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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012년 야고보서 4강(4:1-17)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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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288회 작성일 12-02-12 12:43

본문

2012년 야고보서 제 4 강                                                       
본문 야고보 4:1-17
요절 야고보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야고보서 말씀을 통해서 영적 성숙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1장에서는 영적 성숙에 이르기 위해서 시련을 인내로 감당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시련은 우리를 순수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듭니다. 2장에서는 성숙에 이르기 위해서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하고 들은 말씀을 죽기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3장에서는 영적 성숙에 이르기 위해서 말을 많이 하기보다 배운 바 말씀을 한 가지라도 실천하고자 힘을 써야 합니다. 4장에서는 영적 성숙을 위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 위해서 첫째, 하나님의 뜻에 굴복해야 합니다. 둘째,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셋째, 성결해야 합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복종하라(1-7) :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싸우는게 아니라 이상하게 사람과 싸우기를 잘 합니다. 별 것이 아닌데도 그것 가지고 죽기 살기로 싸웁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어렵듯이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도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 불평과 원망이 많습니다. 대개 집에서 남편에게 끊임없이 불평하는 아내는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에 있습니다. 아내와 끊임없이 싸우는 남편은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에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니 불안하고 짜증이 나고 불평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마음에 여유가 없고 사람과 싸우는 것입니다. 이는 가정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싸우는 정욕은 원뜻이 싸우는 쾌락입니다. 인간은 평화를 추구하지만 전쟁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게임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술중독 등 중독이 많이 있지만 가장 강한 중독은 전쟁 중독이라고 「지식의 역사」를 쓴 챨스 밴 도랜은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데 그 원인은 인간의 육체 내에 있는 싸움에서 오는 쾌락을 삶의 목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싸우는 쾌락을 추구하다보면 다툼은 필연적입니다. 영화와 게임과 드라마를 보십시오. 폭력과 정욕을 두 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싸워야 살맛이 나고 싸우는 것을 보는 데서 대리 만족을 취하기 때문에 뻔한 스토리를 가지고 영화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도 장사가 잘 됩니다. 사람이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며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웁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음으로 만족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기 때문입니다(3). 우리는 사람과 싸우기보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로 구해야 합니다. 야곱이 얍복 강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밤새도록 씨름을 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가 진정 원하는 복을 간구할 때 복을 얻게 되고 참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은 사람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과 싸우지 말고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구해야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신랑으로 성도를 신부로 표현한 말씀이 많습니다. 부부는 친구보다 더 가까운 사이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과 친밀한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면 어떻게 됩니까? 영적으로 간음한 여인이 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은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십니다. 출애굽기 34:14절은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질투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사랑을 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전폭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마음껏 누리며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자연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50억분의 1이라는 확률을 뚫고 이 땅에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먹고 마시고 입도록 나의 필요를 섬세하게 채우시며 교육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내가 죄로 인해서 고통할 때 안타까워하시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마침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어 나의 죄를 도말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내 마음에 내주하게 하셨습니다. 나와 늘 함께 하시며 연합하며 친밀한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아가서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연인 사이로 아름답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기까지 그 백성을 사랑하셔서 엄격한 요구를 하시지만 더욱 큰 은혜를 주셔서 백성들의 결점을 보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엄격한 요구를 채우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6). 교만이 무엇입니까? ‘교만’ 이라는 말을 원어로 보면 ‘위로’ 자신을 ‘보인다’ 라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게 자기 머리를 쳐드는 것을 말합니다. 곧 남을 비웃거나 업신여기며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 머리를 쳐들며 자기를 드러낸다고 자기가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겸손한 자는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순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말고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자신을 놓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도 알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때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살전5:16-18).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고자 마음을 먹으면 하나님의 뜻이 잘 보입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대로 하고자 하면 아주 헷갈립니다.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하나님의 뜻이 잘 보입니다. 그러나 계산적인 마음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13-17절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허탄한 생각을 하는 사람의 예가 나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3,14).” 사람이 미래에 대해서 계획을 세우지만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사람이 세계에서 일어날 5분 앞의 일을 정확히 내다볼 수 있다면 그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미국뉴욕증권 거래소에서는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10년 계획을 세우고 30년 계획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야 합니다. 우리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을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 소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기를 힘썼습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잠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였습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선교 방향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쪽 길을 막으시면 다른 쪽으로 길을 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길을 여시는 대로 복종해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은 자기 확신이 강하고 물질중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일생이 꿈과 같이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자세는 무엇입니까? 1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내용은 주님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내 삶 속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굴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 때 영적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둘째, 마귀를 대적하라. 우리는 마귀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귀는 멀리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과 싸울 때 상대편이나 나의 죄악때문이라고만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물론 인간의 욕심과 죄 때문에 싸우고 다투지만 때로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하여 속이는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는 속이는 자입니다. 마귀는 다툼과 시기의 원인입니다. 사람과 다투고 싸울 때 마귀의 역사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 사람 안에 역사하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귀는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득하면서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예수님은 수제자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막을 때 마귀의 역사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며 책망하셨습니다. 마귀는 교만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과 아주 친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원수이고 하나님의 주권을 거스르는 일을 합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넘어지게 했던 마귀는 지금도 신자들을 유혹하여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는 타협할 존재가 아니라 대적해야 할 존재입니다. 마귀의 존재를 인식하고 대적할 때 사람들과 쓸데 없는 싸움이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다툼과 싸움이 일어날 때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침묵과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마귀는 기도하는 사람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고 계산만 하거나 꾀를 내는 사람은 마귀의 종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승리합니다.

  우리는 그런 예를 히스기야의 기도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히스기야와 그 백성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랍사게가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 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는지라(왕하 18:25).” 그리고 “앗수르 왕의 말씀이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왕하 18:29-31).”고 말하면서 속입니다. 이때 백성이 잠잠하고 한 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히스기야와 그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앗수르 군사 185000명을 치사 송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대적하며 기도하는 백성에게 큰 승리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마귀를 대적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성결해야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사람은 누구를 가까이 하는가에 따라서 그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좋아 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우리도 좋아하고 원하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구와 가까이 지내려면 자주 대화하고 교제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죄를 짓는 손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이는 제사 드리기 전에 물두멍에서 손을 씻는 것을 가리킵니다. 에베소서 2:13 절은 말씀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성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절히 듣습니다. 성결한 사람들은 응답 받는 기도 생활을 합니다. 성결한 사람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한낮의 태양과 같이 크게 빛이 납니다. 반대로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를 못합니다(잠4:18,19). 그러므로 우리는 성결한 생활을 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어야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나와 양들과 백성들의 죄로 인해서 울며 애통하는 삶을 살 때 주님이 가까이 하십니다. 이렇게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 주께서 우리를 높이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성경은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게 됩니다. 우리는 형제에 대한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힘을 써야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만이 아니라 형제간에 더욱 친밀함이 깊어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결국 형제와도 가까워집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뜻이면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이 진정 겸손한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 위해서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여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십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를 힘쓸 때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 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더욱 친밀함을 유지하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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