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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09년 계7강(6:1-7:17) 셀 수 없는 큰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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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201회 작성일 09-10-11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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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요한계시록 제 7강                                                   
말씀 요한계시록 6:1 - 7:17
요절 요한계시록 7:9

셀 수 없는 큰 무리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6장은 인 심판으로 나타나는 어린 양의 진노에 대해서, 7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보호와 위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때에 그 장면이 무섭기 때문에 두려움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의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또한 참고 선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는 가운데서도 그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위로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가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영접할 때 우리는 환란 가운데서 참된 소망을 붙잡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심판과 그 백성에 대한 위로가 어떠합니까?

첫째, 첫째부터 넷째 인 심판(6:1-8) : 사도 요한이 보니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셨습니다. 심판을 행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으로 승리하셔서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환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심판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허락 없이는 환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7가지 인 재앙을 필두로 7나팔과 7대접 재앙으로 이어지며 점차 재앙의 강도가 더하게 됩니다. 인, 나팔, 대접 심판이 진행될수록 심판은 시간 순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면서 종말적 최후 심판에 집중됩니다. 그리고 심판의 네 번째까지는 자연계에 대한 심판을 하다가 뒤로 가면서 사탄을 향한 직접적인 심판에 집중됩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이 성도들을 박해하고 복음 역사를 방해하지만 그들도 주님의 주권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수들의 박해로 인한 피해자가 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영접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심판의 끝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종말관, 역사관은 낙관적입니다.

  첫째 인을 떼었을 때 흰 말이 있는데 그 탄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였습니다. 말을 탄자는 누구입니까? 8절을 볼 때 사망입니다. 말을 탄자가 활과 면류관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는 왕관이 아니라 승리의 월계관과 같은 것입니다. 첫째 인을 통한 심판은 징기스칸이나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와 같은 인물들의 제국주의적 정복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복 전쟁을 통해서 사람들이 죽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에 나오는 전쟁 징조와 맞아 떨어집니다. 말세에 각 처에 민족과 민족 간, 나라와 나라 간의 분쟁과 전쟁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둘째 인을 떼었을 때에 다른 붉은 말이 나왔는데 그 탄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고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습니다. “화평을 제거한다”, “서로 죽인다”는 것은 앞에 나타난 정복전쟁보다 더 참혹한 미움과 복수극이 펼쳐질 것을 의미합니다. 붉은 말은 피와 같은 색 곧 살상과 피흘림을 가리킵니다. 특히 붉은 색은 불같은 붉은 색으로서 가공할 만한 살상과 피흘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둘째 인은 내란, 같은 민족끼리의 싸움, 세계 대전 등을 통한 화평 제거와 죽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 사이에 전쟁을 계속 벌어지겠지만 주님 재림 직전에는 전쟁이 더 자주 일어날 것입니다.

  셋째 인을 떼실 때에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습니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가 되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의 가치를 갖습니다. 밀은 당시의 주식으로 보리보다 더 좋은 곡식으로 여겨졌습니다.  헤로도투스의 글에서 인용해보면 당시 부피 계산에서 “밀 한 되(Coi'nix sivtou)”는 적당한 식욕을 가진 보통 사람의 하루 몫이었습니다. “보리 석 되”는 한 사람의 삼일치 식량이며 한 가족에게는 하루치 식량입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 제국 평균 물가의 여덟 배에서 열여섯 배가 됩니다. 쌀 10Kg에 80만원씩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기근으로 인해 물가 특히 곡물류의 가격이 급등한 것을 말해 줍니다. 노동자가 하루 종일 일해서 번 돈을 한 사람 분의 식량 밖에 구하지 못하니 다른 식구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의 북한이나 에디오피아와 같이 식량부족으로 죽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지구의 삼분의 일이 하루 한끼 밖에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20억의 인구가 굶주림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체 식량으로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물자가 결핍된 상태에서 다 없애지는 않고 일부분은 남겨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긍휼을 가리킵니다. 앞으로 곡물을 전쟁물자화 시킨다면 기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수는 훨씬 더 늘어날 것입니다.

  넷째 인을 떼실 때에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였습니다. 이런 재앙의 현대적 표현은 핵을 탑재한 미사일 공격, 생화학 탄으로 인한 공격, 에이즈와 암으로 인한 대규모의 살상 등 일 것입니다. 땅의 사분의 일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이 심판이 우주적이면서도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피조 세계를 다 멸절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주를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이 유효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환난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들이 주님이 공중 재림하시기 전, 지금으로부터 얼마 남지 않은 7년 대환난 때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7년 대환난 전체가 아니라 후 3년 반에 있을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12:5,6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여기서 천이백육십일은 42개월로 3년반을 말하는데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이 5절에 나오고 6절에 3년반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3년반이라는 기간은 예수님의 승천 후 재림 전까지라고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둘째, 심판을 촉진시키는 순교자들의 기도(9-11) :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10)” 원수들의 핍박이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 걸고 있는지를 시험하게 됩니다. 순교자들은 이러한 시험에서 승리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보복을 위한 기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고 죽으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기도하셨고 스테반 집사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면서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보복의 기도는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불의에 대한 항의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드린 기도입니다. 이들이 복수를 요청하는 목적은 원수들이 하나님께 승복하고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분노는 저속하고 잔인한 복수심이 아니라, 여호와께 대한 정열적인 사랑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그들의 열망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손실이나 상처로 인해 저주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불의, 하나님께 대한 모욕, 불신과 불순종,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짐과 같은 것들입니다. 악인은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개인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고 간주할 때만, 하나님의 편에 서서 저주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자기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원수에 관하여, 하나님의 원수를 향하여 저주합니다. 그러므로 저주는 가장 영적인 행위입니다. 순교자들은 맑은 영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있기 때문에 복수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사탄에게 속한 자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최후 심판을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가 완성되어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순교자들의 수가 차기까지 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순교자들의 숫자를 정해놓았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추측은 성경 어느 부분에서도 근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순교자들이 요청하는 것처럼 지금 당장은 그들의 신원에 대한 응답으로 최후의 심판을 할 때가 아니며 조금 더 지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연하는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여 하늘의 셀 수 없는 무리 곧 충만한 수를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처럼 충성된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을 좇아 순교적이어야 하며, 결국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마음을 영접하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을 채우기를 기도합니다.

  8:1-5절에는 일곱 번째 인 심판이 나오는데 성도들의 기도를 받으시고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통치에 동참합니다. 기도는 강력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를 받으시고 땅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 등 심판을 행하십니다. 고난의 때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가장 힘써야 할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그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은 성도들의 믿음을 보겠느냐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겠느냐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가 경제적인 환난, 정치적인 환난, 자연 재해 등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더욱 기도하는 기도의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왕같은 제사장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최후의 심판(12-17) : 여섯째 인은 마지막 심판을 예시합니다. 이때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구약적 세계관의 입장에서 표현된 종말론적 심판의 현상들입니다. 이때의 공포가 어떠할 것인지는 15,16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우주적 심판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자기들 위에 떨어져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에서 자기들을 가리라고 말합니다. 가장 용감해 보이는 사람도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진노의 큰 날에 누가 능히 서있겠습니까?

  그 날은 어린양의 자비의 날이 아니라 천년을 하루같이 참으시다가 폭발하는 진노의 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에는 한계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천년을 하루 같이 참으시며 모든 악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심판하시는 “진노의 큰 날”이 있습니다. 이때 어린양은 자신의 희생적 사랑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최고로 엄한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 앞에서는 권력과 돈, 아름다움, 학력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오직 어린 양의 피로 죄를 씻은 사람들만이 그 앞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권력과 문화의 힘과 무력과 금력 앞에서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힘들에 주눅 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제사장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넷째, 환난을 이기고 나오는 큰 무리(7:1-14) : 7장은 무시무시한 심판에 대한 계시가 계속되는 가운데 막간으로 끼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계시록은 불신자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는 말씀이지만 신자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성도들은 심판 앞에서 두려움에 잡히거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희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7:1절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1절과 9절의 “이 일 후에”라는 말은 둘 다 ‘이후에’라고 번역해야 하며 6장과 7장 사이에 대한 시간적 순서를 정한다기보다는 논리적 순서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요한이 보니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네 바람은 하나님의 파괴활동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다른 천사가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인침을 받은 자의 수는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일만 이천 명씩 합이 십사만 사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보호받는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함입니다. 천사들이 재난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일이 너무 시급한 일이었기 때문에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여기서 십사만 사천은 구약 백성과 그 성취로서 신약 백성을 함께 포함하는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 전체를 상징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영적 축복과 유산을 이어 가는 사람들임을 부각시킵니다.

  144,000= 12*12*1000으로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전투하는 공동체임을 의미합니다. 천이란 숫자는 군대의 단위를 표시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복음의 깃발을 높이 들고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전투하는 교회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교회 공동체는 자기 한 몸 붙들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자들입니다. 즉 세상 문화와 싸우고, 반기독교 세력과 싸우는 자들입니다. 5-8절은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를 열거하고 있는데 몇 가지 변화가 있습니다. 먼저 르우벤이 아닌 유다로 시작합니다. 이는 육신적 차원이 아닌 영적인 차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단 지파가 누락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경쟁자였던 에브라임이 빠졌습니다. 이는 메시아를 탄생시킨 유다가 완전히 중심 지파가 됨을 보여줍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수를 앞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명과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 14장에 보면 유대인 이방인 구분없이 시온 산에 선 자들 전체가 십사만 사천 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14:4)”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는 이스라엘 민족의 한계를 제거하여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방언에 속한 자들로부터 모여 든 자들을 포함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 졌고 세속에 더럽혀지지 않은 흰 옷을 입었습니다. 그들이 종려 가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환난을 극복하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찬양하는 핵심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구원에 있습니다.

  15-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이 말씀은 21-22장의 마지막 지복 상태와 동일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고,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자가 되어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생명의 진수가 영원한 복락 속에 있는 구원받은 자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생명의 샘에서 신자들의 갈증은 완전히 해소될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 장면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완성된 구원을 누리는 상태를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는 것은 그들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모든 필요가 채워집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가장 만족스럽고 기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욕심이 있지만 그러한 것들은 얻어도 다 지나갈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에게 엄마가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여러 가지 모양의 환란과 어려움을 당하지만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고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제자의 길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나 혼자서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도 전 세계 각 교회에서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을 찬양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복음전파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비전을 보고 주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더욱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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