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5년 신11강(22:9-24:4)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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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신명기 11강
말씀 | 신명기 22:9-24:4
요절 | 신명기 23:14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오늘 말씀은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을 적용한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형법에서 간통죄가 폐지된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고리타분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남녀 간의 성생활이 사생활 차원에서만 다루어진다면 공동체가 거룩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음문제를 공동체의 거룩함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순결에 관한 법은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행복과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성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음란한 세상 속에서 순결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순결하게 산다는 것은 윤리와 도덕적인 순수성을 초월하여 우리의 먹는 것과 입는 것에도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 섞어 하지 말라(22:9-12).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포도원에는 포도나무 외에 그 어떤 것을 심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같은 밭에서 서로 다른 농산물을 재배하는 것을 금하시는 것일까요? 서로 다른 품종을 함께 재배하면 서로 다른 시기에 추수를 할 수 있고, 수확량이 많아지고, 땅에서 서로 다른 영양분을 섭취하여 자랄 뿐만 아니라 땅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병충해에도 대비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면에서 좋아 보이는데 성경은 이런 행위를 금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것을 금할까요? 오늘날은 퓨전, 융합이 대세입니다. 자장면과 짬뽕을 섞은 짬짜면, 짜파게티와 너구리 라면을 섞은 짜파구리 등이 유행입니다. 이렇게 입맛에 따라 유행에 따라 이렇게 섞고 저렇게 섞다 보면 결국은 본래의 순수한 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택한 백성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결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또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밭을 갈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귀와 소는 크기도 다르고 힘도 다릅니다. 그런데 이 둘을 한 멍에에 매어 쟁기질을 시킨다면 힘이 약한 짐승을 쉽게 지치게 할 것입니다. 크기도 다르기 때문에 작은 짐승이 다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율법은 힘이 약하고 작은 짐승의 안전을 배려한 인도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울은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고후6:14).
또 직물을 짤 때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고 합니다. 양 털은 짐승에게서 얻는 것이고 무명실은 나무에서 얻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섞어서 옷감을 만들면 더 튼튼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은 이런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지 말라고 합니다. 요세푸스는 이 율법이 제사장들이 사역할 때 이런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즉 이런 옷감으로 만든 옷은 안수를 할 때 사용하는 기름과 성소에서 사용하는 향처럼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입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1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의 네 귀에 다는 술은 양털로 만들고 나머지는 무명실인데 이런 예외를 허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옷자락 끝에 다는 술은 청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청색은 희귀한 물감이기에 값이 비쌌고 왕과 같은 귀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왕족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들이 청색 술을 차고 다님으로서 그들은 하나님께 매우 소중하며 진귀한 백성이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술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고자 힘을 썼을 것입니다. 이 청색 술은 죄 짓는 것을 억제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 세상에서 구별된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생활해야겠습니다. 성도의 표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24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의 옷, 경건의 옷을 항상 입으므로 성도로서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 순결한 결혼과 성생활(22:13-29). 이 부분에서는 성범죄에 대한 여러 가지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아내를 맞이한 후에 미워하여 비방거리를 만들어 동침했을 때 처녀임을 보지 못했다고 할 경우입니다. 누명을 씌운 것이라면 처녀의 부모가 자리옷을 가지고 성읍 장로들에게 가서 보여줌으로 누명을 벗으라고 합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친정부모가 딸의 첫날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옷이나 옷감을 보존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왜 남편이 아내를 미워하여 이혼하려면 가만히 보내면 되지 이런 비방거리를 찾았을까요? 돈이 문제입니다. 당시에 신부의 몸값으로 돈을 지불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만약 이혼을 할 경우 신부의 몸값의 일부 또는 전부를 받고자 이런 소송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 누명을 씌운 것이 밝혀지면 그 사람을 잡아 때리고 은 백 세겔을 벌금으로 여자 아버지에게 주고 평생 버릴 수 없는 아내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은 백 세겔은 노예 몸값의 세 배 이상이었습니다. 만약 처녀의 표적이 없다면 여자를 끌어내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행했기 때문에 이렇게 하여 그들 가운데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22절에서는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났을 때는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약혼한 처녀가 남자와 만나 성읍 중에서 동침했을 때는 둘 다 끌어내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여자는 성 안에 있었는데 소리를 지르지 않고 간음죄를 지은 것이고 남자는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기 때문에 둘 다 죽여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 강간하였을 경우는 남자만 죽입니다. 소리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기에 처녀는 죄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피해자일 뿐입니다.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붙들고 동침했으면 처녀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처녀를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30절에서는 아버지의 아내 즉 계모와 성 관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를 병들이고 파괴시키는 죄입니다. 또한 간음은 사람을 영적인 존재에서 육적인 존재로 전락시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얼마나 음란합니까? 불륜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미화하고 순결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 드라마의 많은 것들이 막장드라마라고 하는데 누구의 핏줄인가를 찾는 뻔한 내용입니다. 이런 것들이 잘 먹히는 분위기는 사회의 기류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음란물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음란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거룩하고 순결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거듭나 새 사람이 되었다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다 지나갔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의 죄를 잊어버리고 믿음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철저히 회개하며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드려 헌신할 때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혼인 남녀들도 성에 대해서 분명한 자세를 취하고 거룩함을 지켜야 합니다. 또한 절제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가정을 세울 뿐만 아니라 복된 가정을 잘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총회 회원 자격(23:1-8).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사생자는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총회란 곧 이스라엘 시민을 의미했습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거국적인 공식 집회나 예배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의미’ 혹은, ‘이스라엘 공동체나 회합에서 어떠한 직책도 맡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십대 뿐 아니라 영원히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길에서 떡과 물로 영접치 않고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에돔 사람은 형제이기에, 애굽 사람은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객이 되었었기에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강성해진 후에 압제를 당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이스라엘이 스스로 애굽으로 내려갔고 그곳의 보호된 환경 속에서 큰 민족으로 자라날 수 있었기에 사실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선대와 천대를 구분하여 선대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돔과 애굽 사람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한 후에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삼대 째에 이르면 이스라엘 총회 멤버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는 일이 혈통보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신앙공동체의 멤버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에 들어갈 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전 6:9절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천국 혼인잔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혼인잔치에서 쫓겨나게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불의를 계속해서 행한다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자가 아닐까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계속한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나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면서 영적인 성장과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삶입니다.
넷째, 전쟁 중 청결(23:9-14). 이스라엘은 전쟁을 할 때에 진영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몽정함으로 부정하면 진영 밖으로 나가 들어오지 말고 해 질 때에 목욕하고 해 진 후에 진에 들어와야 합니다. 진영 밖에 변소를 마련하고 대변을 본 후 삽으로 땅을 파 덮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진에 거하시면서 전쟁을 지휘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성전입니다. 이스라엘 군은 꾸준히 진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조치를 취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념해야 합니다. 모세는 만일 진을 청결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들 곁을 떠나실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깨끗함은 성결 다음으로 중요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이 사막의 여우라 불리는 독일의 롬멜의 기갑부대에 의해 이집트 카이로 근처까지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패배로 전의를 상실한 영국군은 매우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몽고메리 장군입니다. 그는 아주 깐깐한 원칙주의자이며 잔소리가 심한 육군 상사와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부임하고 처음으로 한 일은 독일군을 이길 수 있는 혹독한 훈련을 시키거나 엄청난 물자를 이송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병들의 군복을 손가락이 베일 정도로 칼 같이 다림질하게 하고 두발과 전투화 손질을 깔끔하게 하며 개인 식기가 번쩍번쩍 빛이 나게 닦도록 날마다 잔소리를 했습니다. 사실 치열한 전장에서 군복을 아무리 잘 다려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군화에 얼굴이 비칠 정도로 광이 나게 닦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금만 지나면 다 쭈글쭈글 해지고 더러워질 뿐입니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진정한 싸움은 자신을 군인답게 하여 스스로 군기를 엄정하게 세우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엄정하게 군기를 갖추었을 때 영국군은 기나긴 패배의 종지부를 찍고 엘 알라망에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쟁은 단순한 무기와 병력의 싸움이 아니라 그 진영을 거룩하게 하고 엄정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진영을 거룩하게 하고 내면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무의식중에 내속에서 튀어나오는 육신주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세속의 찌꺼기를 깨끗이 묻어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도 모른다고 또 아무도 못 봤다고 대충 덮어버리고 방치하면 이런 것들이 악취를 풍겨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므로 결국 싸움에서 패배하게 되고 맙니다. 아간이 여리고 성 전투에서 하나님께 바칠 물건을 몰래 훔쳐 자기 장막 바닥에 숨겨 놓는 죄를 저질렀을 때 이스라엘 진영이 탐욕의 죄로 더럽혀져 아이 성 전투에서 참담하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는지 얼마나 전투경험이 많은지 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진영이 얼마나 거룩한지, 우리 내면이 깨끗한지 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와 함께 하사 떠나지 아니하시므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불결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나의 죄, 즉 더러움이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고 고통하게 하여 떠나시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30절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믿음의 공동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즉 진영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갈수록 죄가 만연하고 대적이 많이 있습니다. 난잡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유혹이 많이 있는 것이지요. 죄는 우리를 산만하게 만들고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에너지를 빼앗아 갑니다. 죄를 지을 때 신뢰를 잃어버리고 시간을 낭비합니다. 선한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승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성결에 힘쓰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성결에 달려 있습니다.
요셉은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기 때문에 자기 몸을 함부로 내팽개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고자 힘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보디발 여사의 유혹을 뿌리침으로 감옥에 갇히는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그것이 지도자의 꿈을 갖고 있던 그에게 총리가 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뒤에는 탈출한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그가 원하는 곳에 거주하게 하고 압제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일반적으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원칙일 것 같은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권을 대단히 존중하고 있습니다. 노예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중에는 창녀나 남창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남창은 동성애를 전제한 말씀일 것입니다. 이런 가증한 일을 성경은 금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대학생들이 학자금이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성매매에 종사하는 비율이 20%를 넘었다고 합니다. 돈을 많이 준다고 성매매를 해서는 안 됩니다. 생계형 성매매가 합리화되는 지금 우리는 물질보다 거룩과 성결를 더욱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돈이든 양식이든 형제에게 꾸어준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범사에 복을 내려주십니다. 가난한 형제가 생계를 위해 꾸는 것인데 이자를 받고자 할 때 가난한 형제를 더욱 어렵고 힘들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근동에서는 돈을 빌렸을 경우 이자가 20-25퍼센트, 곡식을 빌렸을 경우는 33.3-50퍼센트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결국 가난한 자들이 땅을 팔고 자신까지 노예로 팔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형제에게는 절대 이자를 받지 말도록 했습니다. 약자 보호 및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인 것입니다. 같은 공동체에 속한 자들은 때로는 개인적인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경제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서구 기독교 사회는 종교개혁 시대까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러다가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특히 칼빈이 더 적극적이었는데 그의 관점은 서구 사회의 경제발전을 촉진시키는 사상적인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자가 없이는 경제활동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21-23절은 하나님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것을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죄가 될 것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갈 때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 그릇에 담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 손으로 이삭을 따도 되지만 낫을 대지는 말아야 합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이 허기를 면할 수 있게 하는 이웃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릇에 담거나 낫을 대는 것은 욕심을 부리는 도적질과 같은 행위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율법을 들판에서 추수하는 인부들과 과수원 주인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에게만 적용했습니다. 아마도 이 규례가 주인에게 입힌 손실이 너무 컸기 때문에 보완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24:1-4절에서는 아내와 이혼하고 나서 그가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고 여자의 남편이 죽었다고 할 경우 전 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면 안 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입니다. 이미 몸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교회가 영적으로 무력하고 영향력을 잃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군대가 되어야 할 진영이 성령이 함께 하실 수 없는 물질주의와 음란으로 더럽혀진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십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 우리의 진영을 거룩하게 하고 모든 불결한 것을 내어버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함께 행하시며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성결에 있습니다. 성결의 핵심중 하나는 성적 순결입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옵니다. 성결한 삶 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적인 죄가 만연해 가는 시대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더욱 성결한 삶을 살기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가정들을 세우는 일을 힘쓰고 그 자녀들을 영적으로 잘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함께 하사 영광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신명기 22:9-24:4
요절 | 신명기 23:14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오늘 말씀은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을 적용한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형법에서 간통죄가 폐지된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고리타분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남녀 간의 성생활이 사생활 차원에서만 다루어진다면 공동체가 거룩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음문제를 공동체의 거룩함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순결에 관한 법은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행복과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성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음란한 세상 속에서 순결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순결하게 산다는 것은 윤리와 도덕적인 순수성을 초월하여 우리의 먹는 것과 입는 것에도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 섞어 하지 말라(22:9-12).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포도원에는 포도나무 외에 그 어떤 것을 심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같은 밭에서 서로 다른 농산물을 재배하는 것을 금하시는 것일까요? 서로 다른 품종을 함께 재배하면 서로 다른 시기에 추수를 할 수 있고, 수확량이 많아지고, 땅에서 서로 다른 영양분을 섭취하여 자랄 뿐만 아니라 땅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병충해에도 대비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면에서 좋아 보이는데 성경은 이런 행위를 금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것을 금할까요? 오늘날은 퓨전, 융합이 대세입니다. 자장면과 짬뽕을 섞은 짬짜면, 짜파게티와 너구리 라면을 섞은 짜파구리 등이 유행입니다. 이렇게 입맛에 따라 유행에 따라 이렇게 섞고 저렇게 섞다 보면 결국은 본래의 순수한 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택한 백성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결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또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밭을 갈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귀와 소는 크기도 다르고 힘도 다릅니다. 그런데 이 둘을 한 멍에에 매어 쟁기질을 시킨다면 힘이 약한 짐승을 쉽게 지치게 할 것입니다. 크기도 다르기 때문에 작은 짐승이 다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율법은 힘이 약하고 작은 짐승의 안전을 배려한 인도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울은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고후6:14).
또 직물을 짤 때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고 합니다. 양 털은 짐승에게서 얻는 것이고 무명실은 나무에서 얻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섞어서 옷감을 만들면 더 튼튼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은 이런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지 말라고 합니다. 요세푸스는 이 율법이 제사장들이 사역할 때 이런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즉 이런 옷감으로 만든 옷은 안수를 할 때 사용하는 기름과 성소에서 사용하는 향처럼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입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1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의 네 귀에 다는 술은 양털로 만들고 나머지는 무명실인데 이런 예외를 허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옷자락 끝에 다는 술은 청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청색은 희귀한 물감이기에 값이 비쌌고 왕과 같은 귀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왕족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들이 청색 술을 차고 다님으로서 그들은 하나님께 매우 소중하며 진귀한 백성이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술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고자 힘을 썼을 것입니다. 이 청색 술은 죄 짓는 것을 억제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 세상에서 구별된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생활해야겠습니다. 성도의 표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24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의 옷, 경건의 옷을 항상 입으므로 성도로서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 순결한 결혼과 성생활(22:13-29). 이 부분에서는 성범죄에 대한 여러 가지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아내를 맞이한 후에 미워하여 비방거리를 만들어 동침했을 때 처녀임을 보지 못했다고 할 경우입니다. 누명을 씌운 것이라면 처녀의 부모가 자리옷을 가지고 성읍 장로들에게 가서 보여줌으로 누명을 벗으라고 합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친정부모가 딸의 첫날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옷이나 옷감을 보존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왜 남편이 아내를 미워하여 이혼하려면 가만히 보내면 되지 이런 비방거리를 찾았을까요? 돈이 문제입니다. 당시에 신부의 몸값으로 돈을 지불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만약 이혼을 할 경우 신부의 몸값의 일부 또는 전부를 받고자 이런 소송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 누명을 씌운 것이 밝혀지면 그 사람을 잡아 때리고 은 백 세겔을 벌금으로 여자 아버지에게 주고 평생 버릴 수 없는 아내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은 백 세겔은 노예 몸값의 세 배 이상이었습니다. 만약 처녀의 표적이 없다면 여자를 끌어내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행했기 때문에 이렇게 하여 그들 가운데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22절에서는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났을 때는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약혼한 처녀가 남자와 만나 성읍 중에서 동침했을 때는 둘 다 끌어내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여자는 성 안에 있었는데 소리를 지르지 않고 간음죄를 지은 것이고 남자는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기 때문에 둘 다 죽여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 강간하였을 경우는 남자만 죽입니다. 소리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기에 처녀는 죄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피해자일 뿐입니다.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붙들고 동침했으면 처녀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처녀를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30절에서는 아버지의 아내 즉 계모와 성 관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를 병들이고 파괴시키는 죄입니다. 또한 간음은 사람을 영적인 존재에서 육적인 존재로 전락시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얼마나 음란합니까? 불륜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미화하고 순결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 드라마의 많은 것들이 막장드라마라고 하는데 누구의 핏줄인가를 찾는 뻔한 내용입니다. 이런 것들이 잘 먹히는 분위기는 사회의 기류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음란물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음란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거룩하고 순결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거듭나 새 사람이 되었다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다 지나갔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의 죄를 잊어버리고 믿음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철저히 회개하며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드려 헌신할 때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혼인 남녀들도 성에 대해서 분명한 자세를 취하고 거룩함을 지켜야 합니다. 또한 절제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가정을 세울 뿐만 아니라 복된 가정을 잘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총회 회원 자격(23:1-8).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사생자는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총회란 곧 이스라엘 시민을 의미했습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거국적인 공식 집회나 예배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의미’ 혹은, ‘이스라엘 공동체나 회합에서 어떠한 직책도 맡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십대 뿐 아니라 영원히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길에서 떡과 물로 영접치 않고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에돔 사람은 형제이기에, 애굽 사람은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객이 되었었기에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강성해진 후에 압제를 당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이스라엘이 스스로 애굽으로 내려갔고 그곳의 보호된 환경 속에서 큰 민족으로 자라날 수 있었기에 사실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선대와 천대를 구분하여 선대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돔과 애굽 사람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한 후에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삼대 째에 이르면 이스라엘 총회 멤버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는 일이 혈통보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신앙공동체의 멤버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에 들어갈 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전 6:9절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천국 혼인잔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혼인잔치에서 쫓겨나게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불의를 계속해서 행한다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자가 아닐까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계속한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나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면서 영적인 성장과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삶입니다.
넷째, 전쟁 중 청결(23:9-14). 이스라엘은 전쟁을 할 때에 진영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몽정함으로 부정하면 진영 밖으로 나가 들어오지 말고 해 질 때에 목욕하고 해 진 후에 진에 들어와야 합니다. 진영 밖에 변소를 마련하고 대변을 본 후 삽으로 땅을 파 덮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진에 거하시면서 전쟁을 지휘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성전입니다. 이스라엘 군은 꾸준히 진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조치를 취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념해야 합니다. 모세는 만일 진을 청결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들 곁을 떠나실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깨끗함은 성결 다음으로 중요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이 사막의 여우라 불리는 독일의 롬멜의 기갑부대에 의해 이집트 카이로 근처까지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패배로 전의를 상실한 영국군은 매우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몽고메리 장군입니다. 그는 아주 깐깐한 원칙주의자이며 잔소리가 심한 육군 상사와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부임하고 처음으로 한 일은 독일군을 이길 수 있는 혹독한 훈련을 시키거나 엄청난 물자를 이송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병들의 군복을 손가락이 베일 정도로 칼 같이 다림질하게 하고 두발과 전투화 손질을 깔끔하게 하며 개인 식기가 번쩍번쩍 빛이 나게 닦도록 날마다 잔소리를 했습니다. 사실 치열한 전장에서 군복을 아무리 잘 다려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군화에 얼굴이 비칠 정도로 광이 나게 닦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금만 지나면 다 쭈글쭈글 해지고 더러워질 뿐입니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진정한 싸움은 자신을 군인답게 하여 스스로 군기를 엄정하게 세우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엄정하게 군기를 갖추었을 때 영국군은 기나긴 패배의 종지부를 찍고 엘 알라망에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쟁은 단순한 무기와 병력의 싸움이 아니라 그 진영을 거룩하게 하고 엄정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진영을 거룩하게 하고 내면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무의식중에 내속에서 튀어나오는 육신주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세속의 찌꺼기를 깨끗이 묻어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도 모른다고 또 아무도 못 봤다고 대충 덮어버리고 방치하면 이런 것들이 악취를 풍겨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므로 결국 싸움에서 패배하게 되고 맙니다. 아간이 여리고 성 전투에서 하나님께 바칠 물건을 몰래 훔쳐 자기 장막 바닥에 숨겨 놓는 죄를 저질렀을 때 이스라엘 진영이 탐욕의 죄로 더럽혀져 아이 성 전투에서 참담하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는지 얼마나 전투경험이 많은지 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진영이 얼마나 거룩한지, 우리 내면이 깨끗한지 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와 함께 하사 떠나지 아니하시므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불결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나의 죄, 즉 더러움이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고 고통하게 하여 떠나시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30절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믿음의 공동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즉 진영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갈수록 죄가 만연하고 대적이 많이 있습니다. 난잡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유혹이 많이 있는 것이지요. 죄는 우리를 산만하게 만들고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에너지를 빼앗아 갑니다. 죄를 지을 때 신뢰를 잃어버리고 시간을 낭비합니다. 선한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승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성결에 힘쓰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성결에 달려 있습니다.
요셉은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기 때문에 자기 몸을 함부로 내팽개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고자 힘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보디발 여사의 유혹을 뿌리침으로 감옥에 갇히는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그것이 지도자의 꿈을 갖고 있던 그에게 총리가 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뒤에는 탈출한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그가 원하는 곳에 거주하게 하고 압제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일반적으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원칙일 것 같은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권을 대단히 존중하고 있습니다. 노예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중에는 창녀나 남창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남창은 동성애를 전제한 말씀일 것입니다. 이런 가증한 일을 성경은 금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대학생들이 학자금이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성매매에 종사하는 비율이 20%를 넘었다고 합니다. 돈을 많이 준다고 성매매를 해서는 안 됩니다. 생계형 성매매가 합리화되는 지금 우리는 물질보다 거룩과 성결를 더욱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돈이든 양식이든 형제에게 꾸어준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범사에 복을 내려주십니다. 가난한 형제가 생계를 위해 꾸는 것인데 이자를 받고자 할 때 가난한 형제를 더욱 어렵고 힘들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근동에서는 돈을 빌렸을 경우 이자가 20-25퍼센트, 곡식을 빌렸을 경우는 33.3-50퍼센트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결국 가난한 자들이 땅을 팔고 자신까지 노예로 팔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형제에게는 절대 이자를 받지 말도록 했습니다. 약자 보호 및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인 것입니다. 같은 공동체에 속한 자들은 때로는 개인적인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경제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서구 기독교 사회는 종교개혁 시대까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러다가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특히 칼빈이 더 적극적이었는데 그의 관점은 서구 사회의 경제발전을 촉진시키는 사상적인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자가 없이는 경제활동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21-23절은 하나님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것을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죄가 될 것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갈 때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 그릇에 담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 손으로 이삭을 따도 되지만 낫을 대지는 말아야 합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이 허기를 면할 수 있게 하는 이웃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릇에 담거나 낫을 대는 것은 욕심을 부리는 도적질과 같은 행위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율법을 들판에서 추수하는 인부들과 과수원 주인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에게만 적용했습니다. 아마도 이 규례가 주인에게 입힌 손실이 너무 컸기 때문에 보완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24:1-4절에서는 아내와 이혼하고 나서 그가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고 여자의 남편이 죽었다고 할 경우 전 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면 안 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입니다. 이미 몸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교회가 영적으로 무력하고 영향력을 잃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군대가 되어야 할 진영이 성령이 함께 하실 수 없는 물질주의와 음란으로 더럽혀진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십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 우리의 진영을 거룩하게 하고 모든 불결한 것을 내어버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함께 행하시며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성결에 있습니다. 성결의 핵심중 하나는 성적 순결입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옵니다. 성결한 삶 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적인 죄가 만연해 가는 시대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더욱 성결한 삶을 살기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가정들을 세우는 일을 힘쓰고 그 자녀들을 영적으로 잘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함께 하사 영광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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