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07년 여호수아6강(7:1-26) 멸하지 아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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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여호수아 제 6 강
말씀 여호수아 7:1-26
요절 여호수아 7:12
멸하지 아니하면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전투에서 유일하게 패배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동안 승리만 계속했는데 왜 실패했을까요? 그들이 패배하게 된 원인은 죄에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간의 범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간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죄 문제를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 또 실패의 때, 하나님의 징계의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이 말씀은 오늘 보게 될 사건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칠 물건으로 인하여 범죄했는데 바로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6:18절에서 하나님은 이미 경고했습니다.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바친 물건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시고 진멸하고자 한 물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취함으로 자신이 도리어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편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일러 가로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 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하므로” 아이 성은 벧엘의 동남쪽 3km 지점에 있는 가나안의 요새지입니다. 이 지형은 여리고 보다 더 높은 지대에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을 하기 전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보고는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 만 올라가도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를 듣고 여호수아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도 마음이 높아져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온 땅에 퍼지게 되었습니다(6:27). 백성들의 마음도 높아져 있었습니다. 이 정도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여리고 성을 정복한 것이 자기들의 힘으로 된 것인 양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축복을 받을 때, 승리할 때, 일이 잘 풀릴 때 겸손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마음도 안일해 진 것 같습니다. 전쟁은 생사가 걸린 문제인데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치자고 합니다. 이는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8:25절을 볼 때 아이성 주민이 12000명이면 군사는 최소한 4천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방어에 전력하는 이들을 물리치려면 이스라엘은 12000명은 동원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적군보다 적은 병력을 출병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전쟁에 패하게 하심으로 그들 가운데 있던 죄를 드러내셨습니다. 죄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걸림돌이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육 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 성을 치는 것을 가볍게 생각했다가 큰 코를 다치게 되었습니다. 삼십육 명이 죽고 삼십육계를 치다가 돌아와서는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습니다. 물은 어느 모양으로나 변하게 됩니다. 그들은 완전히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실패로 인해 여호수아의 이름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도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망신을 당하였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번의 패배는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여리고 백성을 진멸시킨 그들이 삼십육 명이 죽은 것으로 인해 이렇게 까지 힘들어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는 숫자의 문제라기보다 심리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이것을 지켜보던 가나안 백성들은 우리도 힘을 합하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실패의 때에 여호수아는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에 사람 앞에 나가지 아니하고 전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왜 패하게 하셨을까 알고자 했습니다. 실패의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원인을 찾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우선 되어야 할 일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6-10)” 여호수아는 자신들이 패배한 것도 슬프지만 주의 크신 이름이 땅에 떨어진 것으로 인해서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는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누구나 실패를 경험합니다. 문제는 그 실패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승리하는 인생이 되기도 하고 패배적인 삶을 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이런 질문을 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가 실패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 종일 엎드려 있는 여호수아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10-12).” 그들이 패한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8절에서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기 때문입니다. 바친 것은 ‘헤렘’으로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여리고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었음을 지적해 줍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자신들의 죄 값으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이 도리어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패는 언약을 지키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자신만만한 것이나 기도를 얼마나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그것도 많은 사람의 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죄라도 죄는 누룩과 같이 퍼져나가게 됩니다. 사람이 물건을 도둑질을 했을 때 그 손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온 몸에 죄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면 아간은 왜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취했을까요? 그는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이제까지 고생만 했으니 이제는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가 챙긴 것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과 금덩어리였습니다. 그는 광야 생활을 하느라 옷 한 벌로 살았습니다. 40년 동안 단벌로 살다보니 지겨웠습니다. 그는 이제 가나안에 들어왔으니 유행을 좇아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풍요 속에 행복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도적질을 해서라도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탐심이란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취하고 싶은 것입니다. 탐심은 타인의 것을 내 것으로 취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적당히 먹으면 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탐식을 부리면 비만에 빠집니다. 그리고 온갖 합병증에 걸리게 됩니다. 옷에 탐심을 가지면 돈은 없어도 멋있는 옷을 보면 빚을 내서라도 삽니다. 안목의 정욕에 대한 탐심에 빠지게 되면 자신의 외모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육신적인 사람들의 외모를 쳐다보며 부러워합니다. 또 명예에 대한 탐심이 있습니다. 명예에 대한 탐심에 빠지면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서슴치 않고 합니다. 탐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제력과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양심과 이성이 마비되고 추하고 거짓된 삶을 살게 됩니다. 탐심을 다스리지 못할 때 그것의 종이 됩니다. 파멸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죄가 한 나라를 실패하게 만들었습니다. 작아 보이는 죄가 이렇게 큰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야고보서 1:15절은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면 어떻게 욕심을 이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는 탐심과 세상 욕심을 이길 수 있을까요? 갈 5: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만 욕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 삶을 주관하실 때 내 육체의 욕심, 세상 욕심을 따라 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12).”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시는데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더러운 사람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어 주시고 함께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시는데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전쟁에 패한 이유가 죄때문이라면 그 죄를 제거해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죄 가운데 있는 한 대적을 당할 수 없습니다. 원수 마귀는 이를 알기 때문에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여 죄에 빠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외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제하는 것입니다. 내적 성결의 투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제비뽑기를 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지파대로, 족속대로, 가족대로, 남자대로 가까이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천천히 수사를 진행하는 이유는 죄인이 회개하고 자백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서 오래 참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누구입니까? 므두셀라입니다. 그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므두셀라가 죽을 때 이 세상에 심판이 임하게 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가득하지만 심판하기를 꺼려하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으로 인해서 그는 가장 오래 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까지 오래 참으십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버티는 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제비에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습니다. 아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추적하시는데 가만히 있었습니다. 나만 죄를 지었으랴 생각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는 최소한 두 명이상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자신이 뽑혔습니다. 200만명 중에서 죄를 범한 사람은 유일하게 아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추적하십니다. 그 죄는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죄를 회개하도록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청했습니다. “내 아들아 청하노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여호수아는 범죄한 아간에게 이 죄인아 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 원수야 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내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그가 죄를 지었지만 그를 사랑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협박하거나, 고문하거나,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정당한 것으로 돌리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또한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을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물로 발전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벌을 신실하고 공정한 것으로 인정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켰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인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손상한 것을 회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선한 뜻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우리 힘이 미치는 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자복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아간은 자신이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아간과 그 물건들을 끌고 아골 골짜기로 갔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렇게 하여 그치게 되었습니다. 아간과 그에 속한 물건들을 불사름으로 이스라엘은 자신을 정결케 했습니다. 아간의 죄를 하나님은 엄중하게 다루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죄의 누룩을 제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검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아서 후손들에게 교훈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아골 골짜기에서 죄에 대한 징계를 감당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 죄에 대해서 징벌하여 생명을 죽인 후에야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음 외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괴롭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괴롭게 하신 후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 죄인들에 대한 진노를 예수님에게 대신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괴롬의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문으로 바뀌었습니다(호세아 2:15).
둘째, 그러므로 내 대신 괴롬을 당하신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아간처럼 심판대 앞에서 죄가 드러나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죄사함을 받는 길은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죄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입을 막고 가만히 있으면 몸으로 진노를 받아야 합니다. 시편 32:5절에서는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라고 하였습니다. 죄사함을 받은 후에 우리도 형제의 죄를 감당하며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죄를 보면 분노하는 의로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악을 지은 자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완악한 자들을 보면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대신에 우리는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이 죄사함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죄와 싸워야 합니다. 아간 한 사람의 범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지게 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는 열 명의 정탐꾼들이 200만명을 불신과 두려움에 빠뜨렸습니다. 죄는 누룩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에 대해서 경계하고 책임을 질 때 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이 죄를 용납해버리면 공동체의 수준이 떨어지게 됩니다. 서로가 “저 사람도 저렇게 하는데 나라고 못해” 이런 의식을 가지면 죄에 대해서 방치하게 됩니다. 죄는 나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죄로 인해서 크리스챤의 이름이 욕을 먹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죄가 공동체 전체에 대한 죄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깨어서 죄와 싸워야 합니다. 특히 탐심의 죄와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 교회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를 엄중하게 다루셨습니다. 그로 인해 이제 막 시작된 교회의 성결을 지키셨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바치고자 한 재물의 일부를 숨겼습니다. 이로 인해 부부가 하루 아침에 송장으로 변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제 막 시작된 초대 교회는 높은 수준의 성결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개인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개인 신앙을 중요시하지만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세우는 신앙생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탐심의 죄를 회개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여호수아 7:1-26
요절 여호수아 7:12
멸하지 아니하면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전투에서 유일하게 패배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동안 승리만 계속했는데 왜 실패했을까요? 그들이 패배하게 된 원인은 죄에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간의 범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간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죄 문제를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 또 실패의 때, 하나님의 징계의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이 말씀은 오늘 보게 될 사건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칠 물건으로 인하여 범죄했는데 바로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6:18절에서 하나님은 이미 경고했습니다.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바친 물건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시고 진멸하고자 한 물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취함으로 자신이 도리어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편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일러 가로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 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하므로” 아이 성은 벧엘의 동남쪽 3km 지점에 있는 가나안의 요새지입니다. 이 지형은 여리고 보다 더 높은 지대에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을 하기 전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보고는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 만 올라가도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를 듣고 여호수아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도 마음이 높아져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온 땅에 퍼지게 되었습니다(6:27). 백성들의 마음도 높아져 있었습니다. 이 정도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여리고 성을 정복한 것이 자기들의 힘으로 된 것인 양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축복을 받을 때, 승리할 때, 일이 잘 풀릴 때 겸손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마음도 안일해 진 것 같습니다. 전쟁은 생사가 걸린 문제인데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치자고 합니다. 이는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8:25절을 볼 때 아이성 주민이 12000명이면 군사는 최소한 4천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방어에 전력하는 이들을 물리치려면 이스라엘은 12000명은 동원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적군보다 적은 병력을 출병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전쟁에 패하게 하심으로 그들 가운데 있던 죄를 드러내셨습니다. 죄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걸림돌이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육 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 성을 치는 것을 가볍게 생각했다가 큰 코를 다치게 되었습니다. 삼십육 명이 죽고 삼십육계를 치다가 돌아와서는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습니다. 물은 어느 모양으로나 변하게 됩니다. 그들은 완전히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실패로 인해 여호수아의 이름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도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망신을 당하였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번의 패배는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여리고 백성을 진멸시킨 그들이 삼십육 명이 죽은 것으로 인해 이렇게 까지 힘들어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는 숫자의 문제라기보다 심리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이것을 지켜보던 가나안 백성들은 우리도 힘을 합하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실패의 때에 여호수아는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에 사람 앞에 나가지 아니하고 전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왜 패하게 하셨을까 알고자 했습니다. 실패의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원인을 찾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우선 되어야 할 일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6-10)” 여호수아는 자신들이 패배한 것도 슬프지만 주의 크신 이름이 땅에 떨어진 것으로 인해서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는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누구나 실패를 경험합니다. 문제는 그 실패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승리하는 인생이 되기도 하고 패배적인 삶을 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이런 질문을 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가 실패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 종일 엎드려 있는 여호수아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10-12).” 그들이 패한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8절에서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기 때문입니다. 바친 것은 ‘헤렘’으로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여리고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었음을 지적해 줍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자신들의 죄 값으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이 도리어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패는 언약을 지키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자신만만한 것이나 기도를 얼마나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그것도 많은 사람의 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죄라도 죄는 누룩과 같이 퍼져나가게 됩니다. 사람이 물건을 도둑질을 했을 때 그 손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온 몸에 죄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면 아간은 왜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취했을까요? 그는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이제까지 고생만 했으니 이제는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가 챙긴 것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과 금덩어리였습니다. 그는 광야 생활을 하느라 옷 한 벌로 살았습니다. 40년 동안 단벌로 살다보니 지겨웠습니다. 그는 이제 가나안에 들어왔으니 유행을 좇아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풍요 속에 행복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도적질을 해서라도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탐심이란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취하고 싶은 것입니다. 탐심은 타인의 것을 내 것으로 취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적당히 먹으면 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탐식을 부리면 비만에 빠집니다. 그리고 온갖 합병증에 걸리게 됩니다. 옷에 탐심을 가지면 돈은 없어도 멋있는 옷을 보면 빚을 내서라도 삽니다. 안목의 정욕에 대한 탐심에 빠지게 되면 자신의 외모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육신적인 사람들의 외모를 쳐다보며 부러워합니다. 또 명예에 대한 탐심이 있습니다. 명예에 대한 탐심에 빠지면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서슴치 않고 합니다. 탐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제력과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양심과 이성이 마비되고 추하고 거짓된 삶을 살게 됩니다. 탐심을 다스리지 못할 때 그것의 종이 됩니다. 파멸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죄가 한 나라를 실패하게 만들었습니다. 작아 보이는 죄가 이렇게 큰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야고보서 1:15절은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면 어떻게 욕심을 이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는 탐심과 세상 욕심을 이길 수 있을까요? 갈 5: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만 욕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 삶을 주관하실 때 내 육체의 욕심, 세상 욕심을 따라 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12).”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시는데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더러운 사람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어 주시고 함께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시는데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전쟁에 패한 이유가 죄때문이라면 그 죄를 제거해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죄 가운데 있는 한 대적을 당할 수 없습니다. 원수 마귀는 이를 알기 때문에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여 죄에 빠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외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제하는 것입니다. 내적 성결의 투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제비뽑기를 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지파대로, 족속대로, 가족대로, 남자대로 가까이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천천히 수사를 진행하는 이유는 죄인이 회개하고 자백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서 오래 참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누구입니까? 므두셀라입니다. 그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므두셀라가 죽을 때 이 세상에 심판이 임하게 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가득하지만 심판하기를 꺼려하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으로 인해서 그는 가장 오래 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까지 오래 참으십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버티는 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제비에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습니다. 아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추적하시는데 가만히 있었습니다. 나만 죄를 지었으랴 생각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는 최소한 두 명이상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자신이 뽑혔습니다. 200만명 중에서 죄를 범한 사람은 유일하게 아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추적하십니다. 그 죄는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죄를 회개하도록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청했습니다. “내 아들아 청하노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여호수아는 범죄한 아간에게 이 죄인아 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 원수야 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내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그가 죄를 지었지만 그를 사랑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협박하거나, 고문하거나,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정당한 것으로 돌리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또한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을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물로 발전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벌을 신실하고 공정한 것으로 인정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켰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인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손상한 것을 회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선한 뜻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우리 힘이 미치는 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자복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아간은 자신이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아간과 그 물건들을 끌고 아골 골짜기로 갔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렇게 하여 그치게 되었습니다. 아간과 그에 속한 물건들을 불사름으로 이스라엘은 자신을 정결케 했습니다. 아간의 죄를 하나님은 엄중하게 다루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죄의 누룩을 제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검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아서 후손들에게 교훈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아골 골짜기에서 죄에 대한 징계를 감당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 죄에 대해서 징벌하여 생명을 죽인 후에야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음 외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괴롭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괴롭게 하신 후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 죄인들에 대한 진노를 예수님에게 대신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괴롬의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문으로 바뀌었습니다(호세아 2:15).
둘째, 그러므로 내 대신 괴롬을 당하신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아간처럼 심판대 앞에서 죄가 드러나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죄사함을 받는 길은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죄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입을 막고 가만히 있으면 몸으로 진노를 받아야 합니다. 시편 32:5절에서는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라고 하였습니다. 죄사함을 받은 후에 우리도 형제의 죄를 감당하며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죄를 보면 분노하는 의로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악을 지은 자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완악한 자들을 보면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대신에 우리는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이 죄사함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죄와 싸워야 합니다. 아간 한 사람의 범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지게 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는 열 명의 정탐꾼들이 200만명을 불신과 두려움에 빠뜨렸습니다. 죄는 누룩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에 대해서 경계하고 책임을 질 때 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이 죄를 용납해버리면 공동체의 수준이 떨어지게 됩니다. 서로가 “저 사람도 저렇게 하는데 나라고 못해” 이런 의식을 가지면 죄에 대해서 방치하게 됩니다. 죄는 나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죄로 인해서 크리스챤의 이름이 욕을 먹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죄가 공동체 전체에 대한 죄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깨어서 죄와 싸워야 합니다. 특히 탐심의 죄와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 교회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를 엄중하게 다루셨습니다. 그로 인해 이제 막 시작된 교회의 성결을 지키셨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바치고자 한 재물의 일부를 숨겼습니다. 이로 인해 부부가 하루 아침에 송장으로 변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제 막 시작된 초대 교회는 높은 수준의 성결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개인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개인 신앙을 중요시하지만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세우는 신앙생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탐심의 죄를 회개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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