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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년 요 13강(9:1-41) 세상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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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9회 작성일 21-06-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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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3 강
말씀 | 요한복음 9:1-41
요절 | 요한복음 9:5

세상의 빛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여섯 번째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눈이 멀어서 어두움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 빛이 되셨습니다. 이 세상의 죄와 불의와 질병과 고통, 재난을 보면 마음이 어두워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시면 달라집니다. 우리의 연약한 가운데 일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우리의 무지 가운데서 일하셔서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할 때 주님이 친히 일하사 구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 가운데 빛을 비추사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심을 알게 하시고 우리도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보는 두 관점(1-4).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볼 수 없으니 어두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찬란한 태양 빛과 꽃의 아름다움, 사랑하는 어머니와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부자 집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그 나마 다행인데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일생 구걸을 하면서 살아야했습니다. 우리가 얻는 정보의 90%가 눈을 통해서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백번 물어보는 것보다 한 번 보면 끝난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일생 깜깜한 가운데서, 거지로 살아가는 그를 볼 때 너무나 불쌍하여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인간의 고통에 대한 원인이 죄라는 생각은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개별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성경이 허용하지 않습니다. 욥도 고난을 받았지만 그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요셉이 큰 죄를 지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 그를 앞서 애굽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고난을 통해서 어떤 일을 나타내고자 하십니까? 예수님은 침으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심으로 그가 눈을 뜨게 하십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은 메시야의 사역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자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위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열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열 명의 두령은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와 같다고 생각하며 백성들에게 절망감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그들을 인도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고자 일하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에베소서 2:10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삶에도 선한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인간의 고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4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때가 아직 낮이니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낮은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동안이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입니다. 예수님은 5절에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광야에서 불기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갈 길을 밝혀주셔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떠하든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계실 때 어둡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 때문에 방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시면 어둠 속에 갇히게 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합니다. 젊고 건강할지라도 내면에 빛이 없어서 절망과 무력감에 빠져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마음이 밝아져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같이 하자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지 본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람이 준비되고 환경이 갖추어지고 돈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술 도구도 없고 환경도 갖추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에 날 때부터 눈 먼 자였던 그가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습니다. 이 말씀에서 가서 씻으니 보게 되었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침을 뱉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기분이 나쁠 수 있습니다. 그 침으로 진흙을 이겨 자신의 눈에 바르는 것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를 무시하냐? 나를 놀리는 것이냐고 소리칠 수 있습니다. 그는 주저앉아서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눈이 떠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십니다(시 119:105).” 주님은 그 말씀과 진리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가 갈 길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그와 함께 일을 하는 가운데 이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나 자신과 주위 형편만을 바라보면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세상의 빛 되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밝아집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시기에 우리의 미래가 밝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일을 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단계별로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눈은 사람의 인상을 특징짓는 면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였습니다. 자기의 말은 “내가 그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물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그는 예수님을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이름만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그가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본다고 말하자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있자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대답합니다(17).  ‘선지자’란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은 아직까지 예수님을 메시아로까지는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대한 그의 인식은 예수님을 증언하면서 점차적으로 발전해나갑니다.
 
  바리새인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그 부모를 불러 물었습니다. 부모가 대답합니다.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20,21).”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었습니다. 그들이 눈 뜬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추궁했습니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절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가지만 타협하지 않고 자기에게 임한 한 가지 은혜를 굳게 붙잡았습니다. 한 가지 아는 은혜를 붙잡았을 때 그는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이론이 있어도 체험한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들은 사탄의 회의와 외부적인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불타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핍박도 위협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는 평강 가운데 여러 모양의 어려움들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고 또 묻자 그가 대답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그러자 그들이 욕을 하였습니다.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 사람은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으로 고백했습니다(33). 이는 그의 예수님께 대한 세 번째 진전된 고백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를 출교시켰습니다. 당시에 유대 사회에서 출교를 당하면 종교적 축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장되었습니다. 출교 당하면 먹고 사는 일이 힘들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출교 당했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를 찾아가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 이니라. 38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여기서 인자는 다니엘서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말씀합니다(단 7:13,14).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절하였습니다. 이는 경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육적인 눈을 뜰 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이 뜨여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고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기쁨은 세상의 핍박과 바리새인들의 위협에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받은 은혜를 붙잡고 예수님을 증거할 때 그는 예수님을 온전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생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갑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를 닮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3:17). 이는 예수님이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는 말씀과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과 심판이 둘 다 일어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칠 때 이것을 환영하는 사람은 해방되어 빛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거부하는 사람은 더 깊은 어두움으로 들어갑니다. 똑 같은 빛이 어두움을 쫓아내기도 하고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영적인 눈이 점점 밝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영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루고,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기를 기도합니다.

 40,4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진짜 맹인입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영적으로 맹인인 것을 인정하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영생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맹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빛 예수님을 보지 못하면서도 마치 세상을 잘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나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영적 세계를 밝히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 그 일에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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