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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010년 계14강(18:1-24) 거기서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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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054회 작성일 10-02-07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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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요한계시록 14 강
말씀 요한계시록 18:1 - 24
요절 요한계시록 18:4

거기서 나와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영국 BBC가 발행하는 잡지 포커스 최근호가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포르노에 돈을 많이 쓰는 나라로 꼽았습니다. 한국은 일본, 호주, 핀란드, 미국, 대만을 포함한 9개 경쟁국을 누르고 1위에 오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잡지는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인간의 죄악 7가지 즉 오만, 질투, 색욕, 탐욕, 식탐, 나태, 분노를 얼마나 많이 저지르는지 국가별 자료를 통해 분석 비교했다고 밝혔습니다. 색욕은 포르노를 보기 위해 쓰는 돈의 규모를 근거로 측정되었습니다. 한국은 식탐 수준은 6위였는데 색욕(lust) 부문에서는 1위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위는 일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국가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볼 때 위험 수위에 와 있습니다. 신라, 백제, 고구려 등이 멸망할 때 보면 음란과 술취함 등으로 인해서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습니다. 토인비는 그의 역사 연구에서  로마가 가장 강력하게 보일 때부터 멸망이 시작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징후를 읽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길입니다.

  로마 제국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도 천년을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1절을 보면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힘찬 음성으로 외쳤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3).” 여기서 큰 성 바벨론이란 하나님 나라의 진행을 방해하는 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과거에는 바벨론이 유다를 무너뜨렸고, 요한 당시에는 로마가 교회를 핍박하는 일을 했습니다. 지난 세기에는 무신론을 믿는 공산주의가 이런 일들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70년 만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공산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슬람 세력입니다. 이슬람 세력은 교회를 핍박하는데 개인, 급진적인 단체, 군대, 국가적으로 이런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이슬람세력을 세계로 확산하기 위한 선교거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결국 그 거짓됨과 사랑이 없음으로 인해서 다 무너지고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큰 성 바벨론이 왜 무너지게 됩니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첫째는, 영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2b절을 보면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큰 성 바벨론의 문제는 하나님보다는 귀신의 세력에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귀신은 속이는 자요, 살인자요, 더러운 영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기 때문에 거짓을 참 말처럼 합니다. 그러나 거짓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또 귀신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처음에는 이적도 베풀기 때문에 사람들이 미혹되지만 그 목적이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본성이 나타납니다. 귀신의 영은 사람의 영혼을 더럽힙니다.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습니다. 나중에는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독교를 엄청나게 핍박했습니다. 국가 권력을 사용해서 연약한 신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기독교를 파괴하고자 하는 세력은 영적인 존재인 적그리스도입니다.

둘째는, 그 음행으로 인해서 망하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음행으로 인해서 멸망했습니다. 큰 바벨론도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을 취하게 만들었습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제국의 영향으로 인해서 세계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이 그녀와 함께 음란한 죄를 지었습니다. 사도 요한 당시 로마는 음란한 삶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습니다. 식민지에서 착취한 상품으로 로마 시민들은 배불리 먹고 향락을 즐기며 사치하였습니다. 우리는 인터넷 강국이지만 인터넷으로 음란물을 수출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두려운 일입니다.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마음이 병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인 현실을 바로 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헐리우드는 영화와 음반, 각종 문화로 세계를 병들였습니다. 지금도 그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쾌락의 도시인 라스베가스는 이런 문화를 세계에 계속해서 퍼뜨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캘피포니아에 큰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 지역이 세계에 포르노 비디오를 만들어 퍼뜨리는 곳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고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음란한 것을 퍼뜨리는 일에 앞장 설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앞장 설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우리가 그런 것을 소비하지 말아야 하며, 선한 것을 만들어 나누어야 합니다. 

셋째는, 자기를 영화롭게 한 죄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는지 그 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는 죄입니다. 우리의 인생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해도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익한 종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다 하였을 뿐입니다.” 현대 문명은 인간의 영광을 최대한 드러내고자 합니다. 인간의 능력과 위대함을 마음껏 뽐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해서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교만함에 대해서 언어를 혼잡하게 함으로 그들의 도모를 파하시고 흩어버리셨습니다. 인간의 영화는 풀의 꽃과 같이 잠시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력을 가지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또 어떤 음성이 들렸습니까?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거기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거기는 큰 바벨론 성입니다. 귀신의 처소가 있고 음행을 행하고 사치하고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계속 있으면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바벨론에 살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거기서 나오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바벨론을 어떻게 완전히 떠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떠나라는 말씀은 장소적인 개념보다는 바벨론의 죄악 된 생활로부터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들과 구별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큰 성 바벨론에서 나올 수 있을까요? 먼저는 똥이 더러우니까 피하는 것처럼 죄를 피해야 합니다. 이는 소극적인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투쟁은 사명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육체의 욕심과 성령의 소욕이 싸웁니다. 우리는 악한 세력에 대해서 대항해야 합니다. 원수 마귀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명령하며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 안에 거할 때 영적인 분별력이 생기고 말씀을 따라서 살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소감을 깊이 쓰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한 성도들과 적극적인 교제를 나누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과 시간을 많이 나누는가를 보면 그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게 될 때 세상을 거스르게 됩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우리 시대는 야동이 술과 담배보다 더 심각합니다. 안목의 정욕으로 인해서 삶이 병들어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덩달아서 외모지상주의로 인한 피해도 큽니다. 여드름 치료, 다이어트, 몸무게 등으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여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때 사람들은 마음이 나쁜 것은 바꿀 수 있지만 얼굴이 못 생긴 것은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얼굴은 바꿀 수 있지만 마음을 바꾸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내면의 투쟁을 하는 것이 그 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당시 교회는 소수였지만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개화기에도 그랬습니다. 교회 신자가 소수였지만 사회에 끼친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우리는 현재 더욱 큰 힘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세상 속으로 파고 들어가 섬겨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맑은 공기가 들어오면 나쁜 공기는 나갑니다. 이와 같이 생명의 말씀이 들어오면 나쁜 문화가 나갑니다. 내 마음에 빛이 비추이면 어두움은 자연히 물러납니다.

  오픈 도어 선교회의 창립자인 브라더 앤드류는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성경을 보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동유럽의 공산주의가 무너지자 이제는 이스라엘과 중동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특히 팔레스틴 지역의 연약한 교회들을 돌보며 강하게 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테러리스트들도 사랑하였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삶은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큰 성 바벨론은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하나님의 심판은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불 심판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10절을 보면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19절에도 보면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고 했습니다. 바벨론이 망하는 것은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악인은 망할 때가 되면 속히 무너집니다. 그 허망함이란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24-25절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강하신 분이십니다. 바벨론이나 짐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셨습니다. 심판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생각하면 인생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쌓아 놓은 바벨탑들은 시간이 오래 걸려 만들어야 하지만 무너뜨리는 데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세상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그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은 로마 군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로마도 무너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모든 문화 문명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자각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심판에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바벨론과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 위의 왕들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의 고통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울고 가슴을 쳐야 마땅한데 사치하던 일들이 없어졌음으로 인해 울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이 당하는 고통 때문에 무서워합니다. 그들의 이런 두려움은 바벨론이 망한 것 같이 자기들도 망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상인들의 애가는 어떠합니까? 바벨론은 당시 세계 최대의 시장이었습니다. 상인들에게는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들의 상품을 사는 자가 없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12-13절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이들이 판 상품들이 사치품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물품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종들과 사람의 영혼이 상품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인구는 1/3이 종들이었습니다. 종들 중에는 자녀들을 가르치는 선생도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죽을 운명이거나 매춘을 위한 노예들을 가리킵니다. 로마는 비인간적인 잔인함과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 위에 사치와 풍요 그리고 음란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제 논리로 모든 것을 다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벨론의 부는 얼마나 허망하게 되었습니까? 그 영혼이 탐하던 과일이 떠났고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입니다.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들이 한 시간에 망하였습니다. 인간의 영화라는 것이 이렇게 허망한 것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보고 모든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원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 불타는 연기를 보고 외치며 애통했습니다.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냐”말하면서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했습니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19).”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땅의 부를 추구하는 모든 자들은 아무리 그 부가 쟁쟁할지라도 그것은 잠시 뿐입니다. 결국은 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부로 자기만족을 위해서 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나누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를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줌으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20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왜 교회가 즐거워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심판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교회에게 가했던 핍박을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 되돌려 주십니다. 큰 성이며 견고한 성으로 불리는 강력한 힘을 가진 바벨론은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향하여 막대한 핍박을 가하였습니다. 교회는 완전히 수세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상황을 반전시키십니다. 바벨론은 심판의 자리에 있게 되고 바벨론에 의해 핍박을 받았던 교회는 바벨론의 심판을 즐거워하는 위치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반전 드라마 속에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게 되고 위로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은 큰 성 바벨론의 멸망 자체보다도 그 멸망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한 심판은 곧 교회를 향한 구원의 사역이기도 합니다. 그 심판은 결국은 교회를 괴롭혔던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위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셨나이다”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 있음을 믿을 때 우리는 끝까지 악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산 자들을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기쁨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 외롭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데 세상 사람들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계속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 때 참된 기쁨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난은 잠시이지만 영광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면서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큰 성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 철저하기 때문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큰 맷돌 같은 돌을 바다에 던지면 결코 올라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또 그들이 부르던 노래 소리, 춤추던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고 귀금속을 만들던 세공업자도 보이지 아니하고 잔치 날에 맷돌을 갈던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야 등불이 비치는데 그 안에서 다시는 등불이 비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신랑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그 안에서 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결혼식의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청년들이 사라지고 아이들이 없습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입니다. 그러나 그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습니다. 상인들을 이렇게 인정하고 있는 것은 매우 놀랍습니다. 상인들이 부가 축적되면서 자유에 대한 목마름이 더욱 커져 갔습니다. 그리고 중산층이 형성되어 가면서 봉건영주사회에서 시민사회로 발전해 왔습니다. 시민 사회는 평등과 자유, 인권, 민주주의, 자본의 사유화 등이 가장 큰 가치입니다. 상인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왕족과 같은 권력을 누립니다. 그런데 그들의 속임수에 모든 나라가 속임을 당합니다. 물질적인 가치관이 확산됩니다. 그리고 큰 성 바벨론의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러운 귀신의 영이 지배하는 사회는 우상숭배의 문화를 갖게 됩니다. 철학관, 점쟁이들이 사회를 이끌어갑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큰 성 바벨론은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나라치고 잘 되는 나라가 없습니다. 바벨론 멸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의 삶을 살다가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기도 소리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순교를 각오하며 순종의 삶을 살다간 성도들의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십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바벨론이 멸망을 당하는 원인과 과정과 그 결말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다가 어려움을 당하지만 이는 잠시 잠깐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어려움을 당할 때 인내하여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죄악에서 나와야 합니다. 음행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기 생각대로 사는 데서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기 위해서 나와야 합니다. 영적 침체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사명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힘들고 어려움이 있지만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목전에서 우리 앞에 잔치 상을 베푸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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