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07년 여호수아 4강(5:2-15) 수치를 굴러가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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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여호수아 제 4 강
말씀 여호수아 5:2-15
요절 여호수아 5:9
수치를 굴러가게 하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지난 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언약궤를 앞세워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넌 사건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자연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사람과의 정복 전쟁을 해야 합니다. 피를 흘리고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전쟁을 하기 전에 할례를 다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군대 대장으로 나타나셔서 여호수아에게 발에서 신발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 싸움이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사람과의 싸움이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는 영적인 싸움입니다. 우리의 싸움도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수치를 굴러가게 하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후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후, 언약의 표로서 모든 남자에게 행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는 생후 8일째에 할례를 행하도록 했는데 이를 거부하는 자는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되었습니다(창 17:10-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나와 광야에서 유리하는 동안, 할례의식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할례를 집행해야 했습니다. 이때부터 할례는 이스라엘의 자랑이 되었고 이것을 지키지 않는 백성을 경시하게 되었습니다(삿 14:3,15:18,삼상 14:6,사 52:1). 예레미야는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렘4:4).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할례를 행하거나 하지 않거나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고전7:19). 구원문제에 관해서 할례는 필요치 않습니다. 갈5:5-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할례는 마음의 할례의 외적인 상징으로서 주어진 것입니다(신10:16,30:6,레26:41,렘4:4,9:25,겔44:7).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를 받았습니다(골 2:11). 이것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되었다면 마음의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하기 전에 할례를 행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적을 코앞에 두고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명령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어리석고 불합리해 보입니다. 지금 그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밀고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리고의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가 할례를 행했다는 것을 알면 요새를 열고 나와서 무기력해진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 같지 않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스라엘 군대가 순간적으로 군사적인 유리함을 취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그들이 요단강을 자기 힘으로 건넌 것이 아니듯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것도 그들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 하십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인간적인 열심을 가지고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일로 불평하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1-42).”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일에 힘쓰는 것이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듣는 것입니다. 주일에 분주하게 뛰어다니기보다 먼저 말씀을 깊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영적 생명을 위해서 유익합니다. 많은 일을 하지 못할지라도 예배드리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한 주 내내 승리하는 길입니다.
둘째, 할례는 육을 버리는 것입니다. 가나안 적진임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행하는 의미는 육적인 생각과 수단을 모두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뜻입니다. 실로 할례란 죄로 더럽혀진 육신을 모두 벗어버리며, 또한 육신적인 소욕을 완전히 제어한다는 외적인 표현입니다. 더욱이 이 의식을 행한 자는 당분간 육체가 부자유스럽기 때문에 전투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따라서 할례를 행하는 것은 적의 침입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행한 것은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육적 수단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이요, 인간적인 술수나 무기에 대한 의존을 탈피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한다는 신앙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육의 옷을 겹겹이 걸칩니다. 욕심과 술수 등 갖가지 인간적인 노력들을 기울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중대하고 시급한 일일수록 먼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육신의 소욕, 죄의 소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진 자, 철저히 자기 부정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크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내세우는 자에게 승리를 주시지 않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자에게만 궁극적인 승리를 주십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함으로서 참으로 능력있는 목자 생활을 했습니다. 진정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하나님은 크게 역사하시며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셋째, 할례를 행함으로 신앙 공동체 의식을 세우는 것입니다. 할례를 행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과 피로써 언약을 체결한 신앙 공동체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하나인 것을 하나님 앞에서 공표하는 것이요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전쟁 준비였으며 철병거나 군마보다 더 위력적인 전투력 증강이었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하나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강한 지체 의식을 가지고 하나가 될 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긴밀한 유대 관계를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며 남의 짐을 지며 고통을 함께 나눌 때 비로소 승리하는 영적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할례를 행하는 것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떠나가게 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면 애굽의 수치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 정신이 타락했습니다. 노예는 자발성을 상실하고 상전의 눈치를 보고 할 수 있으면 태만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감정대로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이 출애굽하였지만 광야 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과 주의 종을 대적하는 죄악된 본성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구세대들은 다 죽어나갔습니다. 이제 신세대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훈련을 받고 많이 거룩해졌지만 보고 배운 것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십니다. 애굽의 수치가 물러가고 이제 그들은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 나라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들이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이 나라를 세운다고 나갔는데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랑하고 있다고 애굽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떠돌이 백성들이 나라를 세움으로 수치를 면하고자 하기 쉽습니다. 그들이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라를 세우고자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고 하십니다. 그 백성의 수치를 제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힘으로 수치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수치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나안 백성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 영적인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수치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연합할 때 과거의 우리는 죽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 짐을 굴려버리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희생적으로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켰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자기의 존재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창기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이 존귀한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의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광야 훈련을 시키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광야에서 우리의 본성이 다 드러나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용서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를 묻어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모험하고 도전하는 인생, 개척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안주해 버리면 수치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음으로 죽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목자로서 헌신하지만 실패로 인해서 수치를 겪었습니다. 그 수치를 벗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기를 포기할 때 주님께서 친히 하십니다. 나의 능력과 나의 열정과 나의 자아가 죽을 때 주님께서 친히 하십니다. 열매는 주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열심히 했습니까? 아직도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은혜로 구원을 얻었듯이 은혜로 성장하고 은혜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께 순종을 하고 찬양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집의 문 입구에 바른 피를 보고 넘어간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유월절을 행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마음에 새길 뿐만 아니라 해마다 기념하고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기억하되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무교병을 먹고 쓴 나물을 먹게 하십니다. 유월절 고기도 허리에 띠를 두르고 서서 급히 먹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서 우리에게 성만찬을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된 것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심을 믿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힘을 얻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어린 양을 치라고 하십니다. 제자 양성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순종의 열매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또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그들이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다시는 얻지 못하고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새 포도주와 생명 나무 실과를 먹게 될 것입니다.
2. 여호와의 군대대장 : 13,14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여리고 가까이에서 만난 분은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삼위일체의 이위이신 성육신 전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천군천사들을 대동하고 이 전쟁을 이끌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가 누구 편인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편도 저 편도 아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자신은 이스라엘 군대의 편도, 가나안 군의 편도 아니라 하나님의 편이라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민족 간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자가 하나님의 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그들도 침을 당하게 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치열한 남북전쟁을 하는 동안 아침에 꼭 두 시간씩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그의 참모 중 한 사람이 “이왕 기도하실 바에야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나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시도록 기도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편이 되도록 기도한다.” 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삼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시오 주권자이십니다. 그가 우리의 종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그런 자의 편이 되어 싸우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백성들을 오래 참고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이 가득하여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어 거룩한 나라 제사장 나라를 세우고자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획을 6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심과 그 전능하심을 따라서 이 일을 성취하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 역사를 경영하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끌어들여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이를 간파한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여쭈었습니다.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군인에게 신을 벗으라는 것은 전적인 항복, 전적인 복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열심이 강한 모세를 부르실 때에도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포로를 잡으면 제일 먼저 신발부터 벗긴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포로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지시에 철저히 순종함으로써 거룩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지도자와 영적인 지도자가 다른 점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복종해야 합니다. 거기서 권위가 나옵니다.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또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은 성결하도록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신은 우리가 매일 이 땅을 밟고 일을 하기 때문에 더러워집니다. 그러므로 신을 벗으라는 것은 더러운 것을 벗으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정복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죄를 깨끗하게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싸우심을 믿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성결한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 지도자로서 어떻게 캠퍼스 영적 정복 전쟁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날마다 더러워진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는 정복 전쟁에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저희가 날마다 말씀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더러워진 신발을 벗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하기 전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어 싸워야 함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내 생각은 무조건 옳고 남의 생각은 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의 신발을 벗고 주의 종으로 살 수 있도록 자기를 내려놓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군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여호수아 5:2-15
요절 여호수아 5:9
수치를 굴러가게 하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지난 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언약궤를 앞세워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넌 사건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자연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사람과의 정복 전쟁을 해야 합니다. 피를 흘리고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전쟁을 하기 전에 할례를 다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군대 대장으로 나타나셔서 여호수아에게 발에서 신발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 싸움이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사람과의 싸움이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는 영적인 싸움입니다. 우리의 싸움도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수치를 굴러가게 하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후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후, 언약의 표로서 모든 남자에게 행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는 생후 8일째에 할례를 행하도록 했는데 이를 거부하는 자는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되었습니다(창 17:10-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나와 광야에서 유리하는 동안, 할례의식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할례를 집행해야 했습니다. 이때부터 할례는 이스라엘의 자랑이 되었고 이것을 지키지 않는 백성을 경시하게 되었습니다(삿 14:3,15:18,삼상 14:6,사 52:1). 예레미야는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렘4:4).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할례를 행하거나 하지 않거나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고전7:19). 구원문제에 관해서 할례는 필요치 않습니다. 갈5:5-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할례는 마음의 할례의 외적인 상징으로서 주어진 것입니다(신10:16,30:6,레26:41,렘4:4,9:25,겔44:7).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를 받았습니다(골 2:11). 이것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되었다면 마음의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하기 전에 할례를 행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적을 코앞에 두고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명령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어리석고 불합리해 보입니다. 지금 그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밀고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리고의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가 할례를 행했다는 것을 알면 요새를 열고 나와서 무기력해진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 같지 않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스라엘 군대가 순간적으로 군사적인 유리함을 취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그들이 요단강을 자기 힘으로 건넌 것이 아니듯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것도 그들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 하십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인간적인 열심을 가지고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일로 불평하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1-42).”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일에 힘쓰는 것이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듣는 것입니다. 주일에 분주하게 뛰어다니기보다 먼저 말씀을 깊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영적 생명을 위해서 유익합니다. 많은 일을 하지 못할지라도 예배드리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한 주 내내 승리하는 길입니다.
둘째, 할례는 육을 버리는 것입니다. 가나안 적진임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행하는 의미는 육적인 생각과 수단을 모두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뜻입니다. 실로 할례란 죄로 더럽혀진 육신을 모두 벗어버리며, 또한 육신적인 소욕을 완전히 제어한다는 외적인 표현입니다. 더욱이 이 의식을 행한 자는 당분간 육체가 부자유스럽기 때문에 전투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따라서 할례를 행하는 것은 적의 침입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행한 것은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육적 수단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이요, 인간적인 술수나 무기에 대한 의존을 탈피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한다는 신앙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육의 옷을 겹겹이 걸칩니다. 욕심과 술수 등 갖가지 인간적인 노력들을 기울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중대하고 시급한 일일수록 먼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육신의 소욕, 죄의 소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진 자, 철저히 자기 부정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크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내세우는 자에게 승리를 주시지 않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자에게만 궁극적인 승리를 주십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함으로서 참으로 능력있는 목자 생활을 했습니다. 진정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하나님은 크게 역사하시며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셋째, 할례를 행함으로 신앙 공동체 의식을 세우는 것입니다. 할례를 행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과 피로써 언약을 체결한 신앙 공동체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하나인 것을 하나님 앞에서 공표하는 것이요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전쟁 준비였으며 철병거나 군마보다 더 위력적인 전투력 증강이었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하나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강한 지체 의식을 가지고 하나가 될 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긴밀한 유대 관계를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며 남의 짐을 지며 고통을 함께 나눌 때 비로소 승리하는 영적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할례를 행하는 것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떠나가게 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면 애굽의 수치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 정신이 타락했습니다. 노예는 자발성을 상실하고 상전의 눈치를 보고 할 수 있으면 태만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감정대로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이 출애굽하였지만 광야 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과 주의 종을 대적하는 죄악된 본성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구세대들은 다 죽어나갔습니다. 이제 신세대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훈련을 받고 많이 거룩해졌지만 보고 배운 것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십니다. 애굽의 수치가 물러가고 이제 그들은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 나라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들이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이 나라를 세운다고 나갔는데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랑하고 있다고 애굽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떠돌이 백성들이 나라를 세움으로 수치를 면하고자 하기 쉽습니다. 그들이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라를 세우고자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고 하십니다. 그 백성의 수치를 제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힘으로 수치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수치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나안 백성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 영적인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수치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연합할 때 과거의 우리는 죽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 짐을 굴려버리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희생적으로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켰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자기의 존재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창기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이 존귀한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의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광야 훈련을 시키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광야에서 우리의 본성이 다 드러나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용서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를 묻어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모험하고 도전하는 인생, 개척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안주해 버리면 수치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음으로 죽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목자로서 헌신하지만 실패로 인해서 수치를 겪었습니다. 그 수치를 벗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기를 포기할 때 주님께서 친히 하십니다. 나의 능력과 나의 열정과 나의 자아가 죽을 때 주님께서 친히 하십니다. 열매는 주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열심히 했습니까? 아직도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은혜로 구원을 얻었듯이 은혜로 성장하고 은혜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께 순종을 하고 찬양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집의 문 입구에 바른 피를 보고 넘어간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유월절을 행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마음에 새길 뿐만 아니라 해마다 기념하고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기억하되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무교병을 먹고 쓴 나물을 먹게 하십니다. 유월절 고기도 허리에 띠를 두르고 서서 급히 먹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서 우리에게 성만찬을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된 것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심을 믿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힘을 얻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어린 양을 치라고 하십니다. 제자 양성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순종의 열매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또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그들이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다시는 얻지 못하고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새 포도주와 생명 나무 실과를 먹게 될 것입니다.
2. 여호와의 군대대장 : 13,14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여리고 가까이에서 만난 분은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삼위일체의 이위이신 성육신 전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천군천사들을 대동하고 이 전쟁을 이끌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가 누구 편인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편도 저 편도 아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자신은 이스라엘 군대의 편도, 가나안 군의 편도 아니라 하나님의 편이라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민족 간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자가 하나님의 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그들도 침을 당하게 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치열한 남북전쟁을 하는 동안 아침에 꼭 두 시간씩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그의 참모 중 한 사람이 “이왕 기도하실 바에야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나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시도록 기도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편이 되도록 기도한다.” 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삼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시오 주권자이십니다. 그가 우리의 종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그런 자의 편이 되어 싸우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백성들을 오래 참고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이 가득하여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어 거룩한 나라 제사장 나라를 세우고자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획을 6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심과 그 전능하심을 따라서 이 일을 성취하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 역사를 경영하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끌어들여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이를 간파한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여쭈었습니다.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군인에게 신을 벗으라는 것은 전적인 항복, 전적인 복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열심이 강한 모세를 부르실 때에도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포로를 잡으면 제일 먼저 신발부터 벗긴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포로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지시에 철저히 순종함으로써 거룩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지도자와 영적인 지도자가 다른 점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복종해야 합니다. 거기서 권위가 나옵니다.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또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은 성결하도록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신은 우리가 매일 이 땅을 밟고 일을 하기 때문에 더러워집니다. 그러므로 신을 벗으라는 것은 더러운 것을 벗으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정복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죄를 깨끗하게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싸우심을 믿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성결한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 지도자로서 어떻게 캠퍼스 영적 정복 전쟁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날마다 더러워진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는 정복 전쟁에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저희가 날마다 말씀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더러워진 신발을 벗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하기 전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어 싸워야 함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내 생각은 무조건 옳고 남의 생각은 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의 신발을 벗고 주의 종으로 살 수 있도록 자기를 내려놓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군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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