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5년 신5강(9:1-10:11) 네 공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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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신명기 5강
말씀 | 신명기 9:1-10:11
요절 | 신명기 9:5
네 공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지난 주 풍요의 덫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 말씀 중에 이스라엘이 풍요를 얻게 된 것은 그들의 공의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고 잠깐 언급했습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이 좋은 말을 계속 들어도 그만하라고 하는데 좋지 않은 말을 계속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교만해질 가능성을 보고 그들이 얼마나 완악한 자들이었는가를 상기시킴으로써 쐐기를 박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에 대한 모세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임을 뼈 속 깊이 새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주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심(1-3).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해서 싸워야 할 족속들은 매우 강하고 그들의 성벽은 하늘에 닿을 듯이 높았습니다. 그 당시 가나안 성벽의 높이가 9-15미터에 이르고 폭이 4-5미터에 달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성벽이 하늘에 닿았다는 표현이 생생해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상대해야 할 적들 중에는 아낙 자손이 있습니다. 아낙 자손은 키가 크고 힘이 세기로 소문이 나 있던 족속이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이 상대하기에 버거운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그들 앞에 나아가사 적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의 악이 하늘에 사무칠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맹렬할 불과 같이 그들을 순식간에 삼키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만약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면 소멸하는 불이 되어 그들을 삼킬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4:24).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행동에 따라 아군이 되기도 하시고, 적이 되기도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고자 힘을 쓴다면 전쟁의 승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짐승이 번성할까 하여 조금씩 쫓아내겠다고 말씀하셨는데(7:22), 본문은 속히 멸할 것이라는 말씀과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마도 가나안 사람들의 주력 부대는 순식간에 물리치시지만 패잔병들과 주민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게 될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기에 이스라엘은 마음으로 준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또한 그들의 조상들은 40년 전에 아낙 자손과 싸우기를 거부하며 하나님께 반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도망하는 것은 바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정면 돌파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아가 싸워야 합니다.
둘째, 피해야 할 죄 자만(4-5).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신 후에 그들이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공의로움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스러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가나안 정복은 자신들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실함이 이루어내는 결과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나안 주민들을 내치시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이유는 가나안 백성들의 악함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창15:16). 5절을 보십시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승리한 이유는 원수들의 죄악과 하나님이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서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재산을 물려주거나 무슨 업적을 세워 명예를 남겨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축복하시고 왕위가 흔들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데 자손들은 그 풍요 속에서 부자 집 아들과 같이 안일하거나 방탕하게 된다면 얼마나 허무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훈련시키고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쉽지 않지만 힘을 써야 하고,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셋째, 반역한 이스라엘(6-24). 모세는 이스라엘이 교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더 적나라하게 노골적으로 그들의 실체를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6,7)”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이는 말씀을 청종하기 위해서 머리를 돌려야 하는 상황에서 머리 돌리기를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존감이 풍선처럼 불어나 있었습니다. 그들이 목이 곧다는 것은 고집이 센 것을 의미합니다. 고집이 센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신념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고집이 세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집의 부정적인 면입니다. 그들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고 격노하게 하였던 일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호렙 산에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일을 지적합니다. 그것은 금송아지 숭배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 때 모세는 산 정상에서 이들에게 전할 율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직접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들으면 죽을 것 같아 모세에게 중재를 부탁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산 정상으로 갔습니다. 그는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새긴 두 돌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번이라도 하나님께 신실하고자 했다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중이던 이때 하나님께 신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언약의 장소가 반역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산에 머물면서 그때까지 받지 못했던 율법의 나머지 부분을 받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40일이 끝나는 날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었으니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12). 하나님의 말씀에는 긴박감이 서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고 너를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14).” 모세가 이스라엘을 평가하면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할 때는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엄청난 파장을 초래했습니다. 즉 그들을 모두 죽이고 모세의 후손만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만약 이 말씀이 실행된다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도 버리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언약의 두 돌판은 그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가 내려와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도를 너무나 빨리 떠났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32:1).” 아론은 그들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가져오라고 했고 그것을 모아 녹였습니다. 녹인 금을 부어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우상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송아지가 자신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신의 신이라고 고백하며 그 앞에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 모세는 이 모습을 보고 그 두 돌판을 두 손으로 들어 던져 그들의 목전에서 깨뜨려 버렸습니다. 모세가 돌판을 던져 깨버린 것은 그의 화가 난 감정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깨졌다는 것을 뜻하는 법적인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약 조건을 위반함으로써 그 언약이 무효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들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고자 하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만든 송아지를 불에 태우고 부숴서 가루로 만든 다음 흐르는 개울물에 띄워 보냈습니다(21). 출애굽기 32:20절에 보면 모세는 이 물을 백성들에게 마시도록 했습니다. 우상을 태워서 만든 가루가 섞인 물을 마시게 한 것은 그 가루가 사람의 배설물이 되도록 하여 우상을 한 번 더 경멸하기 위해서입니다.
금송아지를 없애버린 모세는 곧장 다시 40일 금식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론을 죽이려고 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목숨을 내건 중보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기도하는 동안 모세도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이 정작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실지 모세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하는 모세마저도 생명과 죽음의 기로에서 두려워했습니다. 만일 모세가 하나님을 말리지 않았다면 지구상에서 이스라엘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모세 족이 차지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모세의 중보기도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살렸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아론을 계속 대제사장으로 있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우리 생각에 아론은 당장 직위해제를 시키고 백의종군을 시켜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얼마나 큰지 아론의 삶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한 사람 모세의 중보기도였습니다. 한 사람의 중보기도는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수 없이 불순종하고 늘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동역자들에게 실망을 끼쳤습니다. 이를 볼 때 벌써 멸망을 당해야 마땅할 자였습니다. 이것을 알 때 결코 눈꼽만큼의 자기 의도 가질 수 없습니다. 지나온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십시오. 늘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회개한다면서 여전히 똑같이 죄짓고…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은혜로 이렇게 영적인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중보기도와 십자가 대속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반역과 자고함으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동역자들의 마음을 괴롭혔는가 생각할 때 깊이 회개합니다. 죄인의 허물과 실수를 감당해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 너희가 다베라와 맛사와 기브롯 핫다아와에서도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느니라.” 다베라(불사름) 사건(민11:1-3)은 그들이 시내산을 떠난 지 3일 밖에 안 되었을 때인데 길이 좀 힘들다고 악한 말로 원망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진노하사 불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셨습니다. 백성이 부르짖고 모세가 기도하매 불이 꺼졌습니다.
맛사 사건(출17:1-7)은 르비딤에 장막을 쳤을 때 마실 물이 없자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물을 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내어 목말라 죽게 하느냐며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힘들면 악한 말로 원망하고 자신들을 광야에서 죽이려고 데려왔다고 말하였습니다.
기브롯 핫다아와 사건(민11:4-35)은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 값없이 과일과 채소와 고기를 먹었는데 광야에서 만나만 먹는다며 지겹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울며 고기를 먹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평하며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고 노예 시절을 그리워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은혜를 모욕하고 멸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시되 냄새를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메추라기를 내려 거두게 하셨는데 백성들은 이틀간 종일토록 거두는데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120말, 12가마)를 모아 자기를 위해 진영 사면에 펴두었습니다. 그 정도로 엄청나게 탐욕을 부렸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탐욕을 부린 그들을 아직 고기가 잇사이에서 없어지기 전에 큰 재앙으로 쳐서 죽이셨습니다. 기브롯 핫다아와는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탐욕을 부립니다. 무엇이 부족하면 없다며 원망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작은 고난을 힘들어하고 죄악된 옛 삶을 그리워합니다. 육신의 탐욕을 따라 살고자 합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우리의 탐욕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진노케 한 적이 있다면 회개하고 주신 것에 만족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차지하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 왔느니라.” 가데스 바네아 사건(민13:17-14:10)은 이미 1강에서 다루었듯이 약속의 땅이 눈앞에 있는데, 하나님의 명령하신 대로 들어가서 취하면 되는데, 믿음이 없어 두려움에 빠져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야로 들어간 내용입니다. 그들은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이었습니다. 이 반역에 동참했던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을 때까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보류되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반역의 대가로 치룬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당장 진멸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어린 자녀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하셨습니다. 모세가 기억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가 알던 날부터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모세의 목숨을 건 중보기도를 통해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넷째, 모세의 중보기도와 새 돌판(9:25-10:11).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신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께 중보기도하였습니다. 25-29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무조건 죄송하다, 송구스럽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기억해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그리고 애굽인들이 하나님이 능력이 없고 그들을 미워해서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했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용서해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무조건 떼를 쓰듯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기초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욕심과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유익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기뻐하시고 속히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받으시고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두 돌판에 말씀을 쓰시고 조각목으로 만든 궤에 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이 회복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의 뜻을 거역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죄악됨을 깊이 인정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 속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과거의 죄를 기억하는 사람은 미래에 같은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은혜를 감당하는 삶을 살며 이웃들에게 선한 일을 베풀 수 있습니다.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겸손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신명기 9:1-10:11
요절 | 신명기 9:5
네 공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지난 주 풍요의 덫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 말씀 중에 이스라엘이 풍요를 얻게 된 것은 그들의 공의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고 잠깐 언급했습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이 좋은 말을 계속 들어도 그만하라고 하는데 좋지 않은 말을 계속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교만해질 가능성을 보고 그들이 얼마나 완악한 자들이었는가를 상기시킴으로써 쐐기를 박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에 대한 모세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임을 뼈 속 깊이 새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주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심(1-3).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해서 싸워야 할 족속들은 매우 강하고 그들의 성벽은 하늘에 닿을 듯이 높았습니다. 그 당시 가나안 성벽의 높이가 9-15미터에 이르고 폭이 4-5미터에 달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성벽이 하늘에 닿았다는 표현이 생생해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상대해야 할 적들 중에는 아낙 자손이 있습니다. 아낙 자손은 키가 크고 힘이 세기로 소문이 나 있던 족속이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이 상대하기에 버거운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그들 앞에 나아가사 적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의 악이 하늘에 사무칠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맹렬할 불과 같이 그들을 순식간에 삼키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만약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면 소멸하는 불이 되어 그들을 삼킬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4:24).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행동에 따라 아군이 되기도 하시고, 적이 되기도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고자 힘을 쓴다면 전쟁의 승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짐승이 번성할까 하여 조금씩 쫓아내겠다고 말씀하셨는데(7:22), 본문은 속히 멸할 것이라는 말씀과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마도 가나안 사람들의 주력 부대는 순식간에 물리치시지만 패잔병들과 주민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게 될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기에 이스라엘은 마음으로 준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또한 그들의 조상들은 40년 전에 아낙 자손과 싸우기를 거부하며 하나님께 반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도망하는 것은 바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정면 돌파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아가 싸워야 합니다.
둘째, 피해야 할 죄 자만(4-5).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신 후에 그들이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공의로움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스러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가나안 정복은 자신들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실함이 이루어내는 결과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나안 주민들을 내치시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이유는 가나안 백성들의 악함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창15:16). 5절을 보십시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승리한 이유는 원수들의 죄악과 하나님이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서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재산을 물려주거나 무슨 업적을 세워 명예를 남겨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축복하시고 왕위가 흔들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데 자손들은 그 풍요 속에서 부자 집 아들과 같이 안일하거나 방탕하게 된다면 얼마나 허무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훈련시키고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쉽지 않지만 힘을 써야 하고,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셋째, 반역한 이스라엘(6-24). 모세는 이스라엘이 교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더 적나라하게 노골적으로 그들의 실체를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6,7)”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이는 말씀을 청종하기 위해서 머리를 돌려야 하는 상황에서 머리 돌리기를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존감이 풍선처럼 불어나 있었습니다. 그들이 목이 곧다는 것은 고집이 센 것을 의미합니다. 고집이 센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신념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고집이 세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집의 부정적인 면입니다. 그들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고 격노하게 하였던 일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호렙 산에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일을 지적합니다. 그것은 금송아지 숭배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 때 모세는 산 정상에서 이들에게 전할 율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직접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들으면 죽을 것 같아 모세에게 중재를 부탁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산 정상으로 갔습니다. 그는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새긴 두 돌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번이라도 하나님께 신실하고자 했다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중이던 이때 하나님께 신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언약의 장소가 반역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산에 머물면서 그때까지 받지 못했던 율법의 나머지 부분을 받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40일이 끝나는 날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었으니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12). 하나님의 말씀에는 긴박감이 서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고 너를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14).” 모세가 이스라엘을 평가하면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할 때는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엄청난 파장을 초래했습니다. 즉 그들을 모두 죽이고 모세의 후손만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만약 이 말씀이 실행된다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도 버리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언약의 두 돌판은 그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가 내려와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도를 너무나 빨리 떠났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32:1).” 아론은 그들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가져오라고 했고 그것을 모아 녹였습니다. 녹인 금을 부어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우상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송아지가 자신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신의 신이라고 고백하며 그 앞에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 모세는 이 모습을 보고 그 두 돌판을 두 손으로 들어 던져 그들의 목전에서 깨뜨려 버렸습니다. 모세가 돌판을 던져 깨버린 것은 그의 화가 난 감정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깨졌다는 것을 뜻하는 법적인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약 조건을 위반함으로써 그 언약이 무효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들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고자 하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만든 송아지를 불에 태우고 부숴서 가루로 만든 다음 흐르는 개울물에 띄워 보냈습니다(21). 출애굽기 32:20절에 보면 모세는 이 물을 백성들에게 마시도록 했습니다. 우상을 태워서 만든 가루가 섞인 물을 마시게 한 것은 그 가루가 사람의 배설물이 되도록 하여 우상을 한 번 더 경멸하기 위해서입니다.
금송아지를 없애버린 모세는 곧장 다시 40일 금식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론을 죽이려고 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목숨을 내건 중보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기도하는 동안 모세도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이 정작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실지 모세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하는 모세마저도 생명과 죽음의 기로에서 두려워했습니다. 만일 모세가 하나님을 말리지 않았다면 지구상에서 이스라엘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모세 족이 차지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모세의 중보기도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살렸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아론을 계속 대제사장으로 있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우리 생각에 아론은 당장 직위해제를 시키고 백의종군을 시켜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얼마나 큰지 아론의 삶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한 사람 모세의 중보기도였습니다. 한 사람의 중보기도는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수 없이 불순종하고 늘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동역자들에게 실망을 끼쳤습니다. 이를 볼 때 벌써 멸망을 당해야 마땅할 자였습니다. 이것을 알 때 결코 눈꼽만큼의 자기 의도 가질 수 없습니다. 지나온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십시오. 늘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회개한다면서 여전히 똑같이 죄짓고…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은혜로 이렇게 영적인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중보기도와 십자가 대속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반역과 자고함으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동역자들의 마음을 괴롭혔는가 생각할 때 깊이 회개합니다. 죄인의 허물과 실수를 감당해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 너희가 다베라와 맛사와 기브롯 핫다아와에서도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느니라.” 다베라(불사름) 사건(민11:1-3)은 그들이 시내산을 떠난 지 3일 밖에 안 되었을 때인데 길이 좀 힘들다고 악한 말로 원망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진노하사 불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셨습니다. 백성이 부르짖고 모세가 기도하매 불이 꺼졌습니다.
맛사 사건(출17:1-7)은 르비딤에 장막을 쳤을 때 마실 물이 없자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물을 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내어 목말라 죽게 하느냐며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힘들면 악한 말로 원망하고 자신들을 광야에서 죽이려고 데려왔다고 말하였습니다.
기브롯 핫다아와 사건(민11:4-35)은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 값없이 과일과 채소와 고기를 먹었는데 광야에서 만나만 먹는다며 지겹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울며 고기를 먹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평하며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고 노예 시절을 그리워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은혜를 모욕하고 멸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시되 냄새를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메추라기를 내려 거두게 하셨는데 백성들은 이틀간 종일토록 거두는데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120말, 12가마)를 모아 자기를 위해 진영 사면에 펴두었습니다. 그 정도로 엄청나게 탐욕을 부렸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탐욕을 부린 그들을 아직 고기가 잇사이에서 없어지기 전에 큰 재앙으로 쳐서 죽이셨습니다. 기브롯 핫다아와는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탐욕을 부립니다. 무엇이 부족하면 없다며 원망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작은 고난을 힘들어하고 죄악된 옛 삶을 그리워합니다. 육신의 탐욕을 따라 살고자 합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우리의 탐욕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진노케 한 적이 있다면 회개하고 주신 것에 만족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차지하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 왔느니라.” 가데스 바네아 사건(민13:17-14:10)은 이미 1강에서 다루었듯이 약속의 땅이 눈앞에 있는데, 하나님의 명령하신 대로 들어가서 취하면 되는데, 믿음이 없어 두려움에 빠져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야로 들어간 내용입니다. 그들은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이었습니다. 이 반역에 동참했던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을 때까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보류되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반역의 대가로 치룬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당장 진멸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어린 자녀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하셨습니다. 모세가 기억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가 알던 날부터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모세의 목숨을 건 중보기도를 통해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넷째, 모세의 중보기도와 새 돌판(9:25-10:11).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신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께 중보기도하였습니다. 25-29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무조건 죄송하다, 송구스럽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기억해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그리고 애굽인들이 하나님이 능력이 없고 그들을 미워해서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했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용서해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무조건 떼를 쓰듯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기초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욕심과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유익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기뻐하시고 속히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받으시고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두 돌판에 말씀을 쓰시고 조각목으로 만든 궤에 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이 회복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의 뜻을 거역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죄악됨을 깊이 인정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 속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과거의 죄를 기억하는 사람은 미래에 같은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은혜를 감당하는 삶을 살며 이웃들에게 선한 일을 베풀 수 있습니다.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겸손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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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회 다운로드 | DATE : 2015-02-15 13:3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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