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 왕상5강 바알에게 도전한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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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제5강
말씀: 열왕기상 17,18장
요절: 열왕기상 18:21
바알에게 도전한 엘리야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사역을 시작할 때는 아합 왕이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역사상 죄악이 극심하고 어두울 때였습니다. 아합은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겼습니다. 우상을 얼마나 섬겼던지 다른 왕들과 비교가 안될 만큼 악하였습니다. 요즈음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 다음에 부자 되세요. 돈 많이 버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을 보았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 우상에 끌리고 또 숭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만족이 없습니다. 아합 왕은 우상을 섬긴데다가 결혼까지 잘못하였습니다. 그는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이 절세 미인이었던지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가서 바알을 숭배하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믿음으로 도전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훈련하시며 쓰셨습니까?
제 1 장. 믿음 훈련을 받은 엘리야(17장)
1절을 보십시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길 때 하늘은 놋과 같이 만들고 땅은 철과 같이 되게 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신28:23-24).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우상을 숭배하니 비가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슬도 내리지 않는다고 예언했습니다. 헬몬산은 만년설이 있는데 찬 바람이 지형적으로 이스라엘의 더운 바람을 만나면 아침에는 안개가 꽉 끼어 이슬이 비처럼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침에 나무를 흔들면 이슬 방울이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는다는 말씀은 왕과 백성들이 바알을 숭배하는 것에 대한 징계입니다. 동시에 바알이 우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즉 이를 통해서 바알 신은 거짓이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고를 하신 후 엘리야를 숨기시고 3년 동안 훈련하셨습니다.
첫째, 까마귀로부터 얻어먹는 훈련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그 시냇물을 마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을 통해서 그를 먹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잘 잊어먹는 사람에게 까마귀 고기를 먹었느냐고 핀잔을 줍니다. 실제로 까마귀는 제 새끼도 못알아보는 건망증이 심한 새입니다(욥38:41). 또한 레위기 11장에 보면 까마귀는 부정한 것이라서 까마귀 고기는 먹지 못하며 그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집니다. 또 까마귀는 탐욕이 많은 동물이라서 시체까지도 뜯어먹는 새인데 어찌 자기가 다 먹어 치우지 않고 빵을 물어다 주고 고기 덩어리를 물어다 줄 수 있습니까? 이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두마리의 까마귀가 아니라 까마귀 떼를 이용하여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물어다 주도록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사용하신 이유는 엘리야를 찾는 아합과 그 군대에게서 그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또 엘리야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훈련하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질 문제를 책임져 주심을 믿지 못하면 믿음의 전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기본 훈련입니다. 동시에 겸손훈련이요 밑바닥 훈련입니다. 그의 자존심을 깨는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바알에게 도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3년 6개월동안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엘리야는 말씀대로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때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는 시내를 마셨습니다.
둘째는 사르밧 과부에게 얻어먹는 훈련이었습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말랐습니다(7). 엘리야가 물이 말라 어쩔꼬 싶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시돈은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그가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한 과부를 만났을 때 그 과부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녀에게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그 과부가 물을 가지러 갈 때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과부가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2).” 엘리야가 지금 이 여자에게 빵 한 조각을 부탁한 처사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야말로 몰인정한 태도입니다. 벼룩의 간을 빼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왕 신세를 지려면 부잣집에 가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인간적인 생각을 부인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도록 하십니다. 믿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 중에는 한달 내내 번 돈을 다 써도 생활비가 모라라는 판인데 어떻게 십일조를 드릴 수 있으랴 하나님도 내 형편을 아시겠지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만 여기서 보니 하나님은 과부의 형편을 아시면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며 살려면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과부가 엘리야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과부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과부가 하나님을 도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서 과부를 도운 것입니다. 먼저 믿음으로 심어야야만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바알을 섬기고 있을 때 그녀는 바알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섬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엘리야에 대한 하나님의 훈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셋째, 죽음에 도전하여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훈련이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이 일 후에 사르밧 과부의 외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여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 과부는 생활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마음이 푸근하여져서 이젠 아이에게 얼마든지 공부도 시킬 수 있겠구나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서 모든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엘리야를 찾아와 하소연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8)?” 여인은 이제까지 받은 은혜는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종에게 원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죽음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달았습니다. 엘리야가 그 집에 머물면서 그녀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지금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여 재앙을 당하고 있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지난 날 지은 죄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도와준 엘리야에게 와서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하며 원망을 하였습니다. 엘리야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인의 슬픔을 자기 슬픔으로 여기고 그 아들을 달라고 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으로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뉘었습니다(19). 엘리야는 잠잠히 여인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그는 이전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였는데 까마귀 훈련을 통하여 “나의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부르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세 번이나 몸을 펴서 아이 위에 엎드렸다는 말씀은 그 아이의 생명이 자기 생명과 같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사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게 하사 살리셨습니다.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 어미에게 주며 말하기를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나의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여인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같이 사는 여인에게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는 것은 어려운 일인 동시에 최고의 영예입니다. 한편 이 여인은 지난 날 벌써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진실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체험하니 다시 깨달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신앙 생활 할수록 점점 깨달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보호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나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크심과 하나님의 지혜가 오묘하심을 깨닫습니다. 한 여인에게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은 엘리야는 힘을 얻어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2 장. 바알에게 도전한 엘리야 (18장)
제 삼년에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그 당시 이스라엘의 기근이 얼마나 심했던지 아합 왕이 궁내 대신 오바댜와 함께 물 근원을 찾기 위해서 전국을 찾아 다녔습니다. 말과 노새와 짐승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합 왕은 물이 없어 세수를 거를 때마다 “엘리야, 이놈!” 하며 적개심을 불태웠습니다. 그는 엘리야에 대한 수배령을 내려 전국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를 통해서 선지자 일백 인을 가져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습니다.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 그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우상 숭배자인 아합 왕 밑에서 장관직을 수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종들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합의 측근인 궁내대신으로서 이런 행위가 발각될 때는 목숨까지 빼앗기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주님의 종들을 보호하고 섬겼습니다. 그는 위기의 때에 평신도로서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종들을 섬기는 영향력있는 평신도였습니다. 이런 숨겨진 보배들 때문에 칠흙같이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오바댜가 길을 가다가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두려워 말고 아합에게 엘리야가 여기 있다고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자 마자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합은 자기 죄는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종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고 분명하게 왕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도전하였습니다. 즉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았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는 왕과 백성들의 타협하는 신앙에 도전을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머뭇거렸을까요? 아합 왕은 많은 돈을 들여 곳곳에 바알 신전을 화려하게 건축하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학교를 세워 전원 장학금 지급, 전원 기숙사 수용, 졸업 후 전원 취직 보장 등 갖은 특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똑똑하고 출세하려는 자들은 구름떼처럼 이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시절, 광야의 하나님이시요 추억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면 바알과 아세라는 가나안 농경의 하나님이요, 새 시대의 하나님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습니다. 공영 텔레비전은 여호와 하나님을 부정적으로 보도하고 일방적으로 바알신만 선전하였습니다. 게다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원형인 아세라 여신 숭배의식에는 미팅, 번개팅, 쌍쌍 파티 등 쾌락을 즐기는 내용이 즐비했습니다. 그래서 축제 때마다 끼있는 사마리아 대학 남녀 학생들을 열광케 하였습니다. 이렇게 출세욕, 물질주의, 쾌락주의가 수반되는 바알의 문화가 사회와 캠퍼스 곳곳에 창일하였습니다 . 그리하여 이들에게 동조하거나 타협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말려들어 백성들은 양다리를 걸치고 엉거주춤한 상태였습니다. 또한 그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 일 것입니다. 그들 눈에 많은 사람들이 바알 우상을 따르는 것을 보면서 우상에게도 무엇이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손해보기 싫어서입니다. 지금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아합 왕은 바알을 적극적으로 숭배하고 있는데 이 대세를 거스리게 되면 어떤 손해나 핍박이나 죽음이 따르지 않을까 그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택하든지 바알을 택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도록 촉구했습니다. 엘리야는 수나 분위기, 대세에 눌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었습니다. 자신은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때 그는 머뭇머뭇거리는 양들에게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좇는 바알이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께 대한 산 믿음이 있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밀리지 아니하고 과감하게 도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엘리야의 도전 앞에 한 마디 대답이 없었습니다. 왜 대답을 하지 못할까요?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결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감을 쓸 때도 결단을 해야 할 말이 생기고 또 체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결단을 하지 않으면 신앙이 도태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좇던지 아니면 세상 명예를 좇던지,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던지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던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선교사로 나가는 것도 결단이 필요하고 본국에 남아서 세계 선교를 섬기는 것도 결단이 필요합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면서 자신이 한가지 결단을 했습니다.
22-24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니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인이로다.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기도하여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엘리야는 한마디로 화끈한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의 제안에 백성들은 모두가 다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850명이나 되니까 힘으로 밀어붙여도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기도했습니다. “번개와 벼락의 신 바알이여! 벼락의 불로 응락하소서!”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들은 중언 부언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는 답답했던지 단 주위를 뛰놀고 큰 소리를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기도의 투쟁은 처절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저녁 소제드릴 때까지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도 없고 돌아보는 자도 없었습니다. 이는 바알은 신이 아니고 사람이 만든 목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우리를 고난에서 구원할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사46:6,7). 우상을 의지하는 자들의 노력은 다 헛되고 무익합니다.
이제는 엘리야가 기도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먼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았습니다. 우리도 무너진 단을 수축해야 합니다. 신앙의 단을 수축하고 소감의 단, 일대일의 단, 제자 양성의 단, 헌신의 단을 수축해야 합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나무를 벌여 놓고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확실하게 하고자 함 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먹는 문제와 죽은 아이를 살리는 체험을 통해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실 줄을 알았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제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그의 기도가 끝나자 마자 화르르르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는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모든 백성이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잡되 하나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다 죽였습니다. 이런 우상 숭배의 죄악을 제거하고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갈멜산에 올라가서 얼굴을 두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구름이 올라오는지 바다쪽을 확인하라고 사환에게 말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다고 하자 일곱까지 그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아합에게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 신이심을 완벽하게 드러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탕자를 돌이키고자 하는 심정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간결했지만 역사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성정이 똑 같은 사람이지만 믿음의 기도를 드렸을 때 비도 내리고 불도 내리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기도의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기도에서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엘리야의 하나님을 위한 특심한 열심입니다. 그의 첫째 기도 제목은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대접을 받고 높임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아무 것도 아닌 바알이 높임을 받고 섬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인간-만물의 창조 질서가 다 무너지고 가치관이 전도되었습니다. 이를 보는 엘리야의 심령은 분노로 타 올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사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회복되고 영적 질서가 세워지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이를 위한 그의 열심은 특별하였습니다. 그의 심정은 하나님을 위한 순수한 열정으로 불탔습니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싸우는 위대한 복음의 투사였습니다.
둘째는 백성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입니다. 엘리야는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스라엘은 본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거룩한 제사장 나라였습니다. 이들의 특권과 축복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헛된 바알의 노예가 되어 파멸의 길,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해 분노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이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셋째는 엘리야의 도전정신입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이 바알화되어 바알의 세력이 창일한 시대에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려다가도 환경이 힘들고 시대가 힘들면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시대가 이러니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를 합니다. 그러나 힘든 시대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문제입니다. 엘리야는 시대의 영향을 받거나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힘든 시대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단신으로 거대한 바알의 세력에 도전하여 그 시대에 영향을 주고 그 시대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에게는 도전 정신과 파이팅 스피릿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도전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그런 자를 통해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싫어하고 안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싸우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은 영적 싸움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요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죄의 세력과의 싸움이요 내 속에 있는 죄악된 본성과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적 싸움을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셨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12).” 승리는 도전 정신을 가지고 싸우는 자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물질주의, 쾌락주의, 안일주의, 인본주의 등 죄악된 가치관과 싸우고 복음 신앙을 견고히 세워야겠습니다.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양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도전하여 그리스도의 군사들로 세워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도전하는 종들과 함께 하시고 승리를 체험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말씀: 열왕기상 17,18장
요절: 열왕기상 18:21
바알에게 도전한 엘리야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사역을 시작할 때는 아합 왕이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역사상 죄악이 극심하고 어두울 때였습니다. 아합은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겼습니다. 우상을 얼마나 섬겼던지 다른 왕들과 비교가 안될 만큼 악하였습니다. 요즈음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 다음에 부자 되세요. 돈 많이 버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을 보았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 우상에 끌리고 또 숭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만족이 없습니다. 아합 왕은 우상을 섬긴데다가 결혼까지 잘못하였습니다. 그는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이 절세 미인이었던지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가서 바알을 숭배하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믿음으로 도전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훈련하시며 쓰셨습니까?
제 1 장. 믿음 훈련을 받은 엘리야(17장)
1절을 보십시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길 때 하늘은 놋과 같이 만들고 땅은 철과 같이 되게 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신28:23-24).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우상을 숭배하니 비가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슬도 내리지 않는다고 예언했습니다. 헬몬산은 만년설이 있는데 찬 바람이 지형적으로 이스라엘의 더운 바람을 만나면 아침에는 안개가 꽉 끼어 이슬이 비처럼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침에 나무를 흔들면 이슬 방울이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는다는 말씀은 왕과 백성들이 바알을 숭배하는 것에 대한 징계입니다. 동시에 바알이 우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즉 이를 통해서 바알 신은 거짓이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고를 하신 후 엘리야를 숨기시고 3년 동안 훈련하셨습니다.
첫째, 까마귀로부터 얻어먹는 훈련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그 시냇물을 마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을 통해서 그를 먹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잘 잊어먹는 사람에게 까마귀 고기를 먹었느냐고 핀잔을 줍니다. 실제로 까마귀는 제 새끼도 못알아보는 건망증이 심한 새입니다(욥38:41). 또한 레위기 11장에 보면 까마귀는 부정한 것이라서 까마귀 고기는 먹지 못하며 그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집니다. 또 까마귀는 탐욕이 많은 동물이라서 시체까지도 뜯어먹는 새인데 어찌 자기가 다 먹어 치우지 않고 빵을 물어다 주고 고기 덩어리를 물어다 줄 수 있습니까? 이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두마리의 까마귀가 아니라 까마귀 떼를 이용하여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물어다 주도록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사용하신 이유는 엘리야를 찾는 아합과 그 군대에게서 그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또 엘리야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훈련하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질 문제를 책임져 주심을 믿지 못하면 믿음의 전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기본 훈련입니다. 동시에 겸손훈련이요 밑바닥 훈련입니다. 그의 자존심을 깨는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바알에게 도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3년 6개월동안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엘리야는 말씀대로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때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는 시내를 마셨습니다.
둘째는 사르밧 과부에게 얻어먹는 훈련이었습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말랐습니다(7). 엘리야가 물이 말라 어쩔꼬 싶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시돈은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그가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한 과부를 만났을 때 그 과부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녀에게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그 과부가 물을 가지러 갈 때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과부가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2).” 엘리야가 지금 이 여자에게 빵 한 조각을 부탁한 처사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야말로 몰인정한 태도입니다. 벼룩의 간을 빼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왕 신세를 지려면 부잣집에 가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인간적인 생각을 부인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도록 하십니다. 믿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 중에는 한달 내내 번 돈을 다 써도 생활비가 모라라는 판인데 어떻게 십일조를 드릴 수 있으랴 하나님도 내 형편을 아시겠지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만 여기서 보니 하나님은 과부의 형편을 아시면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며 살려면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과부가 엘리야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과부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과부가 하나님을 도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서 과부를 도운 것입니다. 먼저 믿음으로 심어야야만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바알을 섬기고 있을 때 그녀는 바알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섬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엘리야에 대한 하나님의 훈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셋째, 죽음에 도전하여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훈련이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이 일 후에 사르밧 과부의 외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여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 과부는 생활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마음이 푸근하여져서 이젠 아이에게 얼마든지 공부도 시킬 수 있겠구나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서 모든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엘리야를 찾아와 하소연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8)?” 여인은 이제까지 받은 은혜는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종에게 원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죽음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달았습니다. 엘리야가 그 집에 머물면서 그녀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지금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여 재앙을 당하고 있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지난 날 지은 죄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도와준 엘리야에게 와서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하며 원망을 하였습니다. 엘리야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인의 슬픔을 자기 슬픔으로 여기고 그 아들을 달라고 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으로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뉘었습니다(19). 엘리야는 잠잠히 여인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그는 이전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였는데 까마귀 훈련을 통하여 “나의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부르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세 번이나 몸을 펴서 아이 위에 엎드렸다는 말씀은 그 아이의 생명이 자기 생명과 같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사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게 하사 살리셨습니다.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 어미에게 주며 말하기를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나의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여인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같이 사는 여인에게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는 것은 어려운 일인 동시에 최고의 영예입니다. 한편 이 여인은 지난 날 벌써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진실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체험하니 다시 깨달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신앙 생활 할수록 점점 깨달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보호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나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크심과 하나님의 지혜가 오묘하심을 깨닫습니다. 한 여인에게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은 엘리야는 힘을 얻어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2 장. 바알에게 도전한 엘리야 (18장)
제 삼년에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그 당시 이스라엘의 기근이 얼마나 심했던지 아합 왕이 궁내 대신 오바댜와 함께 물 근원을 찾기 위해서 전국을 찾아 다녔습니다. 말과 노새와 짐승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합 왕은 물이 없어 세수를 거를 때마다 “엘리야, 이놈!” 하며 적개심을 불태웠습니다. 그는 엘리야에 대한 수배령을 내려 전국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를 통해서 선지자 일백 인을 가져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습니다.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 그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우상 숭배자인 아합 왕 밑에서 장관직을 수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종들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합의 측근인 궁내대신으로서 이런 행위가 발각될 때는 목숨까지 빼앗기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주님의 종들을 보호하고 섬겼습니다. 그는 위기의 때에 평신도로서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종들을 섬기는 영향력있는 평신도였습니다. 이런 숨겨진 보배들 때문에 칠흙같이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오바댜가 길을 가다가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두려워 말고 아합에게 엘리야가 여기 있다고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자 마자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합은 자기 죄는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종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고 분명하게 왕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도전하였습니다. 즉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았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는 왕과 백성들의 타협하는 신앙에 도전을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머뭇거렸을까요? 아합 왕은 많은 돈을 들여 곳곳에 바알 신전을 화려하게 건축하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학교를 세워 전원 장학금 지급, 전원 기숙사 수용, 졸업 후 전원 취직 보장 등 갖은 특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똑똑하고 출세하려는 자들은 구름떼처럼 이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시절, 광야의 하나님이시요 추억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면 바알과 아세라는 가나안 농경의 하나님이요, 새 시대의 하나님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습니다. 공영 텔레비전은 여호와 하나님을 부정적으로 보도하고 일방적으로 바알신만 선전하였습니다. 게다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원형인 아세라 여신 숭배의식에는 미팅, 번개팅, 쌍쌍 파티 등 쾌락을 즐기는 내용이 즐비했습니다. 그래서 축제 때마다 끼있는 사마리아 대학 남녀 학생들을 열광케 하였습니다. 이렇게 출세욕, 물질주의, 쾌락주의가 수반되는 바알의 문화가 사회와 캠퍼스 곳곳에 창일하였습니다 . 그리하여 이들에게 동조하거나 타협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말려들어 백성들은 양다리를 걸치고 엉거주춤한 상태였습니다. 또한 그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 일 것입니다. 그들 눈에 많은 사람들이 바알 우상을 따르는 것을 보면서 우상에게도 무엇이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손해보기 싫어서입니다. 지금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아합 왕은 바알을 적극적으로 숭배하고 있는데 이 대세를 거스리게 되면 어떤 손해나 핍박이나 죽음이 따르지 않을까 그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택하든지 바알을 택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도록 촉구했습니다. 엘리야는 수나 분위기, 대세에 눌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었습니다. 자신은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때 그는 머뭇머뭇거리는 양들에게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좇는 바알이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께 대한 산 믿음이 있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밀리지 아니하고 과감하게 도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엘리야의 도전 앞에 한 마디 대답이 없었습니다. 왜 대답을 하지 못할까요?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결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감을 쓸 때도 결단을 해야 할 말이 생기고 또 체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결단을 하지 않으면 신앙이 도태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좇던지 아니면 세상 명예를 좇던지,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던지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던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선교사로 나가는 것도 결단이 필요하고 본국에 남아서 세계 선교를 섬기는 것도 결단이 필요합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면서 자신이 한가지 결단을 했습니다.
22-24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니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인이로다.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기도하여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엘리야는 한마디로 화끈한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의 제안에 백성들은 모두가 다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850명이나 되니까 힘으로 밀어붙여도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기도했습니다. “번개와 벼락의 신 바알이여! 벼락의 불로 응락하소서!”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들은 중언 부언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는 답답했던지 단 주위를 뛰놀고 큰 소리를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기도의 투쟁은 처절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저녁 소제드릴 때까지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도 없고 돌아보는 자도 없었습니다. 이는 바알은 신이 아니고 사람이 만든 목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우리를 고난에서 구원할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사46:6,7). 우상을 의지하는 자들의 노력은 다 헛되고 무익합니다.
이제는 엘리야가 기도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먼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았습니다. 우리도 무너진 단을 수축해야 합니다. 신앙의 단을 수축하고 소감의 단, 일대일의 단, 제자 양성의 단, 헌신의 단을 수축해야 합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나무를 벌여 놓고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확실하게 하고자 함 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먹는 문제와 죽은 아이를 살리는 체험을 통해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실 줄을 알았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제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그의 기도가 끝나자 마자 화르르르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는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모든 백성이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잡되 하나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다 죽였습니다. 이런 우상 숭배의 죄악을 제거하고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갈멜산에 올라가서 얼굴을 두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구름이 올라오는지 바다쪽을 확인하라고 사환에게 말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다고 하자 일곱까지 그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아합에게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 신이심을 완벽하게 드러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탕자를 돌이키고자 하는 심정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간결했지만 역사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성정이 똑 같은 사람이지만 믿음의 기도를 드렸을 때 비도 내리고 불도 내리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기도의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기도에서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엘리야의 하나님을 위한 특심한 열심입니다. 그의 첫째 기도 제목은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대접을 받고 높임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아무 것도 아닌 바알이 높임을 받고 섬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인간-만물의 창조 질서가 다 무너지고 가치관이 전도되었습니다. 이를 보는 엘리야의 심령은 분노로 타 올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사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회복되고 영적 질서가 세워지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이를 위한 그의 열심은 특별하였습니다. 그의 심정은 하나님을 위한 순수한 열정으로 불탔습니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싸우는 위대한 복음의 투사였습니다.
둘째는 백성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입니다. 엘리야는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스라엘은 본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거룩한 제사장 나라였습니다. 이들의 특권과 축복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헛된 바알의 노예가 되어 파멸의 길,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해 분노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이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셋째는 엘리야의 도전정신입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이 바알화되어 바알의 세력이 창일한 시대에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려다가도 환경이 힘들고 시대가 힘들면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시대가 이러니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를 합니다. 그러나 힘든 시대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문제입니다. 엘리야는 시대의 영향을 받거나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힘든 시대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단신으로 거대한 바알의 세력에 도전하여 그 시대에 영향을 주고 그 시대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에게는 도전 정신과 파이팅 스피릿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도전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그런 자를 통해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싫어하고 안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싸우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은 영적 싸움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요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죄의 세력과의 싸움이요 내 속에 있는 죄악된 본성과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적 싸움을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셨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12).” 승리는 도전 정신을 가지고 싸우는 자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물질주의, 쾌락주의, 안일주의, 인본주의 등 죄악된 가치관과 싸우고 복음 신앙을 견고히 세워야겠습니다.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양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도전하여 그리스도의 군사들로 세워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도전하는 종들과 함께 하시고 승리를 체험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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