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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2024년 스4강(7,8장) 에스라의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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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56회 작성일 24-02-1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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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에스라 4강
말씀 | 에스라 7장,8장
요절 | 에스라 7:10
 
에스라의 결심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7-10장 말씀은 성전 건축 이후 57년이 지났고 1차 귀환으로부터 약 80년이 지난 상황입니다. 시기적으로 다리오 왕에서 아닥사스다 왕 시대로 바뀌었습니다(다리우스 B.C522-486, 아하수에로 B.C485-464, 아닥사스다 B.C464-423). 오늘 공부할 7,8장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서의 저자인 에스라가 등장하면서 성전 건축 후에 신앙 공동체 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에스라 등장 당시 예루살렘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귀환한 시기에 활동한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을 볼 때, 백성들 사이에 성전만 재건되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영적으로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그런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가르치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에스라를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 손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 ‘학자’는, 히브리어로 ‘소페르’인데 ‘서기관’(scribe)이라는 의미입니다. ‘학자’는 ‘학문을 연구하는 자’라는 의미가 강하지만, ‘서기관’은 ‘국가의 관리직’을 의미합니다. 그는 왕의 비서실장 혹은 국무장관과 같은 고위층 관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였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칠년 다섯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에 이 에스라가 함께 올라왔습니다. 그들은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넉 달 걸려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는 율법에 익숙한 사람인데 무엇을 연구하려고 했을까요? 연구하는 것은 무언가를 찾고 조사하는 것입니다. 연구하는 목적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전을 건축했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씀에서 찾는 것입니다. 성전 건물을 세운다고 하나님의 복이 자동적으로 임하고 모든 것이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건물의 외관을 건축했다면 이제 내용을 채워야 합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할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관계성을 맺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불화하고 싸우고 의견이 쉽게 갈리고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해서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기를 힘들어 합니다. 관계를 파괴하는 일차적인 문제는 자기중심성입니다. 죄의 근원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자기중심성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 앞에서 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죄사함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되고 자유를 느끼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분들이나 학생들이 목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목자의 삶도 결국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을 맺는 일입니다. 그럴려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고 말씀 앞에 자기 발견을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말씀공부와 예배와 수양회 등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면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어도 목자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고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목자의 삶에 따르는 희생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 희생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성장합니다. 아이가 때가 되어 자라서 성인이 되고 남을 섬기고 가정을 부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는 계속 사랑만 받는 어린 아이로 남겠다고 말하면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떠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제사장 나라는 목자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세계에 대해서 복이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목자로 헌신할 때 이 복은 계속 우리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동일하게 받습니다. 아브라함을 세계에 대해서 복의 근원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를 세계에 대해서 복이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으로서의 자부심만 강했지 이방인들에 대해서 제사장 나라로 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본 받아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나라는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준행하고 가르치고자 결심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실행하고 가르쳐서 하나님의 자녀들, 백성들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이라도 말씀을 가르쳐서 행하도록 전수하는 것은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삶입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올라온 목적은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고 가르치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해서 결심을 했습니다. 결심을 했다는 말은 마음에 간직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오기 전에 율법을 깊이 연구하였고,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고, 그 율법을 실행하는 백성을 만들고자 하는 비전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연구만 하지 않고 자신이 먼저 준행하였습니다. ‘준행한다’는 것은 행동하고, 실천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해 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율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구현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먼저 자신을 가르치지 않으면 판단과 정죄, 비난하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아니면 바리새인들과 같이 위선자가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너나 잘해”라고 말하든지, “너 해봤어”라고 묻게 됩니다. 내가 먼저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할 때에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내가 복을 받고 누리게 됩니다. 그 다음에 가르칠 때에 그 가르침은 힘이 있습니다. 영향력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은 삶이 변화되기까지 분명한 진리를 반복하고 지속해야 합니다. 사람이 깨달은 진리를 한 두 번 한다고 몸에 배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실천해야 말씀이 생활화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예배, 말씀 공부, 일용할 양식, 기도를 통해서 받은 말씀을 반복해서 실천할 때 영적인 성숙이 따라오게 됩니다. 에스라는 자신이 연구한 말씀을 준행하고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경말씀은 교회 설교시간에나 듣는 도덕적 교훈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믿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대로 살면 세상에서 뒤쳐진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대로 살 때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는 것처럼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창건자였다면, 이스라엘을 재조직하고 그 후 여러 세기에 걸쳐 이스라엘이 생존 양식으로 삼아 존속할 수 있었던 신앙 형태의 기틀을 잡아 준 사람은 에스라였습니다(존 브라이트).” 에스라의 결심은 뜻을 정한 다니엘과 같이 이스라엘 역사의 신기원을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여, 가르치고자 결심한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이 당면한 시급한 문제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적용 부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영적문제가 있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큰 문제는 말씀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러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요?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잘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오늘날에도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면서 말씀에 담긴 깊은 진리를 체험적으로 맛보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이 시대를 섬기는 지름길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에스라와 같은 결심을 함으로 목자요 제사장 나라로 계속해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의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를 신뢰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은금과 예물을 가져가게 했습니다. 또 유브라데 강 건너편 모든 창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에스라가 무릇 그들에게 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되 은은 백 달란트까지, 밀은 백 고르까지, 포도주는 백 밧까지, 기름도 백 밧까지 하고 소금은 정량 없이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당시 이 지역에서 받는 납세 총액의 30%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 유다 지역이 안정됨으로 이집트의 공격을 막고자 하는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습니다. 왕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 왕이 에스라에게 준 권한은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백성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죄를 정하여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는 권한과 투옥권도 주었습니다. 왕은 국가의 기초를 하나님의 율법 위에 세우라고 한 것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신뢰하고 있고 하나님의 율법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왕보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알고 있기에 에스라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27,28).” 에스라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하나님께서 왕을 비롯한 그의 보좌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하셨음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손’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는 용기와 여건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에스라는 그와 함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계보를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에스라와 함께 귀국한 사람들은 1513명, 여자까지 합하여 약 5천명쯤으로 추산합니다. 이는 1차로 귀환했던 42,360명보다 훨씬 적은 수입니다. 또한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레위인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을 찾아오기 위해서 출발 날짜를 10일을 늦추었습니다. 그는 왜 레위인들을 이렇게 시간을 들여서라도 데려오고자 했을까요?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풀타임으로 일할 사람들입니다. 레위인들이 없으면 하나님 중심의 공동체를 세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레위인의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흩어져서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신33:9). 에스라는 누구보다 율법의 중요성을 알고 있고, 예루살렘에 가는 목적도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레위인들을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우리 모임도 과거 졸업 하고 풀타임, 인턴 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고 줄을 섰는데, 지금은 거의 없습니다. 스탭 후보도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승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사람을 보내서 레위인들을 설득해서 예루살렘에 데리고 간 에스라처럼, 우리도 성경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잘 설득하는 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또 에스라는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여 자신들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주시도록 간구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왕에게 보병과 마병을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고 그를 경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왕보다 더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에스라는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신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은 단순한 귀향길이 아니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런 체험이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율법을 가르칠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에스라는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이스라엘 무리가 성전을 위해 드린 예물의 무게를 정확하게 달아서 레위 제사장들에게 주었습니다. 은이 650달란트 약 15억원, 금 100달란트 약 1,900억원의 금액입니다. 그가 이렇게 무게를 달아 준 이유는, 이 예물들이 얼마나 거룩한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사람들의 탐욕을 방지하기 위한 현실적인 목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에스라 일행이 1500Km를 가는데 이 많은 돈을 가지고 가면 약탈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군대 없이 간다는 건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무모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하나님의 손을 믿었습니다. 정말 살아 있는 위대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고서는 율법에 기초한 영적인 공동체를 세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공동체를 바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1500km를 안전하게 지났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에스라 일행을 도우셨습니다.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말씀에 생명을 거는 사람을 하나님은 건지시고 보호하십니다.

  결론적으로 한 사람 성경선생 에스라의 결심이 이스라엘 새 역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모든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연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모임도 이제 60여년이 지났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결심하고 무엇에 헌신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특히 청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영접하고 목자로 헌신할 수 있도록 사랑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에스라의 손에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다룰 수 있습니까?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더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고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실 걸 믿고 다른 무엇보다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한 명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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