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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 19왕상 10강(20:1-22:53)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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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9회 작성일 19-02-10 14:50

본문

2019년 열왕기상 제 10 강
말씀 | 열왕기상 20:1-22:53
요절 | 열왕기상 20:28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오늘 말씀은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릅니다. 신자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몰라서 나름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알 숭배자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아합 왕에게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또 아합이 의로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자 하나님이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또 그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자 심판을 미루십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죄인들을 대하는 마음이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심을 알고 그를 사랑하며 경외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산의 신, 평지의 신(20장). 아람의 벤하닷 왕이 군대와 말과 병거를 다 동원하여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공격을 하였습니다. 이는 BC 856년에 있었던 전쟁입니다. 벤하닷은 아합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말했습니다.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이는 힘으로 약자를 누르고 빼앗는 강도짓입니다. 벤하닷의 탐욕이었습니다. 힘이 없는 이스라엘 왕은 대답합니다.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힘이 없으니 비굴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벤하닷은 내일 이맘때에 자기 사람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왕의 집과 신하들의 집을 수색하여 원하는 대로 가져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모든 장로와 백성들은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말라”고 조언하였습니다. 사신을 통해서 이스라엘 왕의 결정을 들은 벤하닷은 화가 나서 사마리아의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은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갑옷을 입는 자는 이제 전쟁을 시작하는 군인이고 갑옷을 벗는 자는 전쟁을 승리로 끝낸 사람입니다. 초년병과 잘 훈련된 군사를 비교하며 전쟁은 해봐야 결과를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더욱 화가 난 벤하닷은 ‘뭬야!’ 하며 즉시 진영을 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한 주먹도 안 되는 것이 큰 소리를 치자 자존심이 상한 벤하닷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하는 사람치고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합 왕은 큰소리를 쳤다가 몰살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때 한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은 자기 나름대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고관의 청년들을 계수하니 232명이었습니다. 그 외에 모인 군사가 칠천명이었습니다. 정오에 전쟁이 붙었는데 벤하닷은 왕 32명과 더불어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출전하였습니다. 각 지방의 고관의 청년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대가 적군을 쳐죽이매 아람 사람이 도망하고 벤하닷도 도망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크게 이겼습니다.

  아합 왕은 바알 우상숭배자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왕입니다. 이런 타락한 왕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아람과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편이 되셨습니다. 아무리 그 백성이 타락했어도 그들 편이 되어 싸우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아합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벤하닷의 탐욕에 대해서 심판하십니다. 약자에 대한 그의 비열함에 대해서 징계하십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벤하닷을 쓰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아합을 벌하고 빼앗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벤하닷이 자기 마음대로 할 일이 아닙니다. 로마서 14:4은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판단하십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자기 주인이 관여할 문제입니다. 종이 서 있게 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그를 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합이 선한 일을 해서 칭찬을 받든, 혹은 악한 짓을 해서 벌을 받든 그것은 그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합이 비록 악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나를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역사에 쓰시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으로 인해서 나의 죄를 눈감아주시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은 자녀와 아버지와 같은 관계이기에 사랑이 공의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관의 청년들을 앞세워 전쟁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고관의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고귀하게 자랐습니다. 그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들이었습니다. 고관의 자녀들은 많은 특권을 누리며 큰 어려움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을 전쟁에 앞세워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학생들과 청년들을 앞세워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끄십니다. 청년들은 순수하고 불의에 대해 저항하고 상상력이 풍부합니다. 기존의 방식대로 싸우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방식대로 싸워서 흉악한 자를 싸워 이깁니다. 하나님은 신선한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하는 청년들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세계역사는 이십대들에 의해서 변화와 성장을 거듭해 왔습니다. 복음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년 대학생들의 주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을 받으시고 이 나라의 영적 부흥과 세계 선교를 이끌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구하십니다. 우리가 나이가 많더라도 신선한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산다면 청년들과 호흡을 맞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청년의 정신을 덧입고 영적 전투에 임하여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합 왕에게 전쟁을 어떻게 치룰 것인가 조언했던 그 선지자가 승리한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2차전을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께서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 아람 왕의 신하들은 왕께 아뢰었습니다.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지라.” 아람 군대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산의 신이요 평지의 신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골짜기는 평지를 말합니다. 자신들이 산에서 싸워 졌지만 평지에서 싸우면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합 왕은 선지자의 말대로 철저히 준비하였습니다. 해가 바뀌니 벤하닷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아벡에 모았는데 그 땅에 아람 군대가 가득하였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군대는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와 같았습니다. 한마디로 전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컸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이방인인 아람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지역신이 아님을 보여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십니다. 그는 한계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캐나다에서도 하나님이시고 유럽에서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교회에서도 일하실 뿐만 아니라 나의 집과 직장에서도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모든 분야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 대한 모욕입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대치한 지 일곱째 날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 보병 십만명을 죽였습니다. 그 남은 자가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는데 그 성벽이 이만 칠천명 위에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기이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신 것입니다. 결국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 골방에 숨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두 번이나 악한 아합에게 승리를 주셨을까요? 갈멜 산 사건을 통해서 아합은 바알은 헛된 신이시오, 하나님이 참된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희미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을 확실히 알도록 하셨습니다. 아합이 악한 왕이지만 이런 그에게도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많은 이적과 말씀과 승리를 주심으로 기다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오래 참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긍휼과 자비와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제한하고 모독하는 말에 대해서 그 백성이건 이방인이건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싸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의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고 지켜야 합니다. 그때 화가 복으로 변하고 근심 걱정이 기쁨으로 변화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승리와 축복의 때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합은 벤하닷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를 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자기가 잘 나서 된 줄로 착각을 했습니다. 벤하닷의 신하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러 말하였습니다.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내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은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느냐 그는 내 형제이니라.” 그는 형제와 원수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벤하닷은 아합 왕의 병거에 올라 아양을 떨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보내리이다 또 내 아버지께서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 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이 조약을 맺고 벤하닷을 놓아주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합은 벤하닷을 살려줌으로서 자신이 인자한 왕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벤하닷이 주인님, 주인님, 형님, 형님하니까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는 승리에 도취되어 전쟁의 승리를 자기의 영광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셨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합이 한 일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가 순종한 것이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전쟁에서 그가 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은 당연히 하나님께 바쳐져야 합니다. 그런데 아합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전쟁의 승리를 통해서 자신의 너그러움 즉 자신의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챈 것입니다. 이것은 월권행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의 종이요 청지기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이 잘 될 때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람과의 전쟁에서 두 번의 승리를 주신 것은 벤하닷의 교만과 아람의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으려면 끝까지 벤하닷을 처형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거룩한 전쟁을 인간적인 전쟁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그의 친구에게 알렸습니다. “너는 나를 치라.” 그런데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정 때문에 아무 이유없이 친구를 치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의간의 의리, 자기의 인정을 앞세웠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자 친구를 떠나 갈 때에 사자가 그를 만나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선지자는 죽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갖도록 일깨워주었습니다.

 그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매 그 사람이 그를 치되 상하도록 쳤습니다. 눈덩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쳤습니다. 이에 선지자가 가서 수건으로 자기의 눈을 가리어 변장하고 길 가에서 왕을 기다리다가 왕이 지나갈 때에 그가 소리 질렀습니다. “종이 전장 가운데에 나갔더니 한 사람이 돌이켜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그를 잃어 버리면 네 생명으로 그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하리라 하였거늘 종이 이리 저리 일을 볼 동안에 그가 없어졌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고 하자 그가 급히 자기의 눈을 가린 수건을 벗으니 이스라엘 왕이 그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 왕이 아람 왕 벤하닷을 놓아주는 것이 왜 죄가 됩니까?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는데 아합은 자신이 전쟁을 잘해서 이겼고 포로를 놓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문제로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벤하닷을 풀어줌으로 자신은 크고 관대한 왕이라는 자기 과시를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분수를 알지 못하고 교만을 떨다가 멸망하게 됩니다. 

  둘째, 우연히 쏜 화살(21,22장). 21장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악한 방법으로 탈취하는 내용입니다. 이 죄로 인해 아합과 이세벨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나봇이 왕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한 아합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나봇을 죽인 아합을 더욱 악하게 여기셨습니다. 또한 자신의 이름보다 나봇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21장 20,21절을 보십시오.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25절도 보십시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아합은 자기 영혼을 팔아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의 아내 이세벨의 충동을 못 이겨 악을 행한 것입니다. 탐욕에 자기를 팔아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순간적인 죄의 쾌락에 자기 영혼을 팔기도 합니다. 일시적인 감정에 자기를 팔아버리기도 합니다.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입니다. 아합 집안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은 그의 아내 이세벨입니다. 그녀는 남편 몰래 음모를 꾸며서 무죄한 나봇을 살해하였고, 바알 우상과 아세라 우상으로 이스라엘을 도배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멸망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22장은 아람 왕 벤하닷과 아합 왕의 3차 대전을 보여줍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 없이 삼년을 지냈습니다. 셋째 해에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사마리아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과 아합의 딸과 결혼을 시키고 사돈 관계를 맺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냐?”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은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보자고 했습니다. 선지자 사백 명은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거짓의 영이 그들의 속에 역사하여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17).” 이로 인해 왕의 미움을 사게 된 미가야는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변장을 하고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고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아합은 이 전쟁에서 죽고 사마리아에 장사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선지자의 예언대로 수치스럽고 비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한 아합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아합이 변장하여 아람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경외함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사 66:2). 신자의 삶에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 그가 행하시는 일들을 여러 번 체험하면서도 계속해서 죄에 빠져 들어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죄를 끊고 순종해야 합니다. 탐욕과 교만은 우리 영혼을 무디게 만듭니다. 반대로 순종은 우리 영혼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 영광을 드러내게 합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손해를 입더라도 죄를 끊고 의를 행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의 역사하심을 묵상함으로 알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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