가 끝은 아닙니다.
이 밤의 어두움보다 더 엄청난 것은 바로 하나님이 겉으로 볼 때 연약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저버리는 어두움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적들에게 체포되어 무력한 모습, 재판 과정을 마음대로 좌우하는 재판정의 불공정한 모습, 하나님의 아들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힘없이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깊은 어두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비극과 어떤 방법을 다 동원해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잔학한 행위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난민들, 학대 박는 사람들, 병자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 탄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두운 그 가운데도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충성된 증인의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거짓된 재판정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셨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정복하지) 못하더라”(요1:5)는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수많은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에서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라는 판데믹 상황 속에서 복음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증인들을 통해서 변함없이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며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코로나 19가 사라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진리의 빛은 증인들을 통해서 여전히 비칠 것입니다. 이번 주에 모든 대학교가 개강을 합니다. 우리는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며 충성된 복음의 증인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8-40절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서 심문을 받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사형권이 없기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그들이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행악자로 고발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심문을 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재판장이 관정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가 하면서 죄수를 심문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의 심문에 예수님은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물으십니다. 빌라도가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7).”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정치적인 수단에 의해서 왕이 되거나 통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대의 힘으로 정복해나가는 나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인간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시고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구원해내시면서 세워져나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이 아니라 진리에 의해서 통치가 됩니다. 세상 나라는 정복과 확장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으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와 관계의 회복에 목적을 두고 움직입니다. 세상 나라는 경쟁에 기초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사랑에 기초를 둡니다.
인간이 에덴동산 곧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이유가 무엇인가요? 죄 때문이죠.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았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인간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그 나라의 백성인가요?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됩니다. 3장 5절은 성령을 통해서 마음이 변화된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라고 말씀합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가 그 백성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심겨짐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왕 되신 예수님이 내 마음을 다스림으로 내 마음 속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며,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사랑이 충만합니다. 그 나라 왕이 겸손과 섬김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그 나라 백성들도 겸손과 섬김으로 봉사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섬김을 통해서 교회 속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를 우리는 소망합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진리는 예수님 자신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느냐 듣지 못하느냐는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에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십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복을 누립니다. 생명의 충만함과 참 자유를 누립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자유로운 삶을 제시하십니다. 손발이 묶여서 재판을 받고 계신 예수님이 재판장인 빌라도에게 참된 자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을 더 이상 듣지 않고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의 음성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마치 자신이 왕인 것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결과는 쾌락과 물질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며 살았음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영접하고 그 분의 다스림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누리며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 가정과 교회에 이루어지고 이 사회와 나라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18:1-40
요절 | 요한복음 18:37
내가 왕이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에 체포되고 심문을 받으십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이 상황을 주도하십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 분명히 증거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체포되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왕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십니다. 우리가 왕 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 백성으로서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충성을 다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습니다. 그곳은 가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모이는 곳이므로 가룟 유다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숨기지 않고 잡히고자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기도하셨습니다. 자기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때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얻은 아랫 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무장을 하고 많은 군대를 이끌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당할 일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아가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십니다.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심으로 상황을 주관하십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하자 ‘내가 그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장한 군인들이 물러가서 추풍낙엽처럼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하자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피할 길을 열어 주시고 하나도 잃지 않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보스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오늘날도 우리를 물어뜯고자 달려드는 자들이 있습니다. 비판의 음성, 과거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두려움, 교묘하게 거짓말을 해서 우리의 돈을 빼내 가고자 하는 보이스 피싱 등으로부터 예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저는 지난 주 딸의 이름으로 접근하는 보이스 피싱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빠 나 핸드폰 먹통 돼버려서 에이에스(AS)센터에 맡기고 컴퓨터로 문자 하고 있어, 확인 되면 답장 줘. ... 핸드폰 액정보험 신청하는데 지금 폰 없어서 인증 받을 수가 없어서 아빠 껄로 잠깐 폰 인증 받아도 돼? 응” 이렇게 해서 악한 놈은 제 스마트 폰으로 연결을 하고 핸드폰 약정보험신청을 하고 환불을 받아야 하니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때 보이스 피싱이구나 깨닫고 스마트 폰을 꺼버렸습니다. 제가 딸과 평소에 하던 대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이 악한 놈의 공격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탄의 음성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은 평소에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으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를 여러 모양의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심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때 베드로는 도망가지 않고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충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열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그르칠 수 있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다 칼로 망합니다. 욱하는 감정을 참지 못해서 주먹을 날리거나 언어폭력을 휘두르면 상대방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관계는 깨지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칼을 휘두르면 사탄이 좋아라고 칼춤을 추게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더러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은 무엇일까요? 그 잔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고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의 잔을 적들이 아니라 자신의 손에 받아들고 다 마시고자 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결국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이 마침내 ‘다 이루었다’는 말로 바뀔 때까지 한 방울도 남김없이 그 잔을 다 마십니다.
유사무엘 선교사님은 1992년에 우간다에 KOICA 파견의사로 나아가 10년 간 개척 역사를 섬기면서 두 번의 좌절을 겪었다고 합니다. 5년 단위로 온갖 수고를 다해 섬긴 제자들이 떠나가는 아픔을 두 번씩이나 겪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큰 딸 주은이가 말라리아로 사경을 헤매었고, 자신도 에이즈 감염환자의 주사바늘에 찔려서 감염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너무 낙심되어 한국으로 귀국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명의 양과 마지막으로 공부하면서 받은 말씀이 요한복음 18장 11절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그 말씀에 기초해서 사명의 잔을 끝까지 마셨을 때 우간다와 이디오피아에서 아름다운 개척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고 체포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당시 실세인 안나스에게 데려갔습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한 사람 즉 사도요한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요한은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 요한이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얼떨결에 “나는 아니라”고 말하여 예수님과의 친분을 부인하였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같이 있었기 때문에 이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기록하였습니다. 그 때가 추워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는데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었습니다. 베드로는 끼지 않을 곳에 끼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다고 응답하셨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고 이단적인 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쳐서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고 응수하셨습니다. 죄가 확정되기 전에 사람을 때리는 것은 불법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셨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는데 사람들이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또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아니라.”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말고의 친척이었습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합니다. 그가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었습니다. 요한은 심문하는 자들에게 맞서서 아무 것도 부인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과 질문을 던지는 자들 앞에서 위축되어 모든 것을 부인하는 베드로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공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철저하게 깨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가증스러운 배신을 자각하자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눅 22:62).
이 밤은 가장 어둡고 침울한 밤이었습니다. 안나스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유대인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애굽에서 해방되고, 홍해가 갈라지고 가나안 백성들을 정복하였습니다. 모세와 사무엘과 다윗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과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을 조상으로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율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아를 사형시키기 위해서 안나스는 자신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는 것은 큰 슬픔입니다.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 빛나는 별들이 떠 있듯이 우리는 빛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두움 속에도 임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가야바도 자신의 목적 가운데 사용하십니다. 그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하던 자입니다(11:49,50). 주님께는 흑암과 빛이 일반입니다(시 139:11,12).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기 때문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돕는 일을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히 4:15,16, 5:2, 2:18).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부르시고 수제자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산상수훈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물 위를 걸어가시고, 변화산 상에서 변화되신 예수님을 보았고 중풍병자가 자기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것도 보았고 나병환자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공개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그 때에 그는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어두움은 지금도 가끔가다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를 볼 때 그의 인생 전체가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보입니다. 희망은 사라지고 어두움만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자기를 과신하는 문제를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강한 자아가 이때 비로소 깨졌습니다. 그는 버림을 받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는 잘 아십니다. 그가 자기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도 아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베드로를 부활하신 후에 다시 찾아오셔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 쓰십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의 충만을 받은 몇 주일 후에 그들에게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b)”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실패가 끝은 아닙니다.
이 밤의 어두움보다 더 엄청난 것은 바로 하나님이 겉으로 볼 때 연약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저버리는 어두움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적들에게 체포되어 무력한 모습, 재판 과정을 마음대로 좌우하는 재판정의 불공정한 모습, 하나님의 아들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힘없이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깊은 어두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비극과 어떤 방법을 다 동원해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잔학한 행위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난민들, 학대 박는 사람들, 병자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 탄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두운 그 가운데도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충성된 증인의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거짓된 재판정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셨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정복하지) 못하더라”(요1:5)는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수많은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에서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라는 판데믹 상황 속에서 복음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증인들을 통해서 변함없이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며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코로나 19가 사라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진리의 빛은 증인들을 통해서 여전히 비칠 것입니다. 이번 주에 모든 대학교가 개강을 합니다. 우리는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며 충성된 복음의 증인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8-40절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서 심문을 받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사형권이 없기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그들이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행악자로 고발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심문을 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재판장이 관정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가 하면서 죄수를 심문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의 심문에 예수님은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물으십니다. 빌라도가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7).”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정치적인 수단에 의해서 왕이 되거나 통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대의 힘으로 정복해나가는 나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인간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시고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구원해내시면서 세워져나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이 아니라 진리에 의해서 통치가 됩니다. 세상 나라는 정복과 확장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으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와 관계의 회복에 목적을 두고 움직입니다. 세상 나라는 경쟁에 기초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사랑에 기초를 둡니다.
인간이 에덴동산 곧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이유가 무엇인가요? 죄 때문이죠.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았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인간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그 나라의 백성인가요?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됩니다. 3장 5절은 성령을 통해서 마음이 변화된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라고 말씀합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가 그 백성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심겨짐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왕 되신 예수님이 내 마음을 다스림으로 내 마음 속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며,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사랑이 충만합니다. 그 나라 왕이 겸손과 섬김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그 나라 백성들도 겸손과 섬김으로 봉사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섬김을 통해서 교회 속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를 우리는 소망합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진리는 예수님 자신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느냐 듣지 못하느냐는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에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십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복을 누립니다. 생명의 충만함과 참 자유를 누립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자유로운 삶을 제시하십니다. 손발이 묶여서 재판을 받고 계신 예수님이 재판장인 빌라도에게 참된 자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을 더 이상 듣지 않고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의 음성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마치 자신이 왕인 것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결과는 쾌락과 물질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며 살았음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영접하고 그 분의 다스림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누리며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 가정과 교회에 이루어지고 이 사회와 나라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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