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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000년 에베소서 제 3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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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4,470회 작성일 03-01-17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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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에베소서 제 3 강
말씀/ 에베소서 2:1-22
요절/ 에베소서 2:16

원수됨을 소멸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 가를 말하고 이방인과 유대인간에 있는 뿌리깊은 갈등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결하사 하나가 되게 하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 관계에서 생기는 적대감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소멸하신 것을 깨닫고 평화를 누리며 평안의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Ⅰ. 오직 은혜로(1-10)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엄청난 축복을 언급하기에 앞서 그리스도 없는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은혜의 풍성함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만 죄의 극악함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죄에 대한 부적절한 개념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만약 내가 정신을 차린다면, 선한 생활만 한다면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것이요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이라는 등의 말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진정한 불행은 그들이 '죄'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의 필요성을 결코 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들 자신의 참 모습을 결코 보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1-3)
 1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인간이 죽었다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누구나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허물과 죄"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증거합니다. 이 말씀에서 "허물"은  "잘못된 발걸음", "침범"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허물은 경계선을 넘는 죄, 바른 길에서 이탈하는 죄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는 "표적을 맞추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 편에서의 실패를 뜻합니다. 허물과 죄는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를 전체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적극적인 죄, 소극적인 죄, 알고 지은 죄, 알지 못하고 지은 죄를 총망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죽은 상태는 어떤 상태를 가리킵니까? 죽은 상태는 "죽어 가고 있는 상태"나 "죽도록 정죄 받은" 상태가 아니라 이미 죽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인간이 살아서 활동하는데 죽은 상태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 뜻은 그들의 활동이 죽은 활동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살아서 움직일지라도 그리스도 없는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마치 시체처럼 하나님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기민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없는 생명은 살아 있는 죽음이며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도 죽은 것이라는 점을 주저하지 말고 확신해야 합니다. 바울은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4:18)라고 보충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은 상태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될 때까지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2,3절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첫째로 "이 세상 풍속을 좇는"상태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사회의 가치 체계를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없어질 세상의 악한 방법에 완전히 영합하는 생활이요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법칙에는 전적으로 상반되는 생활을 뜻합니다. 그들의 생은 이 "악한 세대"의 방법대로 사는 생애였습니다. "이 세상 풍속을 좇는" 삶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 체계와는 정 반대되는 가치 체계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런 삶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갈5:19-21)"을 즐기면서 사는 생을 가리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어서 폼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며 살았습니다. 정욕을 즐기면서 연애하고자 하는 마음과 술취하고 도박하고 이기적으로 사는 것을 당연시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말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둘째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사는" 상태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탄을 가리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사단을 위해서 기꺼이 봉사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그의 존재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계속 존재하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탄이 바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불순종은 단순한 불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강하게 반대하는 적극적인 거부 반응을 뜻합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은 불순종의 원리가 그들 속에 내재해 있으므로 그들의 본성이 불순종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곧 중생받지 못한 불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사단을 좇음으로 사단과 같이 되었습니다. 저도 예수님 믿지 전의 사진을 보면 꼭 범죄자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그 사진을 내밀면 지금의 나를 알아 보지 못합니다. 이런 죄인을 구원하사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도록 하시니 감사합니다.
 셋째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상태였습니다.  육체는 타락한 인간 본성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죄의 다스림 아래 예속되어 있는 타락한 인간 본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심은 금지된 것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상태는 몸의 죄만을 가리키지 않고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전인간이 짓는 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타락한 본성을 따라 자기 중심적으로 살았다고 명백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육체의 욕심"을 인간이 소유한 자연적인 욕심과 구별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신체적 욕심은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식욕, 성욕, 혹은 수면욕 등은 바로 자연적인 욕심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욕심들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인간의 신체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단지 음식에 대한 욕망이 폭식이 되고 잠에 대한 욕망이 태만이 되며, 성에 대한 욕망이 정욕이 될 때, 자연적인 욕망이 죄의 성격을 띤 욕망들로 변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 사람들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살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이유를 그들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본질상"은 습관적인 행위나 개발되는 성격을 뜻하지 않고 사람 속에 본래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인간의 원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원죄는 아담이 범죄함으로 아담의 후예들에게 자연적으로 발생한 인간의 타락하고 더러운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아담 안에서 아담과 더불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을 가리킵니다. 바울 사도는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로 시작해서 우리도 다로 끝맺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고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과거의 삶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올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4-10)
 4,5절을 보십시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인간은 죄와 허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해서 긍휼을 베푸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과 풍성하신 은혜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의 동기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지도 못하고 얻을 수도 없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단지 그것을 영접하면 되는 것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것은 성도의 중생의 경험을 뜻하고 "함께 일으키신" 것은 성도의 부활을 뜻하고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승천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그리스도의 생명,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천에 실제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고 말했으며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2-3)"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살리시고 축복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할 때 "지극히" 풍성한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런 표현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울의 감격스런 마음의 표현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요함을 세상에 나타낼 의무가 있습니다. "나타낸다"는 말은 "명백히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보이는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성결을 동시에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결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만 나타내면 교회는 타협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 없이 성결만 나타내면 교회는 딱딱하고 아름다움이 전혀 없게됩니다. 교회는 타락한 세상에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젊은 캠퍼스 지성인들이 교회는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구원받은 목적은 하나님의 작품이 얼마나 멋있고 훌륭한 것인지를 세상에 나타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시물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진열장 속에 있는 성도들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보여준다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해서입니다.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호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작품인 것입니다. 또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구원을 위한 도구요 수단이지 구원을 위한 근거는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믿음이란 용어를 쓸 때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쓰지 "믿음 때문에"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는 믿음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나 원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 자체도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구원에 아무 것도 공헌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습니다. 무한한 지혜와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속 계획을 고안해 내실 수 있고 실천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물론 믿음의 책임과 믿음의 행위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믿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을 수 있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 속에 믿음의 씨앗을 심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믿음을 행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을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통로요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선물은 값을 치르지 않고 받는 것이며 공로 없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이 순전한 하나님의 선물로 성취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도 자랑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영광과 자랑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우리에게는 자랑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본문의 "만드신 바"는 "만들어진 것", "작품", "창조"의 뜻이 있는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가리키는데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는 말은 우리가 불신 상태에서 믿는 상태로 전환되는 정도를 뜻하지 않고 전혀 새롭게 창조되어졌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영적인 걸작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성도들이 외형적으로는 불신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본질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단의 추종자의 차이요 천국과 지옥의 차이이며 영생으로의 부활과 영벌로의 부활의 차이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걸작품은 선행을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비록 선행이 공로를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대단히 중요하여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것들을 행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선한 행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한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시기 전, 우리의 생애를 위해 선한 일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극적인 목적은 성도들의  삶 자체가 선한 일로 엮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선한 일 가운데서 행함으로 하나님의 걸작품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Ⅱ. 한 새 사람(11-22)

 11-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바울은 성도들이 회심 전 과거의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분명하게 상기시킵니다. 바울 시대에 할례와 무할례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특별히 언약의 백성이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결코 환난에 굽히지 않는 사람들로 만들었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방인들을 '개'나 '걸어다니는 짐승'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이 이방인을 사람처럼 창조한 것은 유대인들이 종으로 부릴 때 불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런 언급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해서 얼마나 배타적으로 경멸적인 태도를 가졌었는지를 증거해 줍니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는 축복받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밖에 있어서 이런 특권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이방인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이방인들은 메시야의 소망을 바라볼 수 없는 형편에 있었고 전혀 소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무엇보다 이방인들은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을 섬기고 있었지만 진정한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소외되었던 이방인들이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까워져서 사귐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성결과 의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13-18절은 예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그리스도는 단순히 화평을 주시는 자, 혹은 화평케 하시는 자에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이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리스도만이 홀로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이말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화평이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을 위해서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습니다(15). 율법을 폐하셨다는 것은 원수된 것을 폐하셨다는 것입니다. 원수된 것은 적대감을 말합니다. 율법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적대감이 생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의로 인해서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이방인들은 배타적인 유대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율법 전체를 성취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한 새 사람으로 지어졌고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습니다. 그의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들 속에 있는 적대감을 죽이셨습니다. 그의 죽음을 통해서 땅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의 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동역자 간에 적대감은 아니라도 부담감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가 다르고 요회가 다르다 보면 대화할 기회가 적고 속사정을 모르고 오해가 쌓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언제나 갈등이 작은 문제로부터 생겨서 회의와 불신으로 번지고 사단의 시험에 들어서 분열될 여지가 많습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내 안에 사랑이 없고 형제에게 관심이 없던 죄악을 회개하고 섬김으로 신뢰를 쌓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들이며 그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평화의 사도가 될 수 있는 기초를 주셨습니다. 그 피로 인하여 모든 건물이 함께 연결되며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그 분 안에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시고 모두 하나가 되어 평화를 누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 속에 있는 상처들이 치료되고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를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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