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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09년 계10강(12:1-17) 여자와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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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097회 작성일 09-11-01 11:19

본문

2009년 요한계시록 제 10 강
말씀 요한계시록 12:1 - 17
요절 요한계시록 12:11

여자와 용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춘향이가 이몽룡을 기다리듯이 기다리지만 변 사또가 춘향이를 가만히 놔두지를 않습니다. 마음을 바꾸도록 유혹을 하고 핍박을 합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유혹하고 핍박합니다. 우리는 이 고난의 때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먼저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 살펴  보고, 우리는 어떻게 사탄과 싸워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였습니다. 한 여자가 있는데 해를 옷 입고 달은 그 발 아래에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관을 썼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럽고 존귀하게 보이는 여자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여자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어머니 된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답답하고 촌스럽고 볼 품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랑받는 교회인 우리 자신의 자화상은 무엇입니까? 아가서에 보면 포도원에서 일하는 어여쁜 여자는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합니다. 그럴지라도 그를 흘겨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가 왕의 사랑받는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아이를 잉태하고 해산하는 과정은 고통스럽습니다. 이 여자가 낳을 아이는 누구입니까? 5절을 보면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 장면을 “하늘에서 본 성탄절”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왕국은 파괴되고 사탄의 포로 되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풀려나게 됩니다. 그러니 누가 아이의 탄생을 가장 두려워하겠습니까? 바로 사탄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기 나오는 한 큰 붉은 용은 누구입니까? 9절을 보면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했던 바로 그 자입니다. 사탄은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고 했습니다. 뿔은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는데 열 개의 뿔이 있으니 얼마나 큰 능력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사탄은 그 머리에 일곱 왕관을 썼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면류관에 대한 모방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모방하는데 천재입니다. 이런 그가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정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대적하고 영적 전쟁을 벌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노리는 것은 누구입니까?

  4b절을 보십시오.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용은 아나콘다와 같이 여자 앞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삼키고자 했습니다. 이 아이가 자기의 왕국을 파괴하고 그 포로들을 구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그 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싹을 자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이는 곧 사탄의 공격에 대한 승리의 확보를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 시대의 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정말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심으로 성도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심으로 사탄은 대신 여자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여자를 공격함으로 예수님을 괴롭게 하고자 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여자는 사탄과의 싸움에서 일단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광야는 사실 살기 힘든 곳입니다. 광야는 피난처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양육하십니다. 동시에 광야는 하나님의 훈련과 연단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재림하시기 전 까지 믿음의 투쟁을 해야 합니다. 이 시간은 성전 밖 마당이 이방인에 의해 짓밟히는 마흔 두 달의 기간이요(11:1-2), 두 증인이 예언한 기간입니다(11:3-13).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온실 속의 꽃과 같이 키우지 아니하십니다. 도리어 광야에서 비바람을 맞고 잠을 자며 땡볕을 거닐고 야수와 함께 싸우면서 연단을 받도록 하십니다. 그런 훈련과 연단을 주시면서 사랑과 보호와 도우심을 함께 받도록 하십니다.

  그러면 당시 일곱 교회를 공격했던 용의 무기는 무엇이었습니까? 9절을 볼 때 온 천하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탄은 팍스 로마나를 외치는 로마 황제를 중심으로 황제 숭배를 하도록 했습니다. 네로(Nero, 37-68) 황제는 64년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혼란스러워지자, 소수 종교인 기독교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워 박해하였습니다. 로마는 70년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시켜버렸습니다. 92년 도미티안(Domitianus, 51-96)이 황제가 됩니다. 그는 자신을 ‘주와 하나님’(Lord and God)으로 숭배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시이저는 주님이시다”(Caesar Kurios, Caesar is Lord)라고 말만 하면 다른 종교를 가져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다신론을 섬겼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일이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 신들 중에 또 하나의 신이 추가 된다고 해서 나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 주님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했고, 그 결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으로 쫓겨났습니다. 일반 신자들은 지하와 산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는 마치 범죄행위를 하듯이 밀실에서 은밀하게 드려야 했습니다.

  사탄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건 사회주의 사회건 돈을 신으로 섬기도록 합니다. 사람들의 범죄 행위 뒷면을 보면 돈과 섹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돈은 정복자와 같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을 추구하면서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낍니다. 돈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잘 살고 싶은 욕망은 결국 많은 돈을 벌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사람들이 갈등하는 내면을 조금 들여야 보면 대부분 돈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돈이 웬수”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이 돈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 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잠시 하늘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장면으로 바뀌었습니다. 공중전의 승리를 통하여 지상에서의 싸움에 승리가 보장됩니다.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워 이겼습니다. 큰 용은 하늘로부터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사탄은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소하는 일을 했습니다. 사탄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여호수아를 대적하여 참소했습니다(슥 3:1, 4). 그리고 욥을 참소했습니다(욥 1:6-12, 2:1-6). 참소가 무엇입니까?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죄를 지적하면 사람은 위축이 됩니다. 정죄의식은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의롭고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밥을 먹기 때문에 더러워진 그릇이 나옵니다. 그래서 설거지는 매일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면 사람들과 부딪치게 되고 갈등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은 바닥이 더러워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각오하고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게으르다고 정죄합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 자기 광을 내고자 한다고 판단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제자 양성을 하다가 실패를 반복하자 무능하다고 참소합니다. 실패자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실 1980-1990년대에 부흥의 역사에 쓰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성공, 그 영광을 잊어버리고 변화된 시대를 섬기기 위해서 우리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 비운 마음으로 작은 역사에서 의미를 찾고 내실을 기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사탄의 참소로 인해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위축되다보니 자기만을 돌아보고 형제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습니다. 그래서 목자님들 중에 어떤 분들은 외롭습니다. 이런 가운데 서로를 판단하고 관계가 서먹서먹해 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을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강력해 보여도 패배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이미 승리가 확정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사탄의 등뼈를 꺾은 사건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탄을 이겼고 또 이겨야 합니까?

첫째, 어린 양의 피로써 이겼습니다. 어린 양의 피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고 완성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입니다. 로마서 3:24-25절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바로 나의 죄를 위한 것임을 믿을 때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됩니다. 사탄이 밤낮 우리를 참소하지만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써 참소를 막아냈습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씻겼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변화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됩니다. 저는 이 땅에서 전투를 해 나가야 하는 교회가 얼마나 변화되었는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변화라는 것이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악된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죽을 몸도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 자신과 형제들에게, 동역자들에게 변화를 요구한다면 반드시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변화가 그렇게 금방 금방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악된 성품이 변하여 거룩하고 사랑이 충만하고 인내심이 있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은 시간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나 자신을 용서하고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어린 양의 피는 나 같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한 사랑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를 보면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피는 바로 나를 위한 피입니다. 그 피의 효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3-37).”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는 사탄의 공격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탄의 공격으로 고립되거나 외로움 가운데 있는 형제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사탄의 공격을 당할 때 이를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와 함께 눈물을 흘리고 함께 슬퍼하며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이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불법이 성한 시대에 사랑이 식는다고 했습니다. 자기 문제가 워낙 크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 거할 때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사랑은 개인 신앙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개인 신앙이 굳건할 때 강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서 더욱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마음이 통하게 됩니다. 신뢰할 때 마음이 통하게 됩니다. 서로 사랑할 때 기쁨과 즐거운 일을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서로를 섬기는 일이 즐거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주님과 교제가 있는 곳에 기쁨이 넘칩니다. 성도의 교제가 있는 곳에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기쁨을 누리는 곳에서 우리는 쉼을 갖게 됩니다. 부담을 느끼는 곳에서는 쉼을 누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사랑을 부어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쉼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히기스야와 같이 기쁜 찬송을 부르면서 나아갈 때 원수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줄 믿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찬송하며 나아갑시다.

둘째, 말씀으로 이겼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탄의 공격을 받을 때 기룩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여 이기셨습니다. 사탄은 거짓으로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 거짓은 진리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가질 때 사탄의 거짓에 대항해서 이길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전하는 것이 사탄의 세력에 대한 공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배들도 핍박의 때에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전함으로 승리를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시대가 어렵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묵상하고 전하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 힘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친 우리의 영혼을 소생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사탄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들어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시달리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고리타분하게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학자들의 말, 전문가들의 말이 더 권위가 있어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터치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홍수와 같이 쏟아져 나오는데 영혼의 기갈든 사람들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홍수 속에서 목마름을 체험하고, 수영장에서 목마름이 깊습니다. 먹을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먹을 만한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먹을 만한 말씀의 물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말씀의 생수를 마시고자 하면 얼마든지 찾아서 마실 수 있습니다. 말씀의 양식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밥 먹듯이 꼭꼭 씹어 드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할 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목숨을 내 놓고 싸우는 사람은 아무도 이길 수 없습니다. 당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굳게 붙들었을 때 필연적으로 죽음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어린 양의 피와 증거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헌신에서 능력과 힘이 나옵니다. 헌신하지 않고서는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자기 의지나 성실, 혹은 세상의 말들, 그리고 안일하게 살면 사탄의 밥이 되고 맙니다. 사탄을 이기는 것은 물리적인 위험으로부터 구출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증언하면서 순교하는 것입니다. 순교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승리인 것입니다. 편하게 믿는 것을 복음의 환희인 것처럼 착각하는 시대에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것이 사탄을 이기는 길이라는 본문 말씀은 정말 놀랍습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사탄을 이깁니다. 우리가 어린 양의 피와 하나님의 말씀과 헌신을 통해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성도들은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고 더욱 초조하여 크게 분을 냅니다. 그러나 사탄의 공격 속에서 주님은 큰 독수리의 날개로 성도들을 피난처로 안전하게 인도합니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고자 하지만 땅이 물을 삼키어 여자를 보호합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고 악의 세력과 싸우는 전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전투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싸움을 즐기는 그리스도의 정예 용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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