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09년 약2강(2:1-26) 참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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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야고보서 공부 제2강
말씀: 야고보서 2:1-26
요절: 야고보서 2:26
참된 믿음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제가 20년 전에 선교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지방 보고회를 할 때였습니다. 영남 지방에서 보고를 하고 호남지방에서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호남지방이 영남 지방에 비해서 개발이 되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기차를 타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때 저는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지역차별에 대해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역 차별이란 것이 나라를 분열시키고 지금까지도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이런 차별이 생긴다면 교회는 하나가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 흑인 아이가 백인들만 다니는 교회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제지를 당하여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 아이가 입구에서 울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고 물으니 백인들만 다니는 이 교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도 그 교회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 차별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차별의 문제와 행동하는 믿음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첫째, 교회에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1-13) : 우리는 영광의 주 곧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교회에 중형차를 몰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호텔에 가면 보이들이 겉모양을 보고 사람을 차별합니다. 여의도에 있는 한 호텔에 갔는데 세단은 호텔 지하에 주차를 하도록 하고 봉고 같은 것은 한강 고수부지에 주차하도록 합니다. 그러려니 하고 감당하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존심이 센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예민합니다. 고통을 당합니다. 열등감을 느끼면서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자신의 존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회의를 갖습니다. 이런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무엇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따라서 선택을 합니다. 자기 적성에 맞는 학과를 선택하기보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학과를 택합니다.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더 큰 아파트에 살고 더 큰 차를 타고자 하고 명품으로 몸을 치장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명품은 불황을 모릅니다. 부자들은 비쌀수록 자기가 더 차별되게 드러나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합니다. 중국도 외양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큰 손들이 많다고 합니다. 열등감이 깊은 사람일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차별들이 교회에도 들어왔습니다. 교회에서도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들어오면 부러움을 사고 인정을 받습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주목을 받게 됩니다. 대학생 선교를 사명으로 여기는 우리 모임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주눅이 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우리 모임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선교사로 파송되어 영어를 배우고 캐나다 대학생들을 제자로 세우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진심을 드리는 분들을 보면 대개 가방 끈이 짧지만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을 때 여러분이 어떠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적으로 볼 때 여러분 가운데는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 않았고 유능한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과 강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어리석고 약한 사람들을 택하시고 세상이 대단한 인물로 여기는 사람들을 형편없이 낮추려고 천한 사람과 멸시받는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고전 1:26-29).”
우리 모임은 양 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을 잘 치지 못하는 사람은 주눅이 들기 쉽습니다. 양을 잘 쳐보고자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나 혼자서 다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합심동역해서 양을 쳐야 합니다. 그것이 혼자서 잘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우리 각자가 가을 학기에 세 명의 예비 일대일 양들을 얻어서 말씀 공부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결과만 가지고 판단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양을 치다가 어려워서 포기하고 자기 것만 꾸리는 패배자들이 되기를 주님은 원치 아니하십니다. 이 일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인내를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겉모양만 번지르르한 쭉정이 신자가 아니라 알맹이 신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목자님은 검사를 하시다가 성격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시고 변호사가 되셨습니다. 그는 보통 회사원보다 다섯 배의 월급을 받았지만 검소하고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다 버리고 유학생 선교사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문을 돌리고 아파트 관리를 하고 잔디를 깎으면서 자립 역사를 섬기셨습니다. 이와 같이 실력이 있고 권세가 있고 가진 것이 있지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고 이 모임을 사랑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세상에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목수로 사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하시면서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풍채나 위엄이 없었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이 없었습니다(사 53:2). 예수님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치열하게 실력을 쌓고 성공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그런 것들을 감추고 섬기는 삶을 살 때 그것이 빛이 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들어온 형제 자매들을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귀하게 여겨야합니다. 사랑하는 가족 사이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 다 중요합니다. 또 은사가 다릅니다. 그 은사를 잘 발휘하여 획일적인 교회가 아니라 풍성한 교회로 가꾸어 나가야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차별이 있는 세상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근본 동기가 무엇이어야 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이웃을 내 몸을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내가 현재 실력이 없고 잘 하는 것이 없지만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존중을 받고 싶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를 사랑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부자 앞에서는 아첨을 하고 부러워한다면 스스로를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임을 확신하고 자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긴다면 다른 사람도 나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건강한 자아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배와 같이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희생적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나보다 앞세우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됩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내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됩니다. 사람을 차별하면 간음죄나 살인죄와 같이 율법을 범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대하게 되면 범죄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하기 싫은 사람에 대해서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인사도 하지 않으면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나와 스타일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대한다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나와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대하는 것은 살인죄와 간음죄를 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목자님, 그런 것을 어쩔 수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차별없이 나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해야 합니다. 자유의 율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자유의 율법이란 자유하게 하는 율법입니다. 복음은 자유하게 하는 율법입니다. 우리는 자유하지만 이 자유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자유를 진정 가치있게 쓸 수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긍휼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우리 안에 사람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갈수록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해가 깊어지고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는 형제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대가를 바라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익합니다(14-26) : 14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자기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믿음에다가 선행을 더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바른 믿음은 바른 행위를 가져옵니다.
영화 밀양은 기독교인 편에서 보면 심기가 불편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신애는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Secret Sunshine)에서 살기 위해 아들 준이와 함께 내려옵니다. 밀양은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남편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아내로 위장할 수 있었고(사실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기 전 불륜을 범하고 있었다), 아들 준을 위한 헌신적인 어머니로 보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이사 와서 처음 보는 옷가게 주인에게 인터리어에 신경 쓸 것을 주문하고 자신을 도와준 카센터 사장 종찬을 속물로 여깁니다. 마치 재산이 꽤 있는 미망인으로 행세하였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약국 주인 부부가 소개하는 하나님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중심은 자신이었습니다. (S1)
어느 날 아들 준이가 유괴를 당하고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그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신애는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부흥회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보이는 신애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젠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게 되었어요.” 그런데 정말 신애의 이런 모습은 참된 믿음의 모습이었을까요? (S2)
신애는 더욱 더 자신의 믿음의 깊이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아들을 죽인 살임범을 용서하겠다고 결정합니다. 주변이 반대하였지만 굳이 직접 찾아가서 용서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신애는 살인범을 만나서 자신이 주도하는 세상의 화해자로 근사하게 용서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살인범을 용서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살인범은 성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주님께서 이미 자기를 용서하셨다고 말합니다. 신애는 자기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이미 용서받은 유괴범의 평화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용서할 수 있어요? 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녀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려 했다면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심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애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신애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S3 )
도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요? 그동안 신애가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기복적인 하나님이거나 조종할 수 있는 자판기 하나님 정도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중심이 된 세상에서 악세사리 정도로 여기던 하나님이 어느 날 자신을 주도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하면 이제야 비로소 신애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하나님 앞에서 주도권을 가진 이는 신애였습니다. 신애가 믿었고 신애가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애가 하나님을 일대일로 상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자신을 전도한 약국의 장로를 유혹하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모임을 하는 집에 돌을 던집니다. 부흥회에 가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기도하는 시간에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하는 음반을 틀어줍니다. 결국에는 자살을 시도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그것은 네거티브한 방법으로서 하나님과의 싸움이었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나오는 행위였습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살던 신애에게 침범해온 하나님을 향해 그녀는 죄를 범할 때마다 이렇게 비꼬듯이 말합니다. “보라고! 잘 보이냐구.” 이런 외침은 사실 하나님 부정이 아니라 절대 긍정입니다. 일년 후 그녀는 하나님께 항복하고 언제나 곁에서 자기를 치근덕거리면서도 도와주던 종찬이의 사랑을 따스한 햇볕 같이 받아들입니다. 이 영화는 처음에는 태양이 구름 사이로 비추이던 하늘을 보여주었지만 맨 마지막에는 마당에 흐르는 개숫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관념적인 사랑보다는 땅에서 질퍽거리지만 구체적인 사랑, 실제적인 사랑을 따스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라 현실에서 따스한 햇볕과 같은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S4)
구원이 값없는 은혜이지만 내 편에서는 진정한 참회의 과정입니다. 용서가 고통과 죄를 명백하게 하지 않고 용서받아야 할 죄를 덮어버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피해자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신애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유괴범은 좀 더 신중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하나님과 나 만의 일대일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의 죄로 인해 고통 받는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 이웃이라는 관계 속에서 진정한 구원과 용서와 치유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나의 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에 대해 섬세하게 배려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우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말만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난한 형제를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겠습니까?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현대인의 성경 요일 3:17-18).” 우리는 뜨거운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고자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형제 사랑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형제를 사랑하고자 힘쓰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함께 하사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믿음과 행함은 결코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믿음이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있을 때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다가 그만 두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함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감정을 따라서, 분위기를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살아 있으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알고 믿고 벌벌 떱니다. 그러나 귀신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귀신은 가장 지독한 자기중심적인 존재입니다. 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이 힘이지만 그것으로 그치면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아는 대로 행할 때 진정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에서 가슴까지가 가장 먼 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소감 쓰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입만 살아 있게 되고 입만 천국 갈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온전케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었을 때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낳고 그 아이를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참된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대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율배반적인 존재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잔인한 하나님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지켜왔던 믿음을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기고 하시고 살리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죽은 자를 부활시키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순종을 통해서 온전해졌습니다. 그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지 축복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은 그런 점에서 참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온전케 한다는 말은 원어로 성취하다, 완성하다, 완전하게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할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친구 사이는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 친구 사이는 희생적인 사랑을 합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신자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생 라합은 어떠합니까?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여리고 성에 들어왔을 때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민족을 배반하고 간첩을 보호한 매국노가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믿고 인간적인 정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영향력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역사가 없습니다. 죽은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관념적인 믿음을 회개하고 참된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야고보서 2:1-26
요절: 야고보서 2:26
참된 믿음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제가 20년 전에 선교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지방 보고회를 할 때였습니다. 영남 지방에서 보고를 하고 호남지방에서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호남지방이 영남 지방에 비해서 개발이 되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기차를 타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때 저는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지역차별에 대해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역 차별이란 것이 나라를 분열시키고 지금까지도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이런 차별이 생긴다면 교회는 하나가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 흑인 아이가 백인들만 다니는 교회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제지를 당하여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 아이가 입구에서 울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고 물으니 백인들만 다니는 이 교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도 그 교회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 차별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차별의 문제와 행동하는 믿음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첫째, 교회에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1-13) : 우리는 영광의 주 곧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교회에 중형차를 몰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호텔에 가면 보이들이 겉모양을 보고 사람을 차별합니다. 여의도에 있는 한 호텔에 갔는데 세단은 호텔 지하에 주차를 하도록 하고 봉고 같은 것은 한강 고수부지에 주차하도록 합니다. 그러려니 하고 감당하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존심이 센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예민합니다. 고통을 당합니다. 열등감을 느끼면서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자신의 존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회의를 갖습니다. 이런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무엇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따라서 선택을 합니다. 자기 적성에 맞는 학과를 선택하기보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학과를 택합니다.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더 큰 아파트에 살고 더 큰 차를 타고자 하고 명품으로 몸을 치장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명품은 불황을 모릅니다. 부자들은 비쌀수록 자기가 더 차별되게 드러나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합니다. 중국도 외양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큰 손들이 많다고 합니다. 열등감이 깊은 사람일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차별들이 교회에도 들어왔습니다. 교회에서도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들어오면 부러움을 사고 인정을 받습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주목을 받게 됩니다. 대학생 선교를 사명으로 여기는 우리 모임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주눅이 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우리 모임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선교사로 파송되어 영어를 배우고 캐나다 대학생들을 제자로 세우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진심을 드리는 분들을 보면 대개 가방 끈이 짧지만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을 때 여러분이 어떠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적으로 볼 때 여러분 가운데는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 않았고 유능한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과 강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어리석고 약한 사람들을 택하시고 세상이 대단한 인물로 여기는 사람들을 형편없이 낮추려고 천한 사람과 멸시받는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고전 1:26-29).”
우리 모임은 양 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을 잘 치지 못하는 사람은 주눅이 들기 쉽습니다. 양을 잘 쳐보고자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나 혼자서 다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합심동역해서 양을 쳐야 합니다. 그것이 혼자서 잘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우리 각자가 가을 학기에 세 명의 예비 일대일 양들을 얻어서 말씀 공부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결과만 가지고 판단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양을 치다가 어려워서 포기하고 자기 것만 꾸리는 패배자들이 되기를 주님은 원치 아니하십니다. 이 일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인내를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겉모양만 번지르르한 쭉정이 신자가 아니라 알맹이 신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목자님은 검사를 하시다가 성격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시고 변호사가 되셨습니다. 그는 보통 회사원보다 다섯 배의 월급을 받았지만 검소하고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다 버리고 유학생 선교사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문을 돌리고 아파트 관리를 하고 잔디를 깎으면서 자립 역사를 섬기셨습니다. 이와 같이 실력이 있고 권세가 있고 가진 것이 있지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고 이 모임을 사랑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세상에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목수로 사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하시면서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풍채나 위엄이 없었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이 없었습니다(사 53:2). 예수님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치열하게 실력을 쌓고 성공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그런 것들을 감추고 섬기는 삶을 살 때 그것이 빛이 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들어온 형제 자매들을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귀하게 여겨야합니다. 사랑하는 가족 사이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 다 중요합니다. 또 은사가 다릅니다. 그 은사를 잘 발휘하여 획일적인 교회가 아니라 풍성한 교회로 가꾸어 나가야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차별이 있는 세상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근본 동기가 무엇이어야 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이웃을 내 몸을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내가 현재 실력이 없고 잘 하는 것이 없지만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존중을 받고 싶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를 사랑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부자 앞에서는 아첨을 하고 부러워한다면 스스로를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임을 확신하고 자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긴다면 다른 사람도 나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건강한 자아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배와 같이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희생적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나보다 앞세우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됩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내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됩니다. 사람을 차별하면 간음죄나 살인죄와 같이 율법을 범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대하게 되면 범죄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하기 싫은 사람에 대해서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인사도 하지 않으면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나와 스타일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대한다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나와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대하는 것은 살인죄와 간음죄를 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목자님, 그런 것을 어쩔 수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차별없이 나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해야 합니다. 자유의 율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자유의 율법이란 자유하게 하는 율법입니다. 복음은 자유하게 하는 율법입니다. 우리는 자유하지만 이 자유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자유를 진정 가치있게 쓸 수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긍휼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우리 안에 사람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갈수록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해가 깊어지고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는 형제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대가를 바라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익합니다(14-26) : 14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자기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믿음에다가 선행을 더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바른 믿음은 바른 행위를 가져옵니다.
영화 밀양은 기독교인 편에서 보면 심기가 불편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신애는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Secret Sunshine)에서 살기 위해 아들 준이와 함께 내려옵니다. 밀양은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남편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아내로 위장할 수 있었고(사실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기 전 불륜을 범하고 있었다), 아들 준을 위한 헌신적인 어머니로 보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이사 와서 처음 보는 옷가게 주인에게 인터리어에 신경 쓸 것을 주문하고 자신을 도와준 카센터 사장 종찬을 속물로 여깁니다. 마치 재산이 꽤 있는 미망인으로 행세하였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약국 주인 부부가 소개하는 하나님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중심은 자신이었습니다. (S1)
어느 날 아들 준이가 유괴를 당하고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그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신애는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부흥회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보이는 신애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젠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게 되었어요.” 그런데 정말 신애의 이런 모습은 참된 믿음의 모습이었을까요? (S2)
신애는 더욱 더 자신의 믿음의 깊이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아들을 죽인 살임범을 용서하겠다고 결정합니다. 주변이 반대하였지만 굳이 직접 찾아가서 용서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신애는 살인범을 만나서 자신이 주도하는 세상의 화해자로 근사하게 용서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살인범을 용서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살인범은 성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주님께서 이미 자기를 용서하셨다고 말합니다. 신애는 자기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이미 용서받은 유괴범의 평화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용서할 수 있어요? 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녀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려 했다면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심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애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신애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S3 )
도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요? 그동안 신애가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기복적인 하나님이거나 조종할 수 있는 자판기 하나님 정도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중심이 된 세상에서 악세사리 정도로 여기던 하나님이 어느 날 자신을 주도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하면 이제야 비로소 신애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하나님 앞에서 주도권을 가진 이는 신애였습니다. 신애가 믿었고 신애가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애가 하나님을 일대일로 상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자신을 전도한 약국의 장로를 유혹하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모임을 하는 집에 돌을 던집니다. 부흥회에 가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기도하는 시간에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하는 음반을 틀어줍니다. 결국에는 자살을 시도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그것은 네거티브한 방법으로서 하나님과의 싸움이었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나오는 행위였습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살던 신애에게 침범해온 하나님을 향해 그녀는 죄를 범할 때마다 이렇게 비꼬듯이 말합니다. “보라고! 잘 보이냐구.” 이런 외침은 사실 하나님 부정이 아니라 절대 긍정입니다. 일년 후 그녀는 하나님께 항복하고 언제나 곁에서 자기를 치근덕거리면서도 도와주던 종찬이의 사랑을 따스한 햇볕 같이 받아들입니다. 이 영화는 처음에는 태양이 구름 사이로 비추이던 하늘을 보여주었지만 맨 마지막에는 마당에 흐르는 개숫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관념적인 사랑보다는 땅에서 질퍽거리지만 구체적인 사랑, 실제적인 사랑을 따스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라 현실에서 따스한 햇볕과 같은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S4)
구원이 값없는 은혜이지만 내 편에서는 진정한 참회의 과정입니다. 용서가 고통과 죄를 명백하게 하지 않고 용서받아야 할 죄를 덮어버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피해자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신애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유괴범은 좀 더 신중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하나님과 나 만의 일대일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의 죄로 인해 고통 받는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 이웃이라는 관계 속에서 진정한 구원과 용서와 치유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나의 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에 대해 섬세하게 배려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우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말만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난한 형제를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겠습니까?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현대인의 성경 요일 3:17-18).” 우리는 뜨거운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고자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형제 사랑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형제를 사랑하고자 힘쓰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함께 하사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믿음과 행함은 결코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믿음이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있을 때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다가 그만 두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함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감정을 따라서, 분위기를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살아 있으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알고 믿고 벌벌 떱니다. 그러나 귀신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귀신은 가장 지독한 자기중심적인 존재입니다. 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이 힘이지만 그것으로 그치면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아는 대로 행할 때 진정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에서 가슴까지가 가장 먼 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소감 쓰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입만 살아 있게 되고 입만 천국 갈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온전케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었을 때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낳고 그 아이를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참된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대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율배반적인 존재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잔인한 하나님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지켜왔던 믿음을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기고 하시고 살리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죽은 자를 부활시키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순종을 통해서 온전해졌습니다. 그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지 축복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은 그런 점에서 참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온전케 한다는 말은 원어로 성취하다, 완성하다, 완전하게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할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친구 사이는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 친구 사이는 희생적인 사랑을 합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신자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생 라합은 어떠합니까?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여리고 성에 들어왔을 때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민족을 배반하고 간첩을 보호한 매국노가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믿고 인간적인 정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영향력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역사가 없습니다. 죽은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관념적인 믿음을 회개하고 참된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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