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5년 신10강(19:1-22:8)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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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신명기 10강
말씀 | 신명기 19:1-22:8
요절 | 신명기 19:10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오늘 말씀은 공동체의 여러 문제들 중에서 삶과 죽음을 가름하는 살인, 사형, 전쟁 등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로 6계명에서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적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도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풍성하게 하는 법, 배려하는 삶을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합리적인 법 집행(19:1-21). 19장에서 모세는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자들을 보호하는 법제도인 도피성, 경계선 이동, 그리고 거짓 증언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피해자들의 권리와 관련된 것입니다. 모세는 문자적으로 율법준수를 강요하게 되면 억울한 희생자가 나올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의 권리를 강조함으로써 이스라엘이 훗날 약속의 땅에서 율법을 적용할 때에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도피성은 왜 만들었을까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분명 가해자이지만 사건이 일어난 순간부터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죽은 사람의 친족들에게서 도망해야 하는 피해자가 됩니다. 사람이 일을 하다보면 실수로, 혹은 사고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죽게 함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와 같이 본의 아니게 사람을 죽였는데 보복의 악순환을 막지 못한다면 한 맺힌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고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그 땅은 황폐하게 됩니다.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세 성읍을 구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읍은 어디서든지 가장 빠르게 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표지판을 잘 만들어야 하고 어디서든지 빠르게 도달할 수 있도록 일정한 거리를 재서 배치하라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어디에 사는 누구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도망자가 도피성으로 가는 도중 죽은 사람의 친족들에게 붙잡혀 보복을 당하는 일을 최대한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21절을 보면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의 원리가 있지만 이는 악의를 가지고 이웃을 해치려 할 경우에만 유효한 제한된 원칙이었습니다. 법이 정황을 고려하지 않고 정상을 참작하지 않고 적용된다면 법이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게 됩니다. 어느 사회든 법은 사회의 질서를 확립하고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입니다. 그것이 법의 정신인 것입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아야 그 땅에 평화가 있고 번성할 것입니다.
실수나 사고로 사람을 죽인 자는 도피성에 이르러 성의 장로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들의 허락에 따라 성에 머물 수 있습니다(수20:4). 만일 도피성 장로들이 도망 온 사람의 설명을 듣고 나서도 그 사람이 도피성에 머물러야 하는 일에 대해 설득이 되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을 그가 전에 있었던 곳으로 돌려보내 응징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수20:6). 경우에 따라서 법정은 피해자의 가족에게도 증언할 기회를 주어 쌍방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재판을 통해서 그가 도피성에 머물러야 하는 타당한 이유가 인정된다면 그는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머물러야 합니다. 대제사장이 죽은 다음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망자가 도피성에 머물러 있어야 했을까요? 무죄한 자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정의의 기초입니다. 한편 도피성으로 도피한 사람은 장기간에 걸쳐 많은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비록 우연히 이웃을 죽였다 해도 그 책임은 무거웠습니다. 무거운 책임을 지면서 그는 하나님이 생명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시는지를 배웠을 것입니다. 또 대제사장은 희생제도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죽음이 살인자의 죄를 대속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형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해 주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를 짓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여러분은 어디로 피하십니까? 아담은 무화과나무 뒤로 도피했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가 그를 숨겨줄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떨고 있는 그를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변명하며 자기 죄를 합리화하던 그는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 의와 쌓아 놓은 재물로 도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앞에 그의 자기 의가 걸레와 같음을 발견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쌓아 놓은 재물도 그를 보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의식으로 인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탄식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백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피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죄인들이 도피성 되신 예수님께 피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쉼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피하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고 진정한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상처를 입혀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면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무죄이지만 미워하여 죽인 경우는 엄연한 살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게 하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미움에 대한 보복인 것입니다. 죽인 그 자체를 죄로 보지 않고 미워서 죽인 경우 미움에 대해서 벌을 내렸습니다. 행위도 문제이지만 미워하는 그 마음이 더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워하는 것을 더 큰 죄로 보십니다. 예수님도 형제를 미워하여 욕을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이 자라서 살인으로 나아갑니다. 죄의 원천이 미움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살인을 하지 않았지만 미워한다면 이미 살인한 것입니다. 이를 볼 때 구약도 행위자체보다 마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이 귀한 줄 알고 생명을 아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욕하는 것이나 무시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함부로 욕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존댓말을 쓰는 것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14절은 조상이 정한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웃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경계표를 슬쩍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 대개 힘이 있는 자들이 그런 짓을 했을 것입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일이 있는데 이는 권력형 비리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이 말씀은 불공평한 경쟁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생계와 권한을 위협하는 모든 행위에 적용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재산권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15-21절은 위증하는 죄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거짓 증언으로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막기 위해서 두 증인이나 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하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재판의 공정성과 정확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악을 제하라고 하십니다. 거짓 증언의 1차 폐해는 억울한 피해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피해자 편에서 그 억울함을 느끼시고 억울하게 만든 자를 심판하십니다. 거짓 증언의 2차 폐해는 진실을 가림으로써 신뢰 관계를 무너뜨리고 이웃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위증죄를 심각하게 여기시는 이유입니다.
둘째, 전쟁 규정(20:1-20). 20장은 전쟁에 참여할 군인과 정복한 백성과 나무에 대한 처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는 믿음입니다. 전쟁은 자신들의 군사력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백성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군인의 숫자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자,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 포도원을 만들고 과실을 먹어보지 못한 자, 여자와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지 못한 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자는 다른 군인의 마음에 두려움을 퍼뜨립니다. 그들은 전투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동정과 배려 차원에서 두려움에 떠는 자들을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신명기의 핵심 주제는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이 풍요와 누림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제시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의 열매와 하나님의 축복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이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보내 그들이 충분히 누리지 못한 삶을 누리도록 한 다음, 훗날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전쟁을 하는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의 행복권을 유지하거나 얻기 위해서 인데 이런 사람들이 전쟁에 가서 죽게 되면 전쟁의 취지가 무색해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우리가 매주 동아리 방에서 창세기 바이블 까페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양들을 초청하고 말씀을 심고자 합니다. 우리의 수고에 비해서 양들이 적게 참석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담대하게 초청 역사를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기가 죽지 않고 말씀의 씨를 뿌릴 때 하나님의 때가 되면 풍성하게 거둘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두려워하지 말고 전도와 일대일 전투에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20:10-18절은 정복한 백성들에 대한 처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성읍이라고 해서 무분별하게 초토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먼저 정복하고자 하는 성읍 주민들에게 항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포위된 성읍 백성들에게 평화를 선택할 기회를 주라고 합니다. 만일 그들이 항복하면 이스라엘은 그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들을 고문하거나 소유나 재산을 몰수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노비로 삼아 일을 시켜야 합니다. 노비는 관청 등 정부 기관에서 강제로 일을 시키는 공짜 인력이었습니다.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그 성읍을 정복하여 모든 성인 남자들을 죽여야 합니다. 여자들과 아이들과 그 성의 모든 재산은 전리품으로 간주하여 나누어 가질 수가 있습니다. 21:10-14절에는 여자 포로들에 대한 규례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최대한 자제하며 이 여자들을 인간적으로 배려해야 합니다. 남의 도시를 침략하여 정복하는 것 자체가 잔인한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근동의 다른 민족들이 포로들을 어떻게 취급했는가를 배경으로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군대는 매우 인도적이고 자제하는 마음으로 전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인도주의적인 사상이 깊이 배어 있는 전쟁에 대한 규례인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성읍에는 이 규례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호흡이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그들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그들로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었습니다. 당시 가나안은 더러운 땅이었습니다.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스9:11).” 가나안은 전 세계에서 의인이 노아 가족 밖에 없었던 시대나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했던 소돔 고모라와 비교할 만큼 타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도저히 회개를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진멸하지 않고 남겨두면 이스라엘까지도 악에 물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절박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세속화되면 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교회와 세속주의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생명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세속주의를 거부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종교를 폄훼하고 편안하고 안일하게 사는 것을 동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말씀을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들을 키우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며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대로 사는 공동체를 힘써 세워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생명의 존엄성(21장). 21장은 생명의 존엄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21:1-9절은 죽은 사람으로 인해 그 피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가 이스라엘에게 내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살인범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건을 방치하지 말고 미궁에 빠진 사건이라도 종교적인 차원에서 종결지어야 합니다. 즉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여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고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라고 말하면 그 피 흘린 자가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그들 중에서 제하라고 합니다. 장로들의 탄원을 동반한 암송아지가 하나님의 진노를 백성 중에서 제하는 속량의 제물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익명의 살인자는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 눈은 피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입니다.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정의는 반드시 시행됩니다.
10-14절에서는 포로를 아내로 삼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포로된 여인 중에서 아리따운 자를 보고 아내를 삼고자 하거든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포로의 의복을 벗기고 그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옛적 신분과 삶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신분으로 새 삶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또 남편은 이 여인을 더 이상 노예나 이방 여인을 대하듯 대해서도 안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면 자기의 기업을 아들들에게 나누는 날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그를 참 장자로 삼아 두 몫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요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 때문에 정의가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을 거슬리더라도 정의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패역한 아들은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긴 것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아야 합니다. 시체는 땅을 쉽게 오염시키기 때문입니다. 시체를 오랜 시간 동안 나무에 매달아 두면 짐승들이 그 시체를 먹어 부정을 온 땅에 퍼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은 생기로 왕성해야지 죽음으로 오염시켜서는 안 됩니다.
넷째, 배려하는 삶(22장). 22장은 남을 배려하는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습득한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주인을 찾아주라고 합니다.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고 찾아주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 중국인이 여권과 돈이 든 지갑을 잃어버렸다가 그대로 찾은 사건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 지갑은 발견한 사람이 근처에서 근무를 서던 경찰에게 지갑을 건네주었고 그는 바로 무전을 받고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중국인은 한국 사람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여러 번 표현했고 사례를 하고자 했지만 지갑을 발견한 사람은 일부러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이런 선행이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자부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고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동성연애와 관계된 일로 여호와 하나님께 가증한 것입니다. 어미 새와 새끼 새를 한꺼번에 잡지 말라고 했습니다. 새끼 새는 잡되 어미 새는 살려 보내라고 했습니다. 이는 미래를 위하여 무분별한 포획을 금지한 것입니다. 오늘날 무분별한 포획으로 인해서 짐승들, 물고기들이 멸종해 가고 있습니다. 미래를 위하여 절제하는 범위에서 식량을 구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또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나의 부주의로 남에게 피해가 생기기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본문을 금연을 뒷받침하는 성경 말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안전불감증으로 인해서 많은 인명이 억울하게 죽는데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은 상대방의 생명과 안전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나의 부주의 때문에 다치거나 죽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세월호 사건, 판교 사건을 겪었습니다. 생명과 안전에 대한 이 규정이 얼마나 중요한가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망의 길에 있는 자들이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힘을 써야 합니다. 만일 우리 이웃이 멸망의 길에 있는데도 그를 경고할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20).” 우리가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한다면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적극적으로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길입니다.
말씀 | 신명기 19:1-22:8
요절 | 신명기 19:10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오늘 말씀은 공동체의 여러 문제들 중에서 삶과 죽음을 가름하는 살인, 사형, 전쟁 등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로 6계명에서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적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도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풍성하게 하는 법, 배려하는 삶을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합리적인 법 집행(19:1-21). 19장에서 모세는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자들을 보호하는 법제도인 도피성, 경계선 이동, 그리고 거짓 증언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피해자들의 권리와 관련된 것입니다. 모세는 문자적으로 율법준수를 강요하게 되면 억울한 희생자가 나올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의 권리를 강조함으로써 이스라엘이 훗날 약속의 땅에서 율법을 적용할 때에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도피성은 왜 만들었을까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분명 가해자이지만 사건이 일어난 순간부터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죽은 사람의 친족들에게서 도망해야 하는 피해자가 됩니다. 사람이 일을 하다보면 실수로, 혹은 사고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죽게 함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와 같이 본의 아니게 사람을 죽였는데 보복의 악순환을 막지 못한다면 한 맺힌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고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그 땅은 황폐하게 됩니다.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세 성읍을 구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읍은 어디서든지 가장 빠르게 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표지판을 잘 만들어야 하고 어디서든지 빠르게 도달할 수 있도록 일정한 거리를 재서 배치하라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어디에 사는 누구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도망자가 도피성으로 가는 도중 죽은 사람의 친족들에게 붙잡혀 보복을 당하는 일을 최대한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21절을 보면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의 원리가 있지만 이는 악의를 가지고 이웃을 해치려 할 경우에만 유효한 제한된 원칙이었습니다. 법이 정황을 고려하지 않고 정상을 참작하지 않고 적용된다면 법이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게 됩니다. 어느 사회든 법은 사회의 질서를 확립하고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입니다. 그것이 법의 정신인 것입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아야 그 땅에 평화가 있고 번성할 것입니다.
실수나 사고로 사람을 죽인 자는 도피성에 이르러 성의 장로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들의 허락에 따라 성에 머물 수 있습니다(수20:4). 만일 도피성 장로들이 도망 온 사람의 설명을 듣고 나서도 그 사람이 도피성에 머물러야 하는 일에 대해 설득이 되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을 그가 전에 있었던 곳으로 돌려보내 응징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수20:6). 경우에 따라서 법정은 피해자의 가족에게도 증언할 기회를 주어 쌍방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재판을 통해서 그가 도피성에 머물러야 하는 타당한 이유가 인정된다면 그는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머물러야 합니다. 대제사장이 죽은 다음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망자가 도피성에 머물러 있어야 했을까요? 무죄한 자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정의의 기초입니다. 한편 도피성으로 도피한 사람은 장기간에 걸쳐 많은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비록 우연히 이웃을 죽였다 해도 그 책임은 무거웠습니다. 무거운 책임을 지면서 그는 하나님이 생명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시는지를 배웠을 것입니다. 또 대제사장은 희생제도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죽음이 살인자의 죄를 대속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형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해 주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를 짓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여러분은 어디로 피하십니까? 아담은 무화과나무 뒤로 도피했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가 그를 숨겨줄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떨고 있는 그를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변명하며 자기 죄를 합리화하던 그는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 의와 쌓아 놓은 재물로 도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앞에 그의 자기 의가 걸레와 같음을 발견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쌓아 놓은 재물도 그를 보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의식으로 인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탄식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백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피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죄인들이 도피성 되신 예수님께 피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쉼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피하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고 진정한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상처를 입혀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면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무죄이지만 미워하여 죽인 경우는 엄연한 살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게 하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미움에 대한 보복인 것입니다. 죽인 그 자체를 죄로 보지 않고 미워서 죽인 경우 미움에 대해서 벌을 내렸습니다. 행위도 문제이지만 미워하는 그 마음이 더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워하는 것을 더 큰 죄로 보십니다. 예수님도 형제를 미워하여 욕을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이 자라서 살인으로 나아갑니다. 죄의 원천이 미움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살인을 하지 않았지만 미워한다면 이미 살인한 것입니다. 이를 볼 때 구약도 행위자체보다 마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이 귀한 줄 알고 생명을 아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욕하는 것이나 무시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함부로 욕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존댓말을 쓰는 것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14절은 조상이 정한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웃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경계표를 슬쩍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 대개 힘이 있는 자들이 그런 짓을 했을 것입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일이 있는데 이는 권력형 비리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이 말씀은 불공평한 경쟁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생계와 권한을 위협하는 모든 행위에 적용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재산권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15-21절은 위증하는 죄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거짓 증언으로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막기 위해서 두 증인이나 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하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재판의 공정성과 정확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악을 제하라고 하십니다. 거짓 증언의 1차 폐해는 억울한 피해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피해자 편에서 그 억울함을 느끼시고 억울하게 만든 자를 심판하십니다. 거짓 증언의 2차 폐해는 진실을 가림으로써 신뢰 관계를 무너뜨리고 이웃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위증죄를 심각하게 여기시는 이유입니다.
둘째, 전쟁 규정(20:1-20). 20장은 전쟁에 참여할 군인과 정복한 백성과 나무에 대한 처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는 믿음입니다. 전쟁은 자신들의 군사력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백성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군인의 숫자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자,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 포도원을 만들고 과실을 먹어보지 못한 자, 여자와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지 못한 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자는 다른 군인의 마음에 두려움을 퍼뜨립니다. 그들은 전투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동정과 배려 차원에서 두려움에 떠는 자들을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신명기의 핵심 주제는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이 풍요와 누림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제시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의 열매와 하나님의 축복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이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보내 그들이 충분히 누리지 못한 삶을 누리도록 한 다음, 훗날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전쟁을 하는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의 행복권을 유지하거나 얻기 위해서 인데 이런 사람들이 전쟁에 가서 죽게 되면 전쟁의 취지가 무색해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우리가 매주 동아리 방에서 창세기 바이블 까페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양들을 초청하고 말씀을 심고자 합니다. 우리의 수고에 비해서 양들이 적게 참석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담대하게 초청 역사를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기가 죽지 않고 말씀의 씨를 뿌릴 때 하나님의 때가 되면 풍성하게 거둘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두려워하지 말고 전도와 일대일 전투에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20:10-18절은 정복한 백성들에 대한 처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성읍이라고 해서 무분별하게 초토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먼저 정복하고자 하는 성읍 주민들에게 항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포위된 성읍 백성들에게 평화를 선택할 기회를 주라고 합니다. 만일 그들이 항복하면 이스라엘은 그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들을 고문하거나 소유나 재산을 몰수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노비로 삼아 일을 시켜야 합니다. 노비는 관청 등 정부 기관에서 강제로 일을 시키는 공짜 인력이었습니다.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그 성읍을 정복하여 모든 성인 남자들을 죽여야 합니다. 여자들과 아이들과 그 성의 모든 재산은 전리품으로 간주하여 나누어 가질 수가 있습니다. 21:10-14절에는 여자 포로들에 대한 규례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최대한 자제하며 이 여자들을 인간적으로 배려해야 합니다. 남의 도시를 침략하여 정복하는 것 자체가 잔인한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근동의 다른 민족들이 포로들을 어떻게 취급했는가를 배경으로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군대는 매우 인도적이고 자제하는 마음으로 전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인도주의적인 사상이 깊이 배어 있는 전쟁에 대한 규례인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성읍에는 이 규례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호흡이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그들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그들로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었습니다. 당시 가나안은 더러운 땅이었습니다.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스9:11).” 가나안은 전 세계에서 의인이 노아 가족 밖에 없었던 시대나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했던 소돔 고모라와 비교할 만큼 타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도저히 회개를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진멸하지 않고 남겨두면 이스라엘까지도 악에 물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절박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세속화되면 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교회와 세속주의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생명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세속주의를 거부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종교를 폄훼하고 편안하고 안일하게 사는 것을 동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말씀을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들을 키우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며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대로 사는 공동체를 힘써 세워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생명의 존엄성(21장). 21장은 생명의 존엄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21:1-9절은 죽은 사람으로 인해 그 피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가 이스라엘에게 내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살인범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건을 방치하지 말고 미궁에 빠진 사건이라도 종교적인 차원에서 종결지어야 합니다. 즉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여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고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라고 말하면 그 피 흘린 자가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그들 중에서 제하라고 합니다. 장로들의 탄원을 동반한 암송아지가 하나님의 진노를 백성 중에서 제하는 속량의 제물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익명의 살인자는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 눈은 피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입니다.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정의는 반드시 시행됩니다.
10-14절에서는 포로를 아내로 삼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포로된 여인 중에서 아리따운 자를 보고 아내를 삼고자 하거든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포로의 의복을 벗기고 그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옛적 신분과 삶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신분으로 새 삶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또 남편은 이 여인을 더 이상 노예나 이방 여인을 대하듯 대해서도 안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면 자기의 기업을 아들들에게 나누는 날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그를 참 장자로 삼아 두 몫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요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 때문에 정의가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을 거슬리더라도 정의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패역한 아들은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긴 것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아야 합니다. 시체는 땅을 쉽게 오염시키기 때문입니다. 시체를 오랜 시간 동안 나무에 매달아 두면 짐승들이 그 시체를 먹어 부정을 온 땅에 퍼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은 생기로 왕성해야지 죽음으로 오염시켜서는 안 됩니다.
넷째, 배려하는 삶(22장). 22장은 남을 배려하는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습득한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주인을 찾아주라고 합니다.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고 찾아주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 중국인이 여권과 돈이 든 지갑을 잃어버렸다가 그대로 찾은 사건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 지갑은 발견한 사람이 근처에서 근무를 서던 경찰에게 지갑을 건네주었고 그는 바로 무전을 받고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중국인은 한국 사람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여러 번 표현했고 사례를 하고자 했지만 지갑을 발견한 사람은 일부러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이런 선행이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자부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고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동성연애와 관계된 일로 여호와 하나님께 가증한 것입니다. 어미 새와 새끼 새를 한꺼번에 잡지 말라고 했습니다. 새끼 새는 잡되 어미 새는 살려 보내라고 했습니다. 이는 미래를 위하여 무분별한 포획을 금지한 것입니다. 오늘날 무분별한 포획으로 인해서 짐승들, 물고기들이 멸종해 가고 있습니다. 미래를 위하여 절제하는 범위에서 식량을 구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또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나의 부주의로 남에게 피해가 생기기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본문을 금연을 뒷받침하는 성경 말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안전불감증으로 인해서 많은 인명이 억울하게 죽는데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은 상대방의 생명과 안전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나의 부주의 때문에 다치거나 죽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세월호 사건, 판교 사건을 겪었습니다. 생명과 안전에 대한 이 규정이 얼마나 중요한가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망의 길에 있는 자들이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힘을 써야 합니다. 만일 우리 이웃이 멸망의 길에 있는데도 그를 경고할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20).” 우리가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한다면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적극적으로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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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회 다운로드 | DATE : 2015-03-29 13: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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