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2024년 스1강(1,2장)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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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에스라 1 강
말씀 | 에스라 1장,2장
요절 | 에스라 1:1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우리가 에스라서를 공부하고 느헤미야서를 연속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서의 저자는 에스라입니다.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다가 1차로 스룹바벨과 약 4만여명이 귀환하고(B.C538년) 성전을 지었습니다(B.C515년). 그 내용이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에스라는 2차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영적 부흥을 일으켰습니다(B.C458년). 그러므로 성전 완공과 에스라의 귀환은 6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3차 포로귀환 후에 느헤미야에 의해서 성벽이 재건됩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그들은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면서 자신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목표와 방향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후손들에게 가르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이루려고 바사 즉 페르시아 왕 고레스 원년에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예레미야는 열방의 선지자로 부르심 받았습니다(렘1:5). 선지자들이 볼 때 여러 나라는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쓰시는 도구들입니다.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내가 그 땅을 향하여 선언한 바 곧 예레미야가 모든 민족을 향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라(렘25:11-1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29:10).”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고레스를 목자로 택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나 주의 말씀을 세세토록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딛고 설 수 있는 반석과 같습니다.
고레스에 대해서는 헤로도토스의 책 ‘역사’와 크네노폰의 책 ‘키로파에디아’를 통해 알 수 있는데, 그는 통일왕조를 이룩한 후에도 그 동안의 여러 제국들의 왕들과 달리 인간의 삶을 돌보는 참 군주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모든 종교들을 존중하고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군인이 점령지 백성을 약탈하는 것을 금하고, 빚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종이 되는 것에 반대하고, 인간들을 억압하지 말고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급여를 지불하라고 하였습니다. 각 민족마다 고유한 민족적 정체성을 존중하였으며, 피정복민족에 대하여서도 넓은 아량으로 감싸 포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2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많은 지도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세간으로부터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심종석. “페르시아 아케메니아 왕조의 세계경영사적 의의”. 로고스경영연구 제7권 2호. 2009. 10. p46 그는 헤로도토스의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크네노폰의 ‘키로파에디아’를 인용하여 고레스에 대해 스케일이 큰 정복자로, 자애로운 성군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간으로부터 추앙받는 위대한 인물로 평가한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고레스의 인격이나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을 하셨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입니다. 1,2절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감동시키다’는 단어(עור)는 ‘휘젓다, 움직이게 하다, 깨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 새 일이 일어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 감동이 되면 다른 사람이 말릴 수 없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70년 만에 돌아오는 일이나, 이런 그들을 다른 민족들이 기쁘게 지원한 일이나, 모두 인류사에 없던 일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 ‘감동적인 역사’가 일어납니다.
포로기 이후 성전이 이방 왕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한 것이 새롭지 않습니까? 다윗이 시작했고, 솔로몬이 완성한 성전을 이방 왕의 마음이 감동해서 다시 짓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통해,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격이 좀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사56:7). 일반적으로 ‘감동’은 어떤 사실을 깨닫고 이해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감동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감동하게 되면 자발적이 됩니다. 광야의 성소도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들을 통해 지어졌고(출35:21,36:2). 솔로몬 성전도 성령에 감동된 사람 다윗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 5절에 보면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자들이 다 일어나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짓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이시기 전에 사람들은 기존 상태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 전까지는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자 안정된 바벨론 생활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들은 대부분 바벨론 땅에서 터전을 잡고 살던 2,3세들이었습니다. 그동안 바벨론 땅에서 다진 삶의 터전을 놔두고 새로운 땅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이방인처럼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 년에 한 번 명절에 고향에 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돌아가는 길도 1500Km로 멀고 험합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보여 주실 새로운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하고 상황이 비슷합니다(창12:1).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여호와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루살렘이 황폐되어 있는데, 성전이 없는데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은 역사에 들어와서 일하고 그 역사를 주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을 쓰셔서 요셉과 마리아를 갈릴리에서 베들레헴으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시고 그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마음이 움직여 순종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4절을 보면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면 많은 금과 놋, 재목들, 가죽과 실로 짠 천들이 필요합니다. 또 자재를 운반할 짐승과 수레도 필요하고 제물에 쓰일 짐승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변 사람들로 페르샤 제국 사람들로 하여금 예물을 드려 성전을 세우는 일을 도우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유대인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하였습니다. 일종의 예루살렘 정착지원금과 성전건축비를 지원 받게 한 것입니다. 고레스가 자기의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유대인들과 그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 기쁘게 예물을 드리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라고 명령한 것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개요 금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밖의 그릇이 천 개이니 금, 은 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 사면 사람들이 금은 그릇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기쁘게 예물을 드렸습니다. 고레스는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시키시니,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새로운 역사를 이어갈 희망과 비전이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압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셨고, 이방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공동체를 다스리시며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소망을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임을 통해서 캠퍼스 복음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다음 주에 있는 전국 학생 수양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학생들 안에 어떤 일을 행하실지, 어떤 감동을 주실지 기대가 됩니다.
저는 최근에 우리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일용할 양식 소감을 나누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감사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주위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고, 다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실 때에 순종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갈등이 되지만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해 태국 방콕 센터 지원을 위해서 헌금을 하였습니다. 방콕센터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믿음으로 물질을 드렸을 때에 여러 센터가 동참을 하였고 방콕 센터 봉헌식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섬겨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유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42360명입니다. 제사장이 4289명으로 전체의 1/10정도입니다. 상대적으로 레위인들이 적었는데 2차 귀환 때 레위인들을 찾아서 38명을 데리고 옵니다. 레위인들을 찾아가서 설득하고 독려하는 가운데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레위인들은 오늘날 풀타임 사역자와 같습니다.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 풀타임으로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벨론에 살던 레위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돌아온 사람들의 족보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또 제사장 중에 하바야 자손, 학고스 자손, 바르실래 자손으로 계보에서 이름을 찾을 수 없어서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배제시키지 않았습니다.
기록한 계보의 특징과 성격은 무엇일까요? 돌아온 사람들을 한 사람 단위로 세고 있습니다. 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 중에서 돌아 온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아도, 또 출애굽 규모와 비교해 보아도 매우 적습니다(민2:32). 그렇지만 한 사람을 의미 있고 소중하게 보고 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고생길이 뻔하였습니다. 그들이 소수지만 역사의식과 정체성이 분명하였습니다. 저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브라함과 같은 복의 근원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감동된 사람들이요, 어려운 현실만 보지 않고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역사의 비전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의식 있고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새 역사의 주역들입니다.
계보에 ‘느디님’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성전에서 막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성전 일꾼들입니다(8:20). 상당수가 히브리 이름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은 이방인들로 보입니다. 그들은 유다로 돌아가면 성전에서 막일을 해야 하는 데 왜 자원해서 가려고 했을까요? 느헤미야 10장 28절에 보면, 이들은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겠다고 맹세하는 새 언약에도 참여합니다. 이들이야말로 신분과 직무에 상관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계보는 나중에 느헤미야 7장에서 다시 한 번 소개됩니다. 그럴 정도로 중요한 명단입니다. 저자는 그들이 비록 소수이지만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잇는 사람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 왕조가 무너졌고 페르시아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더 이상 나라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순결한 영적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영적인 개혁운동을 하게 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됩니다.
2장 70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라.” 그들은 조상이 물려준 대로 각 지파의 성읍을 차지하고 거기에 살았습니다.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 성읍에 돌아가 살았다는 것은 언약의 중요한 요소인 ‘땅’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언약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옛 고향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 언약의 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1차 포로귀환과 성전 건축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이방 왕의 마음을 감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방 왕 고레스가 자발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지으라 명령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얼마나 세계적인 분이신지 보여줍니다. 저자가 이런 사실들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전히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우리가 이렇게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도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시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된 소수의 대학생들이 성서한국, 세계 선교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이들에 의해서 써진 역사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우리가 그 역사를 이어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마음이 감동된 사람들을 통해 구원과 제자 양성과 세계 선교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마음이 감동된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실 새 일을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말씀 | 에스라 1장,2장
요절 | 에스라 1:1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우리가 에스라서를 공부하고 느헤미야서를 연속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서의 저자는 에스라입니다.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다가 1차로 스룹바벨과 약 4만여명이 귀환하고(B.C538년) 성전을 지었습니다(B.C515년). 그 내용이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에스라는 2차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영적 부흥을 일으켰습니다(B.C458년). 그러므로 성전 완공과 에스라의 귀환은 6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3차 포로귀환 후에 느헤미야에 의해서 성벽이 재건됩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그들은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면서 자신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목표와 방향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후손들에게 가르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이루려고 바사 즉 페르시아 왕 고레스 원년에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예레미야는 열방의 선지자로 부르심 받았습니다(렘1:5). 선지자들이 볼 때 여러 나라는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쓰시는 도구들입니다.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내가 그 땅을 향하여 선언한 바 곧 예레미야가 모든 민족을 향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라(렘25:11-1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29:10).”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고레스를 목자로 택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나 주의 말씀을 세세토록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딛고 설 수 있는 반석과 같습니다.
고레스에 대해서는 헤로도토스의 책 ‘역사’와 크네노폰의 책 ‘키로파에디아’를 통해 알 수 있는데, 그는 통일왕조를 이룩한 후에도 그 동안의 여러 제국들의 왕들과 달리 인간의 삶을 돌보는 참 군주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모든 종교들을 존중하고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군인이 점령지 백성을 약탈하는 것을 금하고, 빚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종이 되는 것에 반대하고, 인간들을 억압하지 말고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급여를 지불하라고 하였습니다. 각 민족마다 고유한 민족적 정체성을 존중하였으며, 피정복민족에 대하여서도 넓은 아량으로 감싸 포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2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많은 지도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세간으로부터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심종석. “페르시아 아케메니아 왕조의 세계경영사적 의의”. 로고스경영연구 제7권 2호. 2009. 10. p46 그는 헤로도토스의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크네노폰의 ‘키로파에디아’를 인용하여 고레스에 대해 스케일이 큰 정복자로, 자애로운 성군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간으로부터 추앙받는 위대한 인물로 평가한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고레스의 인격이나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을 하셨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입니다. 1,2절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감동시키다’는 단어(עור)는 ‘휘젓다, 움직이게 하다, 깨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 새 일이 일어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 감동이 되면 다른 사람이 말릴 수 없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70년 만에 돌아오는 일이나, 이런 그들을 다른 민족들이 기쁘게 지원한 일이나, 모두 인류사에 없던 일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 ‘감동적인 역사’가 일어납니다.
포로기 이후 성전이 이방 왕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한 것이 새롭지 않습니까? 다윗이 시작했고, 솔로몬이 완성한 성전을 이방 왕의 마음이 감동해서 다시 짓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통해,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격이 좀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사56:7). 일반적으로 ‘감동’은 어떤 사실을 깨닫고 이해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감동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감동하게 되면 자발적이 됩니다. 광야의 성소도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들을 통해 지어졌고(출35:21,36:2). 솔로몬 성전도 성령에 감동된 사람 다윗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 5절에 보면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자들이 다 일어나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짓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이시기 전에 사람들은 기존 상태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 전까지는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자 안정된 바벨론 생활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들은 대부분 바벨론 땅에서 터전을 잡고 살던 2,3세들이었습니다. 그동안 바벨론 땅에서 다진 삶의 터전을 놔두고 새로운 땅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이방인처럼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 년에 한 번 명절에 고향에 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돌아가는 길도 1500Km로 멀고 험합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보여 주실 새로운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하고 상황이 비슷합니다(창12:1).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여호와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루살렘이 황폐되어 있는데, 성전이 없는데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은 역사에 들어와서 일하고 그 역사를 주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을 쓰셔서 요셉과 마리아를 갈릴리에서 베들레헴으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시고 그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마음이 움직여 순종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4절을 보면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면 많은 금과 놋, 재목들, 가죽과 실로 짠 천들이 필요합니다. 또 자재를 운반할 짐승과 수레도 필요하고 제물에 쓰일 짐승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변 사람들로 페르샤 제국 사람들로 하여금 예물을 드려 성전을 세우는 일을 도우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유대인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하였습니다. 일종의 예루살렘 정착지원금과 성전건축비를 지원 받게 한 것입니다. 고레스가 자기의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유대인들과 그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 기쁘게 예물을 드리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라고 명령한 것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개요 금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밖의 그릇이 천 개이니 금, 은 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 사면 사람들이 금은 그릇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기쁘게 예물을 드렸습니다. 고레스는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시키시니,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새로운 역사를 이어갈 희망과 비전이 현실의 어려움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압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셨고, 이방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공동체를 다스리시며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소망을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임을 통해서 캠퍼스 복음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다음 주에 있는 전국 학생 수양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학생들 안에 어떤 일을 행하실지, 어떤 감동을 주실지 기대가 됩니다.
저는 최근에 우리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일용할 양식 소감을 나누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감사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주위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고, 다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실 때에 순종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갈등이 되지만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해 태국 방콕 센터 지원을 위해서 헌금을 하였습니다. 방콕센터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믿음으로 물질을 드렸을 때에 여러 센터가 동참을 하였고 방콕 센터 봉헌식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섬겨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유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42360명입니다. 제사장이 4289명으로 전체의 1/10정도입니다. 상대적으로 레위인들이 적었는데 2차 귀환 때 레위인들을 찾아서 38명을 데리고 옵니다. 레위인들을 찾아가서 설득하고 독려하는 가운데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레위인들은 오늘날 풀타임 사역자와 같습니다.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 풀타임으로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벨론에 살던 레위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돌아온 사람들의 족보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또 제사장 중에 하바야 자손, 학고스 자손, 바르실래 자손으로 계보에서 이름을 찾을 수 없어서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배제시키지 않았습니다.
기록한 계보의 특징과 성격은 무엇일까요? 돌아온 사람들을 한 사람 단위로 세고 있습니다. 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 중에서 돌아 온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아도, 또 출애굽 규모와 비교해 보아도 매우 적습니다(민2:32). 그렇지만 한 사람을 의미 있고 소중하게 보고 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고생길이 뻔하였습니다. 그들이 소수지만 역사의식과 정체성이 분명하였습니다. 저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브라함과 같은 복의 근원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감동된 사람들이요, 어려운 현실만 보지 않고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역사의 비전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의식 있고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새 역사의 주역들입니다.
계보에 ‘느디님’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성전에서 막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성전 일꾼들입니다(8:20). 상당수가 히브리 이름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은 이방인들로 보입니다. 그들은 유다로 돌아가면 성전에서 막일을 해야 하는 데 왜 자원해서 가려고 했을까요? 느헤미야 10장 28절에 보면, 이들은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겠다고 맹세하는 새 언약에도 참여합니다. 이들이야말로 신분과 직무에 상관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계보는 나중에 느헤미야 7장에서 다시 한 번 소개됩니다. 그럴 정도로 중요한 명단입니다. 저자는 그들이 비록 소수이지만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잇는 사람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 왕조가 무너졌고 페르시아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더 이상 나라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순결한 영적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영적인 개혁운동을 하게 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됩니다.
2장 70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라.” 그들은 조상이 물려준 대로 각 지파의 성읍을 차지하고 거기에 살았습니다.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 성읍에 돌아가 살았다는 것은 언약의 중요한 요소인 ‘땅’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언약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옛 고향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 언약의 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1차 포로귀환과 성전 건축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이방 왕의 마음을 감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방 왕 고레스가 자발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지으라 명령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얼마나 세계적인 분이신지 보여줍니다. 저자가 이런 사실들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전히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우리가 이렇게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도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시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된 소수의 대학생들이 성서한국, 세계 선교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이들에 의해서 써진 역사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우리가 그 역사를 이어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마음이 감동된 사람들을 통해 구원과 제자 양성과 세계 선교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마음이 감동된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실 새 일을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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