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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09년 야고보서 제3강 온전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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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느헤미야
댓글 0건 조회 2,834회 작성일 09-08-16 14:34

본문

2009년 야고보서 제 3 강             
말씀 / 야고보서 3:1-18
요절 / 야고보서 3:2 

온전한 사람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세상에는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시위를 떠난 활입니다. 둘째는 지나간 세월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한번 내뱉은 말입니다. 내뱉은 말은 실수라고 해도 이미 그 말은 들은 사람의 마음에 박혀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의 어느 동물도 규격화된 언어로 의사소통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말’로써 생각한 언어를 전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말’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어느 사회건, 집단이건 간에 오가는 말에 따라 그 사람과 공동체가 규정됩니다. 연약한 몇몇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기독교 전체가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는 여러 사례들을 접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를 볼 때 ‘말’이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동시에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말’에 대한 강도 높은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말을 살펴보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여 말을 잘하는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말을 잘하자(1-12)

  1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당시에는 오늘날 처럼 책이 많이 보급되지 않아서 주로 들음으로써 지식을 습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생, 곧 가르치는 사람은 인기가 있었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탈무드에 "부모와 랍비가 물에 빠졌을 때 먼저 랍비를 구하라" 라고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도 고대 그리스 사람들처럼 시장이나 광장에 모여 가르치는 사람의 말을 듣기를 좋아하였고 회당에서도 할 말이 있는 사람에게는 말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관습으로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회당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이 존경을 받으므로 당시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는 자가 되고자 하였습니다(마 23:8).  선생의 인기는 소녀구룹인 ‘소녀시대’(지지지지 베이비 베이비 베이비)나 북한에 억류된 여기자 2명을 데리고 나온 클린턴과도 버금갔습니다. 선생은 그 시대의 최고의 짱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선생은 그들에게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선생된 자가 더 큰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큰 심판'이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엄격한 기준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역시도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목자들이요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목자님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복음은 더 빠르고 더 멀리 전하여 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자 야고보가 왜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깊히 생각해봐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살다보면 이런 저런데서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특히 말에서는 실수가 더 많습니다. 보통 한 사람이 하루 평균 3만 마디나 되는 말을 하기 때문에 실수가 없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지나고 나면 ‘아차, 내가 그 말할 때 실수 했네’ 하며 말의 실수를 발견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란 먼저 하나님께 돌이킨 자로써 시대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내뱉은 말 한마디는 파급효과가 매우 큽니다. 쓰나미 효과와도 같습니다. 해운대란 영화는 쓰나미를 다룬 영화입니다. 일본 대마도 해저에서 발생한 작은 지진이 부산으로 다가 올수록 파고 50m 이상의 거대한 파도를 일으킵니다. 진원지에서 10분만에 부산을 점령합니다. 또 그 여진으로 발생한 더 높은 2차 파도는 살아있는 사람들마저 수장시키고 부산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립니다. 이처럼 우리의 말 한마디로 인해 한 생명을 구할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 야고보는 1절에서 ‘더 큰 심판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저는 얼마전,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지방에 갔었는데 아들이 집을 지키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딴 짓 하는거 아냐?’ 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저 스스로가 아들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말을 한 실수였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못 믿으면 집안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도 믿음의 자식인데!, 아들아! 내가 너를 믿는다!’ 저는 죄인된 심정이 되어 미안함이 앞 섯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인 동시에 선생인 저 역시도 말에 실수를 합니다. 
 
  실수가 없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온전한 사람' 곧 '잘 갖추어진 성숙한 신자'입니다. 혀의 근육은 온 몸에서 가장 부드러운 근육으로 되어있습니다. 마치 탁구공이 스핀을 받아 떨어지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듯 혀가 어떻게 말을 해 낼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혀를 절제시키고 통제하여 말 실수가 없는 사람이 바로 온전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3절에서 이를 비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큰 말(horse)을 부릴 때 그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곧 그 입에 쇠나 나무로 된 막대를 가로로 물려 그 양끝을 줄에 매여 당기므로 말의 방향을 제어하고 행동을 다스립니다. 재갈은 작지만 그 큰 말은 꼼짝도 못하고 순종합니다.  또한, 4절에서 배의 비유를 보십시오. 3만 톤급 배라면 그 길이가 200 미터 높이는 15미터 정도 됩니다. 63빌딩을 눞혀 놓은 크기입니다. 그런데 그 큰 배의 제일 뒤쪽에 작은 키가 물속에 잠겨 있어서, 조타실에서 그것을 좌측으로 틀면 배가 오른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틀면 배가 왼쪽으로 갑니다. 그 큰 배가 작은 키 하나로 통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혀도 몸의 작은 지체에 불과하지만 그 미치는 영향력을 볼 때 참으로 큽니다.
  잠언서 17:20절을 보십시오.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여로보암을 비롯한 북방 열 지파들이 북왕국 초대 통치자인 르호보암에게 가혹한 통치를 완화해 달라고 탄원하였을 때, 르호보암은 “내 부친은 채찍으로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징계하겠다”고 폭언을 하였습니다(대하 10:3,4). 이 한마디 말로 다윗의 통일 왕국은 깨어져 남북으로 갈리는 비운을 맞게 됩니다. 이처럼 혀는 작지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말 잘하면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말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도 있습니다. 무심코 뱉은 말이 사람을 죽입니다. 몸에 상처야 치료하면 낫지만 마음의 상처는 평생갑니다. 총검으로 죽은 사람보다 독한 말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욕심을 말씀으로 제어하고(약 1:14) 인내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훈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훈련으로 연단되어질 때 말에 실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치 혀에서 나오는 말에 따라 우리 인생에 변화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목자님들의 인생소감 등을 통하여 어릴 때 “에이, 못난 놈! 니 주제에 뭘하겠어” 등 무시하는 말 한마디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가 되고 부정적이 되어 운명적인 삶을 사는 모습들을 보게됩니다. 반면 칭찬은 사람에게 용기를 줍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합니다. 자녀들의 성적이 남보다 못할지라도 절대로 비교하지 말고 칭찬과 격려를 해 줘야합니다. “야-아! 이렇게 잘했네! 야! 너 꼭 성공하겠다. 반드시 훌륭한 과학자가 될거야” “엄마는 너를 믿어, 엄마 맘 알지?” 이렇듯 엄마는 너만은 믿는다는 확신을 심고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심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6-8절은 말의 파괴적인 해악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혀는 곧 불입니다. 또한 혀는 몸이라는 큰 우주(세계) 속에 있는 작은 우주로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온 몸 곧 전인격을 더럽히고 작게 시작한 스파크가 불을 일으켜 삼림을 태워버리듯 한 사람의 삶의 수레바퀴 곧 전 인생을 태워버리기도 합니다. 그 사르는 불이 지옥불에서 나옵니다. 이 지옥불은 현세에 있어서는 사람의 혀에 깃들여 그 생을 파멸시키고 죽은 이후의 내세에 있어서는 그 사람 전체를 태워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신 이후 사람들은 세상의 짐승, 새, 벌레, 바다의 생물 등을 다 길들여왔습니다(창1:28). 돌고래를 길들여 쇼를 선보이고, 호랑이나 사자같은 맹수도 길들여서 서커스에 이용합니다. 인도에서는 거대한 코끼리를 길들여 교통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실로 사람이 길들이지 못할 피조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혀,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습니다.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비방, 아첨, 참소, 조소, 이간질, 비밀 누설, 중상모략 등 이 모든 것은, 혀가 내 뱉는 죽이는 독입니다. 우리는 얼마전 국민 배우 고 최진실씨가 고 안00씨의 자살한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악플로 시달리다가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 충격적인 뉴스를 지켜보았습니다. 악플은 결국 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이러한 혀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의 불만이 혀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이 하늘로부터 강하게 임한 오순절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불같이 사도들에게 임하자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혀를 장악하시고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각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의 말은 너무나 유창하고 확신이 넘쳐 사람들은 그들이 마치 술이 취하여 말하는 것처럼 생각 될 정도입니다. 특히 과거에 겁이 많고, 불신의 말, 인간적인 말을 많이 했던 베드로가 담대히 일어나 성령께서 주시는 구원의 메시지를 힘차게 증거합니다. 이를 볼 때 인간의 혀는 악하고 제어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는 혀를 제어하시고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9,10 절을 보십시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어떤 사람은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다가도 그 입으로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분신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내지 못하고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자 야고보가 이러한 비유를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하는 말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을 할 수 있지만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곧 혀를 다스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2절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말씀을 듣고, 선한 생각을 하고, 영적인 일에 힘쓸 때만이 우리의 마음이 날마다 새로와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영적이 될 때 그 마음에서 나오는 어떤 것도 깨끗하고 영적인 말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마음을 날마다 회개하고 성결케 되어 그 입으로 성결한 말, 거룩한 말을 하는 온전한 사람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II. 위로부터 난 지혜(13-18)
  성숙한 신자의 삶이란 위로부터 난 지혜를 덧입고 실제 생활에서 의의 열매가 가득한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 야고보 선생이 말하는 지혜란 어떤 것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지혜와 총명은 성경에 보면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신1:13,15; 단5:12). 이는 습득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혜와 총명을 자랑하였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그들에게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라고 합니다. 곧 ‘지혜와 총명이 있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참된 지혜와 총명에서 나오는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허리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러한 겸손으로 꾸준히 ‘선한 일을 함으로 열매를 맺는 삶’ 그것이 지혜와 총명 있는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그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자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다 보면 과장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말하게 됩니다. 그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고 오직 멸망할 세상만을 바라보는 지혜입니다. 그러한 지혜는 정욕의 것, 곧 동물적이 되고 결국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러한 자들이 있는 곳에는 시기와 다툼이 있고,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위로부터 난 지혜는 어떠합니까? 17,18절을 보십시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위로부터 난 지혜, 곧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참된 지혜는 성결합니다. 어떠한 악한 동기가 없으며 남의 아픔을 먼저 생각합니다. 화평합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가져옵니다. 관용합니다. 용서하며 온유하고 자비롭습니다. 양순합니다. 교만하여 진리를 대적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유순하여 하나님께 잘 순종합니다. 긍휼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곤경에 빠진 자들을 실제로 도와줍니다. 그 결과로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편견과 거짓이 없습니다. 차별이나 위선이 없이 공평함과 신실함이 가득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맺는 가운데 세상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합니다.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평케하여 많은 이들을 의로 돌아오게 하는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 성숙한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성숙한 삶의 열매들을 꾸준히 맺어갑니다.

  우리 역시 연약하여 자기감정이나 정욕을 의지하게 되고 그 결과 혼란과 악한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적인 것은 위로부터 지혜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만세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지혜를 지니셨던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가득한 선한 열매, 편견과 거짓 없음, 화평과 의의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성품과 말씀의 능력을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깃들 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어리석은 자는 자기 마음을 혓바닥 위에 두지만 현명한 자는 자기의 혀를 마음속에 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 많고 고통 많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죄로 가득한 시대와 구별되어 ‘말’을 아끼고 ‘믿음의 말’ 한마디를 건네야 하겠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를 덧입어 믿음의 사람답게 말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위에서 오신 참 지혜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를 풍성히 덧입고 ‘열매 맺는 사람’,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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