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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년요11강(7:53-8:20)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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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7회 작성일 21-06-0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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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1 강             
말씀 | 요한복음 7:53-8:20
요절 | 요한복음 8:11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지지난 주 생수의 강되신 예수님 말씀이 물의 축제를 기반으로 증거했다면, 오늘 말씀은 빛의 축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정죄하고 판단하게 되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분위기가 어둡게 됩니다. 관계는 차가워집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식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죄인들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심으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정죄하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사랑의 온기를 느낍니다. 죄사함을 받을 때 우리의 마음이 밝아지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죄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누립니다. 우리가 날마다 빛 되신 주님을 따름으로 밝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초막절 축제 이후에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 저희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심으로 쉼을 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러자 백성이 다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소원이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이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는데 참으로 ‘아침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에게 생수의 강이신 성령을 주고 영생을 준다고 믿으셨기 때문에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자라도 듣는 자에게 새 생명을 줍니다. 요한복음 5:25은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고질적인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울을 바울로, 시몬을 베드로로, 세리 레위를 성마태로 변화시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쓰셨습니다. 사람을 돕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은혜로운 분위기를 깨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웠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남녀 한 쌍이 죄를 짓는 현장을 급습하고 여자만 잡아왔습니다. 남자는 제비족이었는지 제비같이 잽싸게 달아났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죄를 범하고 공중 앞에 서게 된 여인의 두려움과 수치심과 정죄감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 여인을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사탄은 아름다운 여자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아담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하와를 이용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수제자 베드로를 이용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들은 율법을 잘 준수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할 기회를 잡았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참으로 난처한 질문입니다. 만약 돌로 치라고 하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지만 로마법에 걸리게 됩니다. 로마법은 유대인들에게 사형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또 돌로 치라고 하면 이제까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쳤는데 그의 가르침과 모순이 되어 보입니다. 반대로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율법을 깨뜨리는 범법자가 됩니다. 그들의 질문은 너무나 영리해서 예수님을 함정에 몰아넣은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 여자가 왜 자신의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이렇게 냄새나는 여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여자는 매우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악된 욕망을 따라서 살았을 때 정죄를 받고 땅 바닥에 내동댕이 처지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계속되었고 긴장감이 팽배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으로 인해서 분위기는 가라앉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지혜를 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슨 글을 쓰시고 계신지 궁금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런 침묵의 시간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입을 떼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비수와 같이 돼서 사람들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사람들은 각자 자신을 돌아볼 때 이제까지 지은 죄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까? 하지 말라고 하신 계명뿐만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지만 자기 사랑에 급급했습니다. 또 얼마나 많이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였습니까? 정죄는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의로운 심정이 있기 때문에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죄책감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은 거기 서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있는 죄를 드러내었고, 자신들의 죄를 보자 더 이상 여자를 정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수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이 찔릴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돌이키게 됩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고 합리화하면 나중에는 양심이 무뎌져서 화인 맞은 것처럼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갔습니다.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만이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이 여인을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10,1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다 가고 유일하게 심판하실 수 있는 분과 죄를 지은 여자만 남았습니다. 그제서야 예수님은 여자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네십니다. ‘여자여 (귀나이)’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부르실 때 사용하신 호칭입니다(요2:4). 이는 전적으로 상대방을 높이는 경어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왜 죄를 지었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녀를 정죄하던 자들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며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요3:17;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12:47).” 3:17에서도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먼저 그가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용서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자의 죄와 우리 모두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천벌을 그가 대신 받으십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와 욕을 그가 대신 받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의 실제적인 희생에 기초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값진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값없이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는 죄악 된 삶에서 떠나라 (leave your life of sin)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인이 어떻게 죄악 된 삶에서 떠날 수 있을까요? 법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있어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법이 발전하더라도 죄 문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죄의 문제는 정죄가 아니라 대속을 통한 용서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용서 받은 힘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따를 때 거룩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하고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소원과 힘을 주십니다. 빌립보서 2:13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 안에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 소원을 불러일으키십니다. 또한 선한 일을 행할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그때 죄의 소욕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물론 한 번에 온전히 거룩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자라나면서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다니지 아니하려면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어두움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고 정죄와 판단을 일삼는 것이요 죄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빛 가운데 사는 것은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요, 남을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정죄만 하지 않아도 사람이 살아납니다. 이 여인이 살아난 것은 정죄와 판단이 아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자기 정죄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믿을 때 자기 정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정죄하지 않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쉼과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초막절 행사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의 마지막 날 밤에 성전 여인들의 뜰에 거대한 네 개의 등불을 켜고 그 불빛 아래에서 열광적인 의식을 펼칩니다. 레위인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울려 퍼지고 경건하고 선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타오르는 횃불을 손에 들고서 밤새도록 찬송을 부르며 춤을 추었습니다. 광야생활 동안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감사 찬송을 합니다. 광야에서 밤은 어떠할까요? 추울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사물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 저리 방황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광야의 깜깜한 밤에 불기둥을 통해서 추위로부터 지켜주시고 갈 길을 밝혀주시고 인도해주셨습니다. 길이 없는 광야와 어둠 속에서 불빛을 통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서 우리 인생들을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인도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을 알지 못해서 방황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우쳐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죄의 용서를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감격적인가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죄 사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지만 믿음으로 회개하고 죄사함의 은혜를 누릴 때 주님의 사랑이 깊어지게 됩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질 때 세상의 것에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으면 우리도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보복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보복의 악순환을 이미 끊어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바로 그 용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용서의 은혜도 강물처럼 흘러넘치게 합니다. 우리가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할 때 그 잘못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않게 됩니다. 죄는 관계를 파괴하고 분리시키지만 용서는 우리를 결속시키고 하나가 되게 합니다. 우리가 오늘도 주님의 용서를 받고 용서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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