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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09년 약4강(4:1-17) 주의 뜻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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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312회 작성일 09-08-2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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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야고보서 제 4 강                                                                377
말씀 : 야고보서 4:1-17
요절 : 야고보서 4:15

주의 뜻이면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유럽 국제 수양회를 넘치게 축복하셨습니다. 이 수양회를 통해서 선교사님들에게 큰 힘을 주시고 유럽이 다시 한 번 선교사를 파송하는 대륙이 될 소망을 보았습니다. 유럽 지성인들과 2세 선교사들을 굳게 세우셔서 힘 있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유럽 선교 역사는 사탄의 공격을 받으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들은 사탄을 대적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승리를 체험한 수양회였습니다. 유럽이 앞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대륙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주에 코스모스 졸업이 있었고 우리 센터에서도 세 명이 졸업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의 장래를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 이 분들이 자신의 장래를 주님께 맡기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나의 장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있고 꿈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복종하라(1-10) : 우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일어납니까? 우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악한 본성은 싸우고 다투는 것을 은근히 즐깁니다. 싸우는 것을 보는 것은 재미가 있습니다. 중국의 액션 영화는 뻔한 스토리이지만 언제가 인기가 높습니다.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그런데 1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는 신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다투고 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보다 자기가 주인이 되고 자기가 왕이 되고 자기가 쥐고 흔들고자 하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툼을 일으키게 하는 정욕은 자기주장을 옳다고 하며 끝까지 굽히지 않는 의지를 말합니다.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교만의 정욕, 자기나 자기 분파를 위하고자 하는 이기심이 싸움을 일으킵니다. 신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다툼의 문제들은 결국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자기주장을 하는데서 발생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의견만 옳다고 주장하면 다툼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자 하면 다툴 일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시고 용서하시기 때문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평을 가져옵니다.

  2,3절을 봅시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모든 죄의 근원은 욕심입니다. 죄의 근원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라 할지라도 자기가 주인인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살인하며 시기합니다. 그렇게 하여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다투고 싸웁니다. 자기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만족을 모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는 다투고 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람과 싸우기보다는 하나님께 나아가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찾으라, 구하라, 두드리라 그리하면 찾고 구하고 열리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도 할 때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 그 뜻에 순종하기보다, 자기 뜻을 세우고 상대적 우월감을 얻고자 하는 정욕에 기초하여 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것은 영적인 간음에 해당이 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악한 방법으로 자기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패턴을 크게 나누면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행동을 강조합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투쟁을 강조하게 되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인간은 유한하고 변덕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성령이 거하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모하십니다. 우리가 그를 버리고 세상과 짝하면 그는 우리에게 시기하기까지 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6).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 머리를 쳐들며 자기를 드러낸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마귀는 가장 교만한 자요 또 교만을 부추기는 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귀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복종한다는 말은 단순한 굴종이 아니라 철저하게 낮은 위치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주장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자기주장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아를 버리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를 즐거워하며 그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해서 열정을 내는 것입니다. 열정이란 영어로 ‘enthusiasm’인데 en(안에)이라는 단어와 theos(하나님)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즉 열정이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때 열정이 생깁니다. 열정이 탁월을 낳습니다. 그러나 정욕에 따라 사는 삶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합니다. 자기 욕심과 자기 생각으로 열심을 내면서 이 사람과 다투고 저 사람과 다툽니다. 자기 자신과도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자아와 끊임없이 싸웁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왕되신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백성이 왕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왕의 백성 됨을 거부하는 것이요 왕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들의 정욕을 채우기를 즐겨하였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사 관계성을 회복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면 그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가 백성됨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정욕에 이끌리어 살았습니다. 우리는 다투는 정욕이 들어올 때에 인간적인 싸움을 하지 말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마귀와 싸워 승리할 때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관철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자는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근본적으로 내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요, 내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란 이것저것을 구하기 전에 내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그 뜻에 자기를 순복시키는 것입니다(마6:10).

  우리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에 기초해서 복음을 전하고 양을 칩니다. 진리의 말씀을 나누어 자유를 얻게 합니다. 생명을 얻게 합니다.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나 교회나 잘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세계 선교를 하는 것은 모든 민족을 품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서 비신자들을 사랑함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때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서 많은 양을 친다고 해서 내 이름이 높아지면 얼마나 높아지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것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고자 할 때 어려운 점이 무엇입니까? 자존심입니까? 이기심입니까?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러한 마음 뒤에 역사하는 마귀의 세력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께 복종하라는 말을 한 직후 바로 “마귀를 대적하라” 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헬라어로 “디아볼로” 인데 이는 고소자, 중상자라는 뜻으로 사단 (대적자, 참소자)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마귀는 인격적인 실체입니다. 어두움의 세력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길은 정욕의 유혹이 올 때는 피하는 것이고, 박해가 올 때는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도록 꼬드길 때는 정면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는 불신자들에게는 그 심령을 장악하여 별의 별일을 다 저지르지만, 신자들에게는 손 끝 하나 댈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께서 사셔서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다만 외부에서 유혹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무런 물리적인 힘이나 해를 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적하면 마귀는 그저 물러갑니다. “마귀야 물러가라!” 믿음으로 외치면 쫓겨 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소극적이 방법이라면 적극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8,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은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감추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지만 회개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울로 자신을 보는 것 같이 죄를 깨닫고 돌이킨다면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어야 합니다. 나의 죄로 인해서 울어야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어야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정말 자격 없는 죄인을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회개하는 삶은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갖는 것이 안정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는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형제를 비방하지 않습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입니다.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을 비방해서는 안 됩니까? 그들은 우리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방하는 그 사람은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피로 사신 사람입니다. 주께서 그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셔서 우리의 한 형제가 되게 하셨는데 우리가 그를 함부로 헐뜯고 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모세의 율법과는 다른, 자유케하는 온전한 율법(1:25), 예수님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2:8), 곧 황금률을 말합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이면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13-17) : 우리 중에 누가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생명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우리는 장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지만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렇게 살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성공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이 사람 저 사람과 관계도 맺고, 생각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제가 좀 살아보니 내가 꿈꾸고 계획한대로 되는 것보다 되지 않은 것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최선을 다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생각한 것대로 되지 않은 것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의 인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감사를 드립니다. 내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과학원에 들어갈 수 있다면 독신으로 살고자 계획하고 기도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과학원에 들어가기는커녕 대학원에도 떨어지게 하시고 할 수 없이 군대에 가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자기가 깨어지는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신을 원한 제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네 명의 자녀를 허락하셨습니다. 과학자로서 명예를 꿈꾼 제게 주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제 생각은 제대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풀타임 목자로 인도하셨습니다. 제가 자기가 맡은 교회나 잘 되기를 바라는 좁은 마음을 버리고 세계 만민을 먹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큰마음을 갖도록 주님은 줄기차게 선교사를 파송하게 하셨습니다. 저의 삶을 돌아보면 주님께서 인도하신 삶은 풍성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 결혼을 하지 않으신 분들은 내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고자 고집하다가 노처녀 노총각으로 사는 것보다는 믿음으로 결혼을 해서 가정 교회를 이루고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무지합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고, 나의 전공에 대해서도 그렇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겸손한 태도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그의 종들에게 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면 길을 여십니다. 때로는 닫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도 사실 잘 모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 때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니다.

  현재 유럽은 하나님이 없는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국가라고 말하지만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과 의지로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진보주의요 세속주의입니다. 종교는 있지만 인간이 신인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사신(死神)신학, 자유신학을 가르칩니다.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 천국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유럽 지성인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동성애가 편만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겉으로볼 때는 나이스하지만 속은 썩어가고 있습니다. 외롭습니다. 고독합니다. 이런 사상들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선교사님들은 그들이 구닥다리라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도록 가르치고 그렇게 살도록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입니다. 허탄한 자랑이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의 수완이나 재주나 건강 같은 것을 믿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야고보서에서 허탄한 자랑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세상의 부를 자랑하고(2장), 마치 자신만이 지혜로운 듯이 함부로 말하고 (3장),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다툼을 일삼는 것(4장) 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인생은 그러한 것에 마음을 쓰고 투자하기에는 너무 짧습니다.

  우리는 안개와 같은 인생 가운데 가장 가치 있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의 뜻대로 사는 삶입니다. 주님의 뜻에 복종하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삶입니다. 자기를 주장하는 의지, 자기의 정욕에 이끌리어 사는 삶은 언제나 불만족스럽습니다. 받으면 받을수록 부족하고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순복하는 삶은 참 만족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결코 후회가 없습니다. 17절의 ‘선’ 은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것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안개와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미래를 대비하는 가장 지혜로운 삶입니다.

  유럽 수양회를 마치고 돌아온 날(18일)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를 했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참 위대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들고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한 한 인물의 위대한 삶이 종지부를 찍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께 복종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여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겠습니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이 진정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열정을 덧입고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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