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010년 계 17강(21:1-27) 새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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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요한계시록 17강
말씀 요한계시록 21:1 - 27
요절 요한계시록 21:2
새 예루살렘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오늘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분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살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피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이 세상만물은 탄식하면서 우리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사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면서 오늘 말씀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드신 나라입니다. 이는 기존의 질서를 새롭게 하신 것으로서 질적으로 새로운 세상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기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새롭게 한 새로운 모습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죄 없는 세상으로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5절에 보면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하신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어떻게 될까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또 지나가 버렸다고 했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바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모든 악의 근원이 다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해 이사야 11장 6-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65:17-19절은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전 세상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옛날보다 훨씬 좋은 새 집에 들어오면 옛날 집이 어떠했는지 그리워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어떻게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반지의 제왕 중 주인공이 다쳐서 쉬는 곳 장면)
2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 성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아름다웠습니다. 신부는 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그 교회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입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에덴동산과 같이 기화요초가 만발한 아름답고, 각종 보석으로 단장한 나라요, 풍요로운 나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하나님의 장막이란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거주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백성과 함께 한다는 표시로 출애굽 때는 성막, 가나안에 정착해서는 솔로몬 성전, 이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성도들 가운데 성령으로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지상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는 아직 불완전합니다. 우리 몸의 구속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사탄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과 악인들을 불못에 던져 넣은 다음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 몸이 구속되어 예수님과 같은 몸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 또는 새 예루살렘으로 표현된 이 나라는 변화된 우리 몸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하사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셨던 예수님과 같은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소욕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또한 기쁨과 평강과 온유와 친절이 넘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환경’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에덴 동산에 문제가 생긴 결정적 원인은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성의 파괴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이 가장 큰 형벌이고 지옥입니다. 지옥은 불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보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없는 고통이 훨씬 더 큽니다.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은 주님과 교제를 이루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교제를 나누는 사람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찬송가에도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495장)”라고 노래합니다. 임마누엘은 죽어서 최종적으로 완성될 일이지만 오늘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님이 함께 하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와 함께 모든 일을 행합니다.
그러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서 무엇을 하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주님은 여러분의 아픔을 이해하십니다. 여러분이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보고 계십니다.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세상에서 당했던 수모와 아픔, 그래서 흘려야 했던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다시는 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형벌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인간은 허무하고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인 성 과부는 외아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관에 누워있는 청년에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죽음과 음부를 불못에 던져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는 죽임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새 하늘과 새 땅, 즉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그 나라에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벽제 화장장에 가면 죽음으로 인해서 애통하고 곡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불 속으로 관이 들어갈 때 죽음과 이별로 인해 애곡하는 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담대한 찬송을 부릅니다. “예수 부활했으니 할렐루야 만민 찬송하여라 할렐루야 사망 권세 이기고 할렐루야 하늘 문을 여셨네 할렐루야(찬154).”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실 예수님을 소망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공평과 의를 위해서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싸워야 합니다. 죄로 인해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 세상에서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눈물로 섬긴 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목자님들은 생명의 말씀을 죽음 권세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물로 전합니다. 목자님들이 흘리는 눈물을 먹고 양들은 자랍니다. 생명은 생명을 희생해서만이 자라납니다.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리신 분은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올해 눈물로 말씀의 씨를 뿌리는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UBF는 구제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러한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일생 감당해 나가야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일들입니다. 우리 안에 눈물이 많은 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이 소망으로 위로 받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새 창조의 사역을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새 창조의 사역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정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말씀은 만물을 새로 만든다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만물을 갱신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질적으로 새로운 것, 과거의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란 뜻을 나타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사역은 인류의 범죄로 인하여 상실했던 첫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들을 신실하게 성취하십니다. 그때에는 어떤 오염이나 파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존층의 파괴, 수질 오염, 공기 오염, 토질 오염, 산성비, 밀림의 사막화, 핵폐기물 등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태계를 완전히 새롭게 만드실 것이며 창조된 생태계를 완벽하게 회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염된 물과 공기를 마시고 오존층이 뚫린 상태에서 햇빛을 직접 받아서 병들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집증후군으로 인해서 오염된 공기를 마시고 어떻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앞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6,7).”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완성되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시작과 마무리를 하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시면 완성하여 마무리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건축 역사의 마무리를 잘 지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의 축제로 동역자들과 주민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빈 항아리에 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은 여섯 번째입니다. 다섯을 두고 여섯 번째 정도라면 만족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전혀 만족이 없었습니다. 햇빛이 강렬한 정오에 빈 항아리를 들고 왔는데 그 빈 항아리가 여인의 심령 상태와 같았습니다. 헤밍웨이는 대 문호였는데 사는 것이 너무 컬컬하고 허무해서 마침내 자기가 사냥할 때 쓰는 총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너무나 깊은 절망감과 허무감, 즉 목이 타서 자살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 땅 위에서 돈과 권력과 미와 인기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텅 빈 가슴을 채우기 위해서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마시게 되면 영적으로 깊은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도 부분적으로 생명수를 맛보고 있지만 완전히 맛보고 누리는 때가 속히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면 우리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 내면에 깊은 만족을 주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루신 새 창조의 역사를 값없이 나누어 주십니다.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는 너무나 풍성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킴으로 영적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인내로써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속자와 대조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기는 자들이 아니라 패배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여기서 두려워하는 자들은 황제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핍박을 당할 때 믿음을 포기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했을 때 감당해야 할 불이익으로 인해서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믿음의 길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을 통해서 제시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점술가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거짓말하는 자들은 윤리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신앙적인 변절자들을 말합니다. 신앙고백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두려움 때문에 혹은 유혹 때문에 자기 정체성을 부인하고 타협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우리는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천사는 새 예루살렘의 외부와 내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외부 모습은 어떠합니까? 9절을 보면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성은 단순히 성만이 아니라 그 속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을 성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신부라고 한 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신부)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백성의 공동체 생활(성)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거주지일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환경과 삶이 완전합니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교회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완성될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에 계시기 때문에 영광스럽습니다. 벽옥과 수정같이 맑은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묘사와 닮았습니다(4:3). 종말에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광에 함께 동참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움에 부합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도 영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으로 충만한 모습을 갖게 됩니다.
12-15절은 새 예루살렘의 가장 기본적인 건축적 구조를 소개합니다. 그 성은 크고 높은 성곽이 있어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입니다. 동서남북 사방에 세문이 있는데 이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권리와 축복을 누릴 동등한 권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성곽의 높이는 144규빗인데 이는 약 60m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두께로 보고 있습니다. 앞에서 성의 높이 길이 너비가 약 2500Km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12*12로서 구약의 교회와 신약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성벽을 통해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 성이 크고 높다는 말은 도시가 완전하고 완성된 것이며 완전한 안전과 장엄함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입니다. 본래 지성소는 정방형형인데 16절에 보면 그곳도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길이가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너비와 높이가 같았습니다. 이를 볼 때 그 성은 정방형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형태는 완전함의 상징입니다(왕상 6:20). 새 예루살렘 자체가 성전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에 의해 상징되는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구체화될 것입니다. 19-20절은 열두 보석으로 기초석을 꾸몄다고 했습니다.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인데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포장이 되어 있습니다.
22-27절은 성전의 내부 모습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 안에는 건물인 성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성은 해와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합니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고 들어갈 것입니다.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이 오기까지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 세워질 천국이건, 땅에 세워질 천국이건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쥐가 희망이 없으면 항아리 물에서도 3분 만에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쥐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주면 36시간을 헤엄친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3분 만에 항아리 물에 빠져 죽는 쥐와 같습니다. 희망이 있으면 36시간만이 아니라 일생 주님을 의지하면서 헤엄칠 수 있습니다. 고만이 많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있기 때문에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삶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영광스러운 새 예루살렘을 보고, 이 땅에서 죄와 고난과 사망을 극복하면서 거룩하게 아름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 요한계시록 21:1 - 27
요절 요한계시록 21:2
새 예루살렘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오늘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분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살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피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이 세상만물은 탄식하면서 우리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사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면서 오늘 말씀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드신 나라입니다. 이는 기존의 질서를 새롭게 하신 것으로서 질적으로 새로운 세상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기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새롭게 한 새로운 모습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죄 없는 세상으로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5절에 보면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하신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어떻게 될까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또 지나가 버렸다고 했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바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모든 악의 근원이 다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해 이사야 11장 6-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65:17-19절은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전 세상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옛날보다 훨씬 좋은 새 집에 들어오면 옛날 집이 어떠했는지 그리워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어떻게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반지의 제왕 중 주인공이 다쳐서 쉬는 곳 장면)
2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 성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아름다웠습니다. 신부는 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그 교회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입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에덴동산과 같이 기화요초가 만발한 아름답고, 각종 보석으로 단장한 나라요, 풍요로운 나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하나님의 장막이란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거주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백성과 함께 한다는 표시로 출애굽 때는 성막, 가나안에 정착해서는 솔로몬 성전, 이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성도들 가운데 성령으로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지상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는 아직 불완전합니다. 우리 몸의 구속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사탄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과 악인들을 불못에 던져 넣은 다음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 몸이 구속되어 예수님과 같은 몸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 또는 새 예루살렘으로 표현된 이 나라는 변화된 우리 몸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하사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셨던 예수님과 같은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소욕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또한 기쁨과 평강과 온유와 친절이 넘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환경’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에덴 동산에 문제가 생긴 결정적 원인은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성의 파괴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이 가장 큰 형벌이고 지옥입니다. 지옥은 불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보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없는 고통이 훨씬 더 큽니다.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은 주님과 교제를 이루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교제를 나누는 사람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찬송가에도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495장)”라고 노래합니다. 임마누엘은 죽어서 최종적으로 완성될 일이지만 오늘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님이 함께 하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와 함께 모든 일을 행합니다.
그러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서 무엇을 하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주님은 여러분의 아픔을 이해하십니다. 여러분이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보고 계십니다.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세상에서 당했던 수모와 아픔, 그래서 흘려야 했던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다시는 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형벌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인간은 허무하고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인 성 과부는 외아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관에 누워있는 청년에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죽음과 음부를 불못에 던져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는 죽임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새 하늘과 새 땅, 즉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그 나라에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벽제 화장장에 가면 죽음으로 인해서 애통하고 곡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불 속으로 관이 들어갈 때 죽음과 이별로 인해 애곡하는 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담대한 찬송을 부릅니다. “예수 부활했으니 할렐루야 만민 찬송하여라 할렐루야 사망 권세 이기고 할렐루야 하늘 문을 여셨네 할렐루야(찬154).”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실 예수님을 소망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공평과 의를 위해서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싸워야 합니다. 죄로 인해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 세상에서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눈물로 섬긴 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목자님들은 생명의 말씀을 죽음 권세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물로 전합니다. 목자님들이 흘리는 눈물을 먹고 양들은 자랍니다. 생명은 생명을 희생해서만이 자라납니다.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리신 분은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올해 눈물로 말씀의 씨를 뿌리는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UBF는 구제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러한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일생 감당해 나가야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일들입니다. 우리 안에 눈물이 많은 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이 소망으로 위로 받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새 창조의 사역을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새 창조의 사역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정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말씀은 만물을 새로 만든다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만물을 갱신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질적으로 새로운 것, 과거의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란 뜻을 나타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사역은 인류의 범죄로 인하여 상실했던 첫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들을 신실하게 성취하십니다. 그때에는 어떤 오염이나 파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존층의 파괴, 수질 오염, 공기 오염, 토질 오염, 산성비, 밀림의 사막화, 핵폐기물 등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태계를 완전히 새롭게 만드실 것이며 창조된 생태계를 완벽하게 회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염된 물과 공기를 마시고 오존층이 뚫린 상태에서 햇빛을 직접 받아서 병들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집증후군으로 인해서 오염된 공기를 마시고 어떻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앞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6,7).”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완성되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시작과 마무리를 하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시면 완성하여 마무리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건축 역사의 마무리를 잘 지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의 축제로 동역자들과 주민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빈 항아리에 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은 여섯 번째입니다. 다섯을 두고 여섯 번째 정도라면 만족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전혀 만족이 없었습니다. 햇빛이 강렬한 정오에 빈 항아리를 들고 왔는데 그 빈 항아리가 여인의 심령 상태와 같았습니다. 헤밍웨이는 대 문호였는데 사는 것이 너무 컬컬하고 허무해서 마침내 자기가 사냥할 때 쓰는 총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너무나 깊은 절망감과 허무감, 즉 목이 타서 자살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 땅 위에서 돈과 권력과 미와 인기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텅 빈 가슴을 채우기 위해서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마시게 되면 영적으로 깊은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도 부분적으로 생명수를 맛보고 있지만 완전히 맛보고 누리는 때가 속히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면 우리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 내면에 깊은 만족을 주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루신 새 창조의 역사를 값없이 나누어 주십니다.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는 너무나 풍성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킴으로 영적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인내로써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속자와 대조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기는 자들이 아니라 패배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여기서 두려워하는 자들은 황제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핍박을 당할 때 믿음을 포기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했을 때 감당해야 할 불이익으로 인해서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믿음의 길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을 통해서 제시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점술가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거짓말하는 자들은 윤리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신앙적인 변절자들을 말합니다. 신앙고백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두려움 때문에 혹은 유혹 때문에 자기 정체성을 부인하고 타협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우리는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천사는 새 예루살렘의 외부와 내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외부 모습은 어떠합니까? 9절을 보면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성은 단순히 성만이 아니라 그 속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을 성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신부라고 한 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신부)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백성의 공동체 생활(성)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거주지일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환경과 삶이 완전합니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교회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완성될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에 계시기 때문에 영광스럽습니다. 벽옥과 수정같이 맑은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묘사와 닮았습니다(4:3). 종말에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광에 함께 동참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움에 부합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도 영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으로 충만한 모습을 갖게 됩니다.
12-15절은 새 예루살렘의 가장 기본적인 건축적 구조를 소개합니다. 그 성은 크고 높은 성곽이 있어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입니다. 동서남북 사방에 세문이 있는데 이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권리와 축복을 누릴 동등한 권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성곽의 높이는 144규빗인데 이는 약 60m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두께로 보고 있습니다. 앞에서 성의 높이 길이 너비가 약 2500Km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12*12로서 구약의 교회와 신약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성벽을 통해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 성이 크고 높다는 말은 도시가 완전하고 완성된 것이며 완전한 안전과 장엄함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입니다. 본래 지성소는 정방형형인데 16절에 보면 그곳도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길이가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너비와 높이가 같았습니다. 이를 볼 때 그 성은 정방형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형태는 완전함의 상징입니다(왕상 6:20). 새 예루살렘 자체가 성전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에 의해 상징되는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구체화될 것입니다. 19-20절은 열두 보석으로 기초석을 꾸몄다고 했습니다.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인데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포장이 되어 있습니다.
22-27절은 성전의 내부 모습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 안에는 건물인 성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성은 해와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합니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고 들어갈 것입니다.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이 오기까지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 세워질 천국이건, 땅에 세워질 천국이건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쥐가 희망이 없으면 항아리 물에서도 3분 만에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쥐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주면 36시간을 헤엄친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3분 만에 항아리 물에 빠져 죽는 쥐와 같습니다. 희망이 있으면 36시간만이 아니라 일생 주님을 의지하면서 헤엄칠 수 있습니다. 고만이 많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있기 때문에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삶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영광스러운 새 예루살렘을 보고, 이 땅에서 죄와 고난과 사망을 극복하면서 거룩하게 아름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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