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2024년 스2강(3,4장) 홀로 건축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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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에스라 2강
말씀 | 에스라 3장,4장
요절 | 에스라 4:3
홀로 건축하리라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는데 방해가 있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고 나서 성벽을 건축할 때도 방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방해를 받게 되었을까요? 앗수르에서 옮겨와서 유다에 와 살고 있던 사람들이 같이 성전을 짓자고 하는데 홀로 짓겠다고 하니까 방해를 합니다. 홀로 짓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섞이지 않고 지켜내야 하는 신앙의 순수성은 무엇일까요?
첫째, 성전 지대를 놓을 때의 감격(3:1-13).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습니다.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제사장 예수아와 그의 형제들과 총독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고자 했습니다.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왜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했을까요? 그들이 조상들이 살던 땅에 돌아왔지만, 외국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제정일치 시대에 성전 재건은 곧 정치 공동체의 재건으로 비칠 수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 때는 대적들이 성읍과 성곽 건축은 곧 반란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고발하였습니다(4:12,13).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즉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신교 사회에서 그들이 살아남으려면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이 이방인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빛나게 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주변 사람들이 두려웠지만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생겼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두렵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규칙적으로 아침과 저녁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에게 성전 건물은 없었지만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자세가 자발적입니다. 형식과 의식에 따른 예배가 아니라 말씀에 기초한 예배를 드리고자 힘썼습니다. 그들은 포로기를 거치며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던 과거 선조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형식을 의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의 회개와 헌신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건물이나 형식에 매이지 않고 순수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였습니다. 이것을 볼 때, 지난 역사는 성전이 파괴되고 무너지는 비극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성전시대의 종말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겪으면서 성전이나 나라나 땅보다 하나님과의 언약이 얼마나 더 소중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사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도록 올바른 예배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습니다. 두려움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안하는 대신, 온 힘을 다해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정성껏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 때에 두려워서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에 집중했을 때, 두려워하던 데서 용기와 힘을 얻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그대로 하라고 하인들을 준비시켰던 것처럼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기까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성전 건축을 시작했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 이에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니라.” 성전 건축에 관심을 갖고 재료를 모으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둘째 해 행정력과 권력이 있는 총독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일어났습니다. 총독 스룹바벨의 지휘 하에 레위인들이 성전 공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레위인들은 성전 공사를 감독하였습니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감사하였습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모든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나이 많은 족장들과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은 솔로몬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에 지금 짓고 있는 성전과 비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릴 때 솔로몬 성전을 보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성전이 파괴되고 이제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짓고자 하니 지난 시절로 인한 슬픔과 아픔이 밀려왔습니다. 학개 2:3에 보면 “너희 남은 사람들 가운데, 그 옛날 찬란하던 그 성전을 본 사람이 있느냐? 이제 이 성전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는 하찮게 보일 것이다.” 그들은 포로기를 거치면서 성전의 소중함과 성전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우리는 신앙생활의 본질을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흩어져야 하고, 만날 수 없게 되면서,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여겼던 주일예배, 기도모임, 동역자들과의 관계와 일상적인 만남의 소중함을 절감했습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가 무엇인지,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해는 함께 식사를 하고 교제하며 주 안에서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제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소감을 써서 나누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성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러 사람이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한 일인데 이제 성전을 짓는다고 생각할 때 기쁨이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크게 함성을 질렀습니다. 모든 백성이 큰 소리로 즐겁게 불렀다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이 하신 일들과 그리고 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저자 에스라는 왜 엇갈린 반응을 기록했을까요? 옛 건물만 기억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과 방향을 따라가야 합니다.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은 것은 산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하지만 지금 살아 있는 청년들을 통해서 주님은 새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젊은이들을 믿어야 합니다. 이전 일만 생각하고, 현재를 이전 일과 비교만 하다가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옛날 성공했던 기억이 우상이 되어 새로운 도전을 하지 못하면 역사는 퇴보하게 되어 있습니다. 통곡하던 노인들은 기뻐서 소리 지르는 젊은 세대가 이해가 안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 때보다 돌아온 숫자도 적고 솔로몬 성전보다 규모도 작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출애굽보다 새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일, 나중 영광은 새 성전 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건물 성전을 없애고 인격 성전 되신 예수님의 오심을 바라볼 때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볼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눈물도 없고 애통하는 것도 없는 그 나라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일어나는 것은 통곡할 일이 아니라 큰 소리를 지르며 기뻐할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점점 더 진보하고 있고, 메시야의 시대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43:18). 옛 사람들은 크기를 중심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용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전에는 성취 중심으로 생각했다면 이제는 관계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개인주의, 돈을 최고로 생각하는 풍조,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그를 섬기며 청년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정체하거나 퇴보하지 않고 전진하고 있습니다.
둘째, 대적들의 방해 공작(4:1-24).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대적이라는 말이 처음 나옵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앗수르 왕 산헤립(B.C704-681)의 아들 에살핫돈(B.C681-669)이 옮겨서 정착시킨 사람들의 후손을 말합니다. B.C722년에 북이스라엘은 살만에셀 5세에게 멸망당하고, 그 뒤를 이은 사르곤 2세(B.C721-705)가 이주 정책을 폈습니다. 그 이후 지속적으로 이주 정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자기들의 신들도 섬기는 혼합주의자들이었습니다. 앞에서 모든 나라 백성을 단지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3:3). 그들은 단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적이면 싸워야 할 사람들입니다. 두려워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왜 싸워야 하는 사람들로 보게 되었을까요? 유다와 베냐민 자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이방인의 신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섞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4:2,3을 보십시오.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유다 자손들은 분명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그 땅 백성이 화합과 협력을 제안했을 때,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성전을 함께 건축하자는 제안은 일면 솔깃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외국인이나 다름없는 상황이고 모든 것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도와달라고 요청해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이 먼저 다가와서 성전을 함께 짓자고 하니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들과 연합하면 그 땅에 정착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성전 건축도 수월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행정적인 면에서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성전을 단순히 건물 짓는 걸로 생각했으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공동체(community)입니다. 건물이 없던 바벨론에서도 하나님은 성소가 되셨습니다(겔17:16). 그러므로 공동체의 정체성, 공동체의 신앙이 성전 건축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혼합주의자들이 공동체 속에 들어오면 그들의 신앙이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불순물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속임수가 숨어 있습니다. 나중에 지분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중심의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신들을 함께 섬기는 사실상 자기중심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유익이 우선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연합 사역을 통한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섞이게 되면 정체성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정체성을 흐르게 하면서까지 연합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하나님의 말씀, 제자양성, 세계선교 중심으로 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다른 방향으로 하고자 하면 거절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새 번역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할 일이오.” 그들은 바벨론에 잡혀가기 전에 혼합주의로 인해서 망했습니다. 이제 우리 홀로 하겠다는 말은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하겠다, 사마리아의 영향을 차단하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부족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고 공동체를 이루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살아보겠다, 성경이 가르치는 정신대로 하나님의 성전을, 교회를 세워보겠다는 것입니다. 좀 불편하고, 힘들지만 성경대로, 성경의 정신대로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홀로 건축하겠다는 말은 단순히 그들과 담을 쌓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전 공동체, 즉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데 하나님을 중심으로 구별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구별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삶으로써 예수님이 말씀하신 언덕 위의 도시와 같이 매력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가 있고, 없는 자들, 병든 자들에 대한 긍휼이 있고, 차별이 없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6절을 보십시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저자 에스라는 2차 예루살렘 귀환 직전으로부터 80년 전에 일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땅 백성이 함께 건축을 하겠다고 하다가 거절을 당하자 건축을 훼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들은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했습니다. ‘손을 약하게 한다’는 것은 두렵게 하거나 낙담시켜서 건축하고 싶은 의욕이나 열정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용역깡패를 동원해서 위협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사 왕 고레스 시대부터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행정력을 동원하여 관리들에게 뇌물을 줘서 건축을 막았습니다. 고레스가 성전 건축 조서를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건축을 중단시킨 걸 보면, 그들이 얼마나 교묘하고도 과감하게 방해공작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적들이 오랜 기간 방해하자 유다 백성들은 의욕이 떨어지고, 그들의 관심이 자기 집을 사고 꾸미는 데로 많이 돌아갔습니다. 집을 사고 자녀를 잘 키우는 건 필요한 일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직장의 균형을 이루면서 주님을 섬기면 좋은데 아예 한쪽으로 관심을 돌려버리게 되면 균형을 잃고 각종 병이 생기게 됩니다.
성전 건축 공사는 다리오 왕 제 2년까지 중단되었습니다. BC. 538년부터 522년까지 16년간 중단되었습니다. 아닥사스다 때는 성벽을 건축할 때입니다.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페르시아 공용어인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습니다. 그 조서에는 네 가지 근거를 대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건축하는 예루살렘 성읍을 패역하고 악한 성읍이라고 부릅니다(12). 둘째로는 성읍을 건축하면 조공, 관세, 통행세를 바치지 않아 왕에게 손해가 될 거라고 말합니다(13). 셋째로는 역사적으로 항상 반역하고 폭동을 일으켜 왔고, 예루살렘이 무너진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썼습니다(15). 마지막으로 왕의 영토가 없어질 거라고 보고하였습니다(16).
대적들이 올린 글을 보고 아닥사스다 왕이 조서를 내렸습니다. “너희가 올린 글을 내 앞에서 낭독시키고 명령하여 살펴보니 과연 이 성읍이 예로부터 왕들을 거역하며 그 중에서 항상 패역하고 반역하는 일을 행하였으며 옛적에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큰 군왕들이 있어서 강 건너편 모든 땅이 그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다 바쳤도다. 이제 너희는 명령을 전하여 그 사람들에게 공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 너희는 삼가서 이 일에 게으르지 말라 어찌하여 화를 더하여 왕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랴(18-22).”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였습니다. 유다 자손들은 70년 포로생활을 버티는 것도 중요했지만 앞으로 100년간 계속되는 성전 성벽 건축 방해를 견뎌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고 구별된 삶을 살고자 할 때 치루어야 할 대가는 매우 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려면 값비싼 댓가를 치루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나와 가족들, 물질적, 정신적 희생이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 과정이 험할지라도,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을 섬기는 순수한 신앙 위에 세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빨리 회복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제대로 회복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겪는 방해와 위협과 같은 어려움을 통해서 혼합주의 신앙과 싸우게 하시고, 이를 통해 건물만 짓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에 다른 무엇보다 말씀에 기초한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고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고자 힘써야 합니다. 예배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때까지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그와 동행할 때 세상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여러 모양의 어려움과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사명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버리고 자발적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우선주의 신앙, 절대적인 말씀 중심의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며 매력적인 공동체를 세워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에스라 3장,4장
요절 | 에스라 4:3
홀로 건축하리라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는데 방해가 있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고 나서 성벽을 건축할 때도 방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방해를 받게 되었을까요? 앗수르에서 옮겨와서 유다에 와 살고 있던 사람들이 같이 성전을 짓자고 하는데 홀로 짓겠다고 하니까 방해를 합니다. 홀로 짓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섞이지 않고 지켜내야 하는 신앙의 순수성은 무엇일까요?
첫째, 성전 지대를 놓을 때의 감격(3:1-13).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습니다.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제사장 예수아와 그의 형제들과 총독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고자 했습니다.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왜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했을까요? 그들이 조상들이 살던 땅에 돌아왔지만, 외국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제정일치 시대에 성전 재건은 곧 정치 공동체의 재건으로 비칠 수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 때는 대적들이 성읍과 성곽 건축은 곧 반란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고발하였습니다(4:12,13).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즉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신교 사회에서 그들이 살아남으려면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이 이방인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빛나게 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주변 사람들이 두려웠지만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생겼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두렵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규칙적으로 아침과 저녁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에게 성전 건물은 없었지만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자세가 자발적입니다. 형식과 의식에 따른 예배가 아니라 말씀에 기초한 예배를 드리고자 힘썼습니다. 그들은 포로기를 거치며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던 과거 선조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형식을 의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의 회개와 헌신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건물이나 형식에 매이지 않고 순수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였습니다. 이것을 볼 때, 지난 역사는 성전이 파괴되고 무너지는 비극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성전시대의 종말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겪으면서 성전이나 나라나 땅보다 하나님과의 언약이 얼마나 더 소중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사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도록 올바른 예배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습니다. 두려움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안하는 대신, 온 힘을 다해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정성껏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 때에 두려워서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에 집중했을 때, 두려워하던 데서 용기와 힘을 얻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그대로 하라고 하인들을 준비시켰던 것처럼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기까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성전 건축을 시작했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 이에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니라.” 성전 건축에 관심을 갖고 재료를 모으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둘째 해 행정력과 권력이 있는 총독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일어났습니다. 총독 스룹바벨의 지휘 하에 레위인들이 성전 공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레위인들은 성전 공사를 감독하였습니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감사하였습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모든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나이 많은 족장들과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은 솔로몬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에 지금 짓고 있는 성전과 비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릴 때 솔로몬 성전을 보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성전이 파괴되고 이제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짓고자 하니 지난 시절로 인한 슬픔과 아픔이 밀려왔습니다. 학개 2:3에 보면 “너희 남은 사람들 가운데, 그 옛날 찬란하던 그 성전을 본 사람이 있느냐? 이제 이 성전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는 하찮게 보일 것이다.” 그들은 포로기를 거치면서 성전의 소중함과 성전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우리는 신앙생활의 본질을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흩어져야 하고, 만날 수 없게 되면서,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여겼던 주일예배, 기도모임, 동역자들과의 관계와 일상적인 만남의 소중함을 절감했습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가 무엇인지,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해는 함께 식사를 하고 교제하며 주 안에서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제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소감을 써서 나누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성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러 사람이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한 일인데 이제 성전을 짓는다고 생각할 때 기쁨이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크게 함성을 질렀습니다. 모든 백성이 큰 소리로 즐겁게 불렀다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이 하신 일들과 그리고 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저자 에스라는 왜 엇갈린 반응을 기록했을까요? 옛 건물만 기억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과 방향을 따라가야 합니다.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은 것은 산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하지만 지금 살아 있는 청년들을 통해서 주님은 새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젊은이들을 믿어야 합니다. 이전 일만 생각하고, 현재를 이전 일과 비교만 하다가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옛날 성공했던 기억이 우상이 되어 새로운 도전을 하지 못하면 역사는 퇴보하게 되어 있습니다. 통곡하던 노인들은 기뻐서 소리 지르는 젊은 세대가 이해가 안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 때보다 돌아온 숫자도 적고 솔로몬 성전보다 규모도 작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출애굽보다 새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일, 나중 영광은 새 성전 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건물 성전을 없애고 인격 성전 되신 예수님의 오심을 바라볼 때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볼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눈물도 없고 애통하는 것도 없는 그 나라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일어나는 것은 통곡할 일이 아니라 큰 소리를 지르며 기뻐할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점점 더 진보하고 있고, 메시야의 시대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43:18). 옛 사람들은 크기를 중심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용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전에는 성취 중심으로 생각했다면 이제는 관계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개인주의, 돈을 최고로 생각하는 풍조,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그를 섬기며 청년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정체하거나 퇴보하지 않고 전진하고 있습니다.
둘째, 대적들의 방해 공작(4:1-24).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대적이라는 말이 처음 나옵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앗수르 왕 산헤립(B.C704-681)의 아들 에살핫돈(B.C681-669)이 옮겨서 정착시킨 사람들의 후손을 말합니다. B.C722년에 북이스라엘은 살만에셀 5세에게 멸망당하고, 그 뒤를 이은 사르곤 2세(B.C721-705)가 이주 정책을 폈습니다. 그 이후 지속적으로 이주 정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자기들의 신들도 섬기는 혼합주의자들이었습니다. 앞에서 모든 나라 백성을 단지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3:3). 그들은 단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적이면 싸워야 할 사람들입니다. 두려워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왜 싸워야 하는 사람들로 보게 되었을까요? 유다와 베냐민 자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이방인의 신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섞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4:2,3을 보십시오.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유다 자손들은 분명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그 땅 백성이 화합과 협력을 제안했을 때,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성전을 함께 건축하자는 제안은 일면 솔깃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외국인이나 다름없는 상황이고 모든 것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도와달라고 요청해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이 먼저 다가와서 성전을 함께 짓자고 하니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들과 연합하면 그 땅에 정착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성전 건축도 수월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행정적인 면에서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성전을 단순히 건물 짓는 걸로 생각했으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공동체(community)입니다. 건물이 없던 바벨론에서도 하나님은 성소가 되셨습니다(겔17:16). 그러므로 공동체의 정체성, 공동체의 신앙이 성전 건축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혼합주의자들이 공동체 속에 들어오면 그들의 신앙이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불순물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속임수가 숨어 있습니다. 나중에 지분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중심의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신들을 함께 섬기는 사실상 자기중심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유익이 우선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연합 사역을 통한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섞이게 되면 정체성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정체성을 흐르게 하면서까지 연합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하나님의 말씀, 제자양성, 세계선교 중심으로 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다른 방향으로 하고자 하면 거절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새 번역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할 일이오.” 그들은 바벨론에 잡혀가기 전에 혼합주의로 인해서 망했습니다. 이제 우리 홀로 하겠다는 말은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하겠다, 사마리아의 영향을 차단하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부족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고 공동체를 이루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살아보겠다, 성경이 가르치는 정신대로 하나님의 성전을, 교회를 세워보겠다는 것입니다. 좀 불편하고, 힘들지만 성경대로, 성경의 정신대로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홀로 건축하겠다는 말은 단순히 그들과 담을 쌓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전 공동체, 즉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데 하나님을 중심으로 구별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구별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삶으로써 예수님이 말씀하신 언덕 위의 도시와 같이 매력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가 있고, 없는 자들, 병든 자들에 대한 긍휼이 있고, 차별이 없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6절을 보십시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저자 에스라는 2차 예루살렘 귀환 직전으로부터 80년 전에 일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땅 백성이 함께 건축을 하겠다고 하다가 거절을 당하자 건축을 훼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들은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했습니다. ‘손을 약하게 한다’는 것은 두렵게 하거나 낙담시켜서 건축하고 싶은 의욕이나 열정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용역깡패를 동원해서 위협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사 왕 고레스 시대부터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행정력을 동원하여 관리들에게 뇌물을 줘서 건축을 막았습니다. 고레스가 성전 건축 조서를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건축을 중단시킨 걸 보면, 그들이 얼마나 교묘하고도 과감하게 방해공작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적들이 오랜 기간 방해하자 유다 백성들은 의욕이 떨어지고, 그들의 관심이 자기 집을 사고 꾸미는 데로 많이 돌아갔습니다. 집을 사고 자녀를 잘 키우는 건 필요한 일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직장의 균형을 이루면서 주님을 섬기면 좋은데 아예 한쪽으로 관심을 돌려버리게 되면 균형을 잃고 각종 병이 생기게 됩니다.
성전 건축 공사는 다리오 왕 제 2년까지 중단되었습니다. BC. 538년부터 522년까지 16년간 중단되었습니다. 아닥사스다 때는 성벽을 건축할 때입니다.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페르시아 공용어인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습니다. 그 조서에는 네 가지 근거를 대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건축하는 예루살렘 성읍을 패역하고 악한 성읍이라고 부릅니다(12). 둘째로는 성읍을 건축하면 조공, 관세, 통행세를 바치지 않아 왕에게 손해가 될 거라고 말합니다(13). 셋째로는 역사적으로 항상 반역하고 폭동을 일으켜 왔고, 예루살렘이 무너진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썼습니다(15). 마지막으로 왕의 영토가 없어질 거라고 보고하였습니다(16).
대적들이 올린 글을 보고 아닥사스다 왕이 조서를 내렸습니다. “너희가 올린 글을 내 앞에서 낭독시키고 명령하여 살펴보니 과연 이 성읍이 예로부터 왕들을 거역하며 그 중에서 항상 패역하고 반역하는 일을 행하였으며 옛적에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큰 군왕들이 있어서 강 건너편 모든 땅이 그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다 바쳤도다. 이제 너희는 명령을 전하여 그 사람들에게 공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 너희는 삼가서 이 일에 게으르지 말라 어찌하여 화를 더하여 왕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랴(18-22).”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였습니다. 유다 자손들은 70년 포로생활을 버티는 것도 중요했지만 앞으로 100년간 계속되는 성전 성벽 건축 방해를 견뎌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고 구별된 삶을 살고자 할 때 치루어야 할 대가는 매우 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려면 값비싼 댓가를 치루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나와 가족들, 물질적, 정신적 희생이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 과정이 험할지라도,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을 섬기는 순수한 신앙 위에 세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빨리 회복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제대로 회복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겪는 방해와 위협과 같은 어려움을 통해서 혼합주의 신앙과 싸우게 하시고, 이를 통해 건물만 짓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에 다른 무엇보다 말씀에 기초한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고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고자 힘써야 합니다. 예배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때까지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그와 동행할 때 세상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여러 모양의 어려움과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사명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버리고 자발적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우선주의 신앙, 절대적인 말씀 중심의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며 매력적인 공동체를 세워나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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