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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000년 가을 에베소서 제 1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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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4,584회 작성일 03-01-17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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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가을 에베소서 제 1 강
말씀/에베소서 1:1-14
요절/에베소서 1:3

신령한 복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63년 경 감옥에 있으면서 에베소와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 신실한 자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에베소 교회의 특별한 문제를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가슴에 품고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위대한 신앙 진리를 가르치고자 쓴 것입니다. 전반부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영적 축복에 대해서 썼고 후반부는 교회가 어떻게 생성 발전하는가, 가장 이상적이고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1장을 더 자세히 나누어 보면 1,2절은 인사이고 3-14절은 구속받은 성도들에게 임한 신령한 축복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구속 역사에 나타난 성부(3-6), 성자(7-12), 성령(13,14) 하나님의 역할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미하도록 하였습니다. 15-23절은 사도 바울의 기도인데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에 대해서,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에 대해서,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도록 간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전반부만 배우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자기 소개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도가 되기 위해서 자원하지도 않았고 교회가 그를 사도로 임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사람의 삶의 형태를 규정짓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도 일정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되고 있음을 확실히 하였습니다(롬1:10, 15:32).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고 처음부터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유대교의 열심분자였습니다(갈1:11-14).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택정하셔서 사도로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부르실 때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고 말씀하심으로 바울이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들이란 "거룩한 자들"이란 뜻입니다. 어떻게 에베소 교인들이 거룩한 자들입니까? 그들은 죄가 없는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룩한 자로 불리우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성취한 거룩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들이요, 죄책이 없는 사람들이요 하나님 자신의 백성들입니다. 여기서 거룩은 성화적인 의미나 도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위해 자신을 성별시키는 것처럼 자신에게 딸린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성별되기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진리로 구별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수신자들을 설명합니다. 신실한 자는 활동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단순히 마음이 선하고 좋은 인품의 사람으로 도덕적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주님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바로 신실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약아빠진 사람들이 아니라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은 여러 가지 사상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불경건한 사람들이 이 나라의 구석 구석에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데 신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역사의 주권자시오 통치자라는 것을 신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인사에 이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숨도 쉬지 않고 설명합니다. 헬라어 원본에는 3-14절까지 하나의 복문으로서 마침표가 14절에 하나 찍혀 있습니다. 바울은 숨을 내쉬지도 않은 채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로운 계획에 압도되어 단숨에 기록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전체 문단이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찬송하리로다"라는 용어는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에 대해서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 경험의 영역으로 들어오셔서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으로 인해 인간에게 신령한 복을 주신 사실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향은 자기 중심적이요 축복에 관한한 자기가 받을 복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어린 자녀가 장난감을 사다 준 부모보다는 장난감 자체를 더 즐기고 좋아하는 것처럼 인간은 선후를 바꾸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조심스럽게 그 순서를 바로 지키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적어도 하나님께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한 후 우리의 필요를 요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인간적인 축복은 조건적입니다. 예를 들면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 그 사람은 잠 자는 시간을 희생해야만 합니다. 또한 자기 아내나 남편을 고독하게 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축복들은 첫째로 오래 사는 것이고 둘째로 부자가 되는 것이고 셋째로 많은 손자들과 증손자들을 갖고 평화롭게 죽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복들은 일시적이고 무의미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벧전 1: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러시아의 예까쩨리나 여왕은 백만점이상의 그림을 모아서 박물관을 만들고 여름 궁전, 겨울 궁전에서 살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 영화와 축복은 풀과 같고 풀에 맺힌 아침 이슬과 같아서 잠시 잠간이면 사라져 버릴 한시적이고 무의미한 것들 뿐이었습니다. 저는 러시아의 왕들이 전쟁을 하면서 영토를 넓히고 문화재를 훔치면서 쌓아올린 영화들을 보면서 인생의 덧없음을 실감했습니다. 그들이 쌓아놓은 것들을 다 누리지 못하고 그 후손들이 누리고 있었고 제가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것들이 제 안에 참된 기쁨과 평강을 주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색을 여러 가지를 쓰게 되면 결국 검정 색으로 변하는 것과 같이 그 많은 아름다움들이 공허해졌습니다. 그러나 매일 아침 목자님들, 선교사님들과 함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신령한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 힘으로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이 복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임하는 복으로서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절대 종교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다원화된 세상에서 모든 종교는 같은 역할을 하며 기독교는 그런 종교 중의 하나로서 역할을 감당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의 독선은 종교의 범주를 벗어나는 과격한 주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신령한 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 한 사람만을 통해서라고 강조합니다(행4:12, 딤전 2:5).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중보는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령한 복들은 어떤 복들입니까? 신령한 복은 성령의 역사로 임하는 복입니다. 이런 복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오는 기본적인 복들인 것입니다. 이런 복은 순례자의 길을 걷고 있는 성도들에게 가장 기본이 될 수 있는 평화, 만족, 행복, 기쁨, 영광, 고통 중에서의 위로, 환난 중에서의 도움 등과 같은 것입니다. 한끼 식사는 건너뛸 수 있지만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살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만족과 기쁨은 물질이 많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신령한 복들은 다 하늘에 속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가질 때 우리의 세계관이 바로 되어지고 우리의 사회관과 인생관이 바로 되어집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순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같아질 수 없습니다. 신자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신자는 세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거기에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그 마음과 생각을 세상에 고정시키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본향은 하늘나라요 우리가 받을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들은 훌륭하지만 하늘에 속한 것과 비교할 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신령한 복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이 신령한 복의 충만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계획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합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 이름을 찬송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어떻게 성도들에게 전해 주십니까? 4a절을 보십시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신령한 복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데서 시작하지 않고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의 사역이 먼저가 아니요 하나님의 사역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택하시되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선택하십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선택이 무조건적이었음을 증거해 줍니다.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인간이 무슨 공로를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인데 어떻게 공로를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공로에 의존하지 않고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야곱과 에서의 관계로 선택을 설명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1)"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오묘함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무조건 선택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불의를 행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선택에 조건을 제시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선택받는 자가 장차 믿음을 가질 것과 선한 일을 행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 믿음과 선행을 근거로 택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게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이나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롬5:12).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모든 사람은 정죄 받아 죽어 마땅하다고 말씀합니다(롬6:23).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선택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의를 행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정죄 받을 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선택했다면 우리는 방종에 빠지기 쉽다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인간의 공로가 전혀 가산되지 않고 아무런 조건없이 선택했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선택받은 자는 구원을 얻게 되고 선택받지 못한 자는 지옥에 빠지게 될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목적만 정해 두신 것이 아니라 목적을 성취한 수단까지도 포함하여 정해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택받은 자가 은혜로 시작된 것을 영광으로 완성할 때까지 인내하시며 거룩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빌1:6; 2:12-13;살후2:13).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하심은 이론이 아니라 매일의 구속 경험 속에서 우리들이 겪는 생동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받은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도의 거룩한 삶은 선택받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 거룩한 삶을 위해 선택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무조건 선택했다고 믿는 것은 나의 미래를 내 손에 맡기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과 미래가 내 손에 달려 있다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장래를 그분 자신의 손으로 붙들고 계시도록 계획하시고 또 진행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 얼마나 마음 든든하고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무조건 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 죄사함의 확신과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선택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선택된 백성이 된다는 것은 결코 어렵거나 특별한 자격이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영접하는 자는 그의 택암받은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이것은 하나님의 만민 구속 계획 즉  예정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께 택함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의 가슴에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확신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십니다(롬8:16).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4b-6절을 보십시오.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의 앞에서 거룩하고(거룩은 내적인 순결의 상태) 밖으로는 흠이 없는(순결의 외적 조건) 완전한 자들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이 우리들의 거룩에 있습니까? 인간이 거룩하게만 되면 하나님의 목적이 모두 성취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거룩이나 흠이 없는 것과 같은 덕목들은 선택에서 오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이 최고 목적이요 우리의 성화는 그 목적에 따른 부수적인 것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6절 하반절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선택하신 궁극적인 목적임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7-12절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성도들의 구원을 성취한 내용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사도 바울은 풍성함이란 말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구속을 위해 지불하신 대가가 엄청난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은 성도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피흘리심으로 구체화됩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6:23)" 따라서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하사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을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그의 모든 것을 값으로 지불하시고 교회를 사셨습니다. 성도들을 위해서 임명된 대리자로서 기꺼이 잔혹하고 치욕적인 죽음을 참아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본문은 구속과 죄사함을 같은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속과 죄사함의 뜻이 거의 동일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성도들의 구원 경험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구속과 죄사함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어집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생각하면 구속과 죄사함은 그 뜻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렌스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를 잘 설명합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구속과 죄사함을 하나의 행위로 취급하지 않는다. 구속과 죄사함은 두 개의 행위이다. 구속은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사람을 위한 속량금으로 지불되어질 때 갈보리에서 발생했으며, 죄사함은 하나님께서 죄인이 회개할 때 그 즉시 그의 죄와 죄책을 내어 보내실 때 발생한다. 죄사함은 구속에 달려 있는 것이다."
 구속이라는 말은 값을 지불하고 구했다는 뜻입니다. 구속은 속량금을 지불하고 어떤 사람을 종의 상태에서 해방시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 인류는 죄의 결과로 속박 상태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구약은 한 민족이 율법을 지킴으로 스스로 자유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완전히 실패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무능력한 우리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속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값을 지불했습니까?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성도들을 속량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성도들의 몸값을 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사단에게 성도들의 몸값을 지불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값을 지불한다는 말은 죄인이 죄의 속박에서부터 해방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성립시켰다는 뜻입니다. 그 조건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이요 그 사건 자체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킬 속량금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사단에게 지불한 속량금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사단에게서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 벤허에서 본 것처럼 유다 벤허는 유대의 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친구 메살라로 인해서 모든 가족들은 지하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유다 벤허는 로마 전함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는 41번이었습니다. 그는 죽도록 전함에서 배를 저어야 했습니다. 때로는 충돌 속도로, 때로는 전쟁 속도로 노를 저을 때 쇠사슬에 발이 묶여 있어야 했습니다. 우연히 유다의 배는 중간 부분이 심하게 깨어졌습니다. 로마 집정관 퀸타스 아리아스는 전쟁에서 패했다고 느끼자 바다에 뛰어내려 자살하고자 했습니다. 유다도 뛰어내려 그를 구했습니다. 마침내 들어온 소식은 로마가 전쟁에 이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정관 아리아스는 유다를 그의 아들로 입양시켰습니다. 갑자기 불행이 그를 로마 왕자의 지위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구속에 대해서 조금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은 사단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실망으로 깊은 한숨을 쉬고 염려하고 생존을 위해서 투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정하시고 그의 풍성한 은혜로 말미암아 독생자의 피를 통해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은혜를 아끼지 않으십니다(8).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대신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쁜 마음으로 그의 신비한 뜻을 알리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뜻을 두시고 성취할 때가 되자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은 느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10a).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매우 느리게 보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십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성도를 구원하기 위한 사역을 생각할 때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3,14절은 성도들의 구원을 위한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구원의 조건은 권력, 학력, 금력, 그리고 가문과 같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0:9,10절은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생깁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믿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말씀이 선포되어야 하고 그 선포를 통해서 들음이 있어야 하며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들음, 믿음의 순서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죄인이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성령은 어떻게 사역하십니까? 아무도 성령의 역사를 떠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우리 모두의 마음들은 본래 진리에 대해 즉 복음의 메시지에 대해 닫혀 있습니다 말씀만으로는 그들을 열수도 없고 부드럽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발생하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본질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죄로 죽은 우리의 마음을 살리셔서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을 상고하고 나서 바울은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의 구원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적인 사역과 그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한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적 드라마의 목적은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 시대에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사명인의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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