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3년 신년 3강(엡3:1-21)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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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신년 말씀 제 3 강
말씀 | 에베소서 3:1-21
요절 | 에베소서 3:18,19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난 주에 저는 스탭 목자님들과 함께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았습니다. ‘레미제라블’은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장발장은 ‘내가 누구인가(Who am I)’를 찾아가는 진리의 근본을 대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누이 동생과 조카들의 배고픔 때문에 빵을 훔침으로써 감옥에 갇히고 일생 험난한 길을 갑니다. 가석방 상태에서 은 접시를 훔쳤는데 다시 헌병에게 붙잡혔습니다. 이때 신부가 그에게 은촛대까지 주며 용서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새 길을 가도록 격려합니다. 그는 시장으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가운데 자기를 대신해서 감옥으로 끌려가는 무고한 사람이 있다는 보고를 자베르에게 받고 재판정에 나가 자신이 죄수 24601이라고 밝힙니다. 사람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돌려보내자 그는 은혜를 감당하는 새로운 길을 갑니다. 그러나 장발장이 죄인임을 밝히려고 끈질기게 추적하는 자는 율법을 상징하는 자베르 경감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의에 대한 원칙이 장발장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에 무너지자 결국 세느강에 투신해 자살합니다. 율법을 이기는 것이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마지막으로 장발장의 변화를 통해 창녀 판틴느와 그의 딸 코제트, 연인 마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파급효과를 가져옵니다. 장발장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그의 양딸 코제트와 마리우스와 혁명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은 함께 ‘사랑의 전사’가 되자고 노래를 부르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이는 부활을 상징합니다. 바로 장발장이 다시 사는 부활입니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복음 진리를 깊이 있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나는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그 답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예수님 안에서 내가 죄 사함을 받고, 그 은혜의 풍성함을 받아 목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던 장벽이 허물어지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공동체 안에 있는 여러 갈등을 해결 수 있는 비밀의 열쇠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고 실천할 때 우리는 ‘사랑의 전사’로서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주역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첫째,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일꾼(1-13) : 1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이러므로’란 2:19-22절을 받는 말씀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고 가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감옥에 갇히게 된 바울로 인해 낙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경륜을 그들이 이미 들었습니다. 바울은 계시로 비밀을 알게 되어 먼저 간단히 써서 보냈는데 그 내용이 무척 깊습니다. 그것을 읽으면 그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비밀입니다(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없습니다. 남녀 간의 차별도 없습니다. 빈부, 인종 간, 지역 간의 차별도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백정이 양반과 함께 교회의 일원이 되고 장로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백인들을 존경하고 아프리카나 동남아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회개하고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를 품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세계 선교를 한 결과 전 세계가 함께 국제 수양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가 된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우리 센터 정문 벽에 우리는 세계라는 글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세계가 하나 되는 일을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 복음이 사람들 사이를 화목하게 하고 평화가 깃들게 합니다. 진리를 알게 됨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법 앞에 정의가 시행되고 하나님 앞에서 평등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그가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로마의 죄수요 네로의 죄수이지만 자신을 그리스도의 포로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보화요 삶의 이유이요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께 사로잡혔을 때 삶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파했기 때문에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방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자 유대인들은 그를 율법을 파괴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고 분노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이 기근에 들어서 마게도냐 성도들의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왔을 때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함께 있었던 것을 보고 성전에 들여서 더럽혔다고 오해하여 소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바울은 이로 인해 체포되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교회의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였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것을 간증했습니다. 이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요 그가 직분을 감당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8).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11)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일꾼으로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한 마음으로 감당했습니다. 그의 사역이 확장될수록 그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 깊어졌고 더욱 겸손해졌습니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동역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충성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뿐만 아니라 많은 동역자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체험하고 이를 이방인에게 전하였습니다. 내 안에 은혜가 차고 넘쳐야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은혜가 없는데 어찌 남을 은혜롭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님과 연합한 삶을 살았을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고 진리의 말씀을 받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역사를 열심히 섬기다가 보면 자신의 영성이 고갈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구원 역사를 섬기면서 계속해서 영적인 충전을 하고 나누어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런 영적인 순환이 잘 이루어져야 건강한 사람이고 또 열매를 맺게 됩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해 나가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작은 성공은 자기의 재능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열매를 맺고 귀하게 쓰임 받기 위해서는 충성스럽게 일해야 합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역사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친히 이루어가십니다. 이 장구한 역사에 나는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십니다. 천사들이 모르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고 전하게 됩니다. 천사들은 우리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종들입니다(히1:14). 교회는 그만큼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바울은 더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여러 환난을 당하는 것이 왜 에베소 성도들의 영광이 됩니까? 이는 마치 한 교회에서 순교자가 나오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복음도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모습을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표현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바울과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손에서 상급을 얻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악으로부터 고난을 당하는 것을 더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기를 열망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참하고 초라한 자들을 사랑하여 외양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수치를 당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히브리서 11:24-26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 선교사님들은 아프리카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습니다. 짐바브웨의 한 선교사님은 믿고 신뢰하던 현지인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재산을 도둑맞았습니다. 또 얼마 있지 아니하여 집에 무장 강도들이 침입하여 있던 재산마저 다 훔쳐갔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매우 슬프고 원통합니다. 공의가 사라진 나라에서 그들을 섬기는 것이 고통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11절에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며 축복하셨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가난하게 살고 때로는 강도를 맞고 때로는 무시를 받는 모든 일들이 우리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당하는 여러 환난을 슬퍼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영광스럽게 여기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둘째, 무엇보다 속사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바울은 구원 받은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하도록 기도합니다. 속사람은 우리가 닮아가야 할 예수님의 형상입니다. 속사람은 겉 사람 즉 죽을 본성이 후패되어 갈 때에도 매일 매일 새롭게 되어갑니다(고후 4:16). 우리가 고난을 감당하려면 속사람이 강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약하게 합니까? 죄와 마음의 상처들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마귀와 그의 시험에 대항할 수 없고,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은 깊습니다. 그것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깊은 말씀 공부와 회개가 필요합니다(히4:12). 과거 마음의 상처는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온 사람들은 모두 치유를 받았습니다. 아직도 죄문제나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께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리고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마 8:2). 아직 분노나 쓴 뿌리나 슬픔이 있습니까? 주님께 나아가 진실되게 자신이 치료가 필요함을 고백하십시오. 예수님의 피는 어떤 죄와 병도 성령의 능력으로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히 9:13-14).
셋째,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기도합니다. 17b-1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의 기초가 하나님의 사랑에 놓여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기초가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견고히 놓여져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의 기초가 자기 사랑에 놓여 있다면 그와 그의 사역은 결국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알 수 있는 사랑, 체험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사랑은 측량할 수 없기에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지식을 혼자서 다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런 무한한 사랑을 이해하는데 다른 성도들의 존재가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모든 성도와 함께”라고 말함으로 다른 성도들의 존재가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는데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경험과 배경이 모두 합쳐져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은 모든 죄인들을 다 포함할 만큼 넓습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품는 사랑, 가능성 있는 사람뿐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람까지도 다 품는 사랑입니다. 쓸모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당장은 쓸모없는 사람들, 각종 병자들, 음란한 창기와 이기적인 세리도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센터 부엌 하수관의 얼음을 뜨거운 열로 녹이듯이 악랄한 강도도 그의 사랑에 녹아집니다. 주님은 거라사 광인, 사마리아 여인, 니고데모와 같은 귀족 등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또한 그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할 만큼 깁니다. 그의 사랑은 오래 오래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은 시간과 함께 식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그의 사랑은 깊이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음에까지 내려가십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지옥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모든 죄의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그의 사랑은 높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된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까지 올리실 정도로 높은 사랑입니다. 모세는 왕궁, 사치, 수행원, 그리고 영광을 포기하고 노예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있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동은 아무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모세가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고자 결심했습니다. 당시 동족들은 노예였고 밉살스런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혈족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험에 내던졌습니다. 어떻게요? 어떤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보고 해 받는 사람을 방어하고 보호해주었습니다. 해를 끼치던 사람은 죽였습니다. 그 다음 날 모세가 동일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는데 동족끼리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그들을 화해시키려고 하자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치며 말했습니다.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또 나를 죽이려 하느냐?” 모세는 이 말에 흥분하기 쉬웠습니다. 그는 자기의 진심을 몰라보는 놈이라며 그도 또한 세게 쳐서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하나님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40년 후에 그는 다시 그 백성을 바로의 손아귀에서 구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할 줄도 모르고 감사하지도 않는 동족에게로 보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을 피하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많은 이적들이 있은 후에, 광야에서 그의 손으로 기사가 일어난 후에도 그들은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들 앞에 엎드리거나 그들의 손을 피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불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여전히 그들을 열정적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하며 하나님께 가증한 죄를 범했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그들이 구원받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자기도 그들과 함께 기꺼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실로 미치도록 사랑한 사랑이 있으며 끝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에게 잘못을 범했던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시편 106:32절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그들 때문에 재난이 모세에게 이르렀나니” 이 모든 일이 있은 후에도 모세는 자신을 불태워 그들을 사랑하여 제 정신이 아니었으며, 그들을 위해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합니까? 그는 자신을 핍박하고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했습니다(롬9:3). 그러나 가장 위대한 사랑의 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종이 되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7-8).” 주님이 오셨을 때 이방인의 길로 가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에게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먼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전세계를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을 품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그러나 주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참람하다,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유혹하던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이런 말을 들으셨을 때 더욱 큰 자비를 베푸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난 후에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주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에도 십자가 전에 잔인하게 대했던 사람들과 그 후에 잔인하게 대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그는 사도들을 보내서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랑으로 전 세계를 뒤흔드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무한하고 충만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이 사랑의 온전함에 이를 때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보다 더 강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은 능력입니다. 사랑은 지칠 줄 모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차 있었기 때문에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섬기고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모든 시련을 다 삼켜버리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 되는 길은 무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품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이긴다고 했습니다(고전13). 오늘날 많은 교회 공동체의 문제는 결국 뜨겁고 넘치는 사랑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말과 논리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자기희생적 사랑, 결국 십자가로 인생들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무엇이 제자 양성과 기독교 공동체 사역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각 신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의 본을 통해 돕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라고 사랑하여 하나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에베소서 3:1-21
요절 | 에베소서 3:18,19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난 주에 저는 스탭 목자님들과 함께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았습니다. ‘레미제라블’은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장발장은 ‘내가 누구인가(Who am I)’를 찾아가는 진리의 근본을 대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누이 동생과 조카들의 배고픔 때문에 빵을 훔침으로써 감옥에 갇히고 일생 험난한 길을 갑니다. 가석방 상태에서 은 접시를 훔쳤는데 다시 헌병에게 붙잡혔습니다. 이때 신부가 그에게 은촛대까지 주며 용서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새 길을 가도록 격려합니다. 그는 시장으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가운데 자기를 대신해서 감옥으로 끌려가는 무고한 사람이 있다는 보고를 자베르에게 받고 재판정에 나가 자신이 죄수 24601이라고 밝힙니다. 사람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돌려보내자 그는 은혜를 감당하는 새로운 길을 갑니다. 그러나 장발장이 죄인임을 밝히려고 끈질기게 추적하는 자는 율법을 상징하는 자베르 경감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의에 대한 원칙이 장발장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에 무너지자 결국 세느강에 투신해 자살합니다. 율법을 이기는 것이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마지막으로 장발장의 변화를 통해 창녀 판틴느와 그의 딸 코제트, 연인 마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파급효과를 가져옵니다. 장발장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그의 양딸 코제트와 마리우스와 혁명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은 함께 ‘사랑의 전사’가 되자고 노래를 부르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이는 부활을 상징합니다. 바로 장발장이 다시 사는 부활입니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복음 진리를 깊이 있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나는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그 답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예수님 안에서 내가 죄 사함을 받고, 그 은혜의 풍성함을 받아 목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던 장벽이 허물어지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공동체 안에 있는 여러 갈등을 해결 수 있는 비밀의 열쇠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고 실천할 때 우리는 ‘사랑의 전사’로서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주역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첫째,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일꾼(1-13) : 1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이러므로’란 2:19-22절을 받는 말씀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고 가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감옥에 갇히게 된 바울로 인해 낙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경륜을 그들이 이미 들었습니다. 바울은 계시로 비밀을 알게 되어 먼저 간단히 써서 보냈는데 그 내용이 무척 깊습니다. 그것을 읽으면 그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비밀입니다(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없습니다. 남녀 간의 차별도 없습니다. 빈부, 인종 간, 지역 간의 차별도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백정이 양반과 함께 교회의 일원이 되고 장로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백인들을 존경하고 아프리카나 동남아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회개하고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를 품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세계 선교를 한 결과 전 세계가 함께 국제 수양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가 된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우리 센터 정문 벽에 우리는 세계라는 글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세계가 하나 되는 일을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 복음이 사람들 사이를 화목하게 하고 평화가 깃들게 합니다. 진리를 알게 됨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법 앞에 정의가 시행되고 하나님 앞에서 평등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그가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로마의 죄수요 네로의 죄수이지만 자신을 그리스도의 포로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보화요 삶의 이유이요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께 사로잡혔을 때 삶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파했기 때문에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방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자 유대인들은 그를 율법을 파괴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고 분노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이 기근에 들어서 마게도냐 성도들의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왔을 때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함께 있었던 것을 보고 성전에 들여서 더럽혔다고 오해하여 소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바울은 이로 인해 체포되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교회의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였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것을 간증했습니다. 이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요 그가 직분을 감당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8).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11)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일꾼으로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한 마음으로 감당했습니다. 그의 사역이 확장될수록 그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 깊어졌고 더욱 겸손해졌습니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동역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충성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뿐만 아니라 많은 동역자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체험하고 이를 이방인에게 전하였습니다. 내 안에 은혜가 차고 넘쳐야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은혜가 없는데 어찌 남을 은혜롭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님과 연합한 삶을 살았을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고 진리의 말씀을 받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역사를 열심히 섬기다가 보면 자신의 영성이 고갈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구원 역사를 섬기면서 계속해서 영적인 충전을 하고 나누어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런 영적인 순환이 잘 이루어져야 건강한 사람이고 또 열매를 맺게 됩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해 나가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작은 성공은 자기의 재능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열매를 맺고 귀하게 쓰임 받기 위해서는 충성스럽게 일해야 합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역사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친히 이루어가십니다. 이 장구한 역사에 나는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십니다. 천사들이 모르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고 전하게 됩니다. 천사들은 우리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종들입니다(히1:14). 교회는 그만큼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바울은 더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여러 환난을 당하는 것이 왜 에베소 성도들의 영광이 됩니까? 이는 마치 한 교회에서 순교자가 나오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복음도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모습을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표현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바울과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손에서 상급을 얻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악으로부터 고난을 당하는 것을 더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기를 열망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참하고 초라한 자들을 사랑하여 외양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수치를 당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히브리서 11:24-26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 선교사님들은 아프리카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습니다. 짐바브웨의 한 선교사님은 믿고 신뢰하던 현지인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재산을 도둑맞았습니다. 또 얼마 있지 아니하여 집에 무장 강도들이 침입하여 있던 재산마저 다 훔쳐갔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매우 슬프고 원통합니다. 공의가 사라진 나라에서 그들을 섬기는 것이 고통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11절에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며 축복하셨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가난하게 살고 때로는 강도를 맞고 때로는 무시를 받는 모든 일들이 우리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당하는 여러 환난을 슬퍼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영광스럽게 여기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둘째, 무엇보다 속사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바울은 구원 받은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하도록 기도합니다. 속사람은 우리가 닮아가야 할 예수님의 형상입니다. 속사람은 겉 사람 즉 죽을 본성이 후패되어 갈 때에도 매일 매일 새롭게 되어갑니다(고후 4:16). 우리가 고난을 감당하려면 속사람이 강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약하게 합니까? 죄와 마음의 상처들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마귀와 그의 시험에 대항할 수 없고,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은 깊습니다. 그것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깊은 말씀 공부와 회개가 필요합니다(히4:12). 과거 마음의 상처는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온 사람들은 모두 치유를 받았습니다. 아직도 죄문제나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께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리고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마 8:2). 아직 분노나 쓴 뿌리나 슬픔이 있습니까? 주님께 나아가 진실되게 자신이 치료가 필요함을 고백하십시오. 예수님의 피는 어떤 죄와 병도 성령의 능력으로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히 9:13-14).
셋째,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기도합니다. 17b-1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의 기초가 하나님의 사랑에 놓여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기초가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견고히 놓여져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의 기초가 자기 사랑에 놓여 있다면 그와 그의 사역은 결국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알 수 있는 사랑, 체험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사랑은 측량할 수 없기에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지식을 혼자서 다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런 무한한 사랑을 이해하는데 다른 성도들의 존재가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모든 성도와 함께”라고 말함으로 다른 성도들의 존재가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는데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경험과 배경이 모두 합쳐져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은 모든 죄인들을 다 포함할 만큼 넓습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품는 사랑, 가능성 있는 사람뿐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람까지도 다 품는 사랑입니다. 쓸모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당장은 쓸모없는 사람들, 각종 병자들, 음란한 창기와 이기적인 세리도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센터 부엌 하수관의 얼음을 뜨거운 열로 녹이듯이 악랄한 강도도 그의 사랑에 녹아집니다. 주님은 거라사 광인, 사마리아 여인, 니고데모와 같은 귀족 등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또한 그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할 만큼 깁니다. 그의 사랑은 오래 오래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은 시간과 함께 식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그의 사랑은 깊이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음에까지 내려가십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지옥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모든 죄의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그의 사랑은 높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된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까지 올리실 정도로 높은 사랑입니다. 모세는 왕궁, 사치, 수행원, 그리고 영광을 포기하고 노예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있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동은 아무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모세가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고자 결심했습니다. 당시 동족들은 노예였고 밉살스런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혈족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험에 내던졌습니다. 어떻게요? 어떤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보고 해 받는 사람을 방어하고 보호해주었습니다. 해를 끼치던 사람은 죽였습니다. 그 다음 날 모세가 동일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는데 동족끼리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그들을 화해시키려고 하자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치며 말했습니다.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또 나를 죽이려 하느냐?” 모세는 이 말에 흥분하기 쉬웠습니다. 그는 자기의 진심을 몰라보는 놈이라며 그도 또한 세게 쳐서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하나님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40년 후에 그는 다시 그 백성을 바로의 손아귀에서 구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할 줄도 모르고 감사하지도 않는 동족에게로 보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을 피하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많은 이적들이 있은 후에, 광야에서 그의 손으로 기사가 일어난 후에도 그들은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들 앞에 엎드리거나 그들의 손을 피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불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여전히 그들을 열정적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하며 하나님께 가증한 죄를 범했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그들이 구원받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자기도 그들과 함께 기꺼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실로 미치도록 사랑한 사랑이 있으며 끝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에게 잘못을 범했던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시편 106:32절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그들 때문에 재난이 모세에게 이르렀나니” 이 모든 일이 있은 후에도 모세는 자신을 불태워 그들을 사랑하여 제 정신이 아니었으며, 그들을 위해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합니까? 그는 자신을 핍박하고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했습니다(롬9:3). 그러나 가장 위대한 사랑의 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종이 되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7-8).” 주님이 오셨을 때 이방인의 길로 가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에게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먼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전세계를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을 품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그러나 주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참람하다,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유혹하던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이런 말을 들으셨을 때 더욱 큰 자비를 베푸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난 후에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주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에도 십자가 전에 잔인하게 대했던 사람들과 그 후에 잔인하게 대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그는 사도들을 보내서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랑으로 전 세계를 뒤흔드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무한하고 충만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이 사랑의 온전함에 이를 때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보다 더 강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은 능력입니다. 사랑은 지칠 줄 모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차 있었기 때문에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섬기고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모든 시련을 다 삼켜버리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 되는 길은 무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품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이긴다고 했습니다(고전13). 오늘날 많은 교회 공동체의 문제는 결국 뜨겁고 넘치는 사랑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말과 논리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자기희생적 사랑, 결국 십자가로 인생들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무엇이 제자 양성과 기독교 공동체 사역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각 신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의 본을 통해 돕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라고 사랑하여 하나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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