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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07년 여호수아3강(3:1-5:1) 주의 언약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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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929회 작성일 07-01-28 10:39

본문

2007 겨울 여호수아 제 3 강                                               
말씀 여호수아 3:1 - 5:1
요절 여호수아 3:11

주의 언약궤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우리는 지난 주 심판 가운데서 기생 라합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라합은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만민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언약궤를 앞세워 요단강을 건넌 사건을 배우고자 합니다. 주의 언약궤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기념해야 할 역사는 무엇입니까? 

1. 여호와의 언약궤 : 여호수아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사흘을 지내면서 요단강을 건널 마음 준비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렸습니다.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에 두루 다니며 백성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여호와의 언약궤 뒤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5: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여호와의 언약궤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 여호와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언약궤는 길이 1미터14센티미터, 넓이와 높이 68센티미터의 상자였습니다. 안과 밖을 모두 금으로 쌌으며, 뚜껑은 순금으로 만들었고, 두 천사가 뚜껑 양쪽 끝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 있게 하였습니다. 그룹들이 편 날개 사이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했습니다. 언약궤는 제사장들이 어깨 위에 메고 운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앞서 가시면 언약궤가 제사장들에 의해서 움직이게 됩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서가는 언약궤를 따르는 것은 광야에서 불기둥 구름기둥을 따라간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갈 준비가 되셨을 때 그들이 따르기를 거절한다거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을 때 그들이 앞서 나가게 되면 결과는 재앙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전진에 합당한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승리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모세를 인도하셨던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인도하십니다. 출애굽을 가능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십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100세나 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앞서 가면 이전에 가보지 못한 길에서 행할 길을 알게 됩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성육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사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믿는 자 속에 내주하십니다.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 종들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 주권, 능력, 통치를 상징합니다. 요단강을 사람의 힘만으로 건너고자 하면 빠져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창일한 요단강도 마른 땅 같이 건널 수 있습니다.
       
둘째, 언약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를 상징합니다. 상자 안에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수여했던 율법의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율법을 범하는 것은 그분의 성품에 대한 모욕이요, 그분의 의로운 통치에 대항하는 반역입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고라 자손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공의를 상징했습니다. 죄에는 반드시 심판이 따릅니다. 율법에는 죄를 범한 자들에게 임했던 심판이 나타나 있습니다. 율법은 의롭게 행해야 할 온 세상에 심판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함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성결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셋째, 언약궤는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언약궤의 덮개를 “시은소”(mercy seat)라고 불렀습니다. 일 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피를 뿌렸습니다. 백성들의 죄는 제물로 드리는 짐승의 머리 위에서 고백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해당하는 죄를 지닌 백성들이 있는 곳에서 그 짐승을 죽였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죄인을 대신해서 짐승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짐승의 피는 성막의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가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와 백성이 범한 율법 사이에 있는 시은소에 뿌렸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언약궤는 속죄의 원리를 증거했습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짐승을 죽이시고 그 가죽으로 그들에게 옷 입히셨던 에덴 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갈보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상징합니다. 언약궤가 요단강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하고 그의 부활에 동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세례에 해당이 됩니다. 이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는 것입니다. 종합해 보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공의와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록된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성령 하나님은 언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기초해서 일하시지만 그것을 초월해서 역사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는 것은 여호와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인간적인 방법, 경험, 전략과 전술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장래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매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끈질기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요 그리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삽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이천 규빗은 900-1000m정도의 거리인데 우리가 육안으로 구별할 수 있는 최전방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200만 명이나 되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안으로 바라보아야 할 그 목표 지점에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전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은 언약궤에 주목하고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던 언약궤에 집중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하나님만 의지하여 나아갔음을 말해 줍니다. 
  백성들이 언약궤의 인도함을 따르고자 할 때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이 잘못을 범할 경우에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다윗이 언약궤를 소가 끄는 수레로 옮기고자 할 때 소가 뛰기 때문에 웃사가 언약궤를 잡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삼하6:3-7).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함께 붙좇는 자세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걸음을 친히 인도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10:23).” 우리는 내 생각과 계획대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요단강을 건너간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에게 난관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역경도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를 주목하고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부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주목하고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제 앞에 앞서 가 주십시오. 저는 그 뒤를 따르겠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면 어느 곳이든지 가겠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의 인생을 맡깁니다.” 이런 고백과 함께 한 발자국씩 발걸음을 내디딜 때 우리는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요단 강물이 끊기다 : 그러면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따르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시켰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을 쓰십니다. 더러운 그릇은 씻어야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기사를 행하시기 전에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택하신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준비 과정입니다.

  여호수아는 영적인 준비가 끝나자 제사장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6).” 그러자 제사장들이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에 나아갔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온 땅의 주 여호와란 바다와 강들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여 온 땅에 역사하십니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요단 물을 밟으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그저 물 밖에 서서 “하나님께서 물을 갈라 주시고 물벽을 만들어 주시면 그때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요청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권세와 역사를 먼저 보여 주십시오. 그래야 믿을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나님을 시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약한 우리 인생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믿고 순종하여 실행하라.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 너희가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생명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당시는 곡식 거두는 시기로서 요단강은 언덕까지 차고 넘쳤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요단강물을 밟았을 때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은 일어나 쌓여 멀리 아담 성읍 변두리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위쪽은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고 갑자기 수몰지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고 백성들은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너갔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바닥 가운데에 있는 돌들 위에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최소한 반나절 이상을 그들은 언약궤를 메고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리로 지나갔습니다. 신약에서 이는 세례에 비유됩니다. 언약궤가 강 가운데 선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우리도 함께 그의 죽으심에 동참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강 한가운데 있을 때, 그들은 흐르는 강물을 끊고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질퍽거리며 건너간 것이 아니라 마른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물을 말리우시고 먼지를 일으키며 건너게 하셨습니다. 요단강물이 최고 수위를 기록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자식과 가축을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외에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도 그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이 계속될 것이라는 증거였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요단을 건너야 합니다. 내 힘으로 건너기 어려운 요단강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내 힘의 한계를 느끼게 하고 피할 수도 지체해서도 안 되는 요단의 강물이 도도히 내 앞에 흘러갑니다. 어려운 학업과 전공의 요단이 있습니다. 한번뿐인 선택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결혼의 요단, 자녀양육을 제대로 못할 것만 같은 물질문제의 요단, 평생 제자양성 못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가 불신을 심는 캠퍼스 세속주의의 요단에 이르기까지 많은 요단이 우리 앞을 흘러갑니다. 이 앞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이 됩니다. 요단만 없으면 잘 풀릴 텐데 생각하며 요단을 허용하신 하나님이 괜히 원망스러워집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축복의 백성이 되려면 반드시 요단을 건너야 합니다. 요단은 여호와만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경배 받으실 분인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있을 때 요단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공동체 의식이 많이 사라지고 개인주의 문화가 팽배합니다. 개인주의 문화는 개인을 존중하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이기적인 생활을 조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나 혼자서만 잘 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기적인 문화를 극복하고 공동체 문화를 육성해야 합니다. 혼자서 자기 영역을 만들어 즐기고 컴퓨터와만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관계성을 맺고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합니까?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야 이기심을 이기고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건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3. 길갈에 세운 열두 돌 : 온 백성이 요단을 건넜을 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한 방향을 주셨습니다. 4장 2,3절을 보십시오. “백성의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취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 밤 너희의 유숙할 그 곳에 두라 하라.” 하나님께서는 강 가운데 있던 돌 열둘을 취하여 길갈에 두어 기념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념물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잘 잊어먹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 들어가는 세대에게 기념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길은 어렵고 낙심하기 쉬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역사를 통해서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나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과 첫사랑을 기억하게 되면 정체성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부르셨고 나를 어디로 인도하고 계신가를 깨닫게 됩니다. 역설적이지만 비전은 과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 속에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역사 교육은 현세대뿐만 아니라 오는 세대들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부모가 물려준 신앙과 교훈을 쉽사리 잊을 수가 있으므로 이 역사적인 기념물이 필요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 후손들에게 과거 역사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말해줌으로써 자녀들이 부모의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 하나님께 신실한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서 기념물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후배들과 자녀들에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알 때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신 은혜, 인간 갈등에서 구원하신 은혜, 자녀들을 허락하시고 그들을 질병에서 치료하신 은혜, 여러 가지 고난과 역경에서 도우신 은혜, 먹고 살도록 지혜와 힘을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치 않을 때 온갖 죄를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하기를 기도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념비를 세우고 절기를 기념하는 것을 통해서 자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케 하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바탕 위에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고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며 주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을 때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때 자만해지고 교만하게 되고 온갖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 대해서 경외심을 가지고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세우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5장 1절을 보십시오.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넘실대는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가나안의 모든 사람들은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그를 경외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시며 그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 편재하시며 실제적인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나의 능력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위축됩니다. 손발을 놀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종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요단강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마른 땅으로 건너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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