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1년 요18강(13:1-38) 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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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8 강
말씀 | 요한복음 13:1-38
요절 | 요한복음 13:34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고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네 이웃은 모든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함으로 제자됨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이제까지 표적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습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르렀습니다. 즉 유월절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도를 전하여 구원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당국자들에게 체포되면 제자들은 그를 부인하고 도망을 칠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한 제자는 자기를 배반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런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한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죽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을 하십니다.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나의 형편에 따라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 하건, 못하건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심지어 내가 그를 배반할 수도 있는데 아니 실제로 배반하는데 사랑하십니다.
C. 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상처받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해보라 그러면 곧 당신은 상처받게 될 것이다. 만일 상처받기를 원치 않거든 그 누구도 사랑하지 말라. 당신의 마음을 아무에게도 주지 말라. 심지어 동물에게 조차도 말이다. 당신의 마음을 철장 안에 굳게 가두라. 그리고 적당한 예의와 고상한 취미로 당신의 마음을 꽁꽁 동여매라. 그러면 당신은 결코 상처 입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 안에서 당신의 마음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굳은 마음으로, 누구도 가까이 하지 못할 단단한 마음으로, 누구도 치료하지 못할 치료 불능의 마음으로 변해 갈 것이다.” 사랑은 뭐라구요? 사랑은 상처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로 인해서 상처받고 있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상처는 사랑의 훈장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주님이 주신 새 계명에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계명에 순종할 때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참사랑은 사랑스러운 대상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스러운 것으로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어트는 짐 엘리어트와 휘튼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는데 미전도종족에 대한 선교비젼이 서로 통해서 1953년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 남편이 선교지에서 아마존 원주민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합니다. 그때 엘리자베스의 나이 30살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앗아간 원주민들이 얼마나 밉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1년 동안 간호사 훈련을 받고 그 밀림으로 들어갑니다. 그들과 같이 살면서 그들의 병을 치료해 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남편을 죽인 원수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자기도 그들에게 죽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의 힘은 놀라웠습니다. 처음에는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던 아우카 족들이 엘리자베스를 비롯해서 함께 간 선교사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선교사들의 사랑에 감동을 받고 복음을 영접합니다. 특히 5명의 선교사를 살해한 장본인 ‘키모’가 그 부족의 최초 목사가 됩니다. 순교자의 자녀 2명은 아버지가 죽어간 그 팜비치 강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어트는 20여권의 신앙서적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녀가 한 책에서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확인한 후 자기연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은 생명을 갉아 먹는 사탄의 도구이다. 주님은 비애와 광분의 우리 마음을 닫으시고 당신의 완전한 평화로 채우셨다.” 이를 볼 때 그녀가 얼마나 자기연민과 비통함, 슬픔, 미칠 정도의 분노에 시달렸는가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원수를 저절로,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슬픔, 남편을 죽인 자들에 대한 미움, 하나님께 대한 반발심. 오직 했으면 광분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이런 감정과 싸우느라 얼마나 몸부림치는 투쟁을 했을까 짐작이 갑니다. 아마도 그녀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용서의 사랑을 덧입고 원수를 사랑했습니다. 분노를 이기고 상처를 이기고 슬픔을 이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배반하고 떠난 제자들을 찾아와서 떡과 생선을 구워 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사랑을 회복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사랑을 받은 우리이기에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그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나에게 속한 사람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대개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 나를 욕하는 사람은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아니면 무관심해 버립니다. 말도 하지 않습니다. 꼴 보기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본을 보여 주십니다.
마귀는 벌써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본래 유대인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손, 발을 씻고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배고픔을 아셨습니다. 또한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심으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힘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먹는 것을 먼저 하시고 그 이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
발은 씻는 것은 가장 천한 종이 하는 일입니다. 유대 법에 따르면, 같은 유대인일 경우에 상전이라도 종에게 발을 씻겨 달라고 명령할 수가 없었습니다. 발을 씻어주는 행위는 너무 천하기 때문에 함께 하나님 백성된 유대 공동체에서는 있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아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군대로 말하면 총사령관입니다.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십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높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분이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손으로 씻으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꼬린 내가 진동하는 발을 일일이 씻어 주시고 깨끗하게 닦아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발을 씻는 행위는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나타냅니다. 자신을 내어 주는 극단적 섬김, 즉 죽음을 통한 섬김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씻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종으로서 자기 백성을 섬기는 것인데, 그 섬김의 내용은 그들의 죄를 씻어버리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서 자신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해서 깨끗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심히 황송해 하는 몸짓을 하며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가 모르면 잠잠히 있으면 되는데 그걸 참지 못하고 말합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냄새나고 더러운 발을 씻기실 정도로 자신을 낮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천한 종이 하는 일인데 왜 예수님이 하셔야 하느냐는 뜻입니다. 그는 제자들 중에서도 높아지기를 원하고 최고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도 큰 몫을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상관이 없다는 말은 관계가 없다, 하늘 나라에서 몫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말하며 머리를 디밀었습니다.
다 같이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목욕하는 것’과 ‘발을 씻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목욕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딛3:5). ‘발을 씻는 것’은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더러움을 회개하고 씻음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을 하다보면 더럽혀지는 것처럼 함께 일을 하다보면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가 죄인들 속에서 일을 하면서 죄를 짓기 때문에 매일 죄를 회개하고 씻음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목욕한 사람만이 더러워질 때마다 회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욕한 자’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물과 성령을 통해서 깨끗하게 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씻음 받았기 때문에 몸을 다시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일생에 한 번 일어납니다. 그러나 태어난 아기는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거듭난 이후에는 계속해서 성장해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더러워진 발을 씻는 것입니다. 거듭났지만 내면에는 변화되지 않는 죄악 된 옛 속성이 남아 있어서 새로운 속성과 갈등하며 싸우게 됩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라는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며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원치 않게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죄를 동의하고 자백하면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요한일서 1:8,9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이 발을 씻는 생활입니다. 발을 씻음 받는 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더 풍성한 십자가의 은혜를 덧입고 그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온 몸을 깨끗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범하는 죄까지도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넘어지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고 더러워진 발을 주님께 내놓는 것이 염치가 없는 행동처럼 생각되어서 베드로처럼 더러워진 발을 차마 주님께 내놓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러워진 발을 내놓지 않으면 죄로 인해서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아무리 더럽더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발을 내놓아야 합니다. 정욕으로 더러워진 발, 교만과 욕심으로 더러워진 발, 미움과 질투로 더러워진 발, 원망과 분노로 더러워진 발, 불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한 발을 내놓아서 씻음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더러워진 발을 내놓을 때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더욱 더 주님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또한 자기 의가 없기 때문에 자기처럼 더러워진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겸손하게 용납하며 서로 씻겨주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은 언제나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는 교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수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발견해나갑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하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요 성숙한 사람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는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12-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새롭게 탄생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고 이웃과도 올바른 관계에 들어갑니다. 이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더러운 발을 씻겨주도록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면 서로 발을 씻겨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할까요? 서로간의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기 때문에 천국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또한 용서받은 의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용서를 받았지만 개인 안에서 옛 속성과 새로운 속성이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교회에서도 거만하고, 이기적이고, 혈기 부리고, 술, 담배에 중독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변화 받는,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병원입니다.
교회는 병원이기에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나 자신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용납하는 분위기가 절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치료가 가능합니다. 병원에서는 아픈 사람이 제 구실을 못한다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교회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죄와 허물을 감당해 주고 사랑하는 역사, 치료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주인이신 예수님이 종의 발을 씻겨주었다면 당연히 종도 주인에게 혹은 동료에게 이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승이 이렇게 하셨다면 그 분을 따르는 제자들도 역시 동일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종으로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남을 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시내산 언약에 따라 옛 계명 즉 십계명을 주었듯이 새 언약을 따라 새 계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계명을 두 마디로 요약하셨습니다. 혼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막 12:28-31).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전제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속죄와 새로운 언약 제사로 새로 창조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즉 교회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것은 이 사랑의 모범을 몸소 보이신 행위입니다. 또 이웃에게 자신을 내어 주고 섬기라는 뜻으로 이 사랑을 정의하셨습니다. 사랑은 섬김인데 바로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서 서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섬김의 도를 실천하며 살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은 이 모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교제하는 가운데, 또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표현하는 가운데 새 계명을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참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우리 모두 기쁨과 자유를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이번 주에 있는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고 낮추시고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사람과 겸손을 잘 배우기를 소망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13:1-38
요절 | 요한복음 13:34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고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네 이웃은 모든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함으로 제자됨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이제까지 표적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습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르렀습니다. 즉 유월절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도를 전하여 구원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당국자들에게 체포되면 제자들은 그를 부인하고 도망을 칠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한 제자는 자기를 배반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런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한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죽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을 하십니다.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나의 형편에 따라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 하건, 못하건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심지어 내가 그를 배반할 수도 있는데 아니 실제로 배반하는데 사랑하십니다.
C. 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상처받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해보라 그러면 곧 당신은 상처받게 될 것이다. 만일 상처받기를 원치 않거든 그 누구도 사랑하지 말라. 당신의 마음을 아무에게도 주지 말라. 심지어 동물에게 조차도 말이다. 당신의 마음을 철장 안에 굳게 가두라. 그리고 적당한 예의와 고상한 취미로 당신의 마음을 꽁꽁 동여매라. 그러면 당신은 결코 상처 입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 안에서 당신의 마음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굳은 마음으로, 누구도 가까이 하지 못할 단단한 마음으로, 누구도 치료하지 못할 치료 불능의 마음으로 변해 갈 것이다.” 사랑은 뭐라구요? 사랑은 상처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로 인해서 상처받고 있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상처는 사랑의 훈장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주님이 주신 새 계명에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계명에 순종할 때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참사랑은 사랑스러운 대상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스러운 것으로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어트는 짐 엘리어트와 휘튼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는데 미전도종족에 대한 선교비젼이 서로 통해서 1953년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 남편이 선교지에서 아마존 원주민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합니다. 그때 엘리자베스의 나이 30살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앗아간 원주민들이 얼마나 밉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1년 동안 간호사 훈련을 받고 그 밀림으로 들어갑니다. 그들과 같이 살면서 그들의 병을 치료해 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남편을 죽인 원수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자기도 그들에게 죽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의 힘은 놀라웠습니다. 처음에는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던 아우카 족들이 엘리자베스를 비롯해서 함께 간 선교사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선교사들의 사랑에 감동을 받고 복음을 영접합니다. 특히 5명의 선교사를 살해한 장본인 ‘키모’가 그 부족의 최초 목사가 됩니다. 순교자의 자녀 2명은 아버지가 죽어간 그 팜비치 강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어트는 20여권의 신앙서적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녀가 한 책에서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확인한 후 자기연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은 생명을 갉아 먹는 사탄의 도구이다. 주님은 비애와 광분의 우리 마음을 닫으시고 당신의 완전한 평화로 채우셨다.” 이를 볼 때 그녀가 얼마나 자기연민과 비통함, 슬픔, 미칠 정도의 분노에 시달렸는가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원수를 저절로,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슬픔, 남편을 죽인 자들에 대한 미움, 하나님께 대한 반발심. 오직 했으면 광분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이런 감정과 싸우느라 얼마나 몸부림치는 투쟁을 했을까 짐작이 갑니다. 아마도 그녀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용서의 사랑을 덧입고 원수를 사랑했습니다. 분노를 이기고 상처를 이기고 슬픔을 이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배반하고 떠난 제자들을 찾아와서 떡과 생선을 구워 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사랑을 회복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사랑을 받은 우리이기에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그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나에게 속한 사람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대개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 나를 욕하는 사람은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아니면 무관심해 버립니다. 말도 하지 않습니다. 꼴 보기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본을 보여 주십니다.
마귀는 벌써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본래 유대인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손, 발을 씻고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배고픔을 아셨습니다. 또한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심으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힘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먹는 것을 먼저 하시고 그 이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
발은 씻는 것은 가장 천한 종이 하는 일입니다. 유대 법에 따르면, 같은 유대인일 경우에 상전이라도 종에게 발을 씻겨 달라고 명령할 수가 없었습니다. 발을 씻어주는 행위는 너무 천하기 때문에 함께 하나님 백성된 유대 공동체에서는 있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아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군대로 말하면 총사령관입니다.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십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높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분이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손으로 씻으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꼬린 내가 진동하는 발을 일일이 씻어 주시고 깨끗하게 닦아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발을 씻는 행위는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나타냅니다. 자신을 내어 주는 극단적 섬김, 즉 죽음을 통한 섬김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씻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종으로서 자기 백성을 섬기는 것인데, 그 섬김의 내용은 그들의 죄를 씻어버리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서 자신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해서 깨끗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심히 황송해 하는 몸짓을 하며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가 모르면 잠잠히 있으면 되는데 그걸 참지 못하고 말합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냄새나고 더러운 발을 씻기실 정도로 자신을 낮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천한 종이 하는 일인데 왜 예수님이 하셔야 하느냐는 뜻입니다. 그는 제자들 중에서도 높아지기를 원하고 최고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도 큰 몫을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상관이 없다는 말은 관계가 없다, 하늘 나라에서 몫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말하며 머리를 디밀었습니다.
다 같이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목욕하는 것’과 ‘발을 씻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목욕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딛3:5). ‘발을 씻는 것’은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더러움을 회개하고 씻음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을 하다보면 더럽혀지는 것처럼 함께 일을 하다보면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가 죄인들 속에서 일을 하면서 죄를 짓기 때문에 매일 죄를 회개하고 씻음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목욕한 사람만이 더러워질 때마다 회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욕한 자’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물과 성령을 통해서 깨끗하게 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씻음 받았기 때문에 몸을 다시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일생에 한 번 일어납니다. 그러나 태어난 아기는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거듭난 이후에는 계속해서 성장해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더러워진 발을 씻는 것입니다. 거듭났지만 내면에는 변화되지 않는 죄악 된 옛 속성이 남아 있어서 새로운 속성과 갈등하며 싸우게 됩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라는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며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원치 않게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죄를 동의하고 자백하면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요한일서 1:8,9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이 발을 씻는 생활입니다. 발을 씻음 받는 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더 풍성한 십자가의 은혜를 덧입고 그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온 몸을 깨끗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범하는 죄까지도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넘어지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고 더러워진 발을 주님께 내놓는 것이 염치가 없는 행동처럼 생각되어서 베드로처럼 더러워진 발을 차마 주님께 내놓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러워진 발을 내놓지 않으면 죄로 인해서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아무리 더럽더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발을 내놓아야 합니다. 정욕으로 더러워진 발, 교만과 욕심으로 더러워진 발, 미움과 질투로 더러워진 발, 원망과 분노로 더러워진 발, 불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한 발을 내놓아서 씻음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더러워진 발을 내놓을 때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더욱 더 주님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또한 자기 의가 없기 때문에 자기처럼 더러워진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겸손하게 용납하며 서로 씻겨주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은 언제나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는 교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수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발견해나갑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하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요 성숙한 사람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는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12-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새롭게 탄생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고 이웃과도 올바른 관계에 들어갑니다. 이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더러운 발을 씻겨주도록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면 서로 발을 씻겨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할까요? 서로간의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기 때문에 천국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또한 용서받은 의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용서를 받았지만 개인 안에서 옛 속성과 새로운 속성이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교회에서도 거만하고, 이기적이고, 혈기 부리고, 술, 담배에 중독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변화 받는,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병원입니다.
교회는 병원이기에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나 자신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용납하는 분위기가 절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치료가 가능합니다. 병원에서는 아픈 사람이 제 구실을 못한다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교회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죄와 허물을 감당해 주고 사랑하는 역사, 치료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주인이신 예수님이 종의 발을 씻겨주었다면 당연히 종도 주인에게 혹은 동료에게 이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승이 이렇게 하셨다면 그 분을 따르는 제자들도 역시 동일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종으로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남을 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시내산 언약에 따라 옛 계명 즉 십계명을 주었듯이 새 언약을 따라 새 계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계명을 두 마디로 요약하셨습니다. 혼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막 12:28-31).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전제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속죄와 새로운 언약 제사로 새로 창조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즉 교회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것은 이 사랑의 모범을 몸소 보이신 행위입니다. 또 이웃에게 자신을 내어 주고 섬기라는 뜻으로 이 사랑을 정의하셨습니다. 사랑은 섬김인데 바로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서 서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섬김의 도를 실천하며 살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은 이 모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교제하는 가운데, 또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표현하는 가운데 새 계명을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참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우리 모두 기쁨과 자유를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이번 주에 있는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고 낮추시고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사람과 겸손을 잘 배우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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