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00년 에베소서 제 6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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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에베소서 제 5 강
말씀/에베소서 5:1-21
요절/에베소서 5:8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오늘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합니다. 교회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면 그에 따르는 행위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을 해야 삶의 좌표인 사상이 생기고 사상이 있어야 바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두 가지 존재 곧 사랑을 입은 자녀라는 것과 빛의 자녀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입은 자요 빛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 빛의 자녀들처럼 행할 수 있습니다. 빛의 열매로 가득 찬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는가를 배우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1-12).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고 그를 존경하고 본받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은 항상 삐딱하고 반항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녀들입니다. 예를 들면 쓰레기 같이 천한 것들이 보석 또는 금덩어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새 사람이 되었고 존재가 새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변화된 지위나 존재에 걸쳐진 옛 사람의 옷이 있습니다. 이것은 먼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먼지가 자욱한 보석, 금을 닦아주어야 합니다. 이 닦아주는 일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사랑하는 아버지를 닮아가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부전자전이란 말이 있듯이 자녀들이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그 삶을 자연히 닮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완전과 같은 성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아낌없이 자원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희생으로, 주며 베푸는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도 이 사랑을 배워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고백하였습니다(고후2:14-16). 우리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사랑함으로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빌4:18).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는 말씀과 같이 사랑을 베푸는 삶이 더욱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문둥이 같이 오그라든 손을 펴서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십자가의 피와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와 같은 외침의 아픔이 따릅니다. 우리는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서 참된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양들이나 동역자들을 위한 희생이 따라야 마음에 사랑을 느끼고 정성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나 소설과 같은 이상이나 잠자는 자들의 잠꼬대가 아니라 "수고와 노동"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만이 아니라 영육간에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사랑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보여주는 사랑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는 양들이 죄문제를 극복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해산의 수고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노동, 말씀을 연구하고 나누는 수고, 양의 육신의 필요를 알고 섬기는 것 등이 다 포함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사랑을 실천할 교회가 피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음행은 불법적인 성행위입니다. 혼전 성교, 혼외정사, 동성애, 부부관계를 벗어난 성적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갖 더러운 것은 말이나 생각, 마음의 소원이 깨끗하지 못한 것입니다. 탐욕은 이기적인 마음으로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특히 탐욕이 우상숭배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이나 물질이나 쾌락을 놓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음행이나 온갖 더러운 것이나 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난폭한 언어 사용이나 음담 패설, 방탕한 몸가짐, 어리석은 말, 경솔한 헛된 이야기, 천박한 농담 등도 마땅치 않습니다. 어리석은 말은 술취한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3:8)" 말씀하시고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면 "자기 혀에 재갈"을 먹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약1:26). 6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헛된 말이란 허황된 이론을 말합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영혼만 순결하면 육체는 어떠해도 상관없다는 이론을 폈습니다. 그들의 이론을 받아들인 청년들 중에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방탕에 빠졌습니다. 요즈음도 성적 욕망을 죄의식없이 즐기기 위해서 갖가지 이론들을 만들어서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순종의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저희와 함께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본받고자 힘씁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닮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 주님을 본받기를 기도합니다.
2.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13)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예수님은 세상의 참 빛이십니다(요8:12). 이 참 빛 속에 거하는 자들도 빛입니다. 바울은 빌2:15절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빛이 빛을 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빛을 발할 때 세상의 어두움을 밝힐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신자들이 빛을 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들의 빛을 비추는 삶을 통해서 마음이 밝아집니다. 삶의 방향을 잡습니다. 생명력을 누립니다. 거기서 희망을 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마음씨가 곱고 어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았을 때 비난하기 보다 그를 이해하고 감당해주고자 합니다. 착한 사람은 싸우지 않습니다. 싸울 일이 별로 없습니다. 상대편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신자라고 하는데 말이나 행동이 사납고 이기적이라면 세상 사람들은 인상을 찌뿌립니다. 그런데 착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았을 때 이해하고 덮어 준다고 해서 불의와 타협하고 무관심해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착한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 몸을 사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착함과 함께 의로움과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의로움과 진실함은 우리 시대에 가장 절실한 덕목입니다. 사람들은 의와 진실에 굶주려 있습니다. 의롭고 진실한 사람은 담대합니다. 이번에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탔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요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관은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군부 독재 시절 말할 수 없는 고문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면서도 심지어 사형을 당하여 죽음을 문 앞에 두고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실함을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며 살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때 만인이 우러러 볼 만한 업적을 남기고 노벨상 중에서 가장 명예롭다는 노벨 평화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자로서 좋은 본이 되었습니다.
빛의 기능은 어두움을 노출시킵니다. 11절에서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했는데 책망한다는 말은 빛의 노출시키는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생은 어두움을 그대로 노출시켜서 빛으로 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즉 성도들의 삶이 세상의 악에 반영될 때 세상의 악이 어떤 것인지 노출시키고 악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만듭니다. 성도들은 악에 대해서 중립적일 수 없고 타협적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악을 책망하고 노출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빛은 그 어두움을 빛으로 만듭니다. 사도 바울은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13)."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거룩한 생활이 어두움을 비칠 때 어두움에 속했던 사람이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 사람 역시 참 빛 되신 예수님께 속하게 되고 그 자신이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 권면은 빛이 단순한 지적 조명만을 위해 주어지지 않고 항상 실제적인 순종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주어졌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매일의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의 신앙 고백을 믿을 만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사람들이 우리 마음의 내부는 들여다 볼 수 없지만 우리가 세상에 제시하는 외적인 모습은 자세히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튼튼한 나무는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스럽고 빛은 어두움을 노출시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성도들의 삶은 악을 노출시키고 의를 이루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성도들이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두움이란 빛의 반대로서 미움과 교만과 세상 자랑 등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은 어두움 가운데 은밀히 행하지 아니합니다. 일어나 빛을 비추입니다.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하십니다. 책망한다는 것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른 것과 진실된 것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행위로 악한 행위를 드러내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말로는 얼마든지 악도 선하게 불의도 의롭게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인 행위를 보면 변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생활을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투쟁할 때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잠자는 자는 성도들을 가리키는데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는 불신자들 같이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3.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15-21)
사랑을 입은 자 그리고 빛의 자녀인 교회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5-16절은 지혜로 행하는 자, 17절은 주의 뜻을 분별하여 행하는 자, 18-21절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생활을 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지혜 있는 자(15,16). 15절은 지혜 없는 자와 있는 자를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살려면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야 합니다. 저는 전도서를 읽으면서 인생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본 솔로몬의 고백을 듣고 지혜로운 삶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방편을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영원한 목적이 있는 삶을 위해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영국의 폴목자의 인생 소감을 들어서 알 수 있었듯이 그는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어 29세에 이미 자기 집을 소유하고 부자요 성공한 사람이 되었지만 인생의 무의미와 허무함으로 고통했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성공을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뜻을 행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빨리 빨리 하는 습관으로 인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려놓고 봅니다. 그래서 많은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해서 달려가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이 생각을 먼저 하고, 프랑스 사람들은 생각도 해 보기 전에 먼저 달리고, 영국 사람들은 달리면서 생각한다고 합니다. 속도가 미덕인 이 시대에 우리는 무조건 빨리 빨리 해서 끝장을 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원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도 신문 읽고 아침밥도 안 먹고 급하게 하루를 시작하기 보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가운데 생각하여 행할 때 지혜로운 하루를 살 수 있고 지혜로운 인생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 삶에 열매가 풍성할 것은 당연합니다.
약1:5절에 보면 지혜 있는 자는 자신이 지혜가 없음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겸손한 자입니다. 이러한 자는 세상과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본문은 지혜 있는 자가 세상의 악함을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악한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려면 특별히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합니다. 세월은 흘러가는 기회입니다. 한 번 지나간 오늘은 영원히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시간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과거는 현재의 기억이고 미래는 현재의 희망이다. 그래서 항상 현재만이 존재의 중요성 더욱 고조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질적인 현재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자르기의 미학"이 필요합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하루 24시간씩 주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빈부의 차이가 있고 지위 고하의 차이가 있어도 시간만큼은 모두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지혜있는 자는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선용하는 사람입니다. 시간 선용을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가진 시간이 정해진 제한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지만 모든 일을 제한된 시간 안에 모두 성취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젊다고 해서 이것 저것 다 경험해 보고 한가지를 택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시간은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것, 중요하지 않은 시간을 잘라버리고 삶의 우선 순위를 정해서 매일 매일 그 일을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대로 행하는 이상 더 귀중한 일이 우리 생애에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 주의 뜻을 분별하는 자(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사도 바울은 어리석은 자와 주의 뜻을 분별하는 자를 대비시켜 우리 신자들이 어리석음을 극복하고 주의 뜻대로 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이런 경우 성도는 많이 묵상하고 기도하며 성숙하고 경험이 많은 목자님의 조언을 받은 후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결정합니다. 그리고 결정한 내용에 대해 마음의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 의하면 주의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16세기 종교 개혁자 루터는 "나는 너무 바쁘다. 따라서 나는 더욱 더 기도해야 한다."라고 기도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서 기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개인 기도와 공적인 합심 기도가 잘 조화되어야겠습니다. 합심 기도에 끌려가며 개인 기도를 하지 않는 성도는 나중에는 기도가 이념화되어 버립니다. 이념화되어 버리면 불에 타듯 정열적으로 행동하지만 그 안에 생명이 없기에 시간이 가면 꺼져버립니다. 공산주의, 나치주의, 일본의 군국주의가 그 좋은 예입니다. 그러므로 꼭 공기도는 개인 기도의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개인 기도는 공적인 기도에 연결되어야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아울러 기도만하고 기뻐하는데는, 감사하는데는 인색한 성도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환경이 나빠지면 기도가 한숨이 되고 넉두리가 되어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고 기뻐해야 만이 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셋째, 성령 충만을 받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18-21). 여기서도 술취함과 성령 충만함이 비교되어 있습니다. 술취함은 방탕함입니다. 기분을 내려고 술을 먹으면 나중에 술이 나와 친구를 먹어 버립니다. 술취함과 비슷한 취함이 화투놀이, 인터넷 게임, 마작과 같은 놀이에서도 발견됩니다. 술취함이나 이런 놀이에 취하게 되면 자신도 잊어버리고 자기 아내와 가족도 잊어버리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일도 잊어버립니다. 무엇보다도 역사의 일원으로서의 시간 개념을 잊어버리는 비극이 이런 사람에게 오는 것입니다. 시간 안에 시간과 같이 역사의 구성원으로 살지 못하고 방탕 속에서 인생을 폐기처분하는 비참함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죄악된 곳에서 탈출하는 가장 쉽고 효과적이고 지혜로운 방법은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을 잘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명령형입니다. 반드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복수형입니다. 모든 성도가 받아야 합니다. 수동형입니다. 지속적으로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현재형입니다. 과거에 성령충만했던 사람도 지금 또 충만해져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죄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죄는 성령을 소멸하게 합니다. 죄는 성령 하나님을 슬프시게 만듭니다. 죄가 있으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발하게 일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고백하고 떠나야 합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말씀 안에 풍성히 거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말씀은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깊이 공부할 때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고 벗어 버려야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센타에 자주 나와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를 하는 일, 찬양과 감사를 하는 일등은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마지막으로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자님들을 존경하고 따를 때 성령의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동역자들과 관계성이 회복됩니다. 질서와 복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단은 거스리고 대적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 우리는 삶의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복된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에베소서 5:1-21
요절/에베소서 5:8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오늘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합니다. 교회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면 그에 따르는 행위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을 해야 삶의 좌표인 사상이 생기고 사상이 있어야 바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두 가지 존재 곧 사랑을 입은 자녀라는 것과 빛의 자녀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입은 자요 빛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 빛의 자녀들처럼 행할 수 있습니다. 빛의 열매로 가득 찬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는가를 배우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1-12).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고 그를 존경하고 본받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은 항상 삐딱하고 반항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녀들입니다. 예를 들면 쓰레기 같이 천한 것들이 보석 또는 금덩어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새 사람이 되었고 존재가 새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변화된 지위나 존재에 걸쳐진 옛 사람의 옷이 있습니다. 이것은 먼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먼지가 자욱한 보석, 금을 닦아주어야 합니다. 이 닦아주는 일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사랑하는 아버지를 닮아가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부전자전이란 말이 있듯이 자녀들이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그 삶을 자연히 닮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완전과 같은 성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아낌없이 자원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희생으로, 주며 베푸는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도 이 사랑을 배워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고백하였습니다(고후2:14-16). 우리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사랑함으로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빌4:18).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는 말씀과 같이 사랑을 베푸는 삶이 더욱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문둥이 같이 오그라든 손을 펴서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십자가의 피와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와 같은 외침의 아픔이 따릅니다. 우리는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서 참된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양들이나 동역자들을 위한 희생이 따라야 마음에 사랑을 느끼고 정성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나 소설과 같은 이상이나 잠자는 자들의 잠꼬대가 아니라 "수고와 노동"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만이 아니라 영육간에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사랑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보여주는 사랑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는 양들이 죄문제를 극복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해산의 수고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노동, 말씀을 연구하고 나누는 수고, 양의 육신의 필요를 알고 섬기는 것 등이 다 포함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사랑을 실천할 교회가 피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음행은 불법적인 성행위입니다. 혼전 성교, 혼외정사, 동성애, 부부관계를 벗어난 성적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갖 더러운 것은 말이나 생각, 마음의 소원이 깨끗하지 못한 것입니다. 탐욕은 이기적인 마음으로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특히 탐욕이 우상숭배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이나 물질이나 쾌락을 놓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음행이나 온갖 더러운 것이나 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난폭한 언어 사용이나 음담 패설, 방탕한 몸가짐, 어리석은 말, 경솔한 헛된 이야기, 천박한 농담 등도 마땅치 않습니다. 어리석은 말은 술취한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3:8)" 말씀하시고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면 "자기 혀에 재갈"을 먹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약1:26). 6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헛된 말이란 허황된 이론을 말합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영혼만 순결하면 육체는 어떠해도 상관없다는 이론을 폈습니다. 그들의 이론을 받아들인 청년들 중에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방탕에 빠졌습니다. 요즈음도 성적 욕망을 죄의식없이 즐기기 위해서 갖가지 이론들을 만들어서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순종의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저희와 함께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본받고자 힘씁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닮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 주님을 본받기를 기도합니다.
2.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13)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예수님은 세상의 참 빛이십니다(요8:12). 이 참 빛 속에 거하는 자들도 빛입니다. 바울은 빌2:15절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빛이 빛을 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빛을 발할 때 세상의 어두움을 밝힐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신자들이 빛을 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들의 빛을 비추는 삶을 통해서 마음이 밝아집니다. 삶의 방향을 잡습니다. 생명력을 누립니다. 거기서 희망을 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마음씨가 곱고 어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았을 때 비난하기 보다 그를 이해하고 감당해주고자 합니다. 착한 사람은 싸우지 않습니다. 싸울 일이 별로 없습니다. 상대편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신자라고 하는데 말이나 행동이 사납고 이기적이라면 세상 사람들은 인상을 찌뿌립니다. 그런데 착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았을 때 이해하고 덮어 준다고 해서 불의와 타협하고 무관심해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착한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 몸을 사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착함과 함께 의로움과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의로움과 진실함은 우리 시대에 가장 절실한 덕목입니다. 사람들은 의와 진실에 굶주려 있습니다. 의롭고 진실한 사람은 담대합니다. 이번에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탔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요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관은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군부 독재 시절 말할 수 없는 고문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면서도 심지어 사형을 당하여 죽음을 문 앞에 두고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실함을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며 살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때 만인이 우러러 볼 만한 업적을 남기고 노벨상 중에서 가장 명예롭다는 노벨 평화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자로서 좋은 본이 되었습니다.
빛의 기능은 어두움을 노출시킵니다. 11절에서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했는데 책망한다는 말은 빛의 노출시키는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생은 어두움을 그대로 노출시켜서 빛으로 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즉 성도들의 삶이 세상의 악에 반영될 때 세상의 악이 어떤 것인지 노출시키고 악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만듭니다. 성도들은 악에 대해서 중립적일 수 없고 타협적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악을 책망하고 노출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빛은 그 어두움을 빛으로 만듭니다. 사도 바울은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13)."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거룩한 생활이 어두움을 비칠 때 어두움에 속했던 사람이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 사람 역시 참 빛 되신 예수님께 속하게 되고 그 자신이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 권면은 빛이 단순한 지적 조명만을 위해 주어지지 않고 항상 실제적인 순종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주어졌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매일의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의 신앙 고백을 믿을 만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사람들이 우리 마음의 내부는 들여다 볼 수 없지만 우리가 세상에 제시하는 외적인 모습은 자세히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튼튼한 나무는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스럽고 빛은 어두움을 노출시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성도들의 삶은 악을 노출시키고 의를 이루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성도들이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두움이란 빛의 반대로서 미움과 교만과 세상 자랑 등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은 어두움 가운데 은밀히 행하지 아니합니다. 일어나 빛을 비추입니다.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하십니다. 책망한다는 것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른 것과 진실된 것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행위로 악한 행위를 드러내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말로는 얼마든지 악도 선하게 불의도 의롭게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인 행위를 보면 변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생활을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투쟁할 때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잠자는 자는 성도들을 가리키는데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는 불신자들 같이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3.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15-21)
사랑을 입은 자 그리고 빛의 자녀인 교회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5-16절은 지혜로 행하는 자, 17절은 주의 뜻을 분별하여 행하는 자, 18-21절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생활을 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지혜 있는 자(15,16). 15절은 지혜 없는 자와 있는 자를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살려면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야 합니다. 저는 전도서를 읽으면서 인생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본 솔로몬의 고백을 듣고 지혜로운 삶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방편을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영원한 목적이 있는 삶을 위해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영국의 폴목자의 인생 소감을 들어서 알 수 있었듯이 그는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어 29세에 이미 자기 집을 소유하고 부자요 성공한 사람이 되었지만 인생의 무의미와 허무함으로 고통했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성공을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뜻을 행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빨리 빨리 하는 습관으로 인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려놓고 봅니다. 그래서 많은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해서 달려가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이 생각을 먼저 하고, 프랑스 사람들은 생각도 해 보기 전에 먼저 달리고, 영국 사람들은 달리면서 생각한다고 합니다. 속도가 미덕인 이 시대에 우리는 무조건 빨리 빨리 해서 끝장을 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원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도 신문 읽고 아침밥도 안 먹고 급하게 하루를 시작하기 보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가운데 생각하여 행할 때 지혜로운 하루를 살 수 있고 지혜로운 인생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 삶에 열매가 풍성할 것은 당연합니다.
약1:5절에 보면 지혜 있는 자는 자신이 지혜가 없음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겸손한 자입니다. 이러한 자는 세상과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본문은 지혜 있는 자가 세상의 악함을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악한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려면 특별히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합니다. 세월은 흘러가는 기회입니다. 한 번 지나간 오늘은 영원히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시간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과거는 현재의 기억이고 미래는 현재의 희망이다. 그래서 항상 현재만이 존재의 중요성 더욱 고조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질적인 현재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자르기의 미학"이 필요합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하루 24시간씩 주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빈부의 차이가 있고 지위 고하의 차이가 있어도 시간만큼은 모두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지혜있는 자는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선용하는 사람입니다. 시간 선용을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가진 시간이 정해진 제한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지만 모든 일을 제한된 시간 안에 모두 성취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젊다고 해서 이것 저것 다 경험해 보고 한가지를 택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시간은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것, 중요하지 않은 시간을 잘라버리고 삶의 우선 순위를 정해서 매일 매일 그 일을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대로 행하는 이상 더 귀중한 일이 우리 생애에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 주의 뜻을 분별하는 자(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사도 바울은 어리석은 자와 주의 뜻을 분별하는 자를 대비시켜 우리 신자들이 어리석음을 극복하고 주의 뜻대로 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이런 경우 성도는 많이 묵상하고 기도하며 성숙하고 경험이 많은 목자님의 조언을 받은 후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결정합니다. 그리고 결정한 내용에 대해 마음의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 의하면 주의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16세기 종교 개혁자 루터는 "나는 너무 바쁘다. 따라서 나는 더욱 더 기도해야 한다."라고 기도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서 기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개인 기도와 공적인 합심 기도가 잘 조화되어야겠습니다. 합심 기도에 끌려가며 개인 기도를 하지 않는 성도는 나중에는 기도가 이념화되어 버립니다. 이념화되어 버리면 불에 타듯 정열적으로 행동하지만 그 안에 생명이 없기에 시간이 가면 꺼져버립니다. 공산주의, 나치주의, 일본의 군국주의가 그 좋은 예입니다. 그러므로 꼭 공기도는 개인 기도의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개인 기도는 공적인 기도에 연결되어야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아울러 기도만하고 기뻐하는데는, 감사하는데는 인색한 성도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환경이 나빠지면 기도가 한숨이 되고 넉두리가 되어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고 기뻐해야 만이 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셋째, 성령 충만을 받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18-21). 여기서도 술취함과 성령 충만함이 비교되어 있습니다. 술취함은 방탕함입니다. 기분을 내려고 술을 먹으면 나중에 술이 나와 친구를 먹어 버립니다. 술취함과 비슷한 취함이 화투놀이, 인터넷 게임, 마작과 같은 놀이에서도 발견됩니다. 술취함이나 이런 놀이에 취하게 되면 자신도 잊어버리고 자기 아내와 가족도 잊어버리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일도 잊어버립니다. 무엇보다도 역사의 일원으로서의 시간 개념을 잊어버리는 비극이 이런 사람에게 오는 것입니다. 시간 안에 시간과 같이 역사의 구성원으로 살지 못하고 방탕 속에서 인생을 폐기처분하는 비참함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죄악된 곳에서 탈출하는 가장 쉽고 효과적이고 지혜로운 방법은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을 잘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명령형입니다. 반드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복수형입니다. 모든 성도가 받아야 합니다. 수동형입니다. 지속적으로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현재형입니다. 과거에 성령충만했던 사람도 지금 또 충만해져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죄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죄는 성령을 소멸하게 합니다. 죄는 성령 하나님을 슬프시게 만듭니다. 죄가 있으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발하게 일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고백하고 떠나야 합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말씀 안에 풍성히 거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말씀은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깊이 공부할 때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고 벗어 버려야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센타에 자주 나와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를 하는 일, 찬양과 감사를 하는 일등은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마지막으로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자님들을 존경하고 따를 때 성령의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동역자들과 관계성이 회복됩니다. 질서와 복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단은 거스리고 대적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 우리는 삶의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복된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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