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5년 신14강(29:1-30:20) 언약을 다시 세우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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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신명기 제 14 강
말씀 | 신명기 29:1-30:20
요절 | 신명기 30:19,20
언약을 다시 세우신 하나님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오늘 말씀은 모압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을 다시 세우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신세대들과 언약을 다시 세우십니다. 그 언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우실 새 언약으로 이어지며 맥이 통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언약 백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 받는 길이 무엇입니까?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복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언약이 무엇입니까? 언약은 일반적으로 대인 관계에 있어 서로의 이익을 위한 약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은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에 이스라엘 백성이 동의함으로 성립됩니다. 하나님은 홍수 후에 노아와 언약(창9장9)을 맺으시고, 아브라함과는 땅과 후손을 주시겠다는 언약(창 15,17장)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율법을 주심으로 이스라엘과 언약(출34장, 신5장)을 맺으셨고, 그 후에 여호수아 및 백성과의 언약(수24장)등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택함 받고 언약을 맺게 된 것은, 하나님과 사귐에 있어서 충분한 자격과 실력이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로서 택정 되었던 것입니다(신 7:6-10). 여기서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생깁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을 혼인관계에 비유하였습니다(렘 2:2). 그러므로 이교의 신을 믿는 것과 언약 불이행은 간음으로 규탄되었습니다(호2장). 그들이 계속해서 언약을 깨뜨리고 범죄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며 선지자를 통하여 새 언약(렘 31:31), 영원한 언약(겔 16:60)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채울 수 없기에 다만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의 역사에 참여함에 의해서만, 믿는 자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새 언약은(눅 22:20), 이스라엘 백성에 한하지 않고, 세계 만민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십자가의 속죄로 말미암는 구원의 약속이야말로 새 언약이고 복음입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백성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여 광야에서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4). 기적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가데스 바네아와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께 반역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4절을 보면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일종의 신적 작정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약1:5). 그러므로 이후로부터는 깨닫고 지키라는 말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너희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들이 출애굽 2세대로서 출애굽 사건은 모르지만 광야에서 먹고 산 것은 기억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신발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광야에서 농사를 지은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먹여주셨습니다.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아니하였지만 먹고 마시며 살아왔습니다. 이는 주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속에 담긴 뜻을 아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구하면 주십니다. 다만 사람이 이런 것들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등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산수를 할 정도면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요단강 동편 땅을 차지한 것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싸우기를 거부하여 반역한 세대와 대조적입니다. 모압 평지에 모여 있는 세대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데 손색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새로이 형성된 이스라엘은 시혼과 옥을 물리치고 그들이 통치했던 땅을 빼앗아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의 전환기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따르면 어떤 결과를 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계속해서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것입니다. 요단강 동편을 주신 하나님이 서편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없는 것만 생각하며 슬퍼하고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채워주신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도 친히 일하시고 채워주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기를 바랍니다.
언약에 참여할 자들은 누구입니까? 10,11절을 보면 “오늘 너희 곧 너희의 수령과 너희의 지파와 너희의 장로들과 너희의 지도자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너희의 유아들과 너희의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 거하는 나그네, 또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기브온 백성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 까지입니다. 이는 장차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까지 이 언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민족과 신분을 넘어서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으실 새 언약의 성격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복음 진리 앞에서 만인은 평등합니다. 남녀노소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차별이 없어요. 백인이나 흑인, 황색인종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시간적으로도 1세기 사람들이나 21세기 사람들이나 믿음으로 구원얻는 진리는 동일합니다.
그러면 우리 같이 경건하지 않고, 죄인이고, 심지어 하나님을 반역하고 슬프시게 했던 자들을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게 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우리를 자기 백성 삼으시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 우리로 새 언약에 참여시키신 것입니다. 특히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친 언약이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보증한 언약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파괴되지 않는 은혜의 언약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부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라 칭함 받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녀들이 “아빠, 아빠” 하고 매달릴 때 아버지는 행복합니다. 아버지로서 존재의미를 느끼고 자식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치르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를 기뻐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 대해 염려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그들 중에 생길까 염려하십니다. 가나안 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풍요의 덫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게 될 것을 염려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그들에게 경고하시는 저주의 말을 듣고도 스스로 복을 빌어 마음이 완악하게 되고 멸망할지라도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염려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에게 쓴 뿌리를 품고 대적하고 그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우상을 숭배할 때 징계를 내려 돌이키고자 하시는데도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멸망하면서도 평안이 있으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복입니다.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훗날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이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지지 않은 것이 심판의 시작임을 깨닫고 탄식을 합니다(사6:9-10). 예레미야 선지자도 바벨론이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온다고 아무리 외쳐도 그들이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들에게는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돌이키지 않는 것을 보고 눈물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완악하게 될 때 어떻게 될까요? 20,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위에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부으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시되 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언약의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을 다섯 차례나 30장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들을 징계하실 때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십니다.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누릴 풍요로움은 하나님께 순종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에 대한 대가로 벌을 내리시는 순간 그 땅은 생명력과 생산력을 잃고 황무지로 변할 것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감추어진 일은 아직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지 않은 계시와 말씀을, 나타난 일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신 계시 즉 율법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미 받은 율법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어떻게 지킬까 힘쓰면 됩니다. 아직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것들은 선포된 후에 순종하면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결정하실 것입니다. 장래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나에게 열려 있는 것에 충성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큰 우상은 재물의 신, 맘몬(Mammon)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행복이 저절로 따라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돈만 있으면 아무 걱정할 것도, 염려할 것도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에게 왜 그리 염려가 많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현실 문제와 믿음을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현실이 따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의 주관자이십니다.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기이한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것을 기억할 때 현재 겪고 있는 물질 문제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믿고 구합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채우시고 먹이시고 입히실 것입니다.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에 매이기보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말씀을 전하고 순종하도록 사명인의 삶, 목자의 삶을 힘써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먹고 사는 것보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30장은 이스라엘 앞에 놓인 선택입니다. 그들이 반역하여 다른 나라로 흩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타국으로 귀양살이를 가서 열방에 흩어져 살며 민족성과 나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이 이스라엘의 끝입니까? 아니면 그 후에도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계속될까요?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다른 나라로 끌려간 후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예언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꼭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모세는 그들 앞에 생명과 죽음을 제시하며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권면합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아 모든 나라에 흩어질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30:1,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마음을 돌이키시고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거기서 그들을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그들을 이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상들이 차지한 땅을 다시 차지하게 하실 것이고 번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그 자녀들과 가축과 토지 소산에도 복을 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6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네게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네게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주신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도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넣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이루어집니까?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백성들과 새 언약을 맺을 때라고 합니다(렘31:31-34, 겔36:24-32).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와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는 승천하신 이후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 안에 내주하시며 그를 일생 이끄십니다. 마음에 할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역이요,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요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입니다(딛 3:5).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깊이 영접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의 할례를 베푸셔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서 온 마음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돌아온 아들을 영접하시고 과거의 모든 특권을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풍요로운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의 명령을 행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바다 밖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거나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고 또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율법입니다. 또 율법은 그들의 입에 있고 마음에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있으며 이 사랑은 입을 통한 가르침과 배움으로 공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매주 공부하면서 마음에 새기고 소감을 쓰면서 묵상하고 삶에 적용시키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지킬 수도 없는 어려운 것을 주시고 준수하며 살아가라고 강요하는 폭군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운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재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지금 주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소식입니다. 즐거운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오묘한 것도 아니요, 신비로운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믿음으로 순종할 때 그 능력을 체험하고 복을 받게 됩니다.
모세는 이제 그 백성에게 선택할 것을 권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생명과 복, 사망과 화라는 대조적인 선택을 제시하면서 선택하라고 합니다. 생명을 택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사망을 택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나쁜 것인 죽음을 버리고 좋은 것인 생명을 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선택은 단순히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생명과 복을 선택한다는 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는 자는 장수와 번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싹 달라붙어 그를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도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되고 건강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이 세상의 상속자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신명기 29:1-30:20
요절 | 신명기 30:19,20
언약을 다시 세우신 하나님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오늘 말씀은 모압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을 다시 세우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신세대들과 언약을 다시 세우십니다. 그 언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우실 새 언약으로 이어지며 맥이 통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언약 백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 받는 길이 무엇입니까?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복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언약이 무엇입니까? 언약은 일반적으로 대인 관계에 있어 서로의 이익을 위한 약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은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에 이스라엘 백성이 동의함으로 성립됩니다. 하나님은 홍수 후에 노아와 언약(창9장9)을 맺으시고, 아브라함과는 땅과 후손을 주시겠다는 언약(창 15,17장)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율법을 주심으로 이스라엘과 언약(출34장, 신5장)을 맺으셨고, 그 후에 여호수아 및 백성과의 언약(수24장)등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택함 받고 언약을 맺게 된 것은, 하나님과 사귐에 있어서 충분한 자격과 실력이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로서 택정 되었던 것입니다(신 7:6-10). 여기서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생깁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을 혼인관계에 비유하였습니다(렘 2:2). 그러므로 이교의 신을 믿는 것과 언약 불이행은 간음으로 규탄되었습니다(호2장). 그들이 계속해서 언약을 깨뜨리고 범죄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며 선지자를 통하여 새 언약(렘 31:31), 영원한 언약(겔 16:60)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채울 수 없기에 다만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의 역사에 참여함에 의해서만, 믿는 자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새 언약은(눅 22:20), 이스라엘 백성에 한하지 않고, 세계 만민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십자가의 속죄로 말미암는 구원의 약속이야말로 새 언약이고 복음입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백성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여 광야에서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4). 기적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가데스 바네아와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께 반역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4절을 보면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일종의 신적 작정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약1:5). 그러므로 이후로부터는 깨닫고 지키라는 말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너희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들이 출애굽 2세대로서 출애굽 사건은 모르지만 광야에서 먹고 산 것은 기억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신발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광야에서 농사를 지은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먹여주셨습니다.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아니하였지만 먹고 마시며 살아왔습니다. 이는 주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속에 담긴 뜻을 아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구하면 주십니다. 다만 사람이 이런 것들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등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산수를 할 정도면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요단강 동편 땅을 차지한 것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싸우기를 거부하여 반역한 세대와 대조적입니다. 모압 평지에 모여 있는 세대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데 손색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새로이 형성된 이스라엘은 시혼과 옥을 물리치고 그들이 통치했던 땅을 빼앗아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의 전환기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따르면 어떤 결과를 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계속해서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것입니다. 요단강 동편을 주신 하나님이 서편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없는 것만 생각하며 슬퍼하고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채워주신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도 친히 일하시고 채워주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기를 바랍니다.
언약에 참여할 자들은 누구입니까? 10,11절을 보면 “오늘 너희 곧 너희의 수령과 너희의 지파와 너희의 장로들과 너희의 지도자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너희의 유아들과 너희의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 거하는 나그네, 또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기브온 백성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 까지입니다. 이는 장차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까지 이 언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민족과 신분을 넘어서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으실 새 언약의 성격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복음 진리 앞에서 만인은 평등합니다. 남녀노소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차별이 없어요. 백인이나 흑인, 황색인종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시간적으로도 1세기 사람들이나 21세기 사람들이나 믿음으로 구원얻는 진리는 동일합니다.
그러면 우리 같이 경건하지 않고, 죄인이고, 심지어 하나님을 반역하고 슬프시게 했던 자들을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게 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우리를 자기 백성 삼으시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 우리로 새 언약에 참여시키신 것입니다. 특히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친 언약이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보증한 언약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파괴되지 않는 은혜의 언약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부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라 칭함 받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녀들이 “아빠, 아빠” 하고 매달릴 때 아버지는 행복합니다. 아버지로서 존재의미를 느끼고 자식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치르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를 기뻐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 대해 염려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그들 중에 생길까 염려하십니다. 가나안 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풍요의 덫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게 될 것을 염려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그들에게 경고하시는 저주의 말을 듣고도 스스로 복을 빌어 마음이 완악하게 되고 멸망할지라도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염려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에게 쓴 뿌리를 품고 대적하고 그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우상을 숭배할 때 징계를 내려 돌이키고자 하시는데도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멸망하면서도 평안이 있으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복입니다.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훗날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이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지지 않은 것이 심판의 시작임을 깨닫고 탄식을 합니다(사6:9-10). 예레미야 선지자도 바벨론이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온다고 아무리 외쳐도 그들이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들에게는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돌이키지 않는 것을 보고 눈물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완악하게 될 때 어떻게 될까요? 20,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위에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부으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시되 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언약의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을 다섯 차례나 30장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들을 징계하실 때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십니다.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누릴 풍요로움은 하나님께 순종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에 대한 대가로 벌을 내리시는 순간 그 땅은 생명력과 생산력을 잃고 황무지로 변할 것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감추어진 일은 아직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지 않은 계시와 말씀을, 나타난 일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신 계시 즉 율법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미 받은 율법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어떻게 지킬까 힘쓰면 됩니다. 아직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것들은 선포된 후에 순종하면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결정하실 것입니다. 장래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나에게 열려 있는 것에 충성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큰 우상은 재물의 신, 맘몬(Mammon)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행복이 저절로 따라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돈만 있으면 아무 걱정할 것도, 염려할 것도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에게 왜 그리 염려가 많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현실 문제와 믿음을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현실이 따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의 주관자이십니다.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기이한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것을 기억할 때 현재 겪고 있는 물질 문제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믿고 구합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채우시고 먹이시고 입히실 것입니다.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에 매이기보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말씀을 전하고 순종하도록 사명인의 삶, 목자의 삶을 힘써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먹고 사는 것보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30장은 이스라엘 앞에 놓인 선택입니다. 그들이 반역하여 다른 나라로 흩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타국으로 귀양살이를 가서 열방에 흩어져 살며 민족성과 나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이 이스라엘의 끝입니까? 아니면 그 후에도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계속될까요?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다른 나라로 끌려간 후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예언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꼭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모세는 그들 앞에 생명과 죽음을 제시하며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권면합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아 모든 나라에 흩어질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30:1,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마음을 돌이키시고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거기서 그들을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그들을 이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상들이 차지한 땅을 다시 차지하게 하실 것이고 번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그 자녀들과 가축과 토지 소산에도 복을 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6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네게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네게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주신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도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넣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이루어집니까?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백성들과 새 언약을 맺을 때라고 합니다(렘31:31-34, 겔36:24-32).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와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는 승천하신 이후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 안에 내주하시며 그를 일생 이끄십니다. 마음에 할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역이요,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요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입니다(딛 3:5).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깊이 영접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의 할례를 베푸셔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서 온 마음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돌아온 아들을 영접하시고 과거의 모든 특권을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풍요로운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의 명령을 행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바다 밖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거나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고 또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율법입니다. 또 율법은 그들의 입에 있고 마음에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있으며 이 사랑은 입을 통한 가르침과 배움으로 공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매주 공부하면서 마음에 새기고 소감을 쓰면서 묵상하고 삶에 적용시키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지킬 수도 없는 어려운 것을 주시고 준수하며 살아가라고 강요하는 폭군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운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재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지금 주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소식입니다. 즐거운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오묘한 것도 아니요, 신비로운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믿음으로 순종할 때 그 능력을 체험하고 복을 받게 됩니다.
모세는 이제 그 백성에게 선택할 것을 권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생명과 복, 사망과 화라는 대조적인 선택을 제시하면서 선택하라고 합니다. 생명을 택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사망을 택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나쁜 것인 죽음을 버리고 좋은 것인 생명을 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선택은 단순히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생명과 복을 선택한다는 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는 자는 장수와 번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싹 달라붙어 그를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도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되고 건강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이 세상의 상속자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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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다운로드 | DATE : 2015-05-03 15:4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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