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00년 가을 에베소서 제 2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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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가을 에베소서 제 2 강
말씀/ 에베소서 1:15-23
요절/ 에베소서 1:23
교회의 충만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1장 첫부분은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 그의 깊으신 지혜로 성도들을 구원하신 사실을 인하여 찬양을 돌리고 있습니다. 둘째 부분은 하나님의 크신 복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 달라는 바울의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첫째 부분도 한 문장으로 되어 있고 둘째 부분도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의 풍성함 때문에 맥박이 멈추는 듯 감격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후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했습니다. 에베소는 아데미 우상의 신전이 있었고 우상 만드는 자들의 사업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점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감정적이고 사납고 돈만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신령한 축복을 받아 마음이 변화되어 믿음과 사랑이 싹트는 성도들이 된 것을 인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그들은 동료 성도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충만했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성도의 생활 전부를 가리킵니다. 믿음은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받음이고 사랑은 구원받은 자가 나타내는 모든 행실을 총괄적으로 가리킵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랑과 함께 역사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2)."고 하였습니다.
15절에서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은 그들이 처음 구원받을 때의 믿음만을 가리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매일 생활을 통해서 나타나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모든 성도들을 향한 사랑으로 실천된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랑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고 사랑 없는 믿음은 열매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물론 교회 내에서까지 믿음이나 교리는 경시하고 도덕과 생활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사회의 시각에 비쳐진 성도들의 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며 성도들 자신도 고상한 믿음과 높은 수준의 교리가 요청하는대로 생활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과 교리를 희석시켜 자신의 낮은 차원의 생활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진정한 믿음과 진리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부분이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명을 강조하고 경쟁적으로 역사를 섬기면서 형제 간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형제 사랑을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교제를 강조하면서 말씀 공부에 대한 열정이 많이 식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풍성히 받고 믿을 때 스피릿이 생기고 형제도 올바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진리에 기초한 믿음이 약한 상태에서 사랑만 강조하면 인간적인 교제 모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가을 학기에 더욱 열심을 품고 말씀을 공부하고 믿음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또 시대가 어렵다고 해서 말씀대로 순종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영적 도덕적 수준을 더욱 높이고 진리의 말씀대로 살 때 이 시대를 이길 줄 믿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을 인하여 감사한 후에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에베소 성도들이 또 다른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요 그들이 이미 받은 하나님의 축복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새로운 영적 축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열심이지만 이미 받은 측량할 수 없는 복에 대해서는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NIV 성경에서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흐름을 볼 때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으로 알 수 없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세계적인 석학이었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빛 가운데서 만나고 나서야 그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습니다. 그가 성령의 역사로 영적인 눈을 떴을 때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성령을 받은 에베소 성도들이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이는 이미 임한 성령의 임재가 강력하게 나타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바울은 3장 16절에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속에 성령의 사역은 시작되었지만 완성을 향해 계속 진행되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들의 사랑과 다른 은혜를 점점 풍성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기초적 지식 위에 지혜의 영을 받아서 모든 영적 사리를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알아갈수록 실망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학자인 줄 알고 따르고자 했는데 그가 세상 탐심이 가득한 것을 알고 실망을 했다고 합니다. 위인들의 삶을 알수록 존경심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갈수록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 집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올바른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소망과 축복이 깊어집니다. 우리는 창세기 공부를 많이 하는데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크신 소망을 배우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까지 그의 신앙을 키워주십니다. 험한 세상에서 이삭이 믿음의 조상의 길을 가도록 리브가를 주시고 백배나 축복해 주십니다. 질긴 야곱을 키우신 하나님, 요셉의 인생을 섭리 가운데 인도하신 하나님을 배우면 배울수록 사랑이 깊어지고 신뢰가 깊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성경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열망이 식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생 동안 성장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열망이 대단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을 더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덧입을 때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이는 순결한 삶 속에서 지혜와 총명이 옵니다. 다니엘이나 요셉과 같이 순결한 삶을 살고 이를 위해서 회개하는 생활을 하고 마음이 깨끗할 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으로 삶이 풍성해졌습니다. 마음 눈이 흐리면 하나님의 소망이나 기업의 영광이나 그 풍성함을 모르고 세상의 반짝거리는 것만을 보게 됩니다. 마음 눈이 밝아질 때 보아야할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바울은 좀더 구체적인 세 가지 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조명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의 눈이 밝혀져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과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18). 18절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통해 우리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 우리가 소유한 축복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임의로 부르시지 않고 목적을 가지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공부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며(롬8:17) 그와 교제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고전 1:9).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성도로 부르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하게 하고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인종이나 계급의 장벽을 초월하여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격려하는 한 가족으로서 교제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평화를 누리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사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도록 부르셨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도록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삶을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은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을 제공해 줍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의 변하실 수 없는 약속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우리들의 구원은 현재에도 확실하고 완전하지만 앞으로 나타날 놀랄만한 영광을 소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선이 승리하리라는 막연한 바램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소망은 성령을 보증으로 성도들에게 주시고 미래의 영광스러운 상속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확실히 보장된 소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4,25)"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으로 우리가 소유하게 된 소망과 그 본질 그리고 확실성을 우리들이 알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둘째, 성도가 받을 영광스러운 기업의 풍성함을 알도록 기도합니다(18).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기업을 약속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을 기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며 … 하늘에 간직된(벧전1:14)" 기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서 우리가 장차 받게될 영광은 지금의 고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취한 풍성한 영광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때는 우리의 낮은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완전하고 영원한 교제를 즐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게 하십니다. 그리고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에서 생명 나무 실과를 맺히게 하시고 그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케 하십니다. 우리는 각종 보석으로 꾸며진 성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업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이요 우리의 소망의 대상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기를 바랍니다(19). 19절을 보십시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9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힘"은 내재적인 위대한 능력을 뜻하고 "강력"은 행위 속에 나타난 능력을 뜻하며 "역사하심"은 어떤 사역을 성취시키기 위한 효력 있는 초인간적인 능력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성도들을 회개케 하는데 나타나고 성도들을 끝까지 보존하는데 나타나며 성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는데 나타나고 성도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존귀케 하는데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성도들을 부르셨고 성도들의 기업을 확실하게 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당한 모든 역경을 극복하며서 제자 양성을 하고 세계 선교 사명을 감당케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크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능력을 생각해 볼 때 알렉산더 대왕이나 쥴리어스 시이저나 보나파트르 나폴레옹과 같은 많은 영웅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권세는 자신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시대의 요청과 사탄의 속임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쓴 글을 읽을 때 그들은 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매우 감상적인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나폴레옹 보나파트르는 싸우는 법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자에게 말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적으로 강한 사람들은 외적으로는 강하지만 내적으로는 매우 약하고 비정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세상의 권세와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지극히 큰 능력을 알 때 세상 권세와 마귀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적이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협과 모진 고난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복음 역사를 섬긴 것은 그가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을 믿었고 그 권능을 덧입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빌3:10,1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능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러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어떠합니까?
20-22절을 보십시오. "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나타났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이요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 후에는 어떤 것도 부패와 변질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이 자연적인 과정을 멈추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모든 죽은 자들이 경험한 부패와 변질을 경험하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행2:27). 사람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죄와 죽음을 비웃거나 조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리에 이를 때에만 죄와 죽음을 비웃을 수 있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복음서와 서신서를 비교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에 있어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신 것으로 묘사한 반면 바울 서신은 수동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와 능력을 강조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이 자신의 부활에서도 나타날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요 바울 서신은 예수님과 성도들과의 연합을 강조하고 또 예수님이 성도들과 동일시되심을 강조하기 때문에 부활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이 동작의 주체가 되며 예수님과 신자들은 동작을 받는 대상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확증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오른편은 어떤 자리를 가리킵니까? 그것은 어떤 특별한 장소를 뜻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가 그의 이름으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실 수 있도록 그리스도에게 주신 권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동참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위엄과 그의 범우주적인 주권을 명백히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신 후 최고의 통치 권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의 통치권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까지 미치고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인 천사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들이지만 이 세대와 오는 세대가 병존하는 하는 기간에는 "죽을 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로서 몸을 가지고 죄있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긴장을 하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크신 능력이 함께 함으로 세상에서 악영향을 받기 보다는 도리어 믿음과 사랑으로 세상에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정복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셔서 복음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바울은 예수님이 교회와 만물의 머리가 되심을 설명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권위가 만물에게까지 미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지만 그의 통치권은 만물에게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이 예수님은 교회를 충만하게 하십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임재로 충만해지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활기에 차 있으며 그리스도의 은사들과 능력들과 은혜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유일한 머리이며 우주의 존재와 질서를 위해 필요한 것을 제공하십니다. 그는 또한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며 교회는 그리스도가 소유한 것을 전해 받고 사명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제공받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세우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교회의 존재와 사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하게 제공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사명인으로 살고자 할 때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필요한 지혜와 사랑과 능력과 물질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 안에 충만하신 그리스도를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말씀/ 에베소서 1:15-23
요절/ 에베소서 1:23
교회의 충만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1장 첫부분은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 그의 깊으신 지혜로 성도들을 구원하신 사실을 인하여 찬양을 돌리고 있습니다. 둘째 부분은 하나님의 크신 복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 달라는 바울의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첫째 부분도 한 문장으로 되어 있고 둘째 부분도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의 풍성함 때문에 맥박이 멈추는 듯 감격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후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했습니다. 에베소는 아데미 우상의 신전이 있었고 우상 만드는 자들의 사업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점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감정적이고 사납고 돈만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신령한 축복을 받아 마음이 변화되어 믿음과 사랑이 싹트는 성도들이 된 것을 인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그들은 동료 성도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충만했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성도의 생활 전부를 가리킵니다. 믿음은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받음이고 사랑은 구원받은 자가 나타내는 모든 행실을 총괄적으로 가리킵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랑과 함께 역사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2)."고 하였습니다.
15절에서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은 그들이 처음 구원받을 때의 믿음만을 가리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매일 생활을 통해서 나타나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모든 성도들을 향한 사랑으로 실천된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랑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고 사랑 없는 믿음은 열매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물론 교회 내에서까지 믿음이나 교리는 경시하고 도덕과 생활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사회의 시각에 비쳐진 성도들의 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며 성도들 자신도 고상한 믿음과 높은 수준의 교리가 요청하는대로 생활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과 교리를 희석시켜 자신의 낮은 차원의 생활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진정한 믿음과 진리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부분이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명을 강조하고 경쟁적으로 역사를 섬기면서 형제 간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형제 사랑을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교제를 강조하면서 말씀 공부에 대한 열정이 많이 식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풍성히 받고 믿을 때 스피릿이 생기고 형제도 올바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진리에 기초한 믿음이 약한 상태에서 사랑만 강조하면 인간적인 교제 모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가을 학기에 더욱 열심을 품고 말씀을 공부하고 믿음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또 시대가 어렵다고 해서 말씀대로 순종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영적 도덕적 수준을 더욱 높이고 진리의 말씀대로 살 때 이 시대를 이길 줄 믿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을 인하여 감사한 후에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에베소 성도들이 또 다른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요 그들이 이미 받은 하나님의 축복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새로운 영적 축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열심이지만 이미 받은 측량할 수 없는 복에 대해서는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NIV 성경에서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흐름을 볼 때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으로 알 수 없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세계적인 석학이었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빛 가운데서 만나고 나서야 그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습니다. 그가 성령의 역사로 영적인 눈을 떴을 때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성령을 받은 에베소 성도들이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이는 이미 임한 성령의 임재가 강력하게 나타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바울은 3장 16절에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속에 성령의 사역은 시작되었지만 완성을 향해 계속 진행되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들의 사랑과 다른 은혜를 점점 풍성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기초적 지식 위에 지혜의 영을 받아서 모든 영적 사리를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알아갈수록 실망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학자인 줄 알고 따르고자 했는데 그가 세상 탐심이 가득한 것을 알고 실망을 했다고 합니다. 위인들의 삶을 알수록 존경심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갈수록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 집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올바른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소망과 축복이 깊어집니다. 우리는 창세기 공부를 많이 하는데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크신 소망을 배우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까지 그의 신앙을 키워주십니다. 험한 세상에서 이삭이 믿음의 조상의 길을 가도록 리브가를 주시고 백배나 축복해 주십니다. 질긴 야곱을 키우신 하나님, 요셉의 인생을 섭리 가운데 인도하신 하나님을 배우면 배울수록 사랑이 깊어지고 신뢰가 깊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성경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열망이 식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생 동안 성장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열망이 대단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을 더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덧입을 때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이는 순결한 삶 속에서 지혜와 총명이 옵니다. 다니엘이나 요셉과 같이 순결한 삶을 살고 이를 위해서 회개하는 생활을 하고 마음이 깨끗할 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으로 삶이 풍성해졌습니다. 마음 눈이 흐리면 하나님의 소망이나 기업의 영광이나 그 풍성함을 모르고 세상의 반짝거리는 것만을 보게 됩니다. 마음 눈이 밝아질 때 보아야할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바울은 좀더 구체적인 세 가지 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조명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의 눈이 밝혀져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과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18). 18절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통해 우리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 우리가 소유한 축복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임의로 부르시지 않고 목적을 가지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공부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며(롬8:17) 그와 교제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고전 1:9).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성도로 부르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하게 하고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인종이나 계급의 장벽을 초월하여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격려하는 한 가족으로서 교제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평화를 누리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사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도록 부르셨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도록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삶을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은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을 제공해 줍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의 변하실 수 없는 약속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우리들의 구원은 현재에도 확실하고 완전하지만 앞으로 나타날 놀랄만한 영광을 소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선이 승리하리라는 막연한 바램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소망은 성령을 보증으로 성도들에게 주시고 미래의 영광스러운 상속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확실히 보장된 소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4,25)"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으로 우리가 소유하게 된 소망과 그 본질 그리고 확실성을 우리들이 알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둘째, 성도가 받을 영광스러운 기업의 풍성함을 알도록 기도합니다(18).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기업을 약속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을 기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며 … 하늘에 간직된(벧전1:14)" 기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서 우리가 장차 받게될 영광은 지금의 고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취한 풍성한 영광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때는 우리의 낮은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완전하고 영원한 교제를 즐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게 하십니다. 그리고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에서 생명 나무 실과를 맺히게 하시고 그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케 하십니다. 우리는 각종 보석으로 꾸며진 성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업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이요 우리의 소망의 대상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기를 바랍니다(19). 19절을 보십시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9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힘"은 내재적인 위대한 능력을 뜻하고 "강력"은 행위 속에 나타난 능력을 뜻하며 "역사하심"은 어떤 사역을 성취시키기 위한 효력 있는 초인간적인 능력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성도들을 회개케 하는데 나타나고 성도들을 끝까지 보존하는데 나타나며 성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는데 나타나고 성도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존귀케 하는데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성도들을 부르셨고 성도들의 기업을 확실하게 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당한 모든 역경을 극복하며서 제자 양성을 하고 세계 선교 사명을 감당케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크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능력을 생각해 볼 때 알렉산더 대왕이나 쥴리어스 시이저나 보나파트르 나폴레옹과 같은 많은 영웅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권세는 자신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시대의 요청과 사탄의 속임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쓴 글을 읽을 때 그들은 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매우 감상적인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나폴레옹 보나파트르는 싸우는 법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자에게 말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적으로 강한 사람들은 외적으로는 강하지만 내적으로는 매우 약하고 비정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세상의 권세와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지극히 큰 능력을 알 때 세상 권세와 마귀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적이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협과 모진 고난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복음 역사를 섬긴 것은 그가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을 믿었고 그 권능을 덧입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빌3:10,1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능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러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어떠합니까?
20-22절을 보십시오. "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나타났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이요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 후에는 어떤 것도 부패와 변질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이 자연적인 과정을 멈추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모든 죽은 자들이 경험한 부패와 변질을 경험하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행2:27). 사람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죄와 죽음을 비웃거나 조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리에 이를 때에만 죄와 죽음을 비웃을 수 있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복음서와 서신서를 비교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에 있어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신 것으로 묘사한 반면 바울 서신은 수동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와 능력을 강조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이 자신의 부활에서도 나타날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요 바울 서신은 예수님과 성도들과의 연합을 강조하고 또 예수님이 성도들과 동일시되심을 강조하기 때문에 부활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이 동작의 주체가 되며 예수님과 신자들은 동작을 받는 대상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확증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오른편은 어떤 자리를 가리킵니까? 그것은 어떤 특별한 장소를 뜻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가 그의 이름으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실 수 있도록 그리스도에게 주신 권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동참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위엄과 그의 범우주적인 주권을 명백히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신 후 최고의 통치 권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의 통치권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까지 미치고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인 천사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들이지만 이 세대와 오는 세대가 병존하는 하는 기간에는 "죽을 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로서 몸을 가지고 죄있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긴장을 하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크신 능력이 함께 함으로 세상에서 악영향을 받기 보다는 도리어 믿음과 사랑으로 세상에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정복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셔서 복음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바울은 예수님이 교회와 만물의 머리가 되심을 설명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권위가 만물에게까지 미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지만 그의 통치권은 만물에게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이 예수님은 교회를 충만하게 하십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임재로 충만해지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활기에 차 있으며 그리스도의 은사들과 능력들과 은혜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유일한 머리이며 우주의 존재와 질서를 위해 필요한 것을 제공하십니다. 그는 또한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며 교회는 그리스도가 소유한 것을 전해 받고 사명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제공받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세우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교회의 존재와 사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하게 제공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사명인으로 살고자 할 때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필요한 지혜와 사랑과 능력과 물질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 안에 충만하신 그리스도를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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