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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012년 겨울수양회 야고보서 제 2강 -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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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vid Park
댓글 0건 조회 1,211회 작성일 12-02-1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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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야고보서 2강
말씀 야고보서 2:1-26                                            요절 야고보서 2:18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

어제 우리는 윤성자 목자님을 통해 야고보서가 쓰여진 상황과 배경에 대해 잘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이 행함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에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르쳤다면, 야고보는 이미 하나님 안에서 성장한 성도들에게 신앙의 실천적인 측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장에서 본 바와 같이 당시 가혹한 핍박에 직면해서 많은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의 교제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본 서신의 대상인 유대인 성도들에게 믿음을 적극적인 행위로 드러내어 사랑과 화평의 교제를 회복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본 장에서는 중점적으로 믿음과 행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사도 바울의 ‘이신 칭의’의 믿음을 잘못 이해하여 행함이 없는 삶에 안주하고자 하는 자세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행함’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행동이 따르는 믿음이라야 ‘온전한 믿음’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행동으로 열매 맺는 진정한 믿음을 배우고 우리 각자가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줄기차게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2장 전반부에서 야고보는 교회 내에서도 성도들이 사람의 외적인 조건에 따라 공공연히 차별대우를 하는 것에 대해 바른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좋은 옷을 차려입고 신분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교회에 오면 존대하며 좋은 자리를 내어 주고,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면 아무 데나 앉게 했습니다. 당시에는 종의 신분도 있었으므로 교회 안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평등하게 대한다는 것은 아마도 문화적 정신적으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화 또한 사람들을 그들이 가진 재력, 명예, 권력, 능력 등에 따라 평가하고 대우합니다. 요즘은 특히 외모 지상주의로 인해 외모는 경쟁력을 넘어 권력이라는 말까지 생겨나며 성형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외모 때문에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마음에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는 세상과는 달라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 사도는 교회 공동체를 향해 ‘내 형제들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 안에서 한 몸이 된 영적인 가족 공동체 입니다. 사랑하는 가족 안에서는 서로 잘났다 못났다 하며 판단하지 않습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법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한 자들은 대부분 아쉬울 것이 없으니 별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부하고 힘 있는 자들은 도리어 약자들을 억압합니다. 잘 생긴 사람들도 마음이 부해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좀 똑똑하다 싶은 이들은 기독교를 비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고 서로 영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말씀과 같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임을 가르치며,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롬 2:6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기록하였고, 또 계 22:12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에 관련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이라는 논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함이 없는 것은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있노라 하지만 실제적인 믿음이 없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야고보는 사랑의 실천에 관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양식이 없는데 말로만 평안하라, 몸 따뜻이 하라, 잘 먹으라 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됩니다. 자신이 잘 변화되지 않아서 고통하는 동역자에게 ‘회개하라’고 지적만 하는 것도 별로 도움이 안됩니다. 말로 하긴 쉽지만 인내와 중보기도로 실제적인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씀했습니다.(요일3:18)

성도들이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할 때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웃에 대한 섬김과 사랑을 잘 실천하지 못했을 때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물론 보이지 않게 희생적으로 섬긴 많은 지체들이 있지만, 교회가 몸집을 불려온 것에 비해 사랑이 필요한 사회의 구석구석에 그 손길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교인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학대하기도 하고 직분자들이 각종 비리에 연루되며 목회자가 성적인 문제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판할 수 만은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면 실제 삶 속에서 믿음이 영향을 별로 끼치지 못하는 많은 영역들이 있음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많은 경우에 가정에서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제일 어려운 부분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 아빠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면 자녀들이 믿음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우리 아이들 소감에 다 나오기 때문에 본을 잘 보여야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았을 때 일제 강점기에 교회 지도자들이 신사 참배에 앞장 선 경우도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는 아직도 북한이나 회교도 국가들처럼 믿음을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환경도 있습니다. 이처럼, 생각해 보면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겸손히 믿음을 배우고 말씀을 행하고자 하면 괜찮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만큼의 행함이 따르지 않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2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에 그 믿음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진정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위기의 때에 무너지게 됩니다.

17절에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해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 이는 곧 행함으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총 쏘는 방법을 안다고 해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수없이 사격 연습을 행한 사수만이 전장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의 말씀처럼 귀신들도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다 있습니다. 귀신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알고 떱니다. 오히려 귀신들은 우리보다 영적인 지식이 뛰어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시고 위대한 분이신지 우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진정으로 믿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했을 때, 그에 대한 감사와 순종과 헌신이 따르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처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믿음을 인정받았고, 그의 자손을 크게 번성케 하시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창22:12“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8절,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기생 라합은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라합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녀의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로 인해 그와 그의 가족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마 라합이 그 사실을 마음으로만 믿고 있었다면 여리고 함락 때에 그도 함께 멸망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온전한 믿음은 그에 따른 행동을 수반합니다. 믿음은 행동을 생산하는 에너지라고도 합니다. 어떤 이는 믿음은 나무와 같고 행함은 열매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 또한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됩니다. 믿음이 자라게 되면 그에 합당한 열매가 행동으로 맺히게 됩니다. 그러나 열매를 온전히 맺기도 전에 자신이 어느 정도 믿음이 있다 생각하고 계속된 믿음의 훈련을 게을리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믿음이 순종과 행함으로 올바로 성장해 갈 때 그에 따른 열매가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예에서 볼 때, 그의 믿음은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해 갔습니다. 처음 그에게 요구되어진 믿음의 행동은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렇게 했습니다. 그 후에는 믿음으로 인내하고 기다리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환경과 상황에 관계없이,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붙들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이 그의 믿음의 투쟁이었습니다. 때로는 그냥 포기하고 그의 종을 상속자로 삼고자 했을 정도로 그 기간 동안 그가 얼마나 갑갑하고 힘들었을지 우리는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하션던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의 연단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아이를 보면서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 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에게도 너무나 힘든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요나처럼 이삭을 데리고 다른 길로 배 타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동안의 믿음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게 되었고, 하나님과 깊은 신뢰의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라도 다시 살리시리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번제로 묶은 이삭 앞에서 그 칼을 높이 들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 그리고 그의 믿음의 행동은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하나님은 이런 그를 넘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로 볼 때 행함은 믿음의 성장을 이루고, 성장한 믿음은 더 큰 순종을 낳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단단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작은 것 하나부터 행하기를 미루다 보면 믿음을 유지하기는 커녕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의 죄악의 물결도 거세지고 있습니다. 믿음에 반대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몸부림치지 않으면 정체되고 퇴보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현재적으로 내게 원하시는 분량의 믿음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형상을 소유하기까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끝없이 성장해야 하며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영혼이 없는 몸은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여기서 영혼이라는 단어는 호흡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는데, 호흡이 없는 몸은 곧 시체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빈 껍데기요 시체와 같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스스로 믿음이 있다 생각하지만 진실된 행함이 없는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좀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행함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삶을 살고자, 말씀에 순종하고자, 열매 맺고자 힘들게 투쟁하는 동역자님들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대학교 때 목자님들을 처음 접하면서 한 말씀이라도 순종하고자 하는 그 분들의 삶의 모습에 감동받았습니다. 비록 사람마다 부족함도 있고 특송도 음악적으로는 별로였지만..^^; 소감에서 나타나는 진솔한 모습과 하나님을 향한 진심은 저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지속적인 믿음의 성장을 위해 회복하고 노력해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아마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가르쳐 주고 계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2012년은 기도와 전도의 불을 다시 불태워야 하겠습니다. 의지적인 투쟁을 하기보다는 기도로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의 지혜와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꾸준한 주님과의 교제가 있을 때 우리 마음의 불꽃이 계속해서 타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적, 공적 예배에서 경배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하나님되이 섬기며 그 음성을 인격적으로 듣는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능력을 공급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 하는 가운데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하겠습니다. 중보기도야말로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섬김이 빠지면 안되겠죠? 기도할 때 주시는 마음의 감동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해서 물질로든 시간으로든 섬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말씀이든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쓰실 수 없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자라감에 따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가 발견하고 실제적인 믿음과 행함으로 성장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시고 지금까지 영육간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제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도록 대학교 때 우리 모임으로 인도하시고 믿음을 연단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군생활과 가정을 통해, 그리고 잠시 있었던 수지에서의 교회를 통해 제가 평범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을 이루도록 도와주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UBF를 통해서는 말씀을 깊이 배우고 삶에 적용하고자 투쟁하며 소그룹 모임의 장점과 제자 양성의 믿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최근 4년간 섬겼던 교회는 우리 모임과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분위기가 달랐던 곳이었습니다. 그 곳은 우리 모임처럼 1:1말씀 공부나 소그룹에서의 깊은 인격적인 교제는 없었지만,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뜨거운 마음과 열정적인 기도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배우며 또 찬양인도도 섬기게 된 것은 큰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저의 육신의 정욕을 좇는 습관은 항상 성장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이는 제가 신앙의 초기부터 투쟁해 온 부분이었지만, 쉽게 순간의 유혹에 집중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음란 동영상에 넘어지고, 가정의 위기와 학원 운영의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는 퇴폐업소를 들락거리며 쉽게 회복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저의 상태를 알게 된 동역자는 통곡을 하며 고통하였고, 그 때서야 비로소 저는 지옥에 온 것 같은 고통을 맛보며 뉘우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피눈물을 흘리며 하게 된 다짐은 ‘힘을 길러서 다시는 이런 수치를 당하지 말아야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밤마다 2시간씩 기도를 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운데 있는 저를 상담과 아버지 학교, 특별한 집회 등을 통해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저의 내면을 치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아버지의 빈자리라는 내면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고,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맛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새로워지고, 어색했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과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 무어라 기도해야 할 지 몰라 답답할 때 은혜로 주신 방언도 큰 도움이 되어 많은 시간 힘들지 않게 기도하며 나의 영이 강건하게 세워져 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뿌리 깊은 습관으로 인해 다시금 유혹 앞에 갈등하기도 하였지만, 그 때마다 주 안에서 내가 이미 새로워졌음을 주장하고 기도하며 믿음의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많이 차분해지고 강건해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육신으로 할 수 없었지만, 성령님은 제 안에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러한 삶이 저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끌고 있는 것을 보며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사실 자연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육신적인 이 시대 가운데 별 죄책감도 없이 육신을 좇아 살며, 하나님과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제가 굳게 서서 가정을 지키고, 자녀들을 지키고, 하나님의 역사 편에 서서.. 묵묵히 힘든 직장 생활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제가 기적 속에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며 하나님으로 채워져 견고하게 서기를 기도합니다. 매일 1시간 이상의 기도 생활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더욱 깊어지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을 이루며 하나님이 쓰실 만한 내면으로 빚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요즘은 제가 마음이 많이 편해져서 그런지 매일의 기도를 꾸준히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집에 오면 아이들을 보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날리지만 아빠에게 매달리는 아이들을 돌보다 피곤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 때가 많았습니다. 역사도 겨우 찬양을 준비해서 섬길 뿐 캠퍼스에 가는 것은 엄두가 잘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간절히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제가 날마다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덧입고 맡기신 팀역사를 잘 섬기며, 올해는 캠퍼스에 도전하여 양들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풀타임이라도 하며 역사를 섬기고 영상과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는 사역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현재적으로 직장생활을 신실히 감당하며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순종이 필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직장 생활을 잘 하려면 팀장으로서 공부해야 할 것도 많은데 그 동안의 직장생활은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투쟁함으로 이 가운데서도 진보를 나타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삶 가운데서 나타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믿음과 행함이 균형 잡힌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도록 방향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어찌 보면 믿음과 행함의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 같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믿음에는 그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며, 그 행함은 믿음을 단단하게 하고 더욱 성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균형 잡힌 믿음의 성장으로 줄기차게 열매 맺는 건강한 삶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원하시는 믿음을 발견하고 줄기차게 전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공동체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더욱 간절히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와 나누기 원하십니다. 우리를 친구 삼으시고 동역자 삼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셔서 그 분의 임재 가운데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저희가 이 하나님 한 분만을 간절히 사모하는 열정을 회복하고 힘써 부르짖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하며 넘치는 사랑으로 주위 사람들과 양들에게 하늘의 축복을 전달해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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