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열왕기 왕상6강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4,549회 작성일 03-02-03 14:55

본문

2002년 열왕기상 제 6 강                                                                                   
말씀/열왕기상 19:1-21
요절/열왕기상 19:12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오늘 말씀은 영적인 침체, 낙심의 늪에 빠진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우시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침체에서 나올 수 있는 비결을 배우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학기를 시작하면서 새 힘을 덧입혀 주시고, 힘써야 할 한가지 방향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호렙산으로 간 엘리야 (1-7)

아합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여호와의 불을 내려서 제물을 태우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였습니다. 이세벨은 이 소식을 듣자 마자 “뭬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즉시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다고 위협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을 쳐서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기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갈멜 산에서 여호와의 불을 내리고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을 죽인 그가 왜 그렇게 두려워했을까요? 그는 갈멜산의 대결 후에 탈진한 상태였습니다. 사람은 몸과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몸이 힘들면 정신과 영혼도 쇠약해지기 쉽습니다. 육신이 피곤하면 만사가 귀찮아집니다. 육신의 질병으로 인해서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울해지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지금 엘리야는 이세벨의 말을, 하나님을 믿음으로 듣지 않았습니다. 그가 문제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니 두려워졌습니다. 우리가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면 한 사람이 실수할 때  ‘저 인간이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합니다. 실패를 보는 시각도 다 다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실패를 통해서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배우고 패배하는 사람들은 나는 안돼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 있고 문제 앞에 좌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나안 정탐꾼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생각한 반면 열 두령은 우리는 그들 앞에서 메뚜기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에게 깊은 좌절과 절망을 심었습니다. 엘리야가 믿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바알을 숭배하는 거대한 시대 분위기에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눈으로 볼 때 문제 앞에 두려워 떨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된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자신의 높은 기대치와 현실의 괴리감으로 인한 절망이었습니다. 그는 갈멜산에서의 승리로 다 된 줄 알았습니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불이 내리는 것을 보고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로다”라고 고백했고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런 역사를 보고 아합이 변하고 이세벨이 변화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살기 등등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달겨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내가 헛 일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도다(사49:4)라는 탄식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변화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 그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빨리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은 열조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하지 못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높은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좌절도 깊었습니다. 대개 늘 승리하던 사람, 늘 칭찬만 듣던 사람이 쉽게 좌절합니다. 항상 1등만하던 사람이 2등을 하고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높은 이상을 현실에 맞게 재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제까지는 말씀을 듣고 행동을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다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보다 먼저 행동을 앞세웠습니다. 자기 감정을 앞세우고, 자기 기질을 앞세웠습니다. 그 때 그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기 보다 자기 판단을 앞세워 도망을 쳤습니다. 그는 도망을 가면 안전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도망을 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피가 해결이 아닙니다. 자신의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과연 나의 행동이 타당한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도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로뎀 나무 즉 대싸리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였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위대한 종이 죽기를 구하였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잘 때에 천사를 보내어 지압과 안마와 마사지를 해주시면서 육신의 피로를 풀어 주셨습니다. 마사지와 안마는 혈액이나 림프의 순환을 촉진하고 신진 대사를 왕성하게 하여 조직의 영양을 높여 줍니다. 그리고 노폐물을 배설하도록 하고 저항력을 증강시켜 주고 신경을 자극하여 마비된 신경을 회복하게 하고 내장기능의 변조를 바로 잡는 효과가 있습니다. 천사의 안마와 마사지를 받은 엘리야의 몸은 피로가 가시고 정신이 맑아지고 일어나서 활동할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의 마사지만 해준 것이 아니라 천상의 숯불 구이 떡과 생수를 준비해 두시고 먹이셨습니다. 힘들 때 어떤 위로의 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저 맛있는 요리와 음식을 먹고 하루 종일 쉬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루 종일 자고 먹고 하면서 피로를 풀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로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한마디도 탓하지 않으시고 섬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웅적으로 싸울 때도 있지만 눈 앞에 있는 현실적인 문제만 보고 힘들어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때에 목자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산으로 들로 데리고 나가셔서 속에 있는 이야기를 들어 주시고 맛있는 음식으로 섬겨주시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그때 목자의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바다로 물고기 잡으러간 제자들을 만나셔서 도우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새벽 이슬을 맞으면서 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사 고기를 잡게 해 주시고 숯불에  생선과 떡을  얹어놓으시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시는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 앞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없이 연약한 자를 위로하고 섬겨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헤매다가 돌아올 때 목자님들이 등을 두드려 주시고 반겨주시는 사랑을 느끼면 다시 힘을 얻어 주님께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브엘세바에서 호렙까지는 350킬로미터입니다. 보통 사람이 걸으면 10-15일정도가 걸리는데 엘리야는 40일을 걸어서 호렙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가 호렙에 오는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요? 아마 피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내적인 갈등을 많이 하고 방황하면서 지그재그로 걸어간 것 같습니다. 마음에 여러 모양의 시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왜 호렙 산으로 갔을까요? 호렙 산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던 곳이요 모세가 십계명 두 돌판을 받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을 체결한 곳이기도 합니다. 엘리야는 호렙 산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새롭게 신앙 출발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떤 목자님은 힘들면 자기가 처음 구원을 받은 기도원에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교사님들은 힘들 때 시온 성에 와서 재충전을 받습니다. 우리는 힘들 때 성경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II. 세미한 음성을 들은 엘리야 (9-21)

엘리야는 호렙 산에 있는 깜깜한 굴 속에 들어가서 칩거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굴 속 만큼이나 어두웠습니다. 그는 거기 거하면서 힘든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였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질문과 같습니다. “왜 이세벨을 피하여 비겁하게 도망을 했느냐? 왜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하지 못하느냐?”는 책망의 음성이십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자기의 사명과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돌아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앞만 보고 달리다가 지칠 때에, 우리는 주님과 나 만의 시간을 갖는 가운데 이런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자기를 돌아보기 보다는 마음에 맺혀 있는 문제를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교를 하나님과 같은 질투로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 송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고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자기 백성을 송사하는 엘리야의 마음에는 백성들에 대한 미움과 피해의식이 있습니다. 백성들에 대한 분노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나만 남았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그는 고독하였습니다. 오바댜가 백명의 선지자들을 숨겨 놓고 있었는데 그는 자기 혼자라며 고독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칠천명을 남겨 두시고 계신데 자기 중심적이 되어서 쉽게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번 낙심에 빠지니까 그 휴유증에서 쉽게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역자를 얻어서 일하지 않고 혼자서 일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가 지쳐 버리자 아주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 대개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문제에 빠지게 되면 칩거를 하게 됩니다. 친구간의 왕래가 뜸해지고 말수가 적어지고 의기소침해집니다. 내가 열심히 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고 생각될 때 한 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혼자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동역자를 찾아서 일해야 하고 없으면 세워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반대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보고 팔짱을 끼고 있지 말고 함께 일해야 합니다. 나의 무관심과 태만이 열심히 일하는 동역자에게 외로움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영적 태만에 빠져 있거나 자기 일에만 매달릴 때 영적으로 투쟁하는 사람들의 힘이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선교지에 있는 선교사님들이 외로와하지 않도록 본국에서 열심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선교지를 돌아보고 문제와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생각에 갇혀 있는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그리고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했습니다.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했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했습니다.  강한 바람이나 지진, 불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고 3년 6개월동안 가뭄이 있게 하시고 또 바람이 불게 하사 비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현재 그런 역사 속에 계시지 아니했습니다. 사실 엘리야는 초자연적인 일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런 역사 속에 계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는 과거에 체험한 하나님, 신앙 초기에 체험한 하나님을 붙잡고자 하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강한 하나님, 불의 하나님, 지난 역사의 하나님이시지 현재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와 함께 하시며 새로운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시지만 그는 피해의식과 자기 연민과 불평과 원망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비우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했습니다. 우리도 7,80년대에 일어난 역사만 생각하고 현재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붙잡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만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엄청난 역사 속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현실 속에서도 함께 하십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성령의 불의 역사가 있었는가 하면 따스한 햇빛과 같은 역사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면성을 기대해야 합니다. 훈련과 사랑, 긴장과 여유, 거침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평상시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불 후에 어떤 소리가 있었습니까? 세미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엘리야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조용히 말씀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조용한 아침을 깨우고 일용할 양식을 먹을 때, 소감을 쓸 때, 조용히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을 통해서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카운슬링을 할 때, 일대일로 말씀을 공부할 때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그 임재를 조용하게 느끼게 하십니다. 세미한 소리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조용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슬은 조용히 내리지만 생명을 소생하게 합니다. 과일이 자라고 익게 합니다. 해가 떠오르는 것은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만물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모든 동물들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들레지 아니하시면서도 힘있게 일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은 방언을 하고 앉은 뱅이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이나 부흥회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줄 압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부흥회가 시들고 말씀 공부를 통해서 역사하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말씀 공부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과 함께 하는 말씀 역사입니다.

우리가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평소 때는 안 들리던 소리, 세미한 소리도 조용하게 하면 크게 들립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를 차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말일수록 조용히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비전, 계획, 소망, 사명은 조용한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려면 자기 소리를 죽여야 합니다. 내면에 시끄러운 소리들, 원망과 불평의 소리들을 죽여야 합니다. 자기 열심, 자기 의, 자기 계획, 야심, 자기 생각이 있으면 아무리 해도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립니다. 대신에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들립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자기 소리만 계속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새롭게 듣고자 하기 보다는 이미 들은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연구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엘리야가 체험한 하나님의 역사는 거칠고 사나운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부드러운 역사를 하고자 하십니다. 지속적인 것은 부드러운 역사입니다. 우리가 아카데미나 수양회나 선교 보고 대회나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진행시키지만 일대일을 꾸준히 하는 가운데서 마음을 적신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영혼의 변화와 감동의 역사는 이렇게 일어납니다. 불로 지지는 역사는 쉽게 지치게 합니다. 지진과 불의 역사는 당장에 크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보이는 역사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에 힘을 써야 합니다.

 엘리야는 세미한 소리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경외심을 느꼈지만 삶의 방향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랬을 때 계속해서 힘든 말이 나왔습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14).” 이 말씀을 볼 때 그는 똑 같은 말만 되풀이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문제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기 의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가라.” 이는 돌이켜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다메섹에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사엘을 통해서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세벨과 그 아들들을 예후를 통해서 징계하십니다. 엘리야는 정치 지도자들을 세우고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후계자를 세우는 것이요 제자 양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만 남았다는 엘리야에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절망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역사를 친히 이루어 나가십니다. 이로 인해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나 잘하면 되었습니다. 몇 사람을 세워서 제자양성 하는 것이 작게 보이지만 내실있는 역사입니다. 제자 양성은 눈에 크게 띄지 않지만 생명을 계승하는 역사입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영적 지도자 한 사람을 세운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큰 역사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왕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를 만났는데 그가 소 24마리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는 큰 농사꾼이었습니다.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엘리사의 위에 던졌습니다. 이는 제자로의 부르심이요 후계자를 삼겠다는 상징적인 뜻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 달려가서 청하기를 부모님에게 인사한 후에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두 마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습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남은 생애를 볼 때 하나님께서 주신 한 가지 일에 충성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는데 이를 졸여서 남는 한가지는 무엇입니까? 그 한가지를 효과적으로 완수한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을 마치게 될 줄 믿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낙담하고 침체된 엘리야를 영육간에 섬기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새 학기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제자 삼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4건 1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