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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000년 가을 에베소서 제 8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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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4,581회 작성일 03-01-1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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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가을 에베소서 제 8 강
말씀/에베소서 6:10-24
요절/에베소서 6:11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시작하면서부터 싸움을 합니다. 헤겔은 '인생은 투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사단과의 영적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전투 중에 있는 사람은 내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는가를 분명해 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 속해 있는지, 사단 편에 속해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 속해서 싸우는 사람 중에서도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싸우기를 포기한 사람, 적의 포로가 된 사람, 싸움을 방관하는 사람, 싸우는 척하고 있는 사람, 최전선에서 피흘리며 싸우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저와 여러분이 복음의 투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싸움을 잘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강건해 질 수 있습니까?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 질 수 있습니다(10). 세상 지식이나 무력에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안에서 강건해 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란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보혈 앞에서는 꼼짝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 마음을 칠하고 우리의 교회를 칠하고 우리의 가정을 칠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집을 사단은 침입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전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단이 전능한 존재인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와 한계 안에서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마치 목에 줄을 붙잡아맨 개와 같습니다. 사단이 아무리 짖어대도 그의 목에 매여 있는 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 몸이 건강해지려면 지속적으로 영양분을 섭취하고 운동을 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일대일의 영적 전투를 해야 합니다. 실전 경험이 많은 부대가 전투력이 강한 것과 같이 싸우는 삶이 있어야 강해집니다. 전투가 없으면 마음이 부패해지고 타락하고 안일해지고 무기력해 집니다. 프로 선수들이 강한 것은 그들이 계속해서 훈련을 하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궤계를 씁니다. 궤계란 속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거짓말을 참말처럼 잘합니다. 마귀는 진리의 말씀을 왜곡시킵니다. 마귀는 싸울 때 법이 없습니다. 전쟁에도 법이 있는 법인데 마귀는 제 멋대로 입니다. 마귀는 결코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습니다. 상대를 안심시키고 찌른다든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허점을 찌르고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빈틈없이 보호해 주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갑옷입니다. 사단이 어느 쪽에서 공격을 해와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의 씨름은 인간대 인간의 싸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사와 권세를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힘으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는 정사와 권세를 인간의 전통과 종교적 도덕적 법칙들로 생각하기도 하고 국가, 죽음, 도덕적 및 의식적 법률 그리고 경제적 궤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투쟁은 영적인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같은 문맥 속에 나타난 정사와 권세도 마귀의 존재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사회 제도와 싸우고 악한 지도자와 싸운다면 우리는 국지전에서는 이겼는데도 전면전에서는 지는 전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고 물었을 때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맡기고 너희들은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로마의 정치 세력과 싸우면서 이스라엘의 독립 투쟁에 헌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복음은 화평의 복음이 아니라 분쟁의 씨앗이 되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학생 복음 운동이 시들해진 것은 캠퍼스와 세계 선교에 힘을 쓰던 데서  월남전과 흑인 인권 운동 등으로 방향을 전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회 운동을 사회 운동을 하는 분들에게 맡기고 원색적인 복음 전파를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투쟁은 영적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씨름은 백병전과 같습니다. 우리의 투쟁에는 휴전이 있을 수 없고 승리를 얻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무엇입니까?
첫째,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14). 14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허리띠는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게 하고 옷이 너풀거리지 못하게 정돈을 시켜 줍니다. 또한 허리띠를 맬 때에 힘을 쓰게 됩니다. 역도 선수들은 뱃심을 줄 수 있도록 허리띠를 띠고 무거운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허리띠는 윗 갑옷과 아래 갑옷 사이의 빈틈을 감추어 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허리띠를 띨 때에 마음의 무장을 하게 됩니다. 진리의 말씀은 투쟁의 방향을 잡아주고 싸움의 목적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전쟁에서 진리가 없으면 향방이 없어집니다. 무엇보다 진리로 무장되어 있을 때 전의가 불타오르게 되고 헛발질을 하지 않고 공격 목표를 정확하게 가격할 수 있습니다. 영적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이 불의를 행하게 되면 싸움의 명분을 잃게 되고 스스로 무너져 버립니다. 예를 들면 침략 전쟁은 대의명분을 약화시켜서 싸우는 전사들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있을 때 전략 수립이 가능해 지고 일사분란하게 싸울 수 있습니다. 진리의 허리띠가 없으면 절대적으로 옳은 것, 그른 것이 없어지게 되고 상대적인 생각을 갖게 되어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정신 상태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이 일차전을 빼고는 명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일차전은 성지를 회복한다는 명분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승리를 할 수 있었지만 2차전부터는 장사꾼들에 의해서 전쟁이 이용되고 이슬람 지역의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욕심으로 행했을 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전쟁보다 칼로서 혈과 육의 싸움을 했을 때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싸우는 방법에서도 패배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싸우는 명분도 중요하고 싸우는 과정도 진리의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을 싸울 때에 마음에서 진리를 고수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목숨도 버릴 수 있습니다. 영적 싸움을 할 때에 내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자기 욕심을 사랑하는 사람인지가 판명됩니다. 우리가 세상이 외면하는 진리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진리를 위해서 수치와 멸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영적 싸움은 말로만 진리 운운하는 것으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고난의 시기가 되면 우리는 진리의 원수와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은 예리한 혀와 논리적인 머리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합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고난의 시기에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시기에 논쟁에만 열을 올리는 사람은 있을 곳이 없습니다. 평상시 일대일 할 때는 무적의 영웅처럼 용감해 보이지만 처절한 싸움터에서는 비겁한 군인처럼 꽁무니를 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사람들의 인정과 보상을 위해서 따랐던 것이지 위험과 죽음을 의미하지 않았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 외에도 성도의 신실성을 뜻합니다. 진리는 그리스도와 성경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키고 성도의 신실성은 성도가 모든 일에 있어서 정직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싸움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문제되고 부끄러운 것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문제시하는 것이 없는 상태 즉 회개 안한 죄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성실한 마음을 가지고 진실되게 싸워야 합니다. 싸움을 하는 영적 군사에게 일관성이 부족하거나 완벽할 수 없으므로 전투 중에 실수를 하더라도 신실한 마음은 이를 감추어 버리고 맙니다. 반대로 우리의 행위에 위선이 많을수록 덕목의 영향력도 축소됩니다. 해충이 나무를 갉아먹듯이 위선은 덕목을 갉아먹습니다. 위선은 부패시키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덕목을 약화시키고 부패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장해야할 것 중에 두번째는 의의 흉배입니다. 의가 흉배에 비유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찔린 자리가 신체의 필수적인 기관에 가까울수록 더욱 치명적입니다. 팔이나 다리에 난 상처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지만 심장에 난 상처는 죽음의 전주곡입니다. 의와 거룩함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부분인 영혼과 양심을 보호합니다. 우리가 재산을 잃거나 혹은 세상적인 사업이 실패한다고 해서 생명이 위독할 지경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단도- 귀중한 생명을 해치는 죄-는 사단이 양심을 습격할 때 사용하는 무기로 치명상을 입힙니다. 이번 시드니 올림픽에서 레슬링 부분의 이인섭 선수는 결승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갈빗대가 부러진 상태에서 싸우는데 적이 알고 계속해서 공격을 하기 때문에 결국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심장을 보호하는 흉배가 고장나서 패배한 것입니다. 사단은 이성 문제, 물질 문제, 혈기 등 우리의 죄를 향해서 정죄의 단도를 휘둘러 댑니다. 그러나 의의 흉배가 붙어 있으면 찔려도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죄가 많으면 제대로 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8:33,34절은 말씀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성도를 의롭게 하는 칭의라고 부릅니다.  이 의는 갑옷의 넷째 부분인 "믿음의 방패"입니다. 일명 "믿음의 의"로 불리워지는데 그 이유는 이 의가 믿음으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롬4:11). 흉배에 비교되는 의는 칭의와 함께 성화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성화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의 심령 속에 심겨진 초자연적인 생명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인정을 구할 수 있으며 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행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의의 흉배를 붙인 성도는 담대하여서 용기있게 싸울 수 있습니다.

 두려움 속에 웅크리고 있는 군사나 죽어 움직일 수 없는 군사나 피차 일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염려로 마음이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죽은 군사와 다름이 없습니다.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죽어 있습니다. 앞가슴을 보호막으로 보호하지 않은 군사는 담대하게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의 흉배를 붙인 군인은 두려움없이 최전선에 나갈 수 있습니다. 의는 양심을 보호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위협과 죽음에 용감히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충전시킵니다. 반면에 죄는 두려움의 골방에 죄인을 가두어 버립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잠28:1)."
 접속사 'and'는 흉배와 허리띠를 공교하게 연결시켜 의와 진리가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진리와 거룩은 항상 함께 하여야 합니다. 경건하지 못한 삶과 거룩하지 못한 영의 소유자가 정통성 운운한다는 것은 인간의 머리에 짐승의 몸통을 가진 괴물처럼 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판단 착오로 거룩을 상실합니다. 다말은 진리가 없는 순진성 때문에 순결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복음 진리를 효과적으로 들려주는 길은 거룩한 삶을 살면서 복음을 진리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이 악한 말을 하는 것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비난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질책하는 사람의 경건이 뒷받침될 때 그 질책은 온전한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갑옷, 평안의 복음의 신(15). 바울은 로마 군인들이 활동할 때나 전진할 때 신었던 간편하고 기동성있는 신을 연상하면서 성도들은 복음의 신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마귀는 복음을 두려워하며 증오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마귀의 손아귀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 복음은 상한 심령을 가진 자들에게 평안을 줍니다. 이 평강은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또한 복음으로 인한 평강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강건하게 하며 회복시킵니다. 이 평강을 소유하면 죄와 사탄을 대적해서 능히 싸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평강을 사람이나 재물 혹은 세상적인 것들로 얻고자 하지만 그것은 핍박의 바람이 불어오면 곧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그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도록 캠퍼스와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4,15)."

넷째, 믿음의 방패(16). 16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방패는 전신을 가릴 수 있는 것이 있고 손으로 자유자재로 가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는 말씀을 볼 때 모든 전신갑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임을 알게 됩니다. 믿음의 방패는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화전이란 불화살들입니다. 사단이 쏘는 불화살은 빠르게 날아갑니다. 사단이 쏜 유혹의 화살은 눈을 깜빡일 때의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 안에 목표를 맞춥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바라보고 미처 그의 창을 닫기도 전에 사탄의 화살은 이미 당겨졌습니다. 때때로 한두 마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탄의 유혹의 화살이 날아가 꽂혀 버리고 맙니다. 나발이 다윗의 청을 거절하고 모욕하였다는 전갈을 소년들에게 전해 들었을 때 다윗의 분노는 복수의 화살을 당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수란 결국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야 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이 일단 떠오르고 그것을 우리 마음에서 받아들이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요?
 사탄이 쏘는 불화살은 은밀하게 날아갑니다. 화살은 멀리에서도 쏠 수 있기 때문에 누가 쏘았는지조차도 알지 못하고 상처를 입습니다. 사탄은 때때로 아내의 입을 통해서, 남편이나 친구를 통해서 은밀히 유혹의 화살을 쏘아댑니다. 그 예로 누가 아브라함이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어 아내를 배반하고 죄를 범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사탄의 화살은 빠를 뿐만 아니라 거의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그 어떤 경고도 없이 단숨에 공중을 날아갑니다. 사탄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을 향해 은밀히 유혹의 화살을 쏩니다.
 그런데 사탄이 쏘는 화살의 본질은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는 것입니다. 사탄이 쏘는 화살은 불화살로서 불타는 분노 가운데서 쏩니다. 용처럼 하나님과 모든 성도들을 향해 분노의 불을 내뿜습니다.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행9:1)"란 말씀처럼 사울은 분을 내뿜었습니다. 사람의 속에서 무엇인가 끓어오르면 즉 분노가 치밀면 금방 숨결 또한 뜨거운 법입니다. 사단의 시험은 내뿜어지는 불꽃과 같습니다.
 불화살은 그것을 끄지 않을 때 지옥의 불로 인도됩니다. 모든 유혹을 통해 지옥과 저주로 이끄는 것이 사단이 의도요 목적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화전이라고 한 이유는 독을 품고 있어서 사람의 영혼과 마음과 양심에 불같은 염증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화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화살을 쏠 때 화살촉에 독을 묻힘으로써 적에게 더욱 치명적이 되었던 그 당시의 관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독을 묻힌 화살은 한 대만이라도 맞아서 사람의 몸을 관통하면 상처만 입히는 것이 아니라 독이 전신에 퍼지게 하여 그 상태로 방치하면 치유가 불가능합니다.

 사단은 우리의 마음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화살을 쏘아댑니다.  음란한 영상들과 상상들이라는 화살을 쏘아댑니다. 인터넷 음란 사이트에 접속하여 안목의 정욕이라는 화살에 맞으면 6개월 동안 시달립니다. 관음증에 중독된 사람은 아무리 야한 그림을 보아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리고 음란을 행동으로 옮겨서 죄를 짓고 맙니다. 사단이 쏘는 불화살들 중에는 의심과 회의를 심는 말, 불신의 말을 쏘아댑니다. 비방의 말을 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종들을 모욕하는 말을 함으로 큰 상처를 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종을 믿지 못하게 하고 불신하게 하면 주일 말씀을 들을 수 없고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시름 시름 앓다가 쓰러지고 맙니다. 사단이 쏘는 두려움의 화살도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양심에 거짓 죄의식을 심기도 합니다. 율법주의의 화살에 맞으면 몸이 굳어 버려서 옴짝 달싹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탄이 쏘는 화전들을 막아내는 방패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림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받음으로써 가능합니다. 죄인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믿음만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은 모든 은혜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합니다. 예를 들어 회개는 값진 은혜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믿음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불타오르려면 믿음이 공급하는 연료가 필요합니다. 모든 은혜와 공력 가운데 믿음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단이 심는 회의와 불신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가운데 일어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욕정을 치장하는 의상은 매우 매력적이지만 그것이 실제의 모습은 아닙니다. 믿음은 죄와 사탄이 변장을 하여도 본래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왕궁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버리고 고난의 불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으로 이루어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도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통해서 모든 승리의 자원들을 끌어쓰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을 가질 때 우리는 사탄의  화전들을 능히 막아내고 영적 승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자라게 하고 강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이 생겨나게 하고 자라게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깊이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자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자라도록 애써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족하는 것보다 믿음을 잃을 위험이 큰 것은 없습니다.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내적 평화와 고요가 더해집니다. 그리고 믿음이 강할수록 태산을 옮기는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다섯째,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17). 구원의 투구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방어를 아무리 잘해도 공격을 하지 않으면 원수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쓸 때 마귀의 사상과 이론들을 파하고 마귀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공격을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혼과 영과 골수를 짜르고 찔러 쪼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마귀의 진을 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일대일 전투를 하고 소감을 쓰는 가운데 죄사함을 받고 내 사상이 성경 말씀화 할 때 우리는 사단의 견고한 진을 파하고 하나님의 요새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홍대 캠퍼스와 세계 캠퍼스를 하나님의 요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무기들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모든 기도와 간구와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는 성령의 검이 생명력을 가지고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는 통로입니다. 바울은 이를 잘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기도 부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입을 벌려 담대히 복음의 비밀을 알리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여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효과적인 기도 모임을 이루고 조직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사단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를 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사단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잘 입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갑옷 중에서 파손된 부분을 잘 수리하고 다듬어서 최상의 무장을 갖추고 싸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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