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00년 가을 에베소서 제 5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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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가을 에베소서 제 5 강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말씀/에베소서 4:1-32
요절/에베소서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는 이번 시드니 올림픽에 남과 북이 한반도 기를 가지고 동시 입장을 하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보았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서로 미워하고 질시하며 경계하던 데서 이제 하나가 되어 입장한 것입니다. 김대통령은 하나 되는 것이 쉽지 않지만 많은 손해와 비난을 받으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도 하나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본래부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성을 맺기는 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고 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관계성을 맺고 하나가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의 허물이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하나됨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성령 안에서 하나됨 (1-16)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되게 하셨고 한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은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로서 마땅히 성도들의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힘써야 할 것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는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였던 사람들이 하나됨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모인 모임은 하나가 된 상태가 오래 되면 나누어지게 되고 또 한참 나누어져 있다보면 합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본래 그리스도께 속하여 한 몸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장로교 분열이 가장 심각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들여다보면 교권 다툼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인들만큼 한번 틀어지면 회복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 한잔을 마시고 풀어버릴 것도 신자들은 꽁하고 마음에 품고 대화도 없이 살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온유해야 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합니다. 자존심을 앞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을 슬프시게 합니다. 무엇보다 분열되면 서로가 상처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힘있게 섬기지 못합니다. 몇몇 선교 단체들이 분열을 하여 캠퍼스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가정이나 요회도 마음이 나누이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동역자들의 마음이 분열된 곳에서 양들이 거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끼리 싸우는 것보다 더 볼성사나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된 것을 지키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평안이 하나됨을 지키는 열쇠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강조한다고 해서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를 하되 진리와 거룩함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때만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왜 하나됨을 지켜야 하는지를 4-6절에서 설명합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서로를 주장하지 않고 섬깁니다. 몸은 유기체로서 같이 느끼고 같이 고통을 하고 같이 영광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비롯 여러 교파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크리스챤을 예수님 안에서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이는 세계가 다 공통인 것입니다. 성령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십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그를 믿는 것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됨은 가시적이고 구조적인 연합을 목표로 해야 하며 하나님과의 내적인 연합뿐 아니라 진리와 생명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일곱 번이나 하나를 사용함으로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10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되기 위하여 예수님의 성육신과 승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죄의 포로된 사람들을 죄에서 자유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로 잡힌 자를 사로 잡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수 많은 사람을 모은다는 뜻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일할 사람들에게 필요한 영적 선물을 주셨습니다. 9,10절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먼저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신성의 포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내려오심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어떻게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우리가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교만한 우리가 어떻게 겸손해 질 수 있습니까? 최선의 길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11-12절은 우리가 하나되기 위하여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습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많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음악을 잘하는 은사, 위로를 잘하는 은사, 잘 섬기는 사람, 환경을 잘 정리하는 은사, 요리를 잘하는 은사, 공부를 잘하는 은사, 컴퓨터를 잘하는 은사, 그림을 잘 그리는 은사 등등을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깊고 자세하게 파헤치는 것은 쉽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추어내고 비판하는데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이는 인간의 정신이 타락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가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들추어 내는 대신에 그 사람의 장점을 보고자 힘쓰고 그 은사를 개발시키도록 기도하고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임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됨을 이루는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은사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합니까? 1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은사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은사가 잘 발휘될 때 교회가 풍성해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각자가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개발이 되고 교회 내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은사들을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되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저희 센타에서는 하늘 그림자라는 모임을 이루고 미대생들이 은사를 발휘하여 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이 감독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교회의 암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서 은사를 살리되 감독을 받고 다른 은사를 가진 분들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한 모임만에만 관심이 집중될 때 교만해지고 사단이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교만한 마음을 먹거나 반대로 나에게는 저런 은사가 없다고 열등감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슬퍼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분량대로 은사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은 은사라도 그것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을 통해서 나도 살고 공동체가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그 은사를 찾아내어서 개발시켜주고 그 은사를 통해서 제자를 양성함으로 공동체가 성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각자의 은사를 살리려면 우리 개인이 더욱 은혜 속에서 강건해 지고 또 그런 은사를 가진 분들과 네트웍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번에 각 부장들을 세웠는데 이 분들을 중심으로 부원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의 은사를 잘 살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은사를 잘 발휘하여 성도를 세우고자 할 때 성도들은 어느 정도까지 자라게 됩니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자라게 됩니다. 우리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우리를 자라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기저귀를 찬 사람들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서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을 치게 됩니다. 우리가 은사를 개발하기 위해서 각자 전공 분야를 공부해보면 수없이 많은 이론들과 사상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분별력없이 받아들이게 되면 믿음을 잃고 세상으로 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지식이 함께 자라야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믿음과 아는 것은 같이 자라야 합니다. 하늘그림자 모임은 미술사를 공부하는 가운데 세상의 많은 사상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비판적인 사상들을 접하면서 믿음이 약해지고 모임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다가 결국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믿음이 따르지 않으면 교만해져서 동역자들과 공동체를 판단하고 다른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겸손하게 써야합니다. 우리가 신앙 성장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끼리도 교류가 필요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된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는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과 교제를 하지 않고 혼자서 고독하게 생활하는 사람은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됩니다. 생각의 폭도 좁고 편견과 오해가 많아집니다. 우리가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과 섬김의 정신으로 교류를 해야 합니다. 소감을 팀모임에서 나누고 전체에서도 나누는 가운데 교제를 하고 비공식적인 교제들이 활성화될 때 사랑이 풍성해지고 오해와 내면의 응어리들이 풀리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웃음이 많아지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건전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교류가 활발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때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스스로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교회 성장을 가져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결과 질적 성장뿐 아니라 외적인 성장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하나됨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II.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 (17-32)
4:1-16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후반부에서는 이방인들의 생활과 성도의 생활 모습을 비교함으로 성도들의 삶에 대해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새 삶을 살 수 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치 말라." 이방인은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그들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해 방황하며 어두운 삶을 삽니다. 이런 모습의 상태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체적으로 이방인의 삶의 패턴을 열거합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의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첫째는 마음이 굳어져 있어 불의를 행하게 되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둘째는 총명이 어두워져 이해와 분별력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인간은 죽음과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넷째는 욕심으로 행합니다. 탐욕의 노예가 되어 방탕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없이 사는 이방인의 삶은 소망이 없고 어두우며 죽음과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삶을 말씀하고 지금부터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권면합니다.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첫째는 그리스도를 배워야 합니다. 20절을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배웠다'는 것은 신학이나 교훈이 아닌 그리스도의 인격과 품성을 배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품성을 배우고자 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둘째는 듣는 삶입니다. 21b절을 보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들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어야 합니다. 셋째는 가르침을 받는 삶입니다. 21c절을 보면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21a절에는 진리가 예수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학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됩니다. 이를 볼 때 모두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아야 예수님의 인격을 배울 수 있고, 또 들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경 공부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경 공부를 통해서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물욕과 정욕과 권세욕을 버리고 한국인의 구습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조선 시대부터 당파 싸움을 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는 잘 나가는 사람을 시기하여 짤라버리고 원로들을 공격하여 존경받는 원로가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파당을 만들어서 싸우기를 잘 합니다. 또 서로 잘 낫다고 하고 양반 노릇을 할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구습들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말씀 공부를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깊이 있게 회개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되려면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23절에서 말하듯이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될 때 진정한 개혁을 할 수 있습니다. 머리를 빡빡 밀고 책장을 바꾼다고 새로워집니까? 가을이 되어서 여행을 하고 환경이나 제도를 바꾼다고 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심령으로부터의 개혁이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인 의와 진리와 거룩함에서 자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벗고 입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거짓을 벗고 참을 말해야 합니다(25). 거짓을 없애고 참을 말하는 것은 동전의 앞뒤와 같습니다. 거짓을 없애기 위해서는 참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 몸의 각 지체끼리는 거짓말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나가다가 개똥을 보았다고 합시다. 이 때 눈이 발보고 '야, 그것은 겨니까 밟아도 돼!' 하는 눈이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한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솔직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는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26,27). 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의로운 분과 죄를 가져 오는 분이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죄에 대해 분노를 해야 합니다. 모든 종류의 죄에 대해 분노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의로운 분노도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해가 지기 전에 분을 풀어야 합니다. 분은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범죄 행위입니다. 분이 생기면 악의가 생기고 남을 중상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분이 생기면 속히 풀어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에게 있어서 분, 혈기는 금물입니다. 혈기를 품어서는 안 되고 오래 가지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분이 생기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풀어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리라(약1:19)." 분냄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분을 내어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셋째는 도적질을 벗고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28).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28). 자기 손으로 레포트를 써야 합니다. 불로소득을 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구제를 할 수 있도록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넷째는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선한 말로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29). 입 밖에도 내지 말라는 것은 흉내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여러 가지 축복을 주셨지만 말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신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말을 통해 선을 행하기도 하고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말을 통해서 덕을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을 하되 은혜를 끼치고 덕을 세우고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칭찬의 말, 믿음의 말, 유익한 말, 사랑의 말을 할 때 사람을 세울 수 있습니다. 말은 인격이기 때문에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해야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30).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우리가 더러운 말을 하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가 불의를 말할 때 성령께서 근심케 됩니다. 성령은 연합시키는 영입니다. 그런데 분열시키고 비방하는 말을 하면 성령께서 근심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말을 벗어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1,32절을 보면 성도들이 버려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성도들은 악독, 노함, 분냄, 떠드는 것, 훼방하는 것, 그리고 악의를 버려야 합니다. 반면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함과 같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입으로 즉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세운다면 우리는 많은 양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힘써 지키고 각자 받은 바 은사를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일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말씀/에베소서 4:1-32
요절/에베소서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는 이번 시드니 올림픽에 남과 북이 한반도 기를 가지고 동시 입장을 하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보았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서로 미워하고 질시하며 경계하던 데서 이제 하나가 되어 입장한 것입니다. 김대통령은 하나 되는 것이 쉽지 않지만 많은 손해와 비난을 받으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도 하나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본래부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성을 맺기는 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고 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관계성을 맺고 하나가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의 허물이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하나됨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성령 안에서 하나됨 (1-16)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되게 하셨고 한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은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로서 마땅히 성도들의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힘써야 할 것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는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였던 사람들이 하나됨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모인 모임은 하나가 된 상태가 오래 되면 나누어지게 되고 또 한참 나누어져 있다보면 합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본래 그리스도께 속하여 한 몸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장로교 분열이 가장 심각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들여다보면 교권 다툼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인들만큼 한번 틀어지면 회복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 한잔을 마시고 풀어버릴 것도 신자들은 꽁하고 마음에 품고 대화도 없이 살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온유해야 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합니다. 자존심을 앞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을 슬프시게 합니다. 무엇보다 분열되면 서로가 상처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힘있게 섬기지 못합니다. 몇몇 선교 단체들이 분열을 하여 캠퍼스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가정이나 요회도 마음이 나누이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동역자들의 마음이 분열된 곳에서 양들이 거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끼리 싸우는 것보다 더 볼성사나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된 것을 지키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평안이 하나됨을 지키는 열쇠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강조한다고 해서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를 하되 진리와 거룩함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때만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왜 하나됨을 지켜야 하는지를 4-6절에서 설명합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서로를 주장하지 않고 섬깁니다. 몸은 유기체로서 같이 느끼고 같이 고통을 하고 같이 영광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비롯 여러 교파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크리스챤을 예수님 안에서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이는 세계가 다 공통인 것입니다. 성령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십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그를 믿는 것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됨은 가시적이고 구조적인 연합을 목표로 해야 하며 하나님과의 내적인 연합뿐 아니라 진리와 생명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일곱 번이나 하나를 사용함으로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10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되기 위하여 예수님의 성육신과 승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죄의 포로된 사람들을 죄에서 자유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로 잡힌 자를 사로 잡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수 많은 사람을 모은다는 뜻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일할 사람들에게 필요한 영적 선물을 주셨습니다. 9,10절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먼저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신성의 포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내려오심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어떻게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우리가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교만한 우리가 어떻게 겸손해 질 수 있습니까? 최선의 길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11-12절은 우리가 하나되기 위하여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습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많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음악을 잘하는 은사, 위로를 잘하는 은사, 잘 섬기는 사람, 환경을 잘 정리하는 은사, 요리를 잘하는 은사, 공부를 잘하는 은사, 컴퓨터를 잘하는 은사, 그림을 잘 그리는 은사 등등을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깊고 자세하게 파헤치는 것은 쉽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추어내고 비판하는데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이는 인간의 정신이 타락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가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들추어 내는 대신에 그 사람의 장점을 보고자 힘쓰고 그 은사를 개발시키도록 기도하고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임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됨을 이루는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은사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합니까? 1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은사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은사가 잘 발휘될 때 교회가 풍성해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각자가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개발이 되고 교회 내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은사들을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되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저희 센타에서는 하늘 그림자라는 모임을 이루고 미대생들이 은사를 발휘하여 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이 감독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교회의 암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서 은사를 살리되 감독을 받고 다른 은사를 가진 분들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한 모임만에만 관심이 집중될 때 교만해지고 사단이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교만한 마음을 먹거나 반대로 나에게는 저런 은사가 없다고 열등감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슬퍼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분량대로 은사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은 은사라도 그것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을 통해서 나도 살고 공동체가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그 은사를 찾아내어서 개발시켜주고 그 은사를 통해서 제자를 양성함으로 공동체가 성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각자의 은사를 살리려면 우리 개인이 더욱 은혜 속에서 강건해 지고 또 그런 은사를 가진 분들과 네트웍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번에 각 부장들을 세웠는데 이 분들을 중심으로 부원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의 은사를 잘 살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은사를 잘 발휘하여 성도를 세우고자 할 때 성도들은 어느 정도까지 자라게 됩니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자라게 됩니다. 우리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우리를 자라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기저귀를 찬 사람들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서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을 치게 됩니다. 우리가 은사를 개발하기 위해서 각자 전공 분야를 공부해보면 수없이 많은 이론들과 사상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분별력없이 받아들이게 되면 믿음을 잃고 세상으로 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지식이 함께 자라야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믿음과 아는 것은 같이 자라야 합니다. 하늘그림자 모임은 미술사를 공부하는 가운데 세상의 많은 사상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비판적인 사상들을 접하면서 믿음이 약해지고 모임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다가 결국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믿음이 따르지 않으면 교만해져서 동역자들과 공동체를 판단하고 다른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겸손하게 써야합니다. 우리가 신앙 성장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끼리도 교류가 필요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된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는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과 교제를 하지 않고 혼자서 고독하게 생활하는 사람은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됩니다. 생각의 폭도 좁고 편견과 오해가 많아집니다. 우리가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과 섬김의 정신으로 교류를 해야 합니다. 소감을 팀모임에서 나누고 전체에서도 나누는 가운데 교제를 하고 비공식적인 교제들이 활성화될 때 사랑이 풍성해지고 오해와 내면의 응어리들이 풀리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웃음이 많아지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건전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교류가 활발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때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스스로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교회 성장을 가져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결과 질적 성장뿐 아니라 외적인 성장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하나됨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II.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 (17-32)
4:1-16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후반부에서는 이방인들의 생활과 성도의 생활 모습을 비교함으로 성도들의 삶에 대해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새 삶을 살 수 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치 말라." 이방인은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그들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해 방황하며 어두운 삶을 삽니다. 이런 모습의 상태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체적으로 이방인의 삶의 패턴을 열거합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의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첫째는 마음이 굳어져 있어 불의를 행하게 되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둘째는 총명이 어두워져 이해와 분별력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인간은 죽음과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넷째는 욕심으로 행합니다. 탐욕의 노예가 되어 방탕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없이 사는 이방인의 삶은 소망이 없고 어두우며 죽음과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삶을 말씀하고 지금부터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권면합니다.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첫째는 그리스도를 배워야 합니다. 20절을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배웠다'는 것은 신학이나 교훈이 아닌 그리스도의 인격과 품성을 배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품성을 배우고자 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둘째는 듣는 삶입니다. 21b절을 보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들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어야 합니다. 셋째는 가르침을 받는 삶입니다. 21c절을 보면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21a절에는 진리가 예수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학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됩니다. 이를 볼 때 모두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아야 예수님의 인격을 배울 수 있고, 또 들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경 공부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경 공부를 통해서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물욕과 정욕과 권세욕을 버리고 한국인의 구습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조선 시대부터 당파 싸움을 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는 잘 나가는 사람을 시기하여 짤라버리고 원로들을 공격하여 존경받는 원로가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파당을 만들어서 싸우기를 잘 합니다. 또 서로 잘 낫다고 하고 양반 노릇을 할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구습들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말씀 공부를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깊이 있게 회개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되려면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23절에서 말하듯이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될 때 진정한 개혁을 할 수 있습니다. 머리를 빡빡 밀고 책장을 바꾼다고 새로워집니까? 가을이 되어서 여행을 하고 환경이나 제도를 바꾼다고 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심령으로부터의 개혁이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인 의와 진리와 거룩함에서 자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벗고 입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거짓을 벗고 참을 말해야 합니다(25). 거짓을 없애고 참을 말하는 것은 동전의 앞뒤와 같습니다. 거짓을 없애기 위해서는 참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 몸의 각 지체끼리는 거짓말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나가다가 개똥을 보았다고 합시다. 이 때 눈이 발보고 '야, 그것은 겨니까 밟아도 돼!' 하는 눈이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한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솔직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는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26,27). 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의로운 분과 죄를 가져 오는 분이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죄에 대해 분노를 해야 합니다. 모든 종류의 죄에 대해 분노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의로운 분노도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해가 지기 전에 분을 풀어야 합니다. 분은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범죄 행위입니다. 분이 생기면 악의가 생기고 남을 중상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분이 생기면 속히 풀어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에게 있어서 분, 혈기는 금물입니다. 혈기를 품어서는 안 되고 오래 가지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분이 생기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풀어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리라(약1:19)." 분냄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분을 내어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셋째는 도적질을 벗고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28).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28). 자기 손으로 레포트를 써야 합니다. 불로소득을 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구제를 할 수 있도록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넷째는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선한 말로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29). 입 밖에도 내지 말라는 것은 흉내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여러 가지 축복을 주셨지만 말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신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말을 통해 선을 행하기도 하고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말을 통해서 덕을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을 하되 은혜를 끼치고 덕을 세우고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칭찬의 말, 믿음의 말, 유익한 말, 사랑의 말을 할 때 사람을 세울 수 있습니다. 말은 인격이기 때문에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해야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30).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우리가 더러운 말을 하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가 불의를 말할 때 성령께서 근심케 됩니다. 성령은 연합시키는 영입니다. 그런데 분열시키고 비방하는 말을 하면 성령께서 근심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말을 벗어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1,32절을 보면 성도들이 버려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성도들은 악독, 노함, 분냄, 떠드는 것, 훼방하는 것, 그리고 악의를 버려야 합니다. 반면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함과 같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입으로 즉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세운다면 우리는 많은 양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힘써 지키고 각자 받은 바 은사를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일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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