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09년 계6강(5:1-14)어린 양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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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요한계시록 제 6강
말씀 요한계시록 5:1 - 14
요절 요한계시록 5:6
어린양 사자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영화 ‘미션’은 1750년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와 브라질 국경에서 일어난 실화입니다. 라플라타 앙상센이란 마을에서 예수회 선교사가 과라니 족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합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신부는 “이제 내 차례다”라고 말하면서 폭포 위 지역으로 올라갑니다(S1 04:30-06:27). 그는 음악을 통한 복음 전파를 통하여 그곳에 지상 낙원을 이루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초대 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노예 상인들이 들어오고 영토 확장에 대한 야욕을 가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서 공동체가 파괴 됩니다. 유럽에서 주변 지역으로 들어온 정착민들은 원주민들이 하나님을 믿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선교사들과 원주민들은 자기들이 세운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고자 하는 사람들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무력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과 사랑으로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이런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4장이 성부 하나님을 중심으로 천상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였다면, 5장은 성자 예수님이 중심이 된 내용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심판을 계획하셨다면, ‘어린 양 사자’ 예수님은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그는 심판을 시행하는 합당한 자격을 가지신 분으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점에서 심판자로서 합당한지,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누가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1-6) : 요한이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가 있는데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가 있다는 것은 성경 계시의 최고 권위가 그 분께 있으며 그것을 집행할 능력을 보장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두루마리에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심판 계획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사이고 심판사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구원과 심판과 회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한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었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이 될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찾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현실 앞에 크게 울었습니다. 봉인을 뗄 자가 없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 계획을 실행할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해서 낱낱이 심판하고 악을 제거하지 않으면 구원은 궁극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같은 악한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최후 심판이 집행되지 않는다면 현재 사탄과 그 하수인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최후 심판이 없다면 희생하면서 선을 행할 토대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심판자를 찾을 수 없었을 때 사도 요한은 큰 소리를 내며 울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순간적으로 역사가 교회를 위해 진행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 어떠한 보호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어떠한 심판도 성도들의 승리를 보장해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도 미래의 모든 기업도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의 눈물은 이 책을 열 사람을 보내주시도록 하는 눈물의 기도였습니다. 그러자 장로 중의 한 사람이 그에게 울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자는 힘과 위엄과 용기와 지적인 탁월성에 있어서 정글의 왕입니다. 주님은 사자처럼 하나님의 대적들을 이기셨습니다.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대적도 이길 수 있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즉 두루마리를 작성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고 집행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그가 들은 말은 동물의 왕 사자인데, 정작 본 것은 연약한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것도 죽음을 당한 어린 양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역설적인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습니다(요 1:29). 그는 십자가에서 희생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죽임을 당한 흔적을 가진 어린양의 이미지는 출애굽기와 요한복음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출 12:3-14, 요 1:29; 19:34). 어린양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대적자들을 이기시고 성부와 함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양 손에 못 박힌 손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를 보자마자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분이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사랑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구원의 감격을 누립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기 목숨까지 주면서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가 예수님처럼 신실하게 나를 사랑하십니까?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이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고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집을 잃고 나그네로 살면서 또 직장을 잃는 경제적인 손해를 감당하면서도 믿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까지 나를 위해 내 놓으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그들도 목숨을 바쳐서 주님께 충성을 다 했던 것입니다. 성자는 죄인들에 대한 용서와 최고의 희생으로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S2 00:37:00-00:41:11).
그러면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신 주님, 어린 양과 사자의 이미지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린 양을 통하여, 어린 양의 길을 통하여 사자가 되었습니다. 사자가 되는 길은 어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이 왜 그렇게 강력할까요? 권력, 무력, 금력보다 희생이 왜 더 강할까요? 권력과 무력으로 이기면 반드시 반발과 반항이 뒤따릅니다.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말씀은 진실입니다. 돈으로 이기는 자는 돈으로 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힘으로 제압하지 않고 사랑으로 섬기시고 자기를 주심으로 원수들이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사랑과 섬김과 희생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그런데 어린 양에게는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었습니다. 일곱 뿔은 완전한 권세를 상징하고 일곱 눈은 완전한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는 말씀은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을 충만히 덧입으시고 지혜와 그 권세로 이기셨습니다. 성령님은 온 세상의 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무조건 희생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권세와 지혜를 덧입고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해야 합니다. 검보다 펜이 더 강하다는 속담처럼 검보다 지혜가 더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완벽한 권능과 지혜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어린양 사자’(Lamb Lion)의 계시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계시록에 나타난 승리의 비결입니다. 주님은 희생을 통하여 승리하셨습니다. 져 주심으로 이기셨습니다. 세상을 힘으로 제압하는 폭력의 방식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으로 섬기며 자기 생명을 주는 방식으로 무릎 꿇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방식입니다. 세상은 사자로 승리하는 길을 제시하지만 교회는 어린양으로 승리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전자는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맙니다. 검은 강한 것 같으나 약합니다. 그러나 사랑과 희생은 실패하는 것 같으나 승리하고 약한 것 같으나 강합니다. 당시 세계에서는 로마가 사자요, 교회는 어린양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로마는 멸망했지만 교회는 더욱 번성하고 있습니다. 지금 모슬렘이 칼과 코란을 앞세워 싸우고 있지만 그 속성이 폭력적이기 때문에 결국 패하고 말 것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사실상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사자이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투를 군사적이나 정치적인 힘으로가 아니라, 인내와 사랑, 심지어 죽기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 주신 역설의 방식을 적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패배와 저주의 상징이지만 십자가를 승리의 발판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역설을 우리의 생애 속에서 펼쳐 보이며 살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한 승리, 희생을 통한 생명의 창조를 이루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거기에 열매가 있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미션 영화에서 악랄한 노예상인으로 과라니 족을 괴롭혔던 멘도사가 회개하고 신부가 되어 가브리엘 신부의 좋은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토 경계 합의로 스페인의 관할 지역에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편입되고 선교회는 해체 위기를 맞습니다. 이에 불응하는 과정에서 무력과 사랑의 방법이 대치하게 됩니다. 메도사 로드리고는 용병이었기 때문에 불의에 무력으로 저항하다가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고, 가브리엘 신부는 “나는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살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도들과 함께 죽습니다. 결국 신부들은 다 순교를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추기경은 자신은 살았으나 죽은 자요, 순교자들은 죽었으나 그들의 정신은 살아 있다고 고백합니다. (S3 01:25:14-01:26:08, S4 01:33:52-01:35:17, S5 01:51:30-01:52:44).
사랑은 사람을 치유시킵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도, 사랑을 받는 사람도 … 변화란 사랑의 행동을 실천하고 타인을 위해서 내가 먼저 노력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면 변화와 성장의 출발점은 곧 하나님인 셈입니다. 미션 영화에서도 학살이 끝난 후 아이들은 칼과 바이올린이 놓여 있는데 바이올린을 선택합니다. 주님의 사랑, 희생의 가치가 그들의 마음에 복수보다는 평화, 사랑을 택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데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경배 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7-9) : 7절을 보십시오.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동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성부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은 것이 아니라 취하셨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도 그 길을 자발적으로 택하셨습니다. 마지못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 길이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아셨기에 생명을 던지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두루마리를 취하시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지고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금대접에 담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기도 합주회를 열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기도를 그에게 드린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다양한 기도를 드리는데 바로 그 기도들이 향으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참 성도의 기도는 멜로디이고, 성도들의 합심 기도는 화음입니다. 기도는 옛 용을 붙잡아 맨 쇠고랑을 붙드는 것이고, 하나님의 전능의 손길을 붙잡는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향냄새를 맡음 같이 기뻐 흠향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일반적인 기도가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이 기도하는 우리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아뢰고 응답을 받음으로 기쁘고, 하나님은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해 주심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드림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킬 권세와 지혜를 덧입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놀라운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여 형편대로 살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면 그들이 부른 새 노래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예수님은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온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값진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새로운 긍휼과 은총에 대해서 새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노래는 ‘구속의 노래’(redemption song)이면서 ‘기쁨의 노래’(delight song)이고 동시에 ‘합당한 노래’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드리는 것이 합당한 이유는 그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구속의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이렇게 자신의 피로 사신 것은 그들을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나님께 바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생토록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 것들을 잃는 아픔이 있지만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며 살게 될 영원한 삶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희생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희생 자체도 특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희생과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가족애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래서 형제님, 자매님하고 부릅니다. 기독교는 가장 견고한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커도 커 보이지가 않습니다. 가족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 노릇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복음을 전하고 양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지만 또 왕 노릇을 합니다. 여기서 왕 노릇한다는 시제가 미래이지만 히브리어의 미완료시제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계속 반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20:6절에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가 천년 왕국이라는 견해를 따르면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재림 이후에도 영원한 미래 천국에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무력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으로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섬김의 리더십에 대해서 말씀하심으로 왕 노릇하는 원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심으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임원과 사장이 되기 위해서 희생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그릇이 큰 사람은 큰 희생을 하고 그릇이 작으면 작은 만큼 하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자기 재산 300억을 사회에 기부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한 사람으로서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자세로 주님을 섬기고 주님과 동역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권한이 크고 책임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세로 섬기는 공동체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공포를 백성들에게 심어서 다스리고자 하는 나라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그 나라에 참여하는 수많은 천사들은 어린 양 예수님을 어떻게 찬양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또한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가운데 모든 피조물은 어떻게 찬양합니까?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천사들이나 모든 피조물이 같은 내용으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네 생물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 합당한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겠습니다. 새 노래는 힘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희생을 통한 승리를 노래합니다. 불평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찬양을 통한 승리가 주제입니다. 5장에 나타는 구속의 노래는 주님이 합당하다는 경배송이고,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복음송이며,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신 선교송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와 제사장을 말하는 헌신송이고,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라는 통치송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온 마음으로 찬양을 합시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찬양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세상을 찬양을 하면서 살 때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뜨거운 마음으로, 큰 소리로 찬양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왕 되심을 찬양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체험하면서 살게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말씀 요한계시록 5:1 - 14
요절 요한계시록 5:6
어린양 사자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영화 ‘미션’은 1750년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와 브라질 국경에서 일어난 실화입니다. 라플라타 앙상센이란 마을에서 예수회 선교사가 과라니 족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합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신부는 “이제 내 차례다”라고 말하면서 폭포 위 지역으로 올라갑니다(S1 04:30-06:27). 그는 음악을 통한 복음 전파를 통하여 그곳에 지상 낙원을 이루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초대 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노예 상인들이 들어오고 영토 확장에 대한 야욕을 가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서 공동체가 파괴 됩니다. 유럽에서 주변 지역으로 들어온 정착민들은 원주민들이 하나님을 믿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선교사들과 원주민들은 자기들이 세운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고자 하는 사람들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무력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과 사랑으로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이런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4장이 성부 하나님을 중심으로 천상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였다면, 5장은 성자 예수님이 중심이 된 내용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심판을 계획하셨다면, ‘어린 양 사자’ 예수님은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그는 심판을 시행하는 합당한 자격을 가지신 분으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점에서 심판자로서 합당한지,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누가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1-6) : 요한이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가 있는데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가 있다는 것은 성경 계시의 최고 권위가 그 분께 있으며 그것을 집행할 능력을 보장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두루마리에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심판 계획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사이고 심판사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구원과 심판과 회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한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었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이 될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찾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현실 앞에 크게 울었습니다. 봉인을 뗄 자가 없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 계획을 실행할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해서 낱낱이 심판하고 악을 제거하지 않으면 구원은 궁극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같은 악한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최후 심판이 집행되지 않는다면 현재 사탄과 그 하수인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최후 심판이 없다면 희생하면서 선을 행할 토대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심판자를 찾을 수 없었을 때 사도 요한은 큰 소리를 내며 울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순간적으로 역사가 교회를 위해 진행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 어떠한 보호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어떠한 심판도 성도들의 승리를 보장해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도 미래의 모든 기업도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의 눈물은 이 책을 열 사람을 보내주시도록 하는 눈물의 기도였습니다. 그러자 장로 중의 한 사람이 그에게 울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자는 힘과 위엄과 용기와 지적인 탁월성에 있어서 정글의 왕입니다. 주님은 사자처럼 하나님의 대적들을 이기셨습니다.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대적도 이길 수 있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즉 두루마리를 작성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고 집행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그가 들은 말은 동물의 왕 사자인데, 정작 본 것은 연약한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것도 죽음을 당한 어린 양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역설적인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습니다(요 1:29). 그는 십자가에서 희생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죽임을 당한 흔적을 가진 어린양의 이미지는 출애굽기와 요한복음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출 12:3-14, 요 1:29; 19:34). 어린양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대적자들을 이기시고 성부와 함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양 손에 못 박힌 손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를 보자마자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분이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사랑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구원의 감격을 누립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기 목숨까지 주면서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가 예수님처럼 신실하게 나를 사랑하십니까?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이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고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집을 잃고 나그네로 살면서 또 직장을 잃는 경제적인 손해를 감당하면서도 믿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까지 나를 위해 내 놓으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그들도 목숨을 바쳐서 주님께 충성을 다 했던 것입니다. 성자는 죄인들에 대한 용서와 최고의 희생으로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S2 00:37:00-00:41:11).
그러면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신 주님, 어린 양과 사자의 이미지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린 양을 통하여, 어린 양의 길을 통하여 사자가 되었습니다. 사자가 되는 길은 어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이 왜 그렇게 강력할까요? 권력, 무력, 금력보다 희생이 왜 더 강할까요? 권력과 무력으로 이기면 반드시 반발과 반항이 뒤따릅니다.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말씀은 진실입니다. 돈으로 이기는 자는 돈으로 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힘으로 제압하지 않고 사랑으로 섬기시고 자기를 주심으로 원수들이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사랑과 섬김과 희생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그런데 어린 양에게는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었습니다. 일곱 뿔은 완전한 권세를 상징하고 일곱 눈은 완전한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는 말씀은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을 충만히 덧입으시고 지혜와 그 권세로 이기셨습니다. 성령님은 온 세상의 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무조건 희생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권세와 지혜를 덧입고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해야 합니다. 검보다 펜이 더 강하다는 속담처럼 검보다 지혜가 더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완벽한 권능과 지혜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어린양 사자’(Lamb Lion)의 계시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계시록에 나타난 승리의 비결입니다. 주님은 희생을 통하여 승리하셨습니다. 져 주심으로 이기셨습니다. 세상을 힘으로 제압하는 폭력의 방식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으로 섬기며 자기 생명을 주는 방식으로 무릎 꿇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방식입니다. 세상은 사자로 승리하는 길을 제시하지만 교회는 어린양으로 승리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전자는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맙니다. 검은 강한 것 같으나 약합니다. 그러나 사랑과 희생은 실패하는 것 같으나 승리하고 약한 것 같으나 강합니다. 당시 세계에서는 로마가 사자요, 교회는 어린양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로마는 멸망했지만 교회는 더욱 번성하고 있습니다. 지금 모슬렘이 칼과 코란을 앞세워 싸우고 있지만 그 속성이 폭력적이기 때문에 결국 패하고 말 것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사실상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사자이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투를 군사적이나 정치적인 힘으로가 아니라, 인내와 사랑, 심지어 죽기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 주신 역설의 방식을 적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패배와 저주의 상징이지만 십자가를 승리의 발판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역설을 우리의 생애 속에서 펼쳐 보이며 살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한 승리, 희생을 통한 생명의 창조를 이루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거기에 열매가 있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미션 영화에서 악랄한 노예상인으로 과라니 족을 괴롭혔던 멘도사가 회개하고 신부가 되어 가브리엘 신부의 좋은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토 경계 합의로 스페인의 관할 지역에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편입되고 선교회는 해체 위기를 맞습니다. 이에 불응하는 과정에서 무력과 사랑의 방법이 대치하게 됩니다. 메도사 로드리고는 용병이었기 때문에 불의에 무력으로 저항하다가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고, 가브리엘 신부는 “나는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살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도들과 함께 죽습니다. 결국 신부들은 다 순교를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추기경은 자신은 살았으나 죽은 자요, 순교자들은 죽었으나 그들의 정신은 살아 있다고 고백합니다. (S3 01:25:14-01:26:08, S4 01:33:52-01:35:17, S5 01:51:30-01:52:44).
사랑은 사람을 치유시킵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도, 사랑을 받는 사람도 … 변화란 사랑의 행동을 실천하고 타인을 위해서 내가 먼저 노력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면 변화와 성장의 출발점은 곧 하나님인 셈입니다. 미션 영화에서도 학살이 끝난 후 아이들은 칼과 바이올린이 놓여 있는데 바이올린을 선택합니다. 주님의 사랑, 희생의 가치가 그들의 마음에 복수보다는 평화, 사랑을 택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데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경배 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7-9) : 7절을 보십시오.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동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성부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은 것이 아니라 취하셨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도 그 길을 자발적으로 택하셨습니다. 마지못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 길이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아셨기에 생명을 던지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두루마리를 취하시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지고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금대접에 담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기도 합주회를 열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기도를 그에게 드린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다양한 기도를 드리는데 바로 그 기도들이 향으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참 성도의 기도는 멜로디이고, 성도들의 합심 기도는 화음입니다. 기도는 옛 용을 붙잡아 맨 쇠고랑을 붙드는 것이고, 하나님의 전능의 손길을 붙잡는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향냄새를 맡음 같이 기뻐 흠향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일반적인 기도가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이 기도하는 우리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아뢰고 응답을 받음으로 기쁘고, 하나님은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해 주심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드림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킬 권세와 지혜를 덧입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놀라운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여 형편대로 살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면 그들이 부른 새 노래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예수님은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온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값진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새로운 긍휼과 은총에 대해서 새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노래는 ‘구속의 노래’(redemption song)이면서 ‘기쁨의 노래’(delight song)이고 동시에 ‘합당한 노래’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드리는 것이 합당한 이유는 그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구속의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이렇게 자신의 피로 사신 것은 그들을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나님께 바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생토록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 것들을 잃는 아픔이 있지만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며 살게 될 영원한 삶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희생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희생 자체도 특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희생과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가족애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래서 형제님, 자매님하고 부릅니다. 기독교는 가장 견고한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커도 커 보이지가 않습니다. 가족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 노릇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복음을 전하고 양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지만 또 왕 노릇을 합니다. 여기서 왕 노릇한다는 시제가 미래이지만 히브리어의 미완료시제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계속 반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20:6절에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가 천년 왕국이라는 견해를 따르면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재림 이후에도 영원한 미래 천국에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무력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으로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섬김의 리더십에 대해서 말씀하심으로 왕 노릇하는 원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심으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임원과 사장이 되기 위해서 희생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그릇이 큰 사람은 큰 희생을 하고 그릇이 작으면 작은 만큼 하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자기 재산 300억을 사회에 기부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한 사람으로서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자세로 주님을 섬기고 주님과 동역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권한이 크고 책임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세로 섬기는 공동체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공포를 백성들에게 심어서 다스리고자 하는 나라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그 나라에 참여하는 수많은 천사들은 어린 양 예수님을 어떻게 찬양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또한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가운데 모든 피조물은 어떻게 찬양합니까?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천사들이나 모든 피조물이 같은 내용으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네 생물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 합당한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겠습니다. 새 노래는 힘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희생을 통한 승리를 노래합니다. 불평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찬양을 통한 승리가 주제입니다. 5장에 나타는 구속의 노래는 주님이 합당하다는 경배송이고,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복음송이며,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신 선교송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와 제사장을 말하는 헌신송이고,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라는 통치송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온 마음으로 찬양을 합시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찬양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세상을 찬양을 하면서 살 때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뜨거운 마음으로, 큰 소리로 찬양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왕 되심을 찬양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체험하면서 살게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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