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요한계시록 2010년 계 15강(19:1-21) 어린 양의 혼인 잔치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068회 작성일 10-02-14 13:43

본문

2009 요한 계시록 제 15 강
말씀 요한계시록 19:1 - 21
요절 요한계시록 19:7

어린양의 혼인잔치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어떤 ‘짱’이 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에게 ‘피앙세’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짱’은 권세를 이용하여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열 번만 찍으면’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순결을 지키느냐, 부귀영화를 얻느냐’는 갈림길에 섰습니다. 그녀는 순결을 택했습니다. ‘짱’은 ‘괘씸죄’를 걸어 그녀를 투옥을 시켰습니다. 신부가 이렇게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랑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휴대폰은 언제나 꺼져 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녀의 엄마까지 소식 없는 신랑보다는 ‘짱’을 택하여 팔자를 고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소식 없는 신랑이지만 떠날 때 했던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립니다. 자기 목숨을 걸고 예비신부로서의 길을 끝까지 걷습니다. 마침내 신랑이 심판의 권세를 가진 채 나타났고, 그 험한 세월 동안 중심을 지킨 신부의 눈물을 닦아 줍니다. 신부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신랑의 품에 안겨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바로 그 유명한 “춘향전”인데, 어쩌면 그렇게 우리 교회와 주님과의 관계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오늘 이런 사랑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큰 성 바벨론의 패망 이후에 사도 요한이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합창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1,2).” 하늘에 허다한 무리는 하늘에 있는 승리한 성도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탄의 유혹을 끝까지 이기고 믿음을 지킨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찬양의 내용은 바벨론을 패망시키시고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그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정당한 판단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일심, 재심, 삼심이 없습니다. 대법원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인간이 범죄한 동기와 정황과 결과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죄인들에게 알리바이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판단은 깔끔합니다. 오류가 없습니다. 또한 그는 신실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은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그 백성들을 보호하시겠다는 약속과 그 백성의 억울함을 갚아 주시겠다는 약속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모든 억울한 사정들이 풀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정의가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만백성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던 자들에 대한 보상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클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할렐루야 찬양하는 소리가 올라가고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갔습니다. 그 연기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을 불태운 그 연기입니다.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는 말씀은 영원한 심판의 불이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한 상태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오직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하나님께 어떤 찬송을 합니까?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b).”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찬양을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왜 그렇게 중요한 찬양제목일까요? 하나님의 통치하심은 우리 개개인뿐만 아니라 이 공동체, 국가, 세계와 만물에 미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이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의 생명을 건드리지 말고 그를 시험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욥은 아무 죄가 없었지만 하나님께 대한 그의 순전함이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열 명의 자녀들을 잃어버리고 재산을 잃고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서 지나시나 보지 못하며 그가 자기 앞에서 움직이시나 깨닫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욥9:11). 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신 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게 됩니다. 욥은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나에게 일어나게 하셨을까?”라고 묻습니다. “왜 나입니까?” 고난을 당할 때 가장 흔한 질문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왜”라는 질문을 열여섯 번이나 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실 뿐이었습니다. 침묵이 때로는 최상의 답변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때 욥에게 즉시 대답하셨더라면 욥이 그 대답을 받아들였을까요? 만일 나 자신이라면 그 대답을 받아들였을까요? 하박국 선지자도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합1:2-4).”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믿고 찬송을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한 통치자이심을 깨닫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은 그 분이 원하시는 대로 할 수 있는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일이 일어나는 이유와 목적을 우리에게 반드시 설명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빚을 지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미 독생자와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문제에 당면하거나 위기를 만나면 “왜요?”라고 말하지만 주님께서는 “괜찮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라고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겪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성장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계절을 정해서 시간이 흐른 후에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것처럼 성장을 위해 인생의 계절을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어떤 날은 해가 나고 어떤 날은 폭풍우가 치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정도의 고난을 견딜 수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믿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위하여 준비하였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믿을 때 고난 앞에서도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우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것입니다(렘 29:11).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1:2-3).” 여기라는 동사는 단호한 결정에 의해 행동이 이뤄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체념의 태도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군. 포기해야지. 이 문제는 더 이상 다른 수가 없어.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뭐”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문제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려는 경향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니야 이 문제는 보다 나은 방법으로 대처하는 길이 있을거야. 주님, 저는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보다 건설적인 반응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예기치 않게 만나는 사건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 지 스스로 결정할 능력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욥의 태도는 이러했습니다. “비록 그가 나를 죽이신다 하여도 나는 계속하여 그 분을 신뢰하리라(영어 흠정역 욥 13:15).”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모든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과 변치 않으심과 우리들에 대한 놀라운 관심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어려운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능력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기 전이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신앙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나는 기꺼이 주님을 신뢰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찬양은 자기 포기의 행위이며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일으킵니다. 찬양은 인생의 아픔을 치유해 줍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우리는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주권을 믿고 기뻐해야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7-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삶이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마치 신부가 남편을 만나서 새 인생을 사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혼자서 살던 노총각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할 때 그 집은 기쁨과 즐거움과 깔깔거리는 웃음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날을 이 세상에서 조금이나마 맛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는 자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이 옷은 음녀의 화려한 옷과 대조가 됩니다. 음녀의 옷에 비해서 신부는 정결하고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이 옷은 신부 스스로 입은 옷이 아닙니다. 신랑이 선물한 것입니다.  교회가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를 가지고 신랑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말씀대로 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금방 바닥이 나고 유혹에 넘어갑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셔서 그 피로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부는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옳은 행실이란 ‘옳고 바른 것에 대하여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옷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짐승과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짐승의 표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귀신에게 절하는 것은 귀신과 교제함으로 자기의 몸을 더럽히는 것입니다(고전10:20). 우리는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깁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신령한 예배를 드립니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을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명절에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며 구원하셨습니다. 절망이 가득한 곳에 희망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를 구원하실 때 먼저 그의 생각을 바꾸어주셨습니다.

  행동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빌4:8절에 나온 대로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탁월한 사고와 행동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릇되고 왜곡된 신념을 제거해야 합니다. 내가 버리고 싶은 그릇된 신념은 무엇입니까? 그러한 생각들을 평가해보고 옳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특히 고난을 당할 때 자신에 대해서 자기 비하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보고자하고 존경하지만 자신은 한 없이 깎아 내립니다. 자기를 함부로 대합니다. 무의식적 사고, 왜곡된 사고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고가 정서 장애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사고와 인식을 바로 잡음으로써 정서적인 측면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자기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가운데 옳은 행실을 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 자들은 왜 복이 있습니까? 주님과 함께 먹고 사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이란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할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은혜를 말합니다. 치열한 영적 전투에서 끝까지 견디며 이기는 자들에게는 기대하던 잔치에 참여하는 은총을 주십니다. 이 세상에 많은 복이 있지만 이보다 더 한 복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소망해야 할 복이 바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말에 감격하여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말하는데 이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예언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거는 예언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주셔야 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지금 하는 증거는 성령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알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백마 탄 분은 예수님으로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그 말씀은 진실하였습니다. 정복자 되신 예수님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십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합리적이며 합법적입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 눈은 불꽃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했습니다(12-13). 심판자 예수님은 초월적인 분으로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해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이름 쓴 것 하나가 있는데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심판을 하시면서 심판으로 대적들이 흘린 피로 물들여져 있었습니다. 피 뿌린 옷을 입은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했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1: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그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창조사역에도 역사하셨고 구원사역에도 역사하신 그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심판의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랐습니다. 이는 고전 6:2-3절에 성도들이 세상을 판단할 것이라는 말씀이 응하고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습니다. 그 옷과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17-18절은 그가 심판하신 후에 시체들을 공중의 새들이 처리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19-21절은 전쟁을 일으킨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과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 절하던 자들이 산채로 유황불 못에 던져지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린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최후 승리는 주님이 취하신다는 예언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신부들입니다. 어린 양의 결혼 잔치에 참여할 주인공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신하면서 현재의 고난을 능히 감당해야겠습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영생복락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26건 1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