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09년 계4강(3:1-22) 차든지 뜨겁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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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요한계시록 제 4 강
말씀 요한계시록 3:1 - 22
요절 요한계시록 3:15
차든지 뜨겁든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오늘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사데 교회와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주신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을 받았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편지하신다면 어떤 편지를 보내실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첫째,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사데 교회 : 1절을 보십시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분으로 소개하셨습니다. 일곱 영은 성령님을 상징하는데 그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과 통찰력을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부여하고 살리시는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를 주관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사데 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말씀 역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데 교회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사데 교회는 잘 알려져 있고 사람들이 바라볼 만한 교회라는 평판이 자자했습니다. 사데 교회는 화려한 과거가 있었고 외적인 모습은 잘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맛에 따라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겉은 번지르르했습니다. 그러나 행위만 있고 진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없으면서 열심은 있었습니다. 그들이 죽어가고 있었다는 말은 그들의 옷이 더럽혀져 있다는 말로 나타나 있습니다(4).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속화되어 있고 몇 사람만이 흰 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사회의 타락한 풍조에 휩쓸려 지냈습니다. 부도덕했습니다. 그들은 죄로 인해 무감각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주님은 먼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죄의 잠에서, 세상을 사랑하는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 남아 있는 바 죽게 된 것은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어 가는 것입니다. 아직 까지 살아 있는 그것을 강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꺼져가는 나무에서 아직 타고 있는 불을 일으켜 다시 요원의 불길을 일으키는 것처럼 마음에 성령의 불을 일으키라고 합니다. 주님은 아직 살아 있는 것, 남아 있는 그것에 소망을 두고 계십니다. 소감을 쓰고 훈련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을 불 일 듯이 해야 합니다. 남아 있는 영적 소원, 남아 있는 양심을 일깨워야 합니다. 주님은 없는 데서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잘 하라고 하십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행위를 온전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 보기에 어떠한가에 관심을 갖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그 수준이 높아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내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해야 합니다. 생각한다는 말은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기억은 유익합니다. 특히 구원의 기억이 그러합니다. 사명을 받았을 때 그 기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때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직분을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 소감을 다시 써 보고 과거의 사진도 보고, 과거에 받은 은혜를 기억함으로 오늘과 내일에 대한 자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감사한 것은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어서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주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아버지 앞과 그 천사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십니다.
둘째, 신실한 빌라델비아 교회 :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예수님은 자신을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표현했습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는 천국 문을 열고 닫을 뿐만 아니라 왕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구원의 문은 감히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열린 문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선교의 기회를 가리켰습니다(행14:27, 고후 2:12).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원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률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는 선교의 기회이고 추수할 기회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축출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정죄 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위로였습니다.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닫힌 문은 배우지 않습니다.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대합니다.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할 뿐 아니라 우리 모임이 열린 모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모임으로 자라야겠습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다른 모임이나 단체에게서도 배워야 합니다. 열린 자세로 배우는 사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약속도 회당에서 축출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정죄를 받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줍니다. 유대인들은 84년 얌네아 회의를 통해서 크리스천들의 회당 출입을 금지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교회를 위로하시고 칭찬하십니다. 8b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말씀을 지키며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인들의 숫자가 적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당도 크지 않았습니다. 사회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숫자가 적었고 복음 전도와 모임에 한 두 사람만 빠져도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양보다는 질을 중히 여기시고, 수보다는 순종을 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를 귀히 여기십니다. 그들은 재능에 있어서도 적은 힘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서로 가르치려고만 하며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배우려고 하지 않았던 고린도 교회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배웠던 말씀을 신실하게 간직했습니다. 그들은 학식이 적을지라도 은혜를 더 중히 여기고, 재능보다는 믿음을 더 중히 여기고, 웅변보다는 사랑을 더 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신실함을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께 특별히 소중하게 여겨지는 교회였습니다. 우리도 작은 능력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숫자로나 건물의 크기로나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내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십니다.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가 올 것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내세의 문제에 관심이 없고 오직 현세에만 몰두하는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유대인들은 크리스챤을 박해하여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잡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해 준다는 것은 기둥처럼 필요한 사람, 중요한 사람, 든든한 사람이 되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현재 그 자리, 그 위치, 그 현장에서 기둥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받치는 기둥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 14절을 보십시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아멘은 그렇게 되어지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항상 예하고 순종하셨습니다. 또 그는 충성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시되 죽기까지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 또한 그는 참된 증인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증거에 대해서 참된 증인이 되십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창조의 주관자이시오 창조의 근본이 되십니다. 그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있게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는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이런 분으로 소개한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이 말씀은 “아무도 너를 모른다. 사람들은 실제 이상으로 너를 훌륭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너 자신도 너를 모르는구나. 너는 너의 행위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너의 속 마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한 때는 열성적이고 건강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면서 라오디게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분발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그 교회가 건전한 상태에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교회가 타락하였고, 열성을 잃으면서 미지근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태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도 식어졌습니다. 전도와 섬김에 대해서도 뜨거웠으나 지금은 미지근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도 식어버렸습니다. 성경 공부에 대한 열망도 식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에 시간을 드리고 헌신하는 것을 보면 나도 한 때는 그랬지 하면서 자조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시간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시간을 충분히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티 내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 했습니다. 미지근하다는 말은 사실은 병들었다는 뜻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바로 무관심이요 안일이요 적당주의였습니다. 예수님은 적당히 하는 그들을 토하여 내 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하여 이렇게 병들게 되었을까요? 17절을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주님은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들을 부정해버리십니다. 그들은 부유하고 자랑스러운 도시였습니다. 은행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요한이 편지를 쓰기 약 35년 전에 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로마는 이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서 재정적 지원을 제의했으나, 그들은 이것을 거절하고 시의 재정만으로 도시를 재건했습니다. 요한이 편지를 보낸 후 조금 지난 주후 100년에도 다시 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다시 한 번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도시를 재건했습니다. 이 도시에는 안약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브리기아 분말”과 검은 의복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윤이 나는 검은 양털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신뢰하는 이런 것들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너무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문제가 없음으로 안일해지고 기도에 태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돈 버는 일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하였습니다. 전도하는 일과 다른 형제 자매를 섬기는 일에 신경을 꺼버렸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이기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축적한 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으로 즐기기 때문에 더 이상 주님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어떤 방향을 주십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불로 연단한 금은 믿음을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금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순수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고난이 따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자 하면 희생이 따릅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자 하면 힘이 듭니다. 이러한 영적인 투쟁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십니다.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흰옷은 순결을 말합니다. 흰옷은 은혜로만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는 천국에서 흰 옷을 입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순결한 옷을 입습니다. 안약은 지혜입니다.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보라고 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눈을 통해서 이 세상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의 안경을 끼고 이 세상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고 바로 보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십니다. 징계는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소망 가운데, 영적인 성장을 하도록 훈련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에 대한 가장 합당한 처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불신자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사용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기초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제게 너무나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불신자에게 준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대해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마음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십니다.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문을 두드리십니다. 예수님은 권세도 있고 힘도 있지만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부드럽게 말씀하시면서 두드리십니다. 저는 집에 갔을 때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가끔가다 발로 문을 차면서 빨리 문을 열도록 재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로 문을 차지 않으십니다. 조용히 두드리면서 기다리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문을 열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와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길은 한마디로 예수님과 관계성을 맺는 것이요 그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사역 속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 우리의 말씀 공부 속에, 우리의 가정 속으로, 재정 문제 속으로, 우리의 사업 속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깊이 교제할 때 우리는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힘써 나눔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열심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적인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음란과 탐욕, 거짓과 안일로 그 옷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더럽혀졌다 해도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전투는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전하는 가운데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전쟁에서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일대일 말씀을 전파할 때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한국 UBF가 가을 학기에 5000팀 일대일을 통해서 2500명의 제자들을 세우고자 하는 기도 제목을 잡았습니다. 우리가 이번 가을 학기에 일대일을 세 팀 이상 감당함으로 한 명의 제자를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2010년까지 배가의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또한 내가 소망하는 나와 현재적인 나 사이에 생기는 갭으로 인해서 좌절이 있지만 말씀을 붙잡고 낙심하는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여 영적인 전투에서 이기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통치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계시록 3:1 - 22
요절 요한계시록 3:15
차든지 뜨겁든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오늘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사데 교회와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주신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을 받았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편지하신다면 어떤 편지를 보내실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첫째,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사데 교회 : 1절을 보십시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분으로 소개하셨습니다. 일곱 영은 성령님을 상징하는데 그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과 통찰력을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부여하고 살리시는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를 주관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사데 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말씀 역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데 교회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사데 교회는 잘 알려져 있고 사람들이 바라볼 만한 교회라는 평판이 자자했습니다. 사데 교회는 화려한 과거가 있었고 외적인 모습은 잘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맛에 따라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겉은 번지르르했습니다. 그러나 행위만 있고 진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없으면서 열심은 있었습니다. 그들이 죽어가고 있었다는 말은 그들의 옷이 더럽혀져 있다는 말로 나타나 있습니다(4).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속화되어 있고 몇 사람만이 흰 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사회의 타락한 풍조에 휩쓸려 지냈습니다. 부도덕했습니다. 그들은 죄로 인해 무감각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주님은 먼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죄의 잠에서, 세상을 사랑하는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 남아 있는 바 죽게 된 것은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어 가는 것입니다. 아직 까지 살아 있는 그것을 강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꺼져가는 나무에서 아직 타고 있는 불을 일으켜 다시 요원의 불길을 일으키는 것처럼 마음에 성령의 불을 일으키라고 합니다. 주님은 아직 살아 있는 것, 남아 있는 그것에 소망을 두고 계십니다. 소감을 쓰고 훈련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을 불 일 듯이 해야 합니다. 남아 있는 영적 소원, 남아 있는 양심을 일깨워야 합니다. 주님은 없는 데서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잘 하라고 하십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행위를 온전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 보기에 어떠한가에 관심을 갖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그 수준이 높아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내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해야 합니다. 생각한다는 말은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기억은 유익합니다. 특히 구원의 기억이 그러합니다. 사명을 받았을 때 그 기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때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직분을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 소감을 다시 써 보고 과거의 사진도 보고, 과거에 받은 은혜를 기억함으로 오늘과 내일에 대한 자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감사한 것은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어서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주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아버지 앞과 그 천사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십니다.
둘째, 신실한 빌라델비아 교회 :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예수님은 자신을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표현했습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는 천국 문을 열고 닫을 뿐만 아니라 왕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구원의 문은 감히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열린 문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선교의 기회를 가리켰습니다(행14:27, 고후 2:12).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원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률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는 선교의 기회이고 추수할 기회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축출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정죄 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위로였습니다.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닫힌 문은 배우지 않습니다.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대합니다.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할 뿐 아니라 우리 모임이 열린 모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모임으로 자라야겠습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다른 모임이나 단체에게서도 배워야 합니다. 열린 자세로 배우는 사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약속도 회당에서 축출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정죄를 받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줍니다. 유대인들은 84년 얌네아 회의를 통해서 크리스천들의 회당 출입을 금지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교회를 위로하시고 칭찬하십니다. 8b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말씀을 지키며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인들의 숫자가 적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당도 크지 않았습니다. 사회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숫자가 적었고 복음 전도와 모임에 한 두 사람만 빠져도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양보다는 질을 중히 여기시고, 수보다는 순종을 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를 귀히 여기십니다. 그들은 재능에 있어서도 적은 힘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서로 가르치려고만 하며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배우려고 하지 않았던 고린도 교회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배웠던 말씀을 신실하게 간직했습니다. 그들은 학식이 적을지라도 은혜를 더 중히 여기고, 재능보다는 믿음을 더 중히 여기고, 웅변보다는 사랑을 더 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신실함을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께 특별히 소중하게 여겨지는 교회였습니다. 우리도 작은 능력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숫자로나 건물의 크기로나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내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십니다.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가 올 것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내세의 문제에 관심이 없고 오직 현세에만 몰두하는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유대인들은 크리스챤을 박해하여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잡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해 준다는 것은 기둥처럼 필요한 사람, 중요한 사람, 든든한 사람이 되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현재 그 자리, 그 위치, 그 현장에서 기둥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받치는 기둥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 14절을 보십시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아멘은 그렇게 되어지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항상 예하고 순종하셨습니다. 또 그는 충성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시되 죽기까지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 또한 그는 참된 증인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증거에 대해서 참된 증인이 되십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창조의 주관자이시오 창조의 근본이 되십니다. 그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있게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는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이런 분으로 소개한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이 말씀은 “아무도 너를 모른다. 사람들은 실제 이상으로 너를 훌륭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너 자신도 너를 모르는구나. 너는 너의 행위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너의 속 마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한 때는 열성적이고 건강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면서 라오디게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분발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그 교회가 건전한 상태에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교회가 타락하였고, 열성을 잃으면서 미지근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태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도 식어졌습니다. 전도와 섬김에 대해서도 뜨거웠으나 지금은 미지근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도 식어버렸습니다. 성경 공부에 대한 열망도 식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에 시간을 드리고 헌신하는 것을 보면 나도 한 때는 그랬지 하면서 자조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시간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시간을 충분히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티 내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 했습니다. 미지근하다는 말은 사실은 병들었다는 뜻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바로 무관심이요 안일이요 적당주의였습니다. 예수님은 적당히 하는 그들을 토하여 내 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하여 이렇게 병들게 되었을까요? 17절을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주님은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들을 부정해버리십니다. 그들은 부유하고 자랑스러운 도시였습니다. 은행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요한이 편지를 쓰기 약 35년 전에 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로마는 이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서 재정적 지원을 제의했으나, 그들은 이것을 거절하고 시의 재정만으로 도시를 재건했습니다. 요한이 편지를 보낸 후 조금 지난 주후 100년에도 다시 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다시 한 번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도시를 재건했습니다. 이 도시에는 안약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브리기아 분말”과 검은 의복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윤이 나는 검은 양털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신뢰하는 이런 것들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너무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문제가 없음으로 안일해지고 기도에 태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돈 버는 일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하였습니다. 전도하는 일과 다른 형제 자매를 섬기는 일에 신경을 꺼버렸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이기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축적한 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으로 즐기기 때문에 더 이상 주님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어떤 방향을 주십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불로 연단한 금은 믿음을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금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순수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고난이 따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자 하면 희생이 따릅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자 하면 힘이 듭니다. 이러한 영적인 투쟁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십니다.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흰옷은 순결을 말합니다. 흰옷은 은혜로만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는 천국에서 흰 옷을 입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순결한 옷을 입습니다. 안약은 지혜입니다.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보라고 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눈을 통해서 이 세상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의 안경을 끼고 이 세상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고 바로 보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십니다. 징계는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소망 가운데, 영적인 성장을 하도록 훈련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에 대한 가장 합당한 처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불신자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사용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기초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제게 너무나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불신자에게 준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대해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마음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십니다.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문을 두드리십니다. 예수님은 권세도 있고 힘도 있지만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부드럽게 말씀하시면서 두드리십니다. 저는 집에 갔을 때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가끔가다 발로 문을 차면서 빨리 문을 열도록 재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로 문을 차지 않으십니다. 조용히 두드리면서 기다리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문을 열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와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길은 한마디로 예수님과 관계성을 맺는 것이요 그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사역 속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 우리의 말씀 공부 속에, 우리의 가정 속으로, 재정 문제 속으로, 우리의 사업 속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깊이 교제할 때 우리는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힘써 나눔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열심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적인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음란과 탐욕, 거짓과 안일로 그 옷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더럽혀졌다 해도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전투는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전하는 가운데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전쟁에서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일대일 말씀을 전파할 때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한국 UBF가 가을 학기에 5000팀 일대일을 통해서 2500명의 제자들을 세우고자 하는 기도 제목을 잡았습니다. 우리가 이번 가을 학기에 일대일을 세 팀 이상 감당함으로 한 명의 제자를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2010년까지 배가의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또한 내가 소망하는 나와 현재적인 나 사이에 생기는 갭으로 인해서 좌절이 있지만 말씀을 붙잡고 낙심하는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여 영적인 전투에서 이기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통치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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