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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5년 신12강(24:5-26:15) 나그네, 고아,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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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17회 작성일 15-04-19 13:30

본문

2015년 신명기 12 강 
말씀 | 신명기 24:5-26:15
요절 | 신명기 24:19

나그네, 고아, 과부를 위해 남겨두라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 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본문은 이웃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권면들입니다. 이웃 사랑은 모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와 믿음의 고백을 하는 성도들이 행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눔을 행할 때 그들의 내면은 행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불러옵니다. 우리가 연약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서 자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나눔은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24:5-22). 18절을 보십시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22절도 보십시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나누기 위해서는 나에게 무엇인가 있어야 합니다. 돈이 많아 기부를 하든지, 뛰어난 재주가 있어야 재능 기부를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누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채권자가 채무자를 닦달하듯이 늘 하나님께 청구서를 내밉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이어서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눔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웃 사랑을 말로만 하지 말고 실제적인 규례를 주고 실천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기억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속량하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기억하면, 나누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노예는 재산이 없습니다. 오히려 주인의 재산일 뿐입니다. 유일한 재산은 몸뚱이입니다. 그 몸으로 평생 주인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을 해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합니다. 인권유린을 당해도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인 인간이 노예가 되어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않고 짐승 같이 산다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 이런 노예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값을 지불하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자신의 땅과 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나누는 삶을 살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께서 노예된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제 어떻게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둘째, 사회의 약자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아내가 약자입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보내지 말라고 합니다.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하라고 합니다. 성경은 결혼과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새로 결혼한 사람이 전쟁에 나가서 전사할 경우 아내는 과부가 되고 후손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혼 중에 있는 남자는 아무 직무도 맡지 않고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아내를 즐겁게 하는데 힘써야 했습니다. 이는 부부간 유대를 튼튼히 하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두 남녀가 한 몸을 이루어 아름답고 화목하고 기쁨이 충만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가족관계를 중요시하고 가정을 세울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십니다. 한국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아내는 2년간만 행복감을 느끼고 남편은 평생 행복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만큼 남자를 중심으로 결혼 생활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남자들은 결혼을 하고 나서 아내에 대한 사랑과 희생이 더 많아져야 하고 배려가 더 섬세하고 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함께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해 나가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약자입니다.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윗짝을 전당 잡지 말아야 합니다. 맷돌은 음식을 준비할 때 곡식을 갈기 위해 집에서 매일 사용하는 도구였습니다. 따라서 맷돌은 한 시도 없어서는 안 되는 가정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빚의 담보로 맷돌 전부나 혹은 그 위짝을 취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그 사람으로부터 밥줄을 끊고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였습니다. 이 말씀은 전당을 잡더라도 기본적인 의식주를 위협하는 물품을 잡으면 안 된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여야 합니다(7). 이같이 하여 그들 중에서 악을 제하라고 합니다. 유괴와 인신매매는 고대 근동에서 일반적인 죄악이었습니다. 이는 한 인간의 자유와 인격과 생명을 빼앗는다는 점에서 재물을 도둑질하는 것보다 훨씬 심한 악이었으므로 그 징벌은 사형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정신박약자들을 염전 노예로 삼아서 착취한 사람들, IS 집단의 유인, 강간, 강제 결혼 등의 행위 등이 언론에 발표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사람을 유괴하여 장기적출을 하는 천인공노할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권을 존중하지 아니하면 그 나라는 공의를 세우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나라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병든 사람이 약자입니다. 나병 환자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가르치는 대로 힘써 다 지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미리암이 모세를 대적했다가 나병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미리암을 진 밖으로 보내어 일주일 동안 살게 했습니다. 여선지자였던 미리암도 격리되어야 했던 이 사실을 기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제사장들이 가르치는 대로 나병 환자를 격리 조치를 해서 낫게 해야 합니다. 이는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배려인 동시에 나병 환자에 대한 배려이기도 합니다.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나병 환자가 치료를 잘 받고 사회에 복귀하도록 돕는 것을 볼 때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빚진 사람이 약자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전당물을 취하더라도 상대를 존중해야 합니다. 무엇을 전당물로 맡길 것인가는 채무자가 결정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진 것은 없더라도 그나마 가진 것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의 집안에서 존중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빚을 얻어야 살 수 있는 가난한 사람의 집에 얼마나 값나가는 것이 있었겠습니까? 채권자 입장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추억과 기억이 어려있는 어떤 물건들은 가치에 상관없이 매우 소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빼앗는 행위는 너무 잔인합니다. 그러므로 채권자는 채무가자 스스로 정한 담보를 가지고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것을 바라지 않고 또 갚을 것도 기대하지 않고 빚을 주는 것이 가장 복됩니다.

  만약 채무자 집에 들어가서 집안에 신발도 벗지 않고 들어가서 차압 딱지를 붙이고 인간적인 모욕을 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함으로 그 가족들에게 슬픔과 분노를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채무자를 존중하고 최소한의 자존감과 품위를 지켜주라는 것입니다. 또 그 채무자가 가난해서 담보물로 내놓는 것이 그의 겉옷이라면 그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가 질 때에는 반드시 그 전당물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회에서 겉옷은 이불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겉옷을 돌려주지 않으면 그 채무자는 중동의 차가운 밤 내내 추위에 떨 것이 분명합니다. 해 지기 전 담보로 잡은 겉옷을 돌려준다면 채무자는 그 옷을 입고 자면서 친절을 베푼 채권자를 축복하게 되고 그 일이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로운 행동에 대해서 은밀한 가운데 보시고 갚아주십니다. 또 사랑의 표현은 엄청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배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속 깊은 배려가 있을 때 우리는 고난이 많은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세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가난한 일꾼은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오늘 안 되면 내일 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의 품삯은 그 가족의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 품삯으로 하루를 먹고 살아야 합니다. 이 품삯을 제 때 주지 않으면 그는 주인에 대해 여호와께 호소하게 되고 그러면 그것이 그 주인의 죄가 될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여호와께 호소하면 그 가난한 자를 부르짖게 만든 고용주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죄인이 약자입니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자식들 역시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남을 탓하지 말고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성경은 연좌제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죄인의 가족들에 대한 인권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도 약자입니다. 객이나 고아나 과부를 억울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그네는 누가 도움을 주지 않으면 정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제가 해외에 나가면 나그네가 됩니다. 정말 그 때의 막막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어떻게 먹어야 할지, 어디에 가서 자야 할지 모릅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일상적인 일들이 나그네에게는 생소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외국의 나그네를 도와주는 것이 나에게는 작은 일지만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됩니다. 과부가 힘이 없다고 그의 옷을 전당 잡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그들도 애굽에서 종이 되었었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거기서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과거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그들에게 행했던 것처럼 힘없는 객과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고 과부의 옷을 전당 잡는 등의 잔인한 일을 행한다면 하나님은 바로와 애굽을 심판하셨던 것처럼 그들을 동일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죄로 인해서 얼마나 고통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값없이 속량을 받고 사랑을 받았으니 소외 받고 무시 받는 힘없는 약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고 하십니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어야 합니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어야 합니다. 이처럼 소산의 일부를 일부러 남겨두게 되면 가난한 자들은 구걸하는 비참함을 맛보지 않고도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과거 자신들이 종 되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종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19b).” 나는 작은 것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주님은 모든 일에 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손해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잘 살게 되면 허무함으로 인해서 극도의 방탕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여유가 있을 때 사랑을 실천하고 봉사하게 되면 내면에 기쁨이 생깁니다. 나만이 아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계속해서 행복과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몰수이 거두어 자신만 위해 살면 자신의 내면이 외롭고 불만족하고 불행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받을 수 없습니다.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된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중 ⌜구두장이 마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을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꿈 속에 나타나 내일 너희 집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할아버지는 어찌나 기뻤던지 온갖 정성을 들여 음식을 가득 차려놓고 기다렸으나 어찌된 셈인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예수님은 그 날 저녁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거지가 한 번 오고, 또 한 번은 청소부 할아버지가 오고, 저녁때는 사과장수 아주머니가 왔을 뿐입니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그만, 거지와 청소부 할아버지와 사과장수 아주머니에게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주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 너무나 불쌍하게 보였고 실제로 추위 때문에 또 배고픔 때문에 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 밤 예수님께서 꿈속에 다시 나타나시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왜 오시지 않으셨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나는 오늘 너희 집에 세 번이나 갔었는데 세 번 다 대접을 잘 받았다. 참으로 너는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겠다. 네 이웃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작품 속에 나오는 것으로 마태복음 25장에 언급된 최후의 심판광경을 생각나게 합니다. 최후의 심판시 의인으로 판결을 받은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은 오히려 놀라서 언제 이런 일을 당한 주님을 도와 드린 적이 있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이에 심판주되신 임금은 “분명히 말하건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심판의 근거를 밝히고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우리 주위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며 나누는 것이 곧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눔은 손해가 아니라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받는 길임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나눔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나눔의 영역을 확대해야 합니다(25장). 죄수의 인권에 대해서 배려해야 합니다. 25:1-3절을 보십시오.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1-3).” 정의의 기초는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악하다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잘한 것은 잘했다 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판결을 내리지 않고 지나가면 정의가 제대로 서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도 정의로워야 합니다. 판결 결과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적절하게 때리게 해야 합니다. 태형의 경우 사십까지는 때리더라도 그것을 넘기지는 못합니다.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범죄자도 여전히 주의 백성 중 하나로 여기십니다. 죄인에게 형벌을 내리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함을 지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검찰 수사를 받다가 자살한 사람이 8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는 수사로 인한 정신적 압박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성경은 죄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형벌 후에는 죄를 사하고 형제로 복귀시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짐승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곡식을 떠는 소가 낟알을 주워 먹는 것이 아까워 소의 입에 망을 씌우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을 시키려면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마음껏 먹어야 힘있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 못하는 짐승들도 아끼시며 긍휼히 여기시는데 하물며 사람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긍휼을 베푸시겠습니까?

  자녀가 없이 죽은 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형제들이 함께 살고 있는 경우란 반드시 한 집에서 사는 경우 외에 인접 지역에 사는 것도 포함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재산을 공동으로 물려받은 경우,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는 경우에만 형제의 아내와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의 경우에는 형제의 아내를 범하는 것이 금지됩니다(레18:16). 아들이 없이 형제가 죽은 경우에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행해야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6).  또한 여자의 자립적인 경제활동이 불가능한 당시 상황에서 과부된 여인의 삶을 보존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양자 제도가 있습니다. 저도 호적상으로는 큰 집에 양자로 되어 있습니다. 가계를 잇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저의 아버님은 두 아들을 첫째와 둘째 형님 댁에 양자로 보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영적인 세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회 역사를 하면서 이를 계승할 사람들을 키워야 합니다. 또한 학생 역사의 계보가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계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학생 역사의 계보를 잇도록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렇게 하기를 싫어하면 과부가 된 여자는 그 성문의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해야 합니다.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르게 해야 합니다. 이는 대단한 불명예였으므로 형제의 아내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압력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신을 벗기는 것은 더러운 자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밖에 돌아다닐 자격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기적인 자로 공인되는 것이기에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압박이요 죽은 형제에 대한 존중과 배려인 것입니다. 남편을 잃고 과부로 살게 될 여인에 대한 배려요 죽은 자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5-10계명 까지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웃사랑은 명령이지만 억지로 마지못해 지키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은 손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행복의 비밀이고 지혜입니다. 주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베푸는 삶 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함으로 복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당장 열매가 없을지라도 지속적으로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일하실 줄 믿습니다.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열매는 우리 속에 사랑이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이 우리 마음에 새겨집니다.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할 때 예수님의 제자인 줄을 사람들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바로 알고 전하며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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