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1년 요14강(10:1-42) 나는 선한 목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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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4 강
말씀 | 요한복음 10:1-42
요절 |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우리는 지난 주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눈 뜬 사람이한 가지 받은 바 은혜를 굳게 붙잡고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출교하였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말씀하시며 그를 메시아로 영접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좋은 양이었고 또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목자 예수님을 본 받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목자와 양의 관계. 유대인들에게 양은 단순히 재산의 일부가 아니라 가족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돌보고 키우는 것을 삶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양과 목자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한지 말씀하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 이름이란 그의 전 인격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장점과 단점, 연약함과 가능성, 성격과 기질을 아십니다. 시편 139:2-4은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라고 노래합니다. 주님이 나를 깊이 아시기 때문에 신뢰가 생깁니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양들과 동역자들을 안다고 하지만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알아야 얼마나 알겠습니까? 오랫 동안 같이 사는 부부 사이도 때때로 잘 모를 때가 있죠? 우리도 자기 자신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을 너무나 잘 아시고 인도하십니다.
3,4절을 보면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양은 눈이 좋지 않아서 멀리 보지 못합니다. 다리가 짧아서 한 번 넘어지면 혼자서 일어서지를 못합니다. 공격용 무기도 없습니다. 양은 목자가 털을 깎을 때 잠잠히 있을 정도로 순합니다. 양이 잘 하는 것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분별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르지만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합니다(5).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느냐 듣지 못하느냐는 꼴을 얻느냐 못 얻느냐, 생명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관계된 것입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의 양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로 주님께 말씀을 드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과 우리 사이에 교제가 가능합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육성으로 듣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모세나 사도 바울이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육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 성령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지성을 통해서, 직관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를 기록된 말씀을 기준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그와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그의 사랑을 알기에 가능합니다. 목자의 사랑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그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종이 주인의 음성을 듣지 않고는 순종할 수 없는 것처럼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는 따를 수 없습니다. 목자의 음성은 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과 평안함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으로서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은 본성적인 것입니다.
맹인 거지는 자기 목자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를 위협하며 욕을 하고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며 경배하였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 세 가지 음성이 들립니다. 자기 생각, 사탄의 생각,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기록된 말씀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도구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설교를 들을 때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깊을수록 그의 음성을 민감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말씀 자체를 옳게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상황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가 듣고 순종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평강을 주고 기쁨을 줍니다. 그 열매로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탄의 음성은 두려움을 심고 미움을 일으키고, 감정을 격하게 하며 정죄감을 심어 절망하게 합니다. 자기 생각은 세상의 생각, 사람들의 생각을 따르기 쉽습니다. 우리가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생명이 풍성해지고 기쁨이 있습니다. 내 생각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앞세울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양으로서 그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배를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시몬이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그리한 즉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자기를 발견하고 사람을 취하는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한 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막 8:31,32)” 예수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베드로가 자기 생각을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지 말도록 꾸짖었습니다. 결국 베드로가 사탄에게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이 반복해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30:21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선한 목자되신 주님은 우리의 인생 길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갈림길에서 고민할 때에 내 뒤에서 갈 길을 인도해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32:8은 말씀합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깊이 듣기를 기도합니다. 아기 엄마는 시끄러운 환경 속에서 멀리 떨어져 일을 하다가도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 아이인지 아닌지를 알아듣습니다. 마음이 늘 아이에게 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들으십니다. 우리도 주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민감하게 깊이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동굴에 있던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할 일을 알려 주셨습니다. 왕을 세우고 후계자를 세우도록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는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 하루 하루 충만한 삶,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좋은지 알 수 없을 때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주님, 이제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 주님의 인도하심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목자는 본을 보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목자는 몰이꾼이 아니라 인도자입니다. 돼지는 뒤에서 채찍을 들고 몰아가야 합니다. 소도 앞에서 끌고 가면 받을 수가 있으니 뒤에서 이랴 이랴 하면서 몰고 갑니다. 말은 뒤에서 몰면 뒷발질을 하여 채일 수가 있기 때문에 앞에서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양은 목자가 앞서 가야 따라 옵니다. 목자는 푸른 풀밭과 맑은 시냇물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들을 그곳으로 인도합니다. 때로는 산을 넘어야 합니다. 인도하는 길이 험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많은 골짜기를 통과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깜깜한 터널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가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갑니다. 이처럼 목자와 양은 생명이 결탁된 관계입니다. 자기 생명을 맡기고 따라갈 만큼 깊이 신뢰합니다. 양이 목자를 신뢰하지 못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 불안해서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들이 따라 올 것을 믿고 앞서서 가고, 양들은 목자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줄 것을 믿고 그의 뒤를 따라갑니다. 목자가 앞서 간다는 것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로서 양들을 앞서서 인도하셨습니다. 제자양성을 하실 때도 먼저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오셔서 섬김 받지 않으시고 섬기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열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친히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남의 발을 씻기는 일이 제일 밑에 있는 종이 하기 때문에 마지막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셔서 맨 끝에 있는 종이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후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려 본을 보였노라”말씀하셨습니다(요13:14,15). 예수님은 섬김의 본을 보이셨고 전도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본을 보이셨고, 기도의 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본을 보여주심으로서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양으로서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그가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는 삶입니다.
양의 문 되신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습니다. 이는 구원받은 자들이 예수님과 지속적인 관계성 속에서 누리는 축복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자유로움과 평안과 풍족한 삶이 깃들어 있습니다. 양들은 꼴을 먹음으로서 생명을 얻고 풍족한 삶을 살게 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갈 때 풍성한 꼴을 얻게 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됩니다. 여기서 풍성하다는 뜻은 차고 넘친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넘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생명력이 넘치고, 스피릿이 충만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주님께 대한 자발적인 헌신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요!
셋째, 목자는 양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합니다. 11절과 14,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선한 목자라는 뜻은 고귀하고 완전하고 이상적인 목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선한 목자이실까요?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기 때문에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양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우리는 하루라도 더 살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가장 아름답고 원기왕성한 나이에 자신의 목숨을 양들을 위해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을 영접할 때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로마서 8:3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목자 생활은 자기를 희생하여 양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희생이 없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그 시대의 선한 목자였습니다. 양들을 어찌나 사랑했든지 양들이 위험에 처하면 목숨을 내놓고 양들을 지켰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들을 물어 가면 달려가서 수염을 잡고 주둥이를 찢어서 양들을 입에서 건져내었습니다. 그가 장군이요 왕으로서 전쟁에 나가서 그 백성들을 위해서 싸웠습니다. 그는 몸에 많은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상처들은 백성들에 대한 사랑의 흔적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선한 목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삯군도 있습니다. 삯군은 삯을 위해서 양을 돌봅니다. 평소에는 선한 목자와 삯군을 잘 구분할 수 없지만 위험이 닥치면 알 수 있습니다. 삯군은 삯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을 칩니다. 손해가 따르고 희생이 따르면 양들을 버리고 가버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고귀하고 완전하고 이상적인 목자는 될 수 없지만, 예수님처럼 양들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희생적인 삶을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좋은 양이 되어야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우리에 들지 않은 양’은 목자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양이요, 길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두고 찾으러 나가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어찌하든지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민족, 인종, 신분, 지역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만민의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각 시대마다 복음의 일꾼들을 부르셔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양을 아십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십니다. 그의 희생적인 사랑을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목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 예수님을 닮은 목자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10:1-42
요절 |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우리는 지난 주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눈 뜬 사람이한 가지 받은 바 은혜를 굳게 붙잡고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출교하였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말씀하시며 그를 메시아로 영접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좋은 양이었고 또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목자 예수님을 본 받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목자와 양의 관계. 유대인들에게 양은 단순히 재산의 일부가 아니라 가족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돌보고 키우는 것을 삶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양과 목자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한지 말씀하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 이름이란 그의 전 인격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장점과 단점, 연약함과 가능성, 성격과 기질을 아십니다. 시편 139:2-4은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라고 노래합니다. 주님이 나를 깊이 아시기 때문에 신뢰가 생깁니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양들과 동역자들을 안다고 하지만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알아야 얼마나 알겠습니까? 오랫 동안 같이 사는 부부 사이도 때때로 잘 모를 때가 있죠? 우리도 자기 자신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을 너무나 잘 아시고 인도하십니다.
3,4절을 보면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양은 눈이 좋지 않아서 멀리 보지 못합니다. 다리가 짧아서 한 번 넘어지면 혼자서 일어서지를 못합니다. 공격용 무기도 없습니다. 양은 목자가 털을 깎을 때 잠잠히 있을 정도로 순합니다. 양이 잘 하는 것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분별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르지만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합니다(5).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느냐 듣지 못하느냐는 꼴을 얻느냐 못 얻느냐, 생명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관계된 것입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의 양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로 주님께 말씀을 드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과 우리 사이에 교제가 가능합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육성으로 듣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모세나 사도 바울이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육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 성령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지성을 통해서, 직관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를 기록된 말씀을 기준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그와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그의 사랑을 알기에 가능합니다. 목자의 사랑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그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종이 주인의 음성을 듣지 않고는 순종할 수 없는 것처럼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는 따를 수 없습니다. 목자의 음성은 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과 평안함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으로서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은 본성적인 것입니다.
맹인 거지는 자기 목자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를 위협하며 욕을 하고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며 경배하였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 세 가지 음성이 들립니다. 자기 생각, 사탄의 생각,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기록된 말씀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도구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설교를 들을 때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깊을수록 그의 음성을 민감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말씀 자체를 옳게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상황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가 듣고 순종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평강을 주고 기쁨을 줍니다. 그 열매로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탄의 음성은 두려움을 심고 미움을 일으키고, 감정을 격하게 하며 정죄감을 심어 절망하게 합니다. 자기 생각은 세상의 생각, 사람들의 생각을 따르기 쉽습니다. 우리가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생명이 풍성해지고 기쁨이 있습니다. 내 생각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앞세울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양으로서 그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배를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시몬이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그리한 즉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자기를 발견하고 사람을 취하는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한 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막 8:31,32)” 예수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베드로가 자기 생각을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지 말도록 꾸짖었습니다. 결국 베드로가 사탄에게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이 반복해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30:21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선한 목자되신 주님은 우리의 인생 길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갈림길에서 고민할 때에 내 뒤에서 갈 길을 인도해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32:8은 말씀합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깊이 듣기를 기도합니다. 아기 엄마는 시끄러운 환경 속에서 멀리 떨어져 일을 하다가도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 아이인지 아닌지를 알아듣습니다. 마음이 늘 아이에게 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들으십니다. 우리도 주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민감하게 깊이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동굴에 있던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할 일을 알려 주셨습니다. 왕을 세우고 후계자를 세우도록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는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 하루 하루 충만한 삶,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좋은지 알 수 없을 때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주님, 이제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 주님의 인도하심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목자는 본을 보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목자는 몰이꾼이 아니라 인도자입니다. 돼지는 뒤에서 채찍을 들고 몰아가야 합니다. 소도 앞에서 끌고 가면 받을 수가 있으니 뒤에서 이랴 이랴 하면서 몰고 갑니다. 말은 뒤에서 몰면 뒷발질을 하여 채일 수가 있기 때문에 앞에서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양은 목자가 앞서 가야 따라 옵니다. 목자는 푸른 풀밭과 맑은 시냇물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들을 그곳으로 인도합니다. 때로는 산을 넘어야 합니다. 인도하는 길이 험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많은 골짜기를 통과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깜깜한 터널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가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갑니다. 이처럼 목자와 양은 생명이 결탁된 관계입니다. 자기 생명을 맡기고 따라갈 만큼 깊이 신뢰합니다. 양이 목자를 신뢰하지 못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 불안해서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들이 따라 올 것을 믿고 앞서서 가고, 양들은 목자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줄 것을 믿고 그의 뒤를 따라갑니다. 목자가 앞서 간다는 것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로서 양들을 앞서서 인도하셨습니다. 제자양성을 하실 때도 먼저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오셔서 섬김 받지 않으시고 섬기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열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친히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남의 발을 씻기는 일이 제일 밑에 있는 종이 하기 때문에 마지막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셔서 맨 끝에 있는 종이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후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려 본을 보였노라”말씀하셨습니다(요13:14,15). 예수님은 섬김의 본을 보이셨고 전도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본을 보이셨고, 기도의 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본을 보여주심으로서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양으로서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그가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는 삶입니다.
양의 문 되신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습니다. 이는 구원받은 자들이 예수님과 지속적인 관계성 속에서 누리는 축복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자유로움과 평안과 풍족한 삶이 깃들어 있습니다. 양들은 꼴을 먹음으로서 생명을 얻고 풍족한 삶을 살게 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갈 때 풍성한 꼴을 얻게 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됩니다. 여기서 풍성하다는 뜻은 차고 넘친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넘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생명력이 넘치고, 스피릿이 충만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주님께 대한 자발적인 헌신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요!
셋째, 목자는 양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합니다. 11절과 14,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선한 목자라는 뜻은 고귀하고 완전하고 이상적인 목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선한 목자이실까요?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기 때문에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양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우리는 하루라도 더 살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가장 아름답고 원기왕성한 나이에 자신의 목숨을 양들을 위해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을 영접할 때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로마서 8:3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목자 생활은 자기를 희생하여 양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희생이 없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그 시대의 선한 목자였습니다. 양들을 어찌나 사랑했든지 양들이 위험에 처하면 목숨을 내놓고 양들을 지켰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들을 물어 가면 달려가서 수염을 잡고 주둥이를 찢어서 양들을 입에서 건져내었습니다. 그가 장군이요 왕으로서 전쟁에 나가서 그 백성들을 위해서 싸웠습니다. 그는 몸에 많은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상처들은 백성들에 대한 사랑의 흔적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선한 목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삯군도 있습니다. 삯군은 삯을 위해서 양을 돌봅니다. 평소에는 선한 목자와 삯군을 잘 구분할 수 없지만 위험이 닥치면 알 수 있습니다. 삯군은 삯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을 칩니다. 손해가 따르고 희생이 따르면 양들을 버리고 가버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고귀하고 완전하고 이상적인 목자는 될 수 없지만, 예수님처럼 양들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희생적인 삶을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좋은 양이 되어야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우리에 들지 않은 양’은 목자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양이요, 길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두고 찾으러 나가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어찌하든지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민족, 인종, 신분, 지역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만민의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각 시대마다 복음의 일꾼들을 부르셔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양을 아십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십니다. 그의 희생적인 사랑을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목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 예수님을 닮은 목자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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