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요한복음 2021년 요17강(12:20-50) 한 알의 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6회 작성일 21-07-11 13:03

본문

2021년 요한복음 제 17 강
말씀 | 요한복음 12:20-50
요절 | 요한복음 12:24

한 알의 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세상에서 헛된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번 뿐인 인생인데 누구나 내적 외적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이를 위해서 사람들은 더 높아지기를 원하고 더 많이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낮아지시고 비우시고 나누어 주시고 자기를 부인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값진 인생을 살 수 있는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예고함(20-26). 유월절 명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신교 사회에서 신들이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신화를 들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 헬라인들은 유대교로 개종을 하고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경배하러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어떤 분이신지 알고자 하는 영적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헬라식 이름을 쓰는 빌립에게 가서 청하였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님께 가서 여쭈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 예수님은 이제까지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였는데 드디어 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2:4; 7:6,8,30; 8:20). 이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이때를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영광은 ‘나타낸다’는 원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십자가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나타냅니다. 또한 십자가는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신가를 나타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 메시아로 등극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죄패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팻말이 붙게 됩니다. 그는 정죄의 왕이었던 사탄을 십자가에서 박살내시고 모든 죄인들을 죄의 결박에서 풀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심으로 죄의 댓가를 다 치루십니다. 이제 그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진리의 왕으로서 구약에 예언된 진리를 성취하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 로마인을 비롯한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구원의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헬라인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한 비유를 드셨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관용구를 사용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어떻게 될까요? 한 알의 밀이 죽지 아니하면 지구 상에 있는 사람들은 기아로 굶어죽을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죽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한 알 그대로입니다. 보관이 잘 되면 그나마 다행인데 습도가 맞지 않거나 세균에 닿으면 썩게 됩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기서 한 알의 밀은 한 사람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25절 전반부에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겠지만 오히려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자기 본성을 따라 살 때 생명이 풍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쇠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 생명만 사랑하면서 이기적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돕고 섬기고 사랑함으로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코로나 19 백신을 선진국만 독차지하고 가난한 나라에 공급하지 않자, 델타변이 바이러스가 생겨서 결국 선진국의 백신접종을 허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코로나 감염병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건강하지 않으면 나도 건강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땅에 떨어진 씨앗은 흙에 덮여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뿌리가 내려지면 씨에 있는 양분은 분해되어서 싹을 내고 자라는데 쓰입니다. 싹이 자라서 탄소동화작용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자립적으로 성장하여 줄기를 내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씨앗에서 싹이 나와 탄소동화작용을 할 때까지 씨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씨는 싹이 나서 탄소동화작용을 할 때까지 모든 영양분을 공급하고 빈 껍질만 남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밀알이 죽는다’고 말합니다. 죽는 과정은 땅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이런 과정이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를 볼 때 밀알이 죽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탄생하는 창조의 역사입니다. 한 알의 밀은 4개월이 지나면 100-125개의 알곡을 맺습니다. 이 알곡들을 다시 땅에 뿌리고 거두는 과정을 5년 동안 되풀이하면 100-125억 개라는 엄청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17,000가마니로 100명이 하루 세 끼 빵만 먹는다고 해도 60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됩니다. 이런 열매를 맺으려면 한 알의 밀이 반드시 땅에 떨어져 100% 죽어서 분해되어야 합니다. 99%만 썩어도 안 되고 100% 완전히 썩어야 합니다. 완전히 썩지 않으면 냄새만 나고 곯아서 한 알의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과 권세를 다 버리고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탄생하셔서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한 삶을 사셨고, 일생을 종처럼 낮은 위치에서 섬기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인기는 매우 높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소리치며 환영하였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나고 이방인들이 그에게 나와 인사를 하고 인기가 매우 좋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계속 받으면 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큰 역사를 이루었는데 그것까지도 내려놓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으십니다.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예수님은 놀라운 일을 이루고도 죽으십니다. 왜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합니까? 아담의 타락 이후 예언되어 온 구속역사를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십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데 어떤 방식으로 왕이 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상황에서 죽어버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 죽으신 후에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인류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갑니다. 예수님은 외롭게 홀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죽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서 죽으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죽으심으로 인생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해변의 모래 같은 수많은 영혼들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한 가지 사명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기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목자로 세우려면 희생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살려면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내 안에서 왕 노릇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려면 일용할 양식을 먹고 말씀을 묵상하며 소감을 쓰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앞서고자 하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적용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내가 많은 애를 써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데서 지속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내 안에 소원을 주시고 능력도 주셔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자연히 열매를 맺습니다.

  1863년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 선교의 비전을 품고 아내와 함께 입국한 24세의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에서 아내를 잃고 깊은 슬픔 가운데 있었습니다. 게다가 소속 선교부와의 갈등으로 중국 선교사 직분까지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연단의 시기를 보낸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왔던 조선인 김자평과 그 일행들과의 만남을 예비하셨습니다. 조선인과의 만남을 통해 사역의 방향을 새롭게 세운 토마스는 조선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갖고 조선어를 공부하며 조선을 방문할 계획을 준비했습니다.

  1866년 그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의 통역관으로 승선해 꿈에 그리던 조선으로 향하게 됐습니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사람들로부터 받을 환영을 생각하니 얼굴이 달아오르고 희망에 부풉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하기 위해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이 언젠가는 반드시 인정받으리라 믿으며 나는 갑니다.” 1866년 2월 병인박해로 인해 카톨릭 신자들이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잠두봉(절두산)에서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전국적으로 8000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평양 대동강에 정박한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 관군의 공격으로 침몰했습니다. 1866년 여름, 불길에 휩싸인 선박이 내뿜는 화마와 태양의 뜨거운 열기로 달궈진 모래사장에 조선 관군에게 둘러싸인 파란 눈의 이방인이 무릎을 꿇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습니다. 조선을 가슴에 품은 27세의 젊은이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자신에게 칼을 겨눈 병사에게 성경을 전하고, 이 나라와 백성의 삶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현장을 지켜본 한 병사의 고백입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여럿 죽였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다.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천이 덮인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내게 받으라고 권했다. 내가 그를 죽이기는 했지만,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 왔다.’ 이 사람이 박춘권입니다. 그는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평양안주교회의 장로가 돼 첫 번째 순교자의 이야기를 전하며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은 이 땅에 천만 명의 성도들과 이만 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살 때 자신에게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삶이 더욱 풍요롭고 윤택하게 됩니다.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 미련한 것 같으나 지혜로운 것입니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계시는 그 나라에 그 분을 섬긴 제자들도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한 알의 썩는 밀알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통해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명이 살아난 것처럼, 제자들을 통해서도 많은 영혼이 구원함을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생명의 역사는 예수님을 본 받아 한 알의 썩는 밀알의 인생을 산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또한 이루어지게 됩니다.

  둘째, 예수님의 소원(27-31).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27,28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할 때 고민하여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를 요한복음의 겟세마네 기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죽을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을 좀 더 도와주고 싶습니다. 자신이 죽은 이후에 제자들이 제대로 할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자신이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성취하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이런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이 세상의 임금인 사탄이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여 그 힘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뱀은 머리가 잘렸어도 몸뚱이는 움직이는 것처럼 사탄은 결정적인 힘은 잃었지만 여전히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깨어서 영적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엡6:11).

  셋째, 죽음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시는 예수님(32-50).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32-33).” 예수님이 “땅에서 들린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동시에 일컫는 것입니다. 땅에서 들리신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택하신 모든 자들을 사탄의 세력에서 구원하셔서 예수님께로 이끌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내려오셔서 성육신하시고 종처럼 섬기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삶을 사셨다면 우리의 삶의 목적도 마찬가지로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 삼는데 있어야 합니다.   

  무리들은 예수님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는 예언은 맞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지만 부활 승천하시고 영원히 왕 노릇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직 잠시 동안 빛이 그들 중에 있을 때에 빛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빛의 아들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집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표적을 보고 믿으면 되는데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의 성취입니다.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았습니다.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었습니다. 이런 신자를 두더지 신자라고 부르죠.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유대인들을 붙들고 최선을 다해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후에는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대중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서 표적을 행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완고한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십니다(롬 1:24). 너희들이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너희 마음대로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일어난 현상이 바로 그들의 눈이 감기고 마음이 닫히게 됩니다. 계속된 불신과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조치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완고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는 한 알의 썩는 밀알의 진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배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섬기려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가운데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자기를 비우고, 내려놓고, 섬김과 희생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7건 1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