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요한계시록 10년 계시록 16강(20:1-15)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리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165회 작성일 10-02-21 11:21

본문

2010 요한 계시록 제 16 강
말씀 요한계시록 20:1 - 15
요절 요한계시록 20:6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리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천년왕국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무천년설에 기초해서 본문을 해석하고자 합니다.  이필찬, 「요한 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p. 216-222, (서울, 성서유니온)오늘 말씀은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절은 용의 결박, 4-6절은 천년 동안 왕노릇함, 7-10절은 천년이 찰 때 일어날 일, 11-15절은 최후의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년 동안 왕노릇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용의 결박(1-3) : 사탄을 상징하는 용이 결박당하는 모습이 어떠합니까?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입니다.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잠깐 놓이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탄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철저하게 패퇴하여 무력화된 것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사탄은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 있는 기간인 천년은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 사이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그렇게 결박당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어떻게 요한계시록 중간 중간에 사탄이 왕성하게 활동하여 성도들과 싸워 이기며(13:7), 땅의 왕들을 미혹하여 그들과 그들의 군대를 모으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사탄의 이중적 측면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탄은 철저하게 패배하고 결박당하여 무력한 존재가 되어 버린 반면(계12:7-12; 17:8; 마12:25-30; 눅11:14-26), 또 다른 측면에서는 성도들과 싸워 이기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13:7). 우리는 이 양 측면을 모두 인식할 때 사탄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탄은 1-3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결박당했습니다. 이것은 천년 동안 지속될 것이며 천년이 다 찼을 때 종말적 전쟁을 위해 잠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천년 동안 왕 노릇함(4-6): 사도 요한이 보좌들을 보았는데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백성의 일부가 아니라 백성 전체 곧 교회를 포함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일관성 있게 사람들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즉 ‘이 땅에 거하는 자들’과 대조되는 ‘하늘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 거하는 자들은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로서 언제나 짐승을 따르며, 짐승을 경배하며, 짐승의 사역을 경이롭게 생각하며(17:8; 13:8,12),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며(6:10), 두 증인의 죽음을 기뻐하며(11:10), 짐승에 의해 미혹을 당하여 짐승의 우상을 만들며(13:14), 바벨론의 음행의 잔으로 취하는 자들입니다(17:2).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본질적으로 사단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늘에 거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의 장막이며(13:6),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며(3:12), 사단의 괴롭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존재하는 자들입니다(12:12).

  이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할 것입니다(4,6). 이들이 왕노릇 한다는 것은 왕으로서 통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미래적 사건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이 교회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모두 포함합니다. 1:6절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며, 4:4절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24장로가 면류관을 쓰고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11:3-13절에서 두 증인으로 상징되는 교회는 왕적 권위로 복음을 증거합니다. 특별히 5:9b-10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이 말씀은 20:6절과 병행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린 순간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제사장이 되었을 때 그들은 땅에서 이미 왕노릇을 시작한 것입니다(1:6; 4:4; 5:10; 11:3-13). 그러므로 그들이 왕노릇하는 기간은 사탄이 결박당해서 무저갱에 갇혀 있는 기간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천년으로 표현한 것은 천년이라는 숫자가 통치의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나타내 주는 숫자로서 마흔두 달, 삼년 반, 1260일 그리고 한 때 두 때 반 때가 있는데 이모든 수치는 삼년 반이라는 기간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해당되는 기간을 천년과 삼년 반이라는 다른 숫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기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통치 개념이 있을 때는 천년이란 숫자를 사용하고, 교회가 핍박당하거나 고난을 당하는 모습에서는 삼년 반의 숫자를 사용합니다. 전자는 오랜 기간이며 후자는 짧은 기간입니다. 즉 왕적 통치의 기간을 나타낼 때는 오랜 기간의 수치가 사용되고, 고난과 핍박의 기간을 표시할 때는 짧은 기간의 수치를 사용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되어 천년으로 상징되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동안 이 세상을 통치할 것인데, 이것이 첫째 부활이며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둘째 사망이 다스릴 권세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첫째 부활은 무엇이며 둘째 사망은 무엇입니까? 먼저 첫째 사망이 육체적 죽음이라면 둘째 사망은 최후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은 넓은 의미로는 예수님을  믿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건을 의미하고, 좁은 의미로는 성도가 죽은 후에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좁은 의미의 첫째 부활이건 넓은 의미의 첫째 부활이건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들에게는 둘째 사망 즉 영원한 형벌이 조금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권세와 능력을 덧입고 왕노릇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왕노릇할 수 있습니까? 물론 내가 왕은 아닙니다. 우리의 왕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왕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여 죄와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원함으로 왕노릇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랑과 섬김의 수고를 함으로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자는 낮아져서 섬기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김으로서 사람들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왕노릇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고 마음 고생이 많은 사람이 그분일 것입니다. 왕노릇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농부요 달리는 경주자요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로 묘사했습니다(딤후 4:7). 우리가 열매를 맺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인내하고 전심전력을 해야 합니다. 이번에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 중에 모태범, 이선화, 이정수 선수들이 승리한 원인을 구식 훈련을 인내로 받아들였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타이어를 메고 달리는 훈련, 납 조끼를 입고 달리는 훈련 등이 가장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훈련은 싸움소를 훈련시킬 때 쓰는 방법이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왕노릇을 할 수 있도록 훈련만 시키고 그냥 인내만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왕노릇을 할 수 있도록 천국 열쇠들을 주셨습니다(마16:19). 우리가 영적인 싸움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보물 창고를 열 수 있도록 각종 열쇠를 주셨습니다. 믿음, 기도, 상상력, 성령, 지혜, 동역자들과 건강과 재물들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활용해서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사탄에 대항해서 싸우시고 그 백성들을 보호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사탄을 대항해서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죄와 사망의 세력과 싸우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왕으로서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체의 욕심을 제어하고 어두움의 세력을 정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우리를 다스려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마귀의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과 함께 일할 때 사탄의 진을 파하고 구원 역사를 왕성하게 이룰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각종 질병과 상한 감정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위로하는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왕되신 주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왕의 직분을 힘있게 감당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왕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중간한 상태에 있습니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가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왕의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바로 예수님이 천 년 동안 왕노릇하시는 천년왕국 시대입니다. 지금 사탄은 하늘 보좌에서 쫓겨난 상태입니다. 그리고 무저갱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탄이 아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땅 위에서는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사탄은 너무나 초라한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탄이 현재 지상 교회 앞에서는 위협적인 존재이며 가공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용을 두려워하여 무릎을 꿇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끊임없이 교회를 핍박하고 유혹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 1:11)”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도보다 전도자 됨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함으로 그는 왕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갔지만 거기서 복음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되 힘을 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미 내가 이겼으니 너희도 이기리라”고 권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부쉈다는 것을 믿습니까?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완전한 심판을 이루실 것을 믿고 있습니까? 믿고 있다면 우리가 또 한 번 믿음 안에서 투쟁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전투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이겨야 합니다.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패배주의, 운명주의, 부정적인 생각, 피해의식, 열등감 등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쓰레기 버리듯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믿음의 생각을 하고, 믿음의 말을 하고,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왕노릇할 때 주님께 찬양하고 경배할 특권이 주어집니다.

  셋째, 천년이 찰 때 일어날 일(7-10): 천년이 찰 때 사탄이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일 것인데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이 많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곡과 마곡은 에스겔 38-39장에 등장하는 곡과 마곡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에스겔서에서 ‘곡과 마곡’은 회복된 새 예루살렘의 안전성과 견고성을 시험하기 위해서 등장하지만 그들이 패배함으로서 하나님께서 회복하신 새 예루살렘의 안전성이 입증됩니다. 사탄이 동원한 ‘곡과 마곡’은 지면에 널리 퍼져 있는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포위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습니다. 16:14-20절과 19:19-21절과 20:7-8절에서 사탄 진영의 파멸을 거듭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은 악의 세력에 대한 철저한 제거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넷째, 최후의 심판(11-15) : 사도 요한이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었습니다. 만물의 옛 질서는 사라지고 새롭게 되는 순간이 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는 엄위하시고 거룩하심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또 그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은 짐승을 따르다가 죽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망과 음부와 바다가 내어주고 있습니다. 바다는 악의 영역입니다. 사망과 음부와 바다는 동일한 장소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은 그들의 행위를 낱낱이 기록한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들은 자기 죄를 직고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일생을 기억하게 하사 자기 인생에 지은 죄를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습니다(13). 그리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집니다. 짐승을 따르다가 죽은 자들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모아 놓고 있었던 장소인 사망 곧 음부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더 이상 사탄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은 죽으면 하늘에서 하나님의 품 안에 안겨 있다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 될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죽으면 사망과 음부에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다가 최후의 심판 때에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과 잇대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흘린 땀과 눈물을 주님은 헛되게 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해서 섬긴 것들에 대해서 물 한 잔이라도 기억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써 전파하여 구원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제사장이요 왕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26건 1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