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5년 신8강(14:1-16:17) 너희는 여호와의 성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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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신명기 제 8 강
말씀 | 신명기 14:1-16:17
요절 | 신명기 14:2
너희는 여호와의 성민이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먹는 문제, 물질생활, 종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태도, 절기를 지키는 것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성민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첫째, 거룩한 백성, 거룩한 습관(14:1-21). 1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자녀 된 모습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산 자들이 죽은 자에 대한 죄책감의 표현으로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또 귀신을 달래는 의식이거나, 가나안 우상숭배 예식의 일부로 자해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여호와의 성민이란 거룩한 백성, 구별된 백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성민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 풍습을 따라하지 말고 자신의 신분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3-20절은 먹는 것에서 구별되도록 하십니다. 즉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짐승,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했습니다. 이번에 박대통령이 아랍에미레이트(UAE)에 가서 낙타고기를 대접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낙타고기를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4-20절에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에 따라서 땅에 거하는 짐승(4-8), 물에 사는 짐승(9-10), 공중에 사는 새들(11-20)의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논하고 있습니다. 어떤 기준이나 원리에 따라서 정하고 부정한 것들로 구분되는 것일까요? 역사적으로 많은 주석가들이 정하고 부정한 짐승 목록에 어떤 원리가 있는지 발견하려 했지만 아직까지 흡족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결하고 부정한 짐승의 구분은 이스라엘이 세상 여러 민족들로부터 구분된 원리에 따른다는 것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매일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종 짐승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창조에 부정한 짐승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인간의 죄로 만물도 함께 저주를 받아 부정한 동물이 생겼을 것입니다. 가증하다는 표현은 신명기에서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행위나 타락한 행동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입니다. 부정한 음식은 가나안 인들의 생활 습관과 관련하여 즐겨 먹는 음식이었거나, 혹은 가나안의 우상에게 바친 후 먹는 음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먹는 것은 절제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훈련입니다. 여호와의 성민은 먹고 싶다고 막 먹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식생활부터 이방인들과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탐욕은 가장 보편적인 우상숭배입니다.
오늘날 육신적이고 음란한 문화가 판을 칩니다. 회식을 했다 하면 술을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세속적인 것을 먹고 즐기는 자가 되기보다 영적인 것, 말씀을 먹고 마시며 즐기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시인은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충만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이요 영원한 음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둘째, 신자의 물질생활(14:22-15:23). 14:22-29절은 이스라엘이 드려야 할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드렸습니다. 그들이 누리는 축복은 가나안의 다산의 신들이 준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농업 기술이 일구어 낸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 덕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드림으로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게 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십일조를 드려서 주로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을 위해 썼습니다. 또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에 쓰였습니다. 경주 최부자집은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300년 동안 부를 누렸습니다. 물질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십일조를 아까와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는 신앙의 표현이요 감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표현입니다. 십일조는 물질생활에서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유지하게 해 줍니다. 또 이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는 사역자와 복음 역사와 구제에 쓰여 짐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게 합니다. 말라기 3:10절은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5장에서는 안식년과 첫 열매에 대한 율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속박된 노예에게 자유를 주고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일을 통해서 빈부의 양극화를 막고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소망을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15:1,2절을 보십시오.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이렇게 하여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부의 분배를 균등하게 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매 칠 년은 안식년인데 이는 십계명의 제 4계명인 안식일 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7년째에 모든 빚을 탕감해 주라는 말씀은 십일조 율법보다 더 파격적입니다.
이 율법의 이상적인 목적은 이스라엘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그런데 11절은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서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상과 현실의 대립을 보여줍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는 사회와 소수가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이 있고 없고의 차이인 것입니다. 미국 선교사님들 중에는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걷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볼 때 탄식이 나온다고 합니다. 너무나 이상한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이 걷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나라가 이제는 꾼 돈보다 빌려준 돈이 많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난하건 풍족하건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는 생활습관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돈을 꾸어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난한 형제들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악한 마음을 품으면 그가 하나님께 호소할 것이요, 하나님이 벌하신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꾸어주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12-18절은 노예에 대한 율법입니다. 돈을 꾸었는데 갚지 못해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족 중에 이런 노예가 있다면 일곱째 해에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양과 곡식과 포도주 틀에서 후히 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신대로 종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만약 종이 주인이 좋아서 자유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경우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영구히 그의 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자신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고통하였던 때를 기억하고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종들에게 은혜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빚 면제,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것, 종을 자유하게 하는 계명에 순종할 때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일반적으로 빚을 면제하고 베풀고 종에게 자유를 주면 손해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함께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때 복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건강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측정되는 것이지 그 공동체가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는가에 의해서 판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의 구제 사역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것은 건강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난하지만 함께 나누는 것을 힘써 실천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공동체에 들어오고자 소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대안공동체의 모델입니다.
19-23절은 첫 소산에 대한 율법입니다. 소나 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가족이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으며 즐기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으면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성중에서 잡아먹으면 됩니다. 첫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하고 드리는 자들의 삶에 즐거움과 기쁨을 더하기 위함이지 빼앗기 위함이 아닙니다.
셋째, 신자들의 축제(16:1-17). 이 부분은 주요 절기들에 관한 율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 대한 규례입니다. 유월절은 종교력으로는 1월 양력으로는 3,4월에 드리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장자 재앙 후 출애굽한 그 때를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출12:2). 아빕월 즉 1월 10일에 준비해 둔 어린 양이나 염소를 14일 저녁에 잡아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했습니다(출12:3-11). 그들이 무교병을 먹는 것은 급박하게 행해진 출애굽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유월절 다음날부터 무교절인데 15일부터 21일까지 7일 동안 거행했습니다. 유월절은 농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가장 큰 절기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함께 참여하고 기뻐하는 절기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비록 여러 세대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만 함께 어울리는 시간은 극히 적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세대 간의 대화가 단절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유대인들의 유월절 전통은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또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및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에 드셨습니다. 4월 5일이 부활절인데 지금은 사순절로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우리가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서로를 용서하며 누룩을 제거하는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고 첫 사랑이 어떠했는지 생각하면서 첫 사랑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칠칠절은 아빕월 16일부터 계산하여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를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때는 밀을 거두는 때였으므로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추수를 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밀의 수확을 마무리 하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가나안 지역에서의 밀 추수는 4월 말에서 시작되어 6월 초까지 진행됩니다. 추수를 마무리 하면서 모든 수확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축복이라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오순절은 여호와가 주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셔서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심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애굽의 종 되어 긍핍했던 때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즐거워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했습니다. 즉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드리라고 합니다. 일정한 기준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과 자신의 형편을 고려하여 스스로 결정하는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객과 고아와 과부까지 함께 즐기는 축제로 삼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초막절입니다. 이는 모든 수확을 끝마치고 창고에 저장할 때에 드리는 절기입니다. 양력으로 9월 중순에 드렸는데 우리의 추석이나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인 동시에 광야에서 장막 생활한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가 진행되는 1주일 동안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은 초막 안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선조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임시 처소에서 기거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이 세 절기에 이스라엘 남자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때 빈손으로 오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헌신하라고 합니다. 모세는 마음을 다하여 자기의 형편에 따라, 하나님이 내려주신 복을 따라 정성껏 드리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여호와의 성민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그 삶의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오늘날은 신자와 세상 사람들이 구별이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많이 상실하고 있는 것도 성민으로서 구별되지 않는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는 것, 물질생활, 명절 등 기본적인 생활에서 신자다움을 회복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신명기 14:1-16:17
요절 | 신명기 14:2
너희는 여호와의 성민이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먹는 문제, 물질생활, 종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태도, 절기를 지키는 것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성민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첫째, 거룩한 백성, 거룩한 습관(14:1-21). 1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자녀 된 모습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산 자들이 죽은 자에 대한 죄책감의 표현으로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또 귀신을 달래는 의식이거나, 가나안 우상숭배 예식의 일부로 자해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여호와의 성민이란 거룩한 백성, 구별된 백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성민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 풍습을 따라하지 말고 자신의 신분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3-20절은 먹는 것에서 구별되도록 하십니다. 즉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짐승,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했습니다. 이번에 박대통령이 아랍에미레이트(UAE)에 가서 낙타고기를 대접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낙타고기를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4-20절에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에 따라서 땅에 거하는 짐승(4-8), 물에 사는 짐승(9-10), 공중에 사는 새들(11-20)의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논하고 있습니다. 어떤 기준이나 원리에 따라서 정하고 부정한 것들로 구분되는 것일까요? 역사적으로 많은 주석가들이 정하고 부정한 짐승 목록에 어떤 원리가 있는지 발견하려 했지만 아직까지 흡족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결하고 부정한 짐승의 구분은 이스라엘이 세상 여러 민족들로부터 구분된 원리에 따른다는 것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매일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종 짐승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창조에 부정한 짐승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인간의 죄로 만물도 함께 저주를 받아 부정한 동물이 생겼을 것입니다. 가증하다는 표현은 신명기에서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행위나 타락한 행동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입니다. 부정한 음식은 가나안 인들의 생활 습관과 관련하여 즐겨 먹는 음식이었거나, 혹은 가나안의 우상에게 바친 후 먹는 음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먹는 것은 절제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훈련입니다. 여호와의 성민은 먹고 싶다고 막 먹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식생활부터 이방인들과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탐욕은 가장 보편적인 우상숭배입니다.
오늘날 육신적이고 음란한 문화가 판을 칩니다. 회식을 했다 하면 술을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세속적인 것을 먹고 즐기는 자가 되기보다 영적인 것, 말씀을 먹고 마시며 즐기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시인은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충만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이요 영원한 음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둘째, 신자의 물질생활(14:22-15:23). 14:22-29절은 이스라엘이 드려야 할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드렸습니다. 그들이 누리는 축복은 가나안의 다산의 신들이 준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농업 기술이 일구어 낸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 덕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드림으로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게 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십일조를 드려서 주로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을 위해 썼습니다. 또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에 쓰였습니다. 경주 최부자집은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300년 동안 부를 누렸습니다. 물질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십일조를 아까와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는 신앙의 표현이요 감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표현입니다. 십일조는 물질생활에서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유지하게 해 줍니다. 또 이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는 사역자와 복음 역사와 구제에 쓰여 짐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게 합니다. 말라기 3:10절은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5장에서는 안식년과 첫 열매에 대한 율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속박된 노예에게 자유를 주고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일을 통해서 빈부의 양극화를 막고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소망을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15:1,2절을 보십시오.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이렇게 하여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부의 분배를 균등하게 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매 칠 년은 안식년인데 이는 십계명의 제 4계명인 안식일 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7년째에 모든 빚을 탕감해 주라는 말씀은 십일조 율법보다 더 파격적입니다.
이 율법의 이상적인 목적은 이스라엘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그런데 11절은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서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상과 현실의 대립을 보여줍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는 사회와 소수가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이 있고 없고의 차이인 것입니다. 미국 선교사님들 중에는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걷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볼 때 탄식이 나온다고 합니다. 너무나 이상한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이 걷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나라가 이제는 꾼 돈보다 빌려준 돈이 많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난하건 풍족하건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는 생활습관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돈을 꾸어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난한 형제들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악한 마음을 품으면 그가 하나님께 호소할 것이요, 하나님이 벌하신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꾸어주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12-18절은 노예에 대한 율법입니다. 돈을 꾸었는데 갚지 못해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족 중에 이런 노예가 있다면 일곱째 해에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양과 곡식과 포도주 틀에서 후히 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신대로 종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만약 종이 주인이 좋아서 자유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경우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영구히 그의 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자신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고통하였던 때를 기억하고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종들에게 은혜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빚 면제,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것, 종을 자유하게 하는 계명에 순종할 때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일반적으로 빚을 면제하고 베풀고 종에게 자유를 주면 손해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함께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때 복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건강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측정되는 것이지 그 공동체가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는가에 의해서 판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의 구제 사역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것은 건강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난하지만 함께 나누는 것을 힘써 실천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공동체에 들어오고자 소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대안공동체의 모델입니다.
19-23절은 첫 소산에 대한 율법입니다. 소나 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가족이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으며 즐기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으면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성중에서 잡아먹으면 됩니다. 첫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하고 드리는 자들의 삶에 즐거움과 기쁨을 더하기 위함이지 빼앗기 위함이 아닙니다.
셋째, 신자들의 축제(16:1-17). 이 부분은 주요 절기들에 관한 율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 대한 규례입니다. 유월절은 종교력으로는 1월 양력으로는 3,4월에 드리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장자 재앙 후 출애굽한 그 때를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출12:2). 아빕월 즉 1월 10일에 준비해 둔 어린 양이나 염소를 14일 저녁에 잡아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했습니다(출12:3-11). 그들이 무교병을 먹는 것은 급박하게 행해진 출애굽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유월절 다음날부터 무교절인데 15일부터 21일까지 7일 동안 거행했습니다. 유월절은 농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가장 큰 절기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함께 참여하고 기뻐하는 절기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비록 여러 세대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만 함께 어울리는 시간은 극히 적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세대 간의 대화가 단절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유대인들의 유월절 전통은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또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및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에 드셨습니다. 4월 5일이 부활절인데 지금은 사순절로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우리가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서로를 용서하며 누룩을 제거하는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고 첫 사랑이 어떠했는지 생각하면서 첫 사랑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칠칠절은 아빕월 16일부터 계산하여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를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때는 밀을 거두는 때였으므로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추수를 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밀의 수확을 마무리 하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가나안 지역에서의 밀 추수는 4월 말에서 시작되어 6월 초까지 진행됩니다. 추수를 마무리 하면서 모든 수확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축복이라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오순절은 여호와가 주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셔서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심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애굽의 종 되어 긍핍했던 때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즐거워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했습니다. 즉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드리라고 합니다. 일정한 기준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과 자신의 형편을 고려하여 스스로 결정하는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객과 고아와 과부까지 함께 즐기는 축제로 삼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초막절입니다. 이는 모든 수확을 끝마치고 창고에 저장할 때에 드리는 절기입니다. 양력으로 9월 중순에 드렸는데 우리의 추석이나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인 동시에 광야에서 장막 생활한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가 진행되는 1주일 동안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은 초막 안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선조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임시 처소에서 기거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이 세 절기에 이스라엘 남자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때 빈손으로 오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헌신하라고 합니다. 모세는 마음을 다하여 자기의 형편에 따라, 하나님이 내려주신 복을 따라 정성껏 드리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여호와의 성민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그 삶의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오늘날은 신자와 세상 사람들이 구별이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많이 상실하고 있는 것도 성민으로서 구별되지 않는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는 것, 물질생활, 명절 등 기본적인 생활에서 신자다움을 회복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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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회 다운로드 | DATE : 2015-03-15 13:3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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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heenam님의 댓글
seungheenam 작성일
책소개.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설교.
정창균.
합동신학대학원.
수련회때 적어라에서 중복 되기로 영풍문고에서 주문 하고 이 곳에 글 올려요.
하나님의 성민는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의 뜻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