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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2024년 스5강(9,10장) 울며 기도하며 자복할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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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43회 작성일 24-02-18 19:35

본문

2024년 에스라 5강
말씀 | 에스라 9장,10장
요절 | 에스라 10:1

울며 기도하며 자복할 때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오늘 말씀은 한 사람 에스라의 회개가 백성들의 회개운동으로 번져서 영적 개혁을 이룬 사건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의 죄를 자기 죄로 여기며 통곡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죄는 구체적으로 이방 여인들과 통혼을 함으로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 등 가증한 죄악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무엇일까요? 이 시간 우리가 죄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 애통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온 후 에스라는 방백들로부터 기가 막힌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이방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는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올라온 후 대략 5개월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구약에서 가증한 일은 우선적으로 우상 숭배(신12:13-17)와 성적 타락(레18:3-23)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가증한 일은 통혼(通婚)이었습니다. 즉 이방인들의 딸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았고, 그들의 딸을 이방인들에게 주었습니다(12). 그들은 단순히 이방인들과 결혼만 한 게 아니라, 우상숭배 풍속까지 들여와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방백들은 통혼으로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였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자손’은 문자적으로 ‘거룩한 씨’(the holy seed)입니다. 씨가 섞이게 되면 당대에는 문제가 없지만 후손들이 신앙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후손들이 신앙을 잃어버리면 여호와 신앙의 미래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씨로서 경건한 자손들을 얻고 퍼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낳고 생육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불신자들과 결혼을 하게 됨으로 노아 시대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앙을 잃어버리고 생각이 악하게 되자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홍수 심판으로 멸망하게 되었죠.
 
  통혼에 대한 에스라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속옷과 겉옷을 찢었다는 것은 극도의 슬픔에 빠진 행동입니다(창 37:29,34; 삼하13:19; 욥1:20). 머리털과 수염을 뜯는 것은 분노와 불쾌감을 표출하는 상징적 행동입니다(느13:25; 사50:6). ‘기가 막혔다’는 말은 황폐하게 된 땅, 하나님의 심판 앞에 떨고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는 이 충격적인 사실로 인하여 넋을 잃는 듯한 심리적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대제사장은 어떤 경우에도 머리를 풀거나 옷(예복)을 찢지 못하고, 부모나 형제의 죽음에도 함부로 슬픔을 표시할 수 없습니다(레21:10,11). 지도자들을 필두로 해서 백성들이 죄를 범함으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신앙적인 순수성을 상실하게 될 것을 생각할 때, 에스라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의 이런 반응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사람들이 그에게 모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등 멸망당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범함으로 인해 징계 받은 결과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대하36:12-16).

  에스라는 마냥 슬퍼하지만 않았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에스라는 아무리 슬퍼도 하나님께 정기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근심 중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의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죄악을 자기의 죄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7-15절은 에스라의 회개기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보통 일어서서 기도하는 데, 에스라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가장 겸손하고 수치스러운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그는 왜 서지 못하고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을까요? 마치 자녀의 잘못 때문에 부모가 대신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에스라의 마음이 그러하였습니다.

  사실 에스라는 그들의 죄와 관련이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아마도 백성들의 지도자로 세워졌으나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치 못했다는 자책감이나 실망감과 동시에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아픔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감정을 느껴야 했지만 그들은 조금도 이런 반응이 없습니다. 죄의식이 없습니다. 그만큼 오래되었고, 무감각해졌습니다. 죄에 대한 분별력이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가 정수리에 넘치는 상태입니다. 죄악으로 익사할 지경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죄에 대해 나 몰라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의 죄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침으로 자녀들이 이방 문화와 섞이지 않게 보호해 주고 구별해 주는 울타리를 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1차 포로귀환으로부터 80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땅으로 돌아와 살게 된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지 모르고 살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도 일제 식민 통치나 6.25 전쟁을 겪으면서 국토의 80%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위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전쟁과 고난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기에 독립된 국가로 사는 것이나 자유 민주주의를 누리며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실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역사 교훈을 잊어버리면 이 축복도 ‘잠시’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의 부흥과 성공에 도취해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섬깁니다. 한국 교회를 향한 조롱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쇠퇴가 한참 진행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위기를 깨닫고 회개하지 않으면 2050년이면 이단과 무신론의 나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은 다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에스라는 통혼을 우상숭배 및 그것과 관련된 부도덕한 행위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정체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해주고 보호해주는 ‘울타리’를 허물어버릴 수 있는 가장 위협적인 무기가 바로 ‘결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과 섞여버릴 수 있는 확실한 통로가 ‘결혼’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 앞에서 기가 막히고, 부끄럽고 낯이 뜨겁고, 엎드려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깊은 이해와 율법에 기초하여 죄의 심각성을 알았을 때, 백성들을 책망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먼저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에스라 한 사람이 회개할 때 백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백성들은 에스라가 큰 소리로 울면서 필사적으로 회개하는 기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엄청난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몸부림치면서 통곡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백성들은 큰 충격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의 회개와 통곡이 민족의 회개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백성들은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들은 에스라를 일으켜 세우며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엘람 자손 중 스가냐는 범죄한 이스라엘 자손의 대표로 나옵니다. 스가냐의 아버지는 통혼의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자발적으로 이방 아내와 그 소생을 내보내자는 과감한 제안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가냐는 에스라가 필사적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고 거기서 이스라엘의 소망을 보았습니다. 에스라의 회개를 보면서 자기들도 죄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리라는 기대가 생겼습니다. 또 이번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서 이스라엘에 종교 개혁을 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방인 아내와 그 자녀들까지 강제로 나가게 하는 것은 지금 관점으로 보면 꽤 잔인하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은 어머니의 종교적 영향을 크게 받는 관계로 이방의 풍습이나 종교에 젖어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아무 말도 안했지만, 스가냐는 에스라의 교훈을 따르고 그를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신뢰하였습니다.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그들이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았습니다. 무리가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비 때문에 떨고 있는데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모든 백성들은 큰 소리로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결혼은 굉장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회개하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에스라가 처음부터 회개하라고 책망하고 내보내라고 했으면 집단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발적으로 회개하고 결단하게 한 것은 놀라운 개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단지 에스라의 행동에 감동 받아서가 아니라 그의 회개를 통해 자신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14b).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어떤 조직 체계없이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큰 비를 맞으며 떨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 범죄자들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하면서, 성전 광장에서의 모임을 일단 해산시켰습니다. 그리고 통혼한 자들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장로와 재판장을 각 고을에 세우고 그들을 통해 처리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15절에 보면 “오직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을 돕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에스라의 개혁이 지체되거나 흐지부지 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습니다. 

  이방 여인을 조사하는데 3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공개하였습니다. 제사장(18-22), 레위 사람(23-25), 백성들(25-43) 순서대로 통혼한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하였는데 맨 처음 공개된 사람은 요사닥의 아들인 예수아의 자손들과 그 형제들입니다(3:2; 5:2; 학1:1). 이들은 대제사장 가문의 후예라는 점에서 특별히 영적 모범이 되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이들을 명단 맨 앞에 올려놓음으로써,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부패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손을 잡고 맹세하여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하고 그 죄에 대한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통혼한 사람의 수는 110명입니다. 75일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조사의 결과치고는 소수입니다.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다는 것은 통혼이 오래된 문제였고 이들을 내보내는 것이 엄청나게 큰 인간적 고통을 수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언약의 자손이 아닌 인간적인 생각과 자기 정욕에 기초해 결혼하여 낳은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내보내면서 ‘매우 근심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창21:11). 그럼에도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살고자 에스라의 지도를 따라서 이 같은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종교 개혁 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에스라서가 다소 결론이 모호하게 끝납니다. 이방인 아내들을 내보내기로 맹세하고 명단까지 공개했지만, 정말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 대한 에스라의 목자의 심정과 회개와 기도가 기록된 명단으로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사도바울은 불신자와 결혼한 경우에 우리에게 좋은 안내를 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12,13을 보면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아내의 거룩한 행실을 통해서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또 남편의 거룩한 행실을 통해서 믿지 않는 아내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씨’라는 정체성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결혼이 올바른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데 얼마나 중요한가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잡고 가르친 에스라처럼 기준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기준이 흔들리면 신자들이 하나님도 섬기고 맘몬도 섬기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것입니다. 영성이 흐려지고 깊이가 얕아지면, 그 다음은 상대주의가 만연해집니다. “누구의 신앙이 옳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모든 사람의 생각을 다 인정해 주어야 한다”라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 치열한 논쟁을 싫어하면서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죄를 깨닫고 먼저 깊이 회개할 때 개혁과 회복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문제를 지적하고 책망하기 전에 나의 죄로 받아들이고 울어야 합니다. 여기에 회복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결혼 연령에 이른 분들을 도우시고 합당한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도록 도우시길 기도합니다. 모두 다 믿음의 가정을 꾸려서 경건한 자손을 얻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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