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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010년 계18강(22:1-21) 속히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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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024회 작성일 10-03-07 23:01

본문

2010년 요한계시록 18강
말씀 요한계시록 22:1 - 21
요절 요한계시록 22:20

속히 오리라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오늘 말씀에는 “속히 오리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오시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게 되고 깨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름대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요? 저와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는 가운데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란 생명수의 정결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거룩한 성전과 같은 새 예루살렘의 속성과 잘 조화가 됩니다. 생명수의 강은 근원이 어디입니까?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입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는 에덴동산 꼭대기에서 강물이 흐릅니다. 에스겔 47장에서는 성전에서 강물이 흘러나옵니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그 강물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옵니다. 이러한 강물의 원천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에덴동산과 에스겔의 성전을 통해서 기대했던 바가 새 예루살렘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에서는 에덴동산도 아니고 성전도 아닌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백성과 함께 있어 생명수 샘물의 원천이 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생명수 강물의 흐름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진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계속 유입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완전해진 왕국 삶의 복이 하나님의 백성을 가득 채웁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에덴의 회복은 생명수 강의 양 옆에 있는 달마다 열 두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에 의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첫 창조 시에 아담과 하와를 위해 준비되었던 생명나무가 이제 종말에 교회를 위해서 준비됩니다. 생명수 강이 그런 것처럼 생명나무도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요한이 생명나무를 언급하는 것은 종말적 교회공동체의 삶 속에서 주어지는 에덴의 회복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회복된 삶의 특징 중 하나는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 생명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납니다. 이 사역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생명수의 풍성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러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맛을 본 생명수의 은혜를 새 예루살렘에서는 풍성하게 또 지속적으로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우리가 때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그 나라에서는 열매가 없어서 마음 고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달마다 맺게 되는 열두 가지 열매로 인해서 우리는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또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말씀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치유할 수 있는 잎사귀가 존재한다는 것은 단순히 새 예루살렘에 질병과 고통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에 참여하면 전혀 고통이나 부족함이나 질병이 없는 완전함을 누리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즉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고통에서 온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죄 때문에 상처받은 영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의 불의는 깊은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생명나무 잎사귀로 인해서 치료를 받습니다. 우리가 일을 하다 보면 원치 않게 상처를 받고 줍니다. 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들 때문에 상처받은 영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누가 치료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교회가 치료할 수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건강한 삶으로 인해서 누리게 되는 생명의 풍성함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이 나라를 사모합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다시 저주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죄 때문에 저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죄가 없으니 저주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어서 그의 종들이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봉사한다, 예배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삶은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삶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겁고 기쁨이 충만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해서 누리게 되는 풍성한 복을 찬양합니다. 그 즐거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죄의 결과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창 3:9-11). 가인은 죄를 범하고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게 되었습니다(창4:14). 출33:20,23절에서 죄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으며 보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벌어져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서 말씀을 듣던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심으로 그리스도를 대면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었습니다(요14:7,9).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 새 에덴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과 막힘없는 교제가 이루어지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동으로 된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지만 그 날에는 밝히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눔으로 인해서 우리는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는 것은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며 그를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여기서 밤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히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습니다.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임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 영광스러운 임재를 나타냈던 것처럼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왕 노릇’이란 ‘통치하다’라는 의미로 이것은 교회가 불신자를 향한 왕 노릇도 아니요 성도가 성도를 향한 왕 노릇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만물을 통치하도록 위탁받았던 것을 의미합니다.

  이상에서 교회의 종말적 모습은 단순히 미래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는 지금 이 땅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동시에 종말적 특징들을 가지고 하늘에 앉아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계시록 2-3장에서는 땅에, 4-5장은 하늘에 존재하는 것으로 교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패러다임이 요한계시록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습니다. 땅에 존재하여 전투하는 교회는 동시에 하늘에 존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땅과 하늘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두 가지 면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늘이라는 곳이 영원한 세대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종말에는 하늘과 땅의 구별이 사라지게 되므로 하늘에 거하는 자들과 땅에 거하는 자들의 구별이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종말적 교회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는 좀 더 희망적이며 낙관적인 교회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백성을 모으는 일에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패배의식에 빠져드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인간의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철저하게 반성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해 볼 때 도전을 극복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공동체성에 눈을 떠야 합니다. 계시록은 한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교회를 전체로서 이해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일 한 개인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관심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전체입니다.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의 영향이 점점 심화되고 무관심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인터넷을 사용하는데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섭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사람들은 반응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도 자기 문제에 집착하다보니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회개하고 서로를 돌아보고 관심을 갖고 섬기는 일에 더욱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올 해 가정교회 모임을 이루어서 삶을 나누는 역사가 정착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제 가정 교회 단위로 함께 주일 말씀을 공부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전도하고 함께 제자 양육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종말에 누릴 수 있는 축복을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어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런 특권이 제대로 발휘된다면 우리 교회 공동체에 새로운 능력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나 교제가 천상의 감동과 감격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예배와 가정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생명력이 넘쳐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21절은 에필로그입니다. 여기에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이 7,12,20절에 세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속히 오십니다. 속히 오신다는 의미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초림 이후에 일어나는 상시적인 오심과 함께 재림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오십니까?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그 말씀들을 이 땅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그가 오심으로 믿는 자는 구원하시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하십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써 구원과 심판이 완성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예수님께서 속히 오시기 때문에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집안이 어지러우면 손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좀 기다리시라 말하고 치운 다음에 손님을 맞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행실이 부끄럽다면 주님이 속히 오시는 것이 부담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속히 오심을 바라는 사람은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계시록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말씀이 요구하는 삶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 때 어려움이 따르면 세상의 분위기를 따라서 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지킬 뿐만 아니라 인봉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예수님이 속히 오심을 널리 알려야 합니다. 심판과 구원의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긴급하게 알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지혜로운 청지기 같이 깨어서 양들에게 말씀을 나누어주고 작은 일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될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삽니다. 말씀이 전파된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 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의와 의로움, 불순종과 순종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받는 자들의 자세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현 시대를 응급 상황으로 이해하고 전해야 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아무리 도와도 돌이키지 않으니 그대로 두십시오. 죄에 대한 책임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만 그들이 돌이키는 것은 우리의 권한 밖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가운데 연약한 사람들은 격려해서 강하게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의를 행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는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주님께서 주실 상은 구원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따라서 심판과 구원 사역이 결정됩니다. 이런 일을 행하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 된 분으로 모든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주관하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는 겉옷을 말합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행실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자들은 복 받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때 생명나무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아야 거룩한 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어떤 나무입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접근할 수 없었던 나무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형벌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죄에 도로 빠진 자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복음을 들을 후에도 악하고 더러운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 밖에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요 자손으로 광명한 새벽 별이십니다. 광명한 새벽 별은 민수기 24:17절을 배경으로 한 메시야의 호칭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십니다. “오라 듣는 자도 오라 목마른 자도 오라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 한 절에 ‘오라’는 말씀이 세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주님께 나아가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듣고 주님께 가야 합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목마른 사람은 생명수의 근원되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18,19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 메시지를 듣는 교회는 이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나름대로 빼거나 더하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절대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버리면 절대적 기준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강한 의지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속히 오시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속히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요? 주님이 속히 오시기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그의 오심을 전파해야 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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