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5년 신6강(10:12-11:32) 네 행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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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신명기 제 6 강
말씀 | 신명기 10:12-11:32
요절 | 신명기 10:13
네 행복을 위하여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것을 마치 주님을 위해서 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는 목자님을 위해서 일대일을 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양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나의 번영과 행복을 위한 것임을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존경을 뜻합니다. 우리 자신이 왕들의 왕이자 주들의 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깊은 존경에서 우러나는 찬송과 경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경외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20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예배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오직 그분만 경배하고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에게 의지한다는 말의 원어는 다바크인데 이는 들러붙다, 착 달라붙다는 뜻입니다. 이 동사는 부부가 서로에게 애착을 가지고 가까이 하는 것을 뜻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가까이 하기를 마치 아내와 남편이 하나가 됨 같이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착 달라붙어 친근히 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무엇입니까? 그의 말씀을 사랑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말씀을 지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도덕과 기준을 만들고 개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닦아 놓으신 길을 가면 됩니다. 이번에 헌법재판소는 간통죄가 위헌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간통죄가 사라던 날 나이트클럽에서는 축배를 들었고, “결혼 왜해 사랑하면 되지”라면서 중년 여성들이 즐거이 말했다고 합니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법도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윤리와 법보다 더 근본적인 가치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일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주의 백성을 선택하실 만큼 먼저 사랑하신 것에 대해서 올바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충성과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말씀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의 인생은 환난과 곤고가 있고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선을 행하는 사람은 마음에 평강이 있고 복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부담을 주거나 짐을 지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쉼과 만족을 주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 옵니다. 의로운 것을 하고 즐거운 것을 할 때 옵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선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참으로 선을 행할 수 있고 진정한 만족과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경외하는 것을 인생의 큰 방향으로 삼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이 세상의 만물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이시며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잘 나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주권에 의해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은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고 목을 굳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집스럽고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목이 굳어버리면 한쪽만 바라보기 쉽습니다. 유연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은혜롭고 겸손하면 삶에 여유가 있고 융통성이 생깁니다. 그래야 자녀들과 섬기는 사람들을 풍성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아니하고 마음이 딱딱하게 되면 바리새인과 같이 됩니다. 마음이 메마르고 건조하고 좁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힘써야 할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문자적으로 하면 마음의 포피를 잘라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반역하려고 하는 것은 과감하게 잘라내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은혜 안에 거할 때 연약한 사람,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돌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십니다. 이스라엘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로 있었기 때문에 나그네의 처지를 잘 압니다. 그들도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갈 때 70명이었는데 이제는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졌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강성해진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1장 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하나님께 복을 받고 나서 풍요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물질적인 풍요나 다른 어떤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역사 속에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강한 손과 펴신 팔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애굽 전국에 이적과 기사로 그들을 심판하시고 출애굽한 그들을 추격하는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들을 홍해에 수장시키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당을 지어 반역한 다단과 아비람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를 높였습니다. 그들은 성막 봉사 일을 작게 여기고 제사장 직분을 구했습니다.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애굽 생활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고 광야에서 자기들을 죽이려고 이끌어 냈다고 말했습니다(민16:13). 또 자기들의 눈을 빼려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자신들의 왕이 되려 한다고 말하며 대적하였습니다. 이는 가데스바네아 사건(민13장)에 버금가는 대 반역사건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리더쉽에 대한 반역일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크게 분노하셔서 산채로 땅이 갈라져 250명을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이때 14700명이 염병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반역과 심판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사람 속에는 이런 반역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 심은 교만,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명예욕을 끊어내야 합니다. 자기를 높일 때 행복이 없습니다. 도리어 불행과 저주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가벼운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대적자가 될 수 있고, 거기에 무서운 심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명령을 지킬 때 받게 될 복들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강성하여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고 그 땅에서 그 날이 장구하게 됩니다. 이는 육체적으로 오래 살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힘과 축복과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면 힘과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 생명이 말라버립니다. 우리가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길은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얻게 될 가나안 땅은 애굽 땅과 같지 않습니다. 애굽 땅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습니다. 발로 물을 댄다는 표현은 발로 수차를 돌려 나일 강물을 퍼서 물을 대던 농사기법으로 여겨집니다. 애굽은 관계수로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입니다. 물이 고이는 것이 아니라 빠져 버리는 땅입니다. 비를 마셔버리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려 주십니다. 지난 주에 배운 것처럼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나의 힘과 능력, 쌓아 놓은 재물을 믿고 살 것인가 때마다 나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요하십니다. 그는 풍성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공급을 받으면서 살 것인가 내 힘을 의지해서 살 것인가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느니 자기 주먹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버릴 때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능력이 말라버려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 수 있습니다(16,17).
인간의 힘으로 물을 대 농사짓는 땅이 더 안전해 보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풍족할 때 사람들은 머리를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들이 가두어둔 물을 의지합니다. 재물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원이 없을 때 수완이 생깁니다. 부족한 자원과 여러 가지 제약들이 창의성을 늘려줍니다. 잠자는 창조성을 키우는 것은 역경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 강물을 끌어들여서 농사를 짓고 머리를 써서 품종을 개발하고 농산품을 유럽에 수출을 하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하나님을 믿고 머리를 써서 개척하고 도전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물을 대 놓고 살기보다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의지해서 사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물질을 쌓아두고 사는 삶이 복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삶이 축복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가치관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기를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삶이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침을 주십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있고 몸에 있고 삶의 모든 영역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툭 건드리면 말씀이 튀어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이고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연인이 준 편지를 두고두고 묵상하고 이를 통해 사랑이 깊어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이 식으면 더 이상 선물에 관심이 없고, 다른 데 관심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식으면 우리는 세상의 뉴스나 오락, 게임, 주식, 돈에 관심을 빼앗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얼마나 지배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말씀과 삶이 따로 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공부가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쁨과 즐거움입니까? 신앙생활이 행사와 형식이 되고 정작 기쁨은 말씀 외에 다른 곳에서 얻을 때 비참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원하시고 그 사랑은 말씀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양들에게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늘 노출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그들의 날과 그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을 것입니다(21). 이는 의역하면 ‘하늘이 땅 위에 펼쳐져 있는 한 영원토록 이르리라’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을 받게 될 땅에서 개인적, 사회적, 민족적 축복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게 누릴 영원한 삶까지도 복되게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의지하면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그들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입니다. 원수들은 그들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능히 당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생명과 힘과 승리와 번영은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는 모든 축복이 언약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 나라의 승리는 군사력에 달려 있지만, 이스라엘은 특별한 나라입니다. 승리와 축복이 오직 언약 성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학기를 시작하면서 학문에서, 직장에서, 복음 사역에서 많은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대학생들이 많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진정한 성공의 열쇠는 말씀을 사랑하는 삶에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꿀처럼 달게 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모든 승리와 축복과 번영을 주십니다.
그들이 만약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는 도에게 떠나 그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이스라엘 앞에 놓인 축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선택의 도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율법은 사랑의 선물인데 동시에 시험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험은 그들을 탈락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풍성한 삶을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저주에 대한 경고는 이스라엘의 삶에 팽팽한 긴장을 안겨줍니다. 그것은 여호와냐, 다른 신이냐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은 완벽한 낙원이지만 그것은 순종을 전제로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순종할 때 축복이 지속되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도 이런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물을 주셨습니다. 즉 그를 믿을 때 죄사함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몸이 구속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직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애굽에서 구원 얻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죄로 멸망한 사건을 예시하며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고전 10:12). 어떤 사람은 구원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 나라를 맛보았지만 죄를 짓고 믿음을 배반하며 넘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값싼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얻은 값비싼 구원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었다고 되는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 선물을 소중히 여긴다면 감사함과 두려움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땅이 에발 산처럼 황량한 곳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고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길을 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늘 내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불꽃의 온도를 살피며 말씀 사랑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순종을 명하신 이유는 나의 행복을 위함입니다. 나를 택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 사랑에 순종함으로 응답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신명기 10:12-11:32
요절 | 신명기 10:13
네 행복을 위하여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것을 마치 주님을 위해서 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는 목자님을 위해서 일대일을 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양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나의 번영과 행복을 위한 것임을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존경을 뜻합니다. 우리 자신이 왕들의 왕이자 주들의 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깊은 존경에서 우러나는 찬송과 경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경외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20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예배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오직 그분만 경배하고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에게 의지한다는 말의 원어는 다바크인데 이는 들러붙다, 착 달라붙다는 뜻입니다. 이 동사는 부부가 서로에게 애착을 가지고 가까이 하는 것을 뜻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가까이 하기를 마치 아내와 남편이 하나가 됨 같이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착 달라붙어 친근히 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무엇입니까? 그의 말씀을 사랑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말씀을 지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도덕과 기준을 만들고 개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닦아 놓으신 길을 가면 됩니다. 이번에 헌법재판소는 간통죄가 위헌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간통죄가 사라던 날 나이트클럽에서는 축배를 들었고, “결혼 왜해 사랑하면 되지”라면서 중년 여성들이 즐거이 말했다고 합니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법도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윤리와 법보다 더 근본적인 가치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일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주의 백성을 선택하실 만큼 먼저 사랑하신 것에 대해서 올바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충성과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말씀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의 인생은 환난과 곤고가 있고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선을 행하는 사람은 마음에 평강이 있고 복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부담을 주거나 짐을 지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쉼과 만족을 주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 옵니다. 의로운 것을 하고 즐거운 것을 할 때 옵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선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참으로 선을 행할 수 있고 진정한 만족과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경외하는 것을 인생의 큰 방향으로 삼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이 세상의 만물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이시며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잘 나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주권에 의해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은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고 목을 굳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집스럽고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목이 굳어버리면 한쪽만 바라보기 쉽습니다. 유연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은혜롭고 겸손하면 삶에 여유가 있고 융통성이 생깁니다. 그래야 자녀들과 섬기는 사람들을 풍성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아니하고 마음이 딱딱하게 되면 바리새인과 같이 됩니다. 마음이 메마르고 건조하고 좁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힘써야 할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문자적으로 하면 마음의 포피를 잘라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반역하려고 하는 것은 과감하게 잘라내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은혜 안에 거할 때 연약한 사람,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돌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십니다. 이스라엘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로 있었기 때문에 나그네의 처지를 잘 압니다. 그들도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갈 때 70명이었는데 이제는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졌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강성해진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1장 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하나님께 복을 받고 나서 풍요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물질적인 풍요나 다른 어떤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역사 속에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강한 손과 펴신 팔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애굽 전국에 이적과 기사로 그들을 심판하시고 출애굽한 그들을 추격하는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들을 홍해에 수장시키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당을 지어 반역한 다단과 아비람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를 높였습니다. 그들은 성막 봉사 일을 작게 여기고 제사장 직분을 구했습니다.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애굽 생활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고 광야에서 자기들을 죽이려고 이끌어 냈다고 말했습니다(민16:13). 또 자기들의 눈을 빼려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자신들의 왕이 되려 한다고 말하며 대적하였습니다. 이는 가데스바네아 사건(민13장)에 버금가는 대 반역사건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리더쉽에 대한 반역일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크게 분노하셔서 산채로 땅이 갈라져 250명을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이때 14700명이 염병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반역과 심판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사람 속에는 이런 반역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 심은 교만,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명예욕을 끊어내야 합니다. 자기를 높일 때 행복이 없습니다. 도리어 불행과 저주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가벼운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대적자가 될 수 있고, 거기에 무서운 심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명령을 지킬 때 받게 될 복들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강성하여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고 그 땅에서 그 날이 장구하게 됩니다. 이는 육체적으로 오래 살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힘과 축복과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면 힘과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 생명이 말라버립니다. 우리가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길은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얻게 될 가나안 땅은 애굽 땅과 같지 않습니다. 애굽 땅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습니다. 발로 물을 댄다는 표현은 발로 수차를 돌려 나일 강물을 퍼서 물을 대던 농사기법으로 여겨집니다. 애굽은 관계수로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입니다. 물이 고이는 것이 아니라 빠져 버리는 땅입니다. 비를 마셔버리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려 주십니다. 지난 주에 배운 것처럼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나의 힘과 능력, 쌓아 놓은 재물을 믿고 살 것인가 때마다 나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요하십니다. 그는 풍성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공급을 받으면서 살 것인가 내 힘을 의지해서 살 것인가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느니 자기 주먹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버릴 때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능력이 말라버려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 수 있습니다(16,17).
인간의 힘으로 물을 대 농사짓는 땅이 더 안전해 보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풍족할 때 사람들은 머리를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들이 가두어둔 물을 의지합니다. 재물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원이 없을 때 수완이 생깁니다. 부족한 자원과 여러 가지 제약들이 창의성을 늘려줍니다. 잠자는 창조성을 키우는 것은 역경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 강물을 끌어들여서 농사를 짓고 머리를 써서 품종을 개발하고 농산품을 유럽에 수출을 하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하나님을 믿고 머리를 써서 개척하고 도전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물을 대 놓고 살기보다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의지해서 사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물질을 쌓아두고 사는 삶이 복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삶이 축복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가치관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기를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삶이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침을 주십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있고 몸에 있고 삶의 모든 영역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툭 건드리면 말씀이 튀어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이고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연인이 준 편지를 두고두고 묵상하고 이를 통해 사랑이 깊어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이 식으면 더 이상 선물에 관심이 없고, 다른 데 관심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식으면 우리는 세상의 뉴스나 오락, 게임, 주식, 돈에 관심을 빼앗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얼마나 지배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말씀과 삶이 따로 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공부가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쁨과 즐거움입니까? 신앙생활이 행사와 형식이 되고 정작 기쁨은 말씀 외에 다른 곳에서 얻을 때 비참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원하시고 그 사랑은 말씀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양들에게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늘 노출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그들의 날과 그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을 것입니다(21). 이는 의역하면 ‘하늘이 땅 위에 펼쳐져 있는 한 영원토록 이르리라’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을 받게 될 땅에서 개인적, 사회적, 민족적 축복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게 누릴 영원한 삶까지도 복되게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의지하면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그들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입니다. 원수들은 그들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능히 당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생명과 힘과 승리와 번영은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는 모든 축복이 언약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 나라의 승리는 군사력에 달려 있지만, 이스라엘은 특별한 나라입니다. 승리와 축복이 오직 언약 성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학기를 시작하면서 학문에서, 직장에서, 복음 사역에서 많은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대학생들이 많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진정한 성공의 열쇠는 말씀을 사랑하는 삶에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꿀처럼 달게 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모든 승리와 축복과 번영을 주십니다.
그들이 만약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는 도에게 떠나 그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이스라엘 앞에 놓인 축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선택의 도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율법은 사랑의 선물인데 동시에 시험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험은 그들을 탈락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풍성한 삶을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저주에 대한 경고는 이스라엘의 삶에 팽팽한 긴장을 안겨줍니다. 그것은 여호와냐, 다른 신이냐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은 완벽한 낙원이지만 그것은 순종을 전제로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순종할 때 축복이 지속되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도 이런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물을 주셨습니다. 즉 그를 믿을 때 죄사함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몸이 구속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직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애굽에서 구원 얻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죄로 멸망한 사건을 예시하며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고전 10:12). 어떤 사람은 구원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 나라를 맛보았지만 죄를 짓고 믿음을 배반하며 넘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값싼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얻은 값비싼 구원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었다고 되는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 선물을 소중히 여긴다면 감사함과 두려움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땅이 에발 산처럼 황량한 곳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고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길을 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늘 내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불꽃의 온도를 살피며 말씀 사랑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순종을 명하신 이유는 나의 행복을 위함입니다. 나를 택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 사랑에 순종함으로 응답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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