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요한복음 2021년 요16강(12:1-19)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9회 작성일 21-07-04 17:45

본문

2021년 요한복음 제 16 강
말씀 | 요한복음 12:1-19
요절 | 요한복음 12:14,15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 세상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쳐서 헌신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더 배리 선교사님도 결혼의 꿈을 희생하고 캠퍼스 선교를 위해서 일생을 드리셨습니다. 테레사 수녀도 일생을 인도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생명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째 계명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입니다. 이 분들은 이 계명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더 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평화의 왕, 겸손의 왕 예수님을 마음에 깊이 모셔들이고 다스림을 받는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첫째,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1-3).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이 곳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을 면한 날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번 유월절에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 이후 이때를 위해서 준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치에 앉아서 그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고 그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고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죄가 깨끗이 씻어짐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자라는 가운데 결혼에 대한 꿈을 가지고 향유를 모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오빠 나사로가 병들어 상태가 위중해지자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기별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결국 오빠는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흘 뒤에 오셨지만 나가볼 기력도 없었습니다. 원망과 슬픔으로 인해서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에 빠져 사는 것도 허무했습니다. 결혼의 꿈도 죽음 앞에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오빠 나사로를 장사한 지 나흘 째 되던 날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 하셨습니다. 언니 마르다가 “주여 죽은 지가 이미 나흘이 되었으매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고 돌을 옮겨 놓자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살아난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예수님이 누구신가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빠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을 생명도 다시 살리실 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빠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께 대한 감사가 마리아의 마음에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예루살렘과 유대에 더욱 힘있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고 심지어 오빠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그 말씀을 흘려듣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이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예수님께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마르다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불고기, 잡채, 탕수육, 시원한 수박냉채, 올리브유에 튀긴 생선 요리와 감자 등등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빈석에 기대어 계시고 제자들과 나사로는 함께 앉은 자 중에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내가 본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절을 봅시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 향유의 값은 3천만 원 정도입니다. 마리아는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을 경배하고 존귀히 여기는 의미였습니다. 7절에서 예수님은 마리아가 자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만 기록했습니다. 아마도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기에 요한은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마태와 마가는 발에 기름 부은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고,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라그랑지 Lagrange). 요한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그녀의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은 것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발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있지만, 예수님의 발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이었습니다.  여인에게 머리털은 그녀의 영광이었습니다. 또 여인은 아무데서나 머리털을 풀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닦음으로 자기 마음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녀의 사랑과 헌신이 어떠하였는지 잘 볼 수 있습니다. 여자가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닦는다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는 율법적인 나라이고 알지 못하는 남녀가 바깥에서 대화도 할 수 없는 사회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용납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장례를 위한 준비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결혼의 꿈이라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죄인들을 위해서 바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과 생명을 다해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사랑은 우리의 좋은 본이 됩니다. 선한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일이 있지만 죄인을 위해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 원수 된 자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를 위해서 희생적으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에 비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7장 47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죄 사함을 받은 것이 많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달은 사람일수록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할수록 마리아처럼 자신의 전 생애를 헌신하게 됩니다. 

  임현수목사님은 20년 가까이 북한의 어렵고 힘든 주민들을 위해 돕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150여 차례 많은 비용을 들여 북한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미국에서 집회를 할 때 ‘김일성 대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는데 국가 전복 음모 혐의로 북한 공항에서 그를 억류하였습니다. 북한에 억류되어 감옥에 간 그는 추운 겨울날 하루 8시간 씩 일을 하다 손과 발에 동상이 다 걸리기도 하였으며, 억류된 지 2개월 만에 20kg이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그를 독방에 가두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했기에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외로움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감옥에 있는 31개월 간 그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고 홀로 밥을 먹으며, 홀로 지낸 그는 외로움에 사무칠 때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좌절과 원망, 불만의 마음이 싹트려고 할 때마다, 하루도 쉬지 않고 하나님이 저에게 용기와 기쁨, 감사를 주셨습니다.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찬양하는 나무를 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온통 감사할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하루 8시간의 중노동 속에서도 성경을 읽으며 암송하였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렇게 31개월간의 긴긴 세월을 믿음으로 이겨내었습니다. 2017년 8월 9일 하나님의 은혜로 억류가 풀려 캐나다로 돌아온 그는 억류당했던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북한에 갇힌 31개월 동안 제게는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아래 죽지 않을 수 있었으며, 오히려 목숨을 걸고 주님을 섬길 수 있겠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믿음이 성장하였습니다.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행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더욱 기대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둘째, 동기가 불순한 사람(4-6).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님을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를 낭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갔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리 마태에게 돈궤를 맡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면에서 탁월한 재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룟 유다를 신뢰해서 돈궤를 맡겼는데 그는 신뢰를 배신했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돈을 더 사랑할 때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습니다. 그에게 돈은 우상이었습니다. 돈은 매우 힘이 있어서 만사를 해결합니다(전10:19). 그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헌신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헌신은 돈 문제가 아니라 마음 문제요 사랑 문제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가 없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의 말씀을 듣고 표적도 보았지만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박애주의자 같았지만 사실은 도둑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할 때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흘러넘칠 때 이웃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없이 이웃을 섬기고자 할 때 곧 지치거나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속이고 동료들을 속이고 하나님까지 속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마저 속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또 진실은 반드시 드러납니다.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지혜요 신자의 덕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주님은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없으니 헌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삼년 동안 그의 제자로 살았지만 결국은 배반자가 되고 맙니다. 그는 비참하게 자신의 인생을 마칩니다. 

  셋째, 예수님의 가치관(7-11). 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공격으로부터 마리아를 변호해 주십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예수님은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은 자신의 장례를 위한 준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엿새 후에 세상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알고 소중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두려움 때문에 모두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만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었다면 자신의 인생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꿈과 사랑이 담긴 향유를 예수님께 쏟아 부을 만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또 향유를 부어버렸는데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마리아의 헌신이 간직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많은 돈을 쌓아놓지만 하나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을 두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한 것들은 하나님 나라 창고에 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냉수 한 그릇 준 것도 상급을 잃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9,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8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가 주님께 드린 모든 것은 결코 헛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다 간직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가난한 자들은 우리와 항상 함께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 그에게 직접 사랑을 표현할 기회가 없습니다. 헌신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를 분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소원을 주실 때 헌신을 해야지 미루고 미루면 때를 놓치고 맙니다. 우리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을 때 기회를 사서 주님께 헌신을 해야 합니다. 늙어서 힘이 없고 기억력도 쇠하여지면 섬기고 싶어도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청년의 때에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의 뜻을 섬겼습니다. 우리가 젊을 때, 힘이 있을 때에 주님께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겸손과 화평의 왕(12-19).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유월절 명절을 보내기 위해 온 유대와 외국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까지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270만명이 25만 마리의 양을 끌고 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실을 소문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국가의 승리를 상징하고 왕이 입성할 때 흔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때까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다윗 같이 힘 있는 왕을 기다려왔습니다. 가난과 압제와 각종 인생 문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능력 있는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 한 마디로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시자 자신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그 분이 오셔서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시고 큰 승리를 이루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 자신이 평화의 왕이요 겸손의 왕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되 사랑과 섬김으로,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사람은 누구의 다스림을 받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좌우됩니다. 이전에 우리는 죄와 사탄의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그때 끊임없이 정죄를 받고 심판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죄와 사탄의 종노릇을 하면서 미움, 분노, 음란, 분리, 불안, 살인, 욕설 등 악한 열매만 맺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 마음에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고, 다른 사람과 관계가 회복되어 화목하고, 사람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 용서하고 오래 참아줍니다. 친절과 온유와 기쁨을 누립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이고 조건적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상황과 조건을 뛰어넘습니다. 고요함과 평안을 누립니다. 바리새인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만왕의 왕이 되어 우리를 다스리시며 온 세상이 그를 따르며 충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겸손과 평화와 자기희생을 통해서 죽음을 정복하고 교만한 인간들을 굴복시켜서 사랑과 겸손한 마음으로 그 분을 섬기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그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마리아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사랑하고 섬깁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충성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7건 1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