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09년 계9강(10:1-11:19) 두 증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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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요한계시록 제 9 강
말씀 요한계시록 10:1 - 11:19
요절 요한계시록 11:3
두 증인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오늘 말씀은 환난 가운데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환란의 때에 자기 한 몸 사리기 위해서 위축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때에 성도들이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은혜를 주사 말씀 전하는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입에는 꿀, 배에는 쓴 책(10:1-11) : 제 6나팔이 울려 퍼진 후에 일곱째 나팔이 나오지 않고 본문이 등장합니다. 사도 요한이 보니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했습니다. 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 요한이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기록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6,7절을 보면 심판이 지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곱 천둥은 시작에 불과하고 진짜가 곧 다가오기 때문에 그것을 기록해야 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가서 바다와 땅을 밝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니 천사가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달리라고 말했습니다(9). 1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단 맛을 느낍니다. 다른 음식도 마찬가지이지만 많이 씹을 때 본래의 맛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말씀의 진가를 알 때 영혼이 소생함을 입습니다. 마치 피곤한 사람이 꿀을 먹을 때 눈이 밝아지고 힘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아니하고 급하게 삼켜 버린다면 맛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도리어 말씀을 먹다가 체하게 됩니다. 소화가 되지 않는 말씀을 계속 먹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어린 사람들은 말씀으로 인해서 넘어집니다. 우리가 병이 들면 입맛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병을 치료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밥을 먹듯이 힘들더라도 꾸준히 밥을 먹으면서 약을 먹어야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육체의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인 건강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음으로 유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두루마리를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행하려 할 때는 부담이 있습니다. 사명인으로서 말씀을 선포하고 행하려고 할 때 핍박도 있고 심적인 고통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회개할 때는 쓰지만 그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해서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영적 비만에 걸리기가 열에 아홉입니다. 연약하고 죄악된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때로는 죽을 맛입니다. 달게 먹고 쓰게 고하는 것이 말씀 사역자의 사명입니다. 사명의 길은 달콤함과 쓰라림, 기쁨과 부담(sweet-sour, joy-burden)이 연속되는 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고 전도하는 것이 어렵지만 이것을 잘 감당하는 것이 참된 기쁨을 누리고 강해지는 길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자 캠퍼스에 올라가면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사도 요한은 2-3장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하여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제는 온 세상을 향하여 다시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 새로운 위임을 받았습니다. 요한이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도래를 암시하는 열려진 책을 먹으므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제 그 무시무시한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데, 요한은 그 완성의 문턱에서 예언자로서의 갱신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예언의 사역은 다시 교회 공동체가 감당해야 하는 부르심의 전형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많은 백성”, “나라”, “방언”, “임금들” 등 온 세상 만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시대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라고 주장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이 바로 세상에 가 있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 말입니다. 자녀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아서 이 명령이 섭섭하십니까? 물론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에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만 있지 않고 온 세상에도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희생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런 장면은 감동이 있지만 생명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람들 편에서는 고통이요 쓰라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단 맛을 보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다시 예언하라”는 메시지는 “다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교회가 마지막까지 감당해야만 할 사명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회개를 거부하는 세상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교회입니다. 비록 우리의 형편은 초라할지라도, 약할지라도 믿음으로 이 일을 감당해 내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둘째, 두 증인(11:1-13) : 하나님께서는 심판 가운데서도 그의 백성들은 보호하십니다. 요한은 갈대 자를 받아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했습니다. 그러나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입니다. 마흔두 달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여기에 나오는 두 증인은 누구일까요? 4절을 보면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했습니다. 두 감람나무는 스가랴 4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두 가지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당시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정치지도자 스룹바벨을 말합니다.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은 성전 건축 역사를 이루는데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두 증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두 촛대는 1장 20절을 볼 때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교회 공동체라고 보아야 합니다. 증인은 무시되거나 잊힐 수 없는 어떤 일을 경험하고, 기억이나 회상으로 그 경험의 내용을 말할 수 있고 말하는 자입니다. 성경적 의미는 복음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선언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도록 권세를 주셨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증인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권세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증인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합니다. 이는 죄와 그 심판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평화로울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 가운데 있을 때에도 변함없이 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시련에 처했지만 중단 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로마 제국 내에 놀라운 교회 설립의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복음 전도에 있습니다. 전도하는 요회는 성장합니다. 요회 역사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전도를 하지 않으면 복음 역사 자체가 죽고 맙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도전할 때 생명력은 더욱 강화됩니다. 교회의 존재 여부는 말씀 선포의 열정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전도를 하기 위해서 아파트 계단을 수없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무릎 연골이 닳고 닳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수술했습니다.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다리야 말로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다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다리를 가지고 계십니까? 각선미가 잘 빠진 다리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다리가 아름답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캠퍼스에서 배척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할 때 그 발은 아름답습니다. 또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제자의 특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증거 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떤 권세를 주셨습니까? 5,6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이는 모세와 엘리야에게 주셨던 권능이었습니다. 복음 역사에 대한 방해 세력들은 두 증인의 입에서 나오는 불에 의해 소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이때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직전 최후의 순간입니다. 사탄과 교회 공동체가 치르게 될 종말적인 영적 전쟁은 최후의 결전입니다. 매우 치열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사탄의 세력이 교회를 이기고 성도들을 죽일 것입니다. 성도들의 시체는 큰 성 길에 있게 됩니다. 이는 수치를 상징합니다.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께 반항적이 되었고 타락하게 됩니다. 교회가 이런 죽임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자 땅에 사는 자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11,12절을 보십시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마른 뼈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 살아난 사건처럼 하나님께서 교회에 생기를 주셔서 교회를 살리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듯이 교회를 다시 살리십니다. 이를 통해 대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신들이 죽인 두 증인이 살아나는 것을 본 그들은 큰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 하늘로부터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을 듣고 교회가 승천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실 때의 모습과 같습니다. 교회는 고난과 죽음의 과정을 거쳐서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고난은 사흘 반이지만 땅에서 복음을 전하며 왕 노릇하는 기간은 삼년 반입니다. 고난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이를 구경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나이다.”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은 역사입니다.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 됩니다.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13).
셋째, 일곱째 나팔 소리(15-19) :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나서 이릅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세상 나라는 하나의 왕국입니다. 세상 왕국은 사탄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이제 변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중 왕으로 오셔서 세상 왕국을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사탄 세력들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을 포상하심으로써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그들은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십니다. 모든 성도들이 공통으로 받는 상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충성했느냐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갚아주십니다.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최후 백보좌 심판입니다.
19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린다는 말은 종말적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의 신실함을 상징합니다. 언약궤는 BC58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솔로몬 성전을 파괴할 때에 그에 의해 취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 성전에 언약궤가 보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모아 그의 자비를 보여주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믿음의 중심을 지킨 그 백성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언약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에게 일시적인 고난과 죽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부활과 영광스러운 미래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진노의 날이 급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가 오면 늦기 때문에 구원의 날인 오늘 돌이켜야 합니다. 오늘 구원의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이런 세상을 향하여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끝까지 예언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그 날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충성스럽게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계시록 10:1 - 11:19
요절 요한계시록 11:3
두 증인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오늘 말씀은 환난 가운데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환란의 때에 자기 한 몸 사리기 위해서 위축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때에 성도들이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은혜를 주사 말씀 전하는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입에는 꿀, 배에는 쓴 책(10:1-11) : 제 6나팔이 울려 퍼진 후에 일곱째 나팔이 나오지 않고 본문이 등장합니다. 사도 요한이 보니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했습니다. 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 요한이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기록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6,7절을 보면 심판이 지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곱 천둥은 시작에 불과하고 진짜가 곧 다가오기 때문에 그것을 기록해야 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가서 바다와 땅을 밝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니 천사가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달리라고 말했습니다(9). 1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단 맛을 느낍니다. 다른 음식도 마찬가지이지만 많이 씹을 때 본래의 맛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말씀의 진가를 알 때 영혼이 소생함을 입습니다. 마치 피곤한 사람이 꿀을 먹을 때 눈이 밝아지고 힘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아니하고 급하게 삼켜 버린다면 맛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도리어 말씀을 먹다가 체하게 됩니다. 소화가 되지 않는 말씀을 계속 먹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어린 사람들은 말씀으로 인해서 넘어집니다. 우리가 병이 들면 입맛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병을 치료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밥을 먹듯이 힘들더라도 꾸준히 밥을 먹으면서 약을 먹어야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육체의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인 건강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음으로 유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두루마리를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행하려 할 때는 부담이 있습니다. 사명인으로서 말씀을 선포하고 행하려고 할 때 핍박도 있고 심적인 고통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회개할 때는 쓰지만 그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해서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영적 비만에 걸리기가 열에 아홉입니다. 연약하고 죄악된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때로는 죽을 맛입니다. 달게 먹고 쓰게 고하는 것이 말씀 사역자의 사명입니다. 사명의 길은 달콤함과 쓰라림, 기쁨과 부담(sweet-sour, joy-burden)이 연속되는 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고 전도하는 것이 어렵지만 이것을 잘 감당하는 것이 참된 기쁨을 누리고 강해지는 길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자 캠퍼스에 올라가면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사도 요한은 2-3장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하여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제는 온 세상을 향하여 다시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 새로운 위임을 받았습니다. 요한이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도래를 암시하는 열려진 책을 먹으므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제 그 무시무시한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데, 요한은 그 완성의 문턱에서 예언자로서의 갱신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예언의 사역은 다시 교회 공동체가 감당해야 하는 부르심의 전형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많은 백성”, “나라”, “방언”, “임금들” 등 온 세상 만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시대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라고 주장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이 바로 세상에 가 있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 말입니다. 자녀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아서 이 명령이 섭섭하십니까? 물론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에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만 있지 않고 온 세상에도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희생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런 장면은 감동이 있지만 생명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람들 편에서는 고통이요 쓰라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단 맛을 보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다시 예언하라”는 메시지는 “다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교회가 마지막까지 감당해야만 할 사명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회개를 거부하는 세상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교회입니다. 비록 우리의 형편은 초라할지라도, 약할지라도 믿음으로 이 일을 감당해 내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둘째, 두 증인(11:1-13) : 하나님께서는 심판 가운데서도 그의 백성들은 보호하십니다. 요한은 갈대 자를 받아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했습니다. 그러나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입니다. 마흔두 달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여기에 나오는 두 증인은 누구일까요? 4절을 보면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했습니다. 두 감람나무는 스가랴 4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두 가지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당시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정치지도자 스룹바벨을 말합니다.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은 성전 건축 역사를 이루는데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두 증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두 촛대는 1장 20절을 볼 때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교회 공동체라고 보아야 합니다. 증인은 무시되거나 잊힐 수 없는 어떤 일을 경험하고, 기억이나 회상으로 그 경험의 내용을 말할 수 있고 말하는 자입니다. 성경적 의미는 복음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선언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도록 권세를 주셨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증인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권세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증인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합니다. 이는 죄와 그 심판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평화로울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 가운데 있을 때에도 변함없이 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시련에 처했지만 중단 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로마 제국 내에 놀라운 교회 설립의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복음 전도에 있습니다. 전도하는 요회는 성장합니다. 요회 역사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전도를 하지 않으면 복음 역사 자체가 죽고 맙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도전할 때 생명력은 더욱 강화됩니다. 교회의 존재 여부는 말씀 선포의 열정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전도를 하기 위해서 아파트 계단을 수없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무릎 연골이 닳고 닳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수술했습니다.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다리야 말로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다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다리를 가지고 계십니까? 각선미가 잘 빠진 다리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다리가 아름답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캠퍼스에서 배척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할 때 그 발은 아름답습니다. 또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제자의 특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증거 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떤 권세를 주셨습니까? 5,6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이는 모세와 엘리야에게 주셨던 권능이었습니다. 복음 역사에 대한 방해 세력들은 두 증인의 입에서 나오는 불에 의해 소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이때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직전 최후의 순간입니다. 사탄과 교회 공동체가 치르게 될 종말적인 영적 전쟁은 최후의 결전입니다. 매우 치열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사탄의 세력이 교회를 이기고 성도들을 죽일 것입니다. 성도들의 시체는 큰 성 길에 있게 됩니다. 이는 수치를 상징합니다.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께 반항적이 되었고 타락하게 됩니다. 교회가 이런 죽임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자 땅에 사는 자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11,12절을 보십시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마른 뼈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 살아난 사건처럼 하나님께서 교회에 생기를 주셔서 교회를 살리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듯이 교회를 다시 살리십니다. 이를 통해 대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신들이 죽인 두 증인이 살아나는 것을 본 그들은 큰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 하늘로부터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을 듣고 교회가 승천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실 때의 모습과 같습니다. 교회는 고난과 죽음의 과정을 거쳐서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고난은 사흘 반이지만 땅에서 복음을 전하며 왕 노릇하는 기간은 삼년 반입니다. 고난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이를 구경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나이다.”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은 역사입니다.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 됩니다.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13).
셋째, 일곱째 나팔 소리(15-19) :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나서 이릅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세상 나라는 하나의 왕국입니다. 세상 왕국은 사탄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이제 변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중 왕으로 오셔서 세상 왕국을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사탄 세력들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을 포상하심으로써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그들은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십니다. 모든 성도들이 공통으로 받는 상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충성했느냐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갚아주십니다.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최후 백보좌 심판입니다.
19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린다는 말은 종말적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의 신실함을 상징합니다. 언약궤는 BC58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솔로몬 성전을 파괴할 때에 그에 의해 취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 성전에 언약궤가 보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모아 그의 자비를 보여주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믿음의 중심을 지킨 그 백성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언약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에게 일시적인 고난과 죽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부활과 영광스러운 미래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진노의 날이 급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가 오면 늦기 때문에 구원의 날인 오늘 돌이켜야 합니다. 오늘 구원의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이런 세상을 향하여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끝까지 예언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그 날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충성스럽게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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