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5년 신3강(4:44-6:2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페이지 정보

본문
2015년 신명기 3 강
말씀 | 신명기 4:44-6:25
요절 | 신명기 6: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렵고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상적인 목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표현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여자가 결혼을 하기 전에는 집안을 청소하고 음식을 만드는 것이 어렵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해 주고 싶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사랑의 관계성이 깊어지게 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세는 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증언과 규례와 법도를 선포하였습니다. 이곳은 모세의 첫 번째 설교가 이루어진 것과 같은 장소입니다. 요단강 동쪽은 전쟁에서 이겨서 얻은 땅이고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이전에는 바산 왕 옥의 땅인데 이스라엘의 땅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 말하기 전에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언약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 간에 동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규례와 법도를 따르겠다는 동의요 약속입니다. ‘언약’은 ‘매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매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이제 매이고 묶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매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부부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남남이지만 일단 결혼서약을 하게 되면 이제 평생 매인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노예 백성 이스라엘이 감히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도 죄의 노예였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조상들과 세운 언약은 연속성이 있습니다. 지금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모압 땅에 있는 후손들과도 세우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언약은 지금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와도 세우신 것입니다. 롬 4:16절은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울 때에도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언약이 적용되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주신 언약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혈통에서 믿음의 사람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를 믿는 자는 또한 하나님과 언약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해석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언약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호렙산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은 어떠했습니까? 4절을 보면 불 가운데서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대면하심’은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셨음, 친근히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장엄한 모습으로 임재하셨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 모세가 중재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 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자요 존재의 뿌리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는 백성에게 주어지는 십계명은 생명이요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안내자입니다.
첫 번째 계명, 나 외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7). 가나안 땅은 다신교 사회였습니다. 날씨와 번영의 신 바알과 다산과 관능의 신 아스다롯 등이 판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필요에 따라서 신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섬길 유일한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한 창조주이십니다. 또 그들을 바로와 애굽의 우상들로부터 구원해 내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첫 계명에서 이스라엘의 절대적이고 독점적인 충성을 명령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이하는 남편의 자격으로 아내의 일편단심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요구는 긴밀한 애정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기에 결코 무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기대도 큰 법입니다. 첫째 계명은 첫 단추와 같습니다. 여기서 어긋나기 시작하면 다 문제가 됩니다. 그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구하면 그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그를 섬기는 것이 쉽지만 그러한 체험이 없는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들이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야 합니다.
둘째 계명은 우상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을 형상화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8,9).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으로 바꾸게 됩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바뀌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제한시키게 됩니다. 결국 신앙이 왜곡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4:24).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어떤 형상을 만들고자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공장과 같아서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냅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크게 만들어서 그 힘을 과시하고자 합니다. 아름다운 건물로 그 영광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림과 석상들을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서 신의 위대함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들을 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독보적인 존재이십니다. 그 영광을 다른 것에 빼앗기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사야 42:8절은 말씀합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오늘날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는 것으로 알려진 유물들과 상징들도 우리 신앙의 올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십자가를 단순히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기념하는 상징이 아니라, 그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는 생각으로 그 앞에서 특별한 예식을 행한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훗날 히스기야는 모세의 놋뱀을 파괴해 없애버린 일도 이 같은 원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하는 자들은 죄를 삼사 대까지 갚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복을 주기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이 마치 저주가 연좌되는 것을 뜻하는 것처럼 이해하지만 본문의 핵심은 대조에 있습니다. 1000대 3이 상징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잘 받들어 사는 사람들의 집안에 임할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합니다. 반대로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우상을 만들어 그것이 하나님인 양 그 앞에서 절하고 섬기는 사람의 집안에는 그 분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 진노는 잠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것이지 조상의 죄때문이 아닙니다(렘31:29,30). 모세는 나중에 조상의 죄 때문에 후손을 벌하는 것과 자식들의 죄 때문에 부모를 벌하는 일을 율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신24:16). 우리가 헛된 신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지조를 지키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이미지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엄성과 품위를 망가뜨리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구분되시는 분이십니다.
셋째 계명,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11). “너는 네 하나님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의 사사로운 유익을 위해서 도용내지는 오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름은 그의 존재를 나타내는데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찬양하고 섬겨야지, 함부로 이용하거나 농담거리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망령되이 부르는 것은 헛되이, 공허하게, 무의미하게, 기대없이 부르는 것입니다. 주문을 외우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그에게 상 주심을 믿고 기대감을 갖고 불러야 합니다. 이는 듣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우상들과 차별성을 갖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니 그를 인격적으로 믿고 구해야 합니다.
넷째 계명,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12-15).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사역을 이루시고 칠일에 쉬셨습니다. 언약 백성인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안식일에 생업을 잠시 놓고 쉬며 성회로 모이고 언약의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함으로서 새 힘을 덧입어야 합니다.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죄에서 구원하신 구속의 은혜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함께 교제를 나누며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주일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신앙고백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제사의 목적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주님과 연합된 의미를 되새기고 감사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께 예배드림으로 안식을 얻기를 바랍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종은 안식일이 없이 죽도록 일해야 합니다. 종은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종에서 풀려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자유인의 특권은 바로 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좀 마음 놓고 쉬어야 합니다. 안식일에 쉰다는 것은 내가 종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입니다. 안식을 포기하는 것은 다시 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섯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부모를 공경할 때 축복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단순히 효도의 개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세대를 통해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축복의 물줄기를 영접하고 순종하며 또 자손들에게 계승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부모가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잘 시키고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여 순종하고 말씀에 따라 살 때 축복의 역사가 계승됩니다.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골3:20). 자기를 낳으시고 길러주시고 교육시켜 주신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윗사람을 존중하고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할 줄 알게 됩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그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옛적에 우리나라에 고려장이 있었던 것처럼 근동지역에서도 나이가 들어 노동력을 상실해 버린 노인들이 집에서 쫓겨나고 길거리로 내몰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신27:16). 이 법은 이런 상황에 처한 힘없는 노부모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그 근본 취지가 있었습니다. 즉 이 계명은 노동력을 상실하고 ‘안식’을 맞은 노인들을 적절하게 대접하고 섬김으로써 그들이 노년에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라는 것이요, 부모의 노년에 대한 책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만일 늙고 힘없는 부모를 공경하여 어떤 경제적인 손실이 자식에게 임한다면, 선하신 하나님이 그가 부모를 위하여 투자한 액수의 몇 배라도 갚아 주실 것입니다. 또 늙은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보아야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공허함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또한 주의 백성들이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은 그 사회에 신뢰와 존경을 바탕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게 합니다.
여섯 째 계명, 살인하지 말라. 피조물인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임의로 취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부모가 되어 자기가 살기 어렵다고 자녀의 생명을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침범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미움과 복수, 원한 품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격모독도 살인으로 보셨습니다. 이 말씀이 사형제도를 금하는 성경적 근거로 채택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사용된 ‘살인하다’는 동사는 전쟁을 통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정당하게 범죄자를 처형하는 것을 설명하는 데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계명은 정당한 형 집행 테두리 밖에서 살해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계명, 간음하지 말라.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제도입니다. 간음은 사회를 더럽히는 부도덕한 행위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범죄입니다. 간음은 사회질서의 기초가 되는 가족관계를 깨는 일이기 때문에 심각한 형벌을 가하고 있습니다(신22:22). 예수님은 마음의 음욕도 금하셨습니다. 음란 동영상이나 누드 사진을 보는 것, 동성애, 수간 등도 다 죄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제도이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그리고 최초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서약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덟째 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이웃의 소유물을 존중하고 사회적 약자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각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기 전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일정한 양의 물질을 공동체에 기부하여 모든 지체들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과 존엄성을 유지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것을 도둑질 하는 것은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나 가족들의 자존감이나 존엄성을 빼앗는 행위이기에 금하고 있습니다.
아홉째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20). 이웃은 모든 권리를 지닌 공동체의 멤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법정에서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위증은 진실을 왜곡하는 것 외에도 사회의 진실성과 질서를 위협합니다. 만일 위증에 근거하여 죄 없는 사람을 처형할 경우 그 죗값은 온 공동체가 져야 합니다. 성경은 최소한 두 명의 증언이 필요했습니다. 재판 결과 사형이 집행되어야 할 경우에는 증인들이 먼저 돌을 던지는 것도 의무조항이었습니다(신13:10).
열 번째 계명, 탐내지 말라(21). 탐심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의 열망이며 이미 선포된 모든 계명을 위반하는 일의 첫 걸음입니다. 나의 소유권이 존중되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남의 소유권도 인정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계명은 나의 권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필연성을 전제로 합니다. 탐내는 것은 사람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의욕적으로 사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남이 소유한 것에 대해 소유욕에 불타 그 물건에 집착하거나 그 물건을 갖기 위해 행악을 마다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또 탐욕은 언약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죄입니다. 광야의 여정에서 채우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채워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청결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셨습니다(마5:8). 마음에 일어나는 탐심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이 충만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직접 말씀하시고 두 돌판에 써서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율법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주셨고 그 이후에 주어지는 율법은 모세의 중재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여호와께서 십계명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에서 큰 음성으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생명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이처럼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즐거움을 추구하고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이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자세가 너무나 경박하고 버릇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 분이 주신 말씀에 대하여서 너무 경외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은 죄짓기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신앙생활을 잘 감당하게 만듭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건전한 두려움을 갖고 산다면 그 날이 장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속에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들은 율법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즐기라고 준 것이 아니라 율법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삶의 지침이요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둘째로 율법은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선포하는 것은 그들에게 도덕적이고 의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따라 살 때 삶의 풍요와 번성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율법대로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약속의 땅에서 번성하고 오래 사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게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삶이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6장 4,5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지켜야 할 대계명입니다. 예수님도 주의 백성들의 기본적인 의무는 모든 것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골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며 섬겨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경외하고 고백하며 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곧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의지와 느낌까지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열정과 욕망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힘을 다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끼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힘은 종종 재산, 재물을 뜻하는데 곧 재물과 소유물을 다 사용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난 경외와 말씀대로 살려는 열망이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각인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앉으나 서나 말씀 생각만 해야 합니다. 말씀에 취해서 살아야 합니다. 집에 있을 때에든지 나가서든지 사회에 나가서도 말씀 아래에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과 자녀들의 마음에 무엇으로 가득합니까? 온통 스마트 폰과 영상매체 등 세상 것으로 가득 합니다. 온갖 세상적인 것들에 노출되어 있음으로 자연히 그런 것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녀들과 양들을 말씀에 노출시켜야 합니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수시로 줄기차게 생명 걸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본을 보이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풍요롭게 되었을 때 조심해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데 정작 축복을 받고 나면 언제 간구했냐며 그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풍요로움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나태해지고 음란해지기 쉽습니다. 자기 힘과 지혜로 부요하게 된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 의에 빠져서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 복을 주신 분을 잊지 않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예배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오직 그분만 경배하고 순종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한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운 신은 여호와이기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충성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온 세상의 절대적인 권위자로 인정하고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여기서 의로움은 행위로 말미암은 의로움이라기 보다는 언약관계 속에서 언약에 대한 충성을 의미합니다. 창15: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듯이 우리의 의로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지킴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신 유일하신 분이시고, 우리를 계속해서 복 주기 위해서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사랑해야 하며 그 증거로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된 인생을 사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진정한 에덴의 축복을 회복하는 길이요, 하나님 나라, 축복의 세계로 들어가는 비결입니다.
말씀 | 신명기 4:44-6:25
요절 | 신명기 6: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렵고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상적인 목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표현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여자가 결혼을 하기 전에는 집안을 청소하고 음식을 만드는 것이 어렵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해 주고 싶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사랑의 관계성이 깊어지게 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세는 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증언과 규례와 법도를 선포하였습니다. 이곳은 모세의 첫 번째 설교가 이루어진 것과 같은 장소입니다. 요단강 동쪽은 전쟁에서 이겨서 얻은 땅이고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이전에는 바산 왕 옥의 땅인데 이스라엘의 땅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 말하기 전에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언약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 간에 동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규례와 법도를 따르겠다는 동의요 약속입니다. ‘언약’은 ‘매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매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이제 매이고 묶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매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부부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남남이지만 일단 결혼서약을 하게 되면 이제 평생 매인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노예 백성 이스라엘이 감히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도 죄의 노예였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조상들과 세운 언약은 연속성이 있습니다. 지금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모압 땅에 있는 후손들과도 세우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언약은 지금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와도 세우신 것입니다. 롬 4:16절은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울 때에도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언약이 적용되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주신 언약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혈통에서 믿음의 사람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를 믿는 자는 또한 하나님과 언약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해석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언약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호렙산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은 어떠했습니까? 4절을 보면 불 가운데서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대면하심’은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셨음, 친근히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장엄한 모습으로 임재하셨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 모세가 중재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 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자요 존재의 뿌리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는 백성에게 주어지는 십계명은 생명이요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안내자입니다.
첫 번째 계명, 나 외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7). 가나안 땅은 다신교 사회였습니다. 날씨와 번영의 신 바알과 다산과 관능의 신 아스다롯 등이 판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필요에 따라서 신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섬길 유일한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한 창조주이십니다. 또 그들을 바로와 애굽의 우상들로부터 구원해 내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첫 계명에서 이스라엘의 절대적이고 독점적인 충성을 명령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이하는 남편의 자격으로 아내의 일편단심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요구는 긴밀한 애정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기에 결코 무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기대도 큰 법입니다. 첫째 계명은 첫 단추와 같습니다. 여기서 어긋나기 시작하면 다 문제가 됩니다. 그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구하면 그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그를 섬기는 것이 쉽지만 그러한 체험이 없는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들이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야 합니다.
둘째 계명은 우상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을 형상화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8,9).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으로 바꾸게 됩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바뀌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제한시키게 됩니다. 결국 신앙이 왜곡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4:24).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어떤 형상을 만들고자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공장과 같아서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냅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크게 만들어서 그 힘을 과시하고자 합니다. 아름다운 건물로 그 영광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림과 석상들을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서 신의 위대함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들을 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독보적인 존재이십니다. 그 영광을 다른 것에 빼앗기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사야 42:8절은 말씀합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오늘날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는 것으로 알려진 유물들과 상징들도 우리 신앙의 올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십자가를 단순히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기념하는 상징이 아니라, 그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는 생각으로 그 앞에서 특별한 예식을 행한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훗날 히스기야는 모세의 놋뱀을 파괴해 없애버린 일도 이 같은 원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하는 자들은 죄를 삼사 대까지 갚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복을 주기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이 마치 저주가 연좌되는 것을 뜻하는 것처럼 이해하지만 본문의 핵심은 대조에 있습니다. 1000대 3이 상징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잘 받들어 사는 사람들의 집안에 임할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합니다. 반대로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우상을 만들어 그것이 하나님인 양 그 앞에서 절하고 섬기는 사람의 집안에는 그 분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 진노는 잠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것이지 조상의 죄때문이 아닙니다(렘31:29,30). 모세는 나중에 조상의 죄 때문에 후손을 벌하는 것과 자식들의 죄 때문에 부모를 벌하는 일을 율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신24:16). 우리가 헛된 신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지조를 지키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이미지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엄성과 품위를 망가뜨리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구분되시는 분이십니다.
셋째 계명,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11). “너는 네 하나님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의 사사로운 유익을 위해서 도용내지는 오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름은 그의 존재를 나타내는데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찬양하고 섬겨야지, 함부로 이용하거나 농담거리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망령되이 부르는 것은 헛되이, 공허하게, 무의미하게, 기대없이 부르는 것입니다. 주문을 외우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그에게 상 주심을 믿고 기대감을 갖고 불러야 합니다. 이는 듣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우상들과 차별성을 갖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니 그를 인격적으로 믿고 구해야 합니다.
넷째 계명,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12-15).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사역을 이루시고 칠일에 쉬셨습니다. 언약 백성인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안식일에 생업을 잠시 놓고 쉬며 성회로 모이고 언약의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함으로서 새 힘을 덧입어야 합니다.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죄에서 구원하신 구속의 은혜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함께 교제를 나누며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주일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신앙고백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제사의 목적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주님과 연합된 의미를 되새기고 감사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께 예배드림으로 안식을 얻기를 바랍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종은 안식일이 없이 죽도록 일해야 합니다. 종은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종에서 풀려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자유인의 특권은 바로 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좀 마음 놓고 쉬어야 합니다. 안식일에 쉰다는 것은 내가 종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입니다. 안식을 포기하는 것은 다시 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섯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부모를 공경할 때 축복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단순히 효도의 개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세대를 통해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축복의 물줄기를 영접하고 순종하며 또 자손들에게 계승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부모가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잘 시키고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여 순종하고 말씀에 따라 살 때 축복의 역사가 계승됩니다.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골3:20). 자기를 낳으시고 길러주시고 교육시켜 주신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윗사람을 존중하고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할 줄 알게 됩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그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옛적에 우리나라에 고려장이 있었던 것처럼 근동지역에서도 나이가 들어 노동력을 상실해 버린 노인들이 집에서 쫓겨나고 길거리로 내몰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신27:16). 이 법은 이런 상황에 처한 힘없는 노부모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그 근본 취지가 있었습니다. 즉 이 계명은 노동력을 상실하고 ‘안식’을 맞은 노인들을 적절하게 대접하고 섬김으로써 그들이 노년에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라는 것이요, 부모의 노년에 대한 책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만일 늙고 힘없는 부모를 공경하여 어떤 경제적인 손실이 자식에게 임한다면, 선하신 하나님이 그가 부모를 위하여 투자한 액수의 몇 배라도 갚아 주실 것입니다. 또 늙은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보아야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공허함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또한 주의 백성들이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은 그 사회에 신뢰와 존경을 바탕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게 합니다.
여섯 째 계명, 살인하지 말라. 피조물인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임의로 취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부모가 되어 자기가 살기 어렵다고 자녀의 생명을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침범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미움과 복수, 원한 품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격모독도 살인으로 보셨습니다. 이 말씀이 사형제도를 금하는 성경적 근거로 채택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사용된 ‘살인하다’는 동사는 전쟁을 통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정당하게 범죄자를 처형하는 것을 설명하는 데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계명은 정당한 형 집행 테두리 밖에서 살해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계명, 간음하지 말라.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제도입니다. 간음은 사회를 더럽히는 부도덕한 행위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범죄입니다. 간음은 사회질서의 기초가 되는 가족관계를 깨는 일이기 때문에 심각한 형벌을 가하고 있습니다(신22:22). 예수님은 마음의 음욕도 금하셨습니다. 음란 동영상이나 누드 사진을 보는 것, 동성애, 수간 등도 다 죄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제도이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그리고 최초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서약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덟째 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이웃의 소유물을 존중하고 사회적 약자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각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기 전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일정한 양의 물질을 공동체에 기부하여 모든 지체들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과 존엄성을 유지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것을 도둑질 하는 것은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나 가족들의 자존감이나 존엄성을 빼앗는 행위이기에 금하고 있습니다.
아홉째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20). 이웃은 모든 권리를 지닌 공동체의 멤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법정에서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위증은 진실을 왜곡하는 것 외에도 사회의 진실성과 질서를 위협합니다. 만일 위증에 근거하여 죄 없는 사람을 처형할 경우 그 죗값은 온 공동체가 져야 합니다. 성경은 최소한 두 명의 증언이 필요했습니다. 재판 결과 사형이 집행되어야 할 경우에는 증인들이 먼저 돌을 던지는 것도 의무조항이었습니다(신13:10).
열 번째 계명, 탐내지 말라(21). 탐심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의 열망이며 이미 선포된 모든 계명을 위반하는 일의 첫 걸음입니다. 나의 소유권이 존중되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남의 소유권도 인정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계명은 나의 권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필연성을 전제로 합니다. 탐내는 것은 사람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의욕적으로 사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남이 소유한 것에 대해 소유욕에 불타 그 물건에 집착하거나 그 물건을 갖기 위해 행악을 마다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또 탐욕은 언약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죄입니다. 광야의 여정에서 채우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채워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청결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셨습니다(마5:8). 마음에 일어나는 탐심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이 충만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직접 말씀하시고 두 돌판에 써서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율법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주셨고 그 이후에 주어지는 율법은 모세의 중재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여호와께서 십계명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에서 큰 음성으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생명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이처럼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즐거움을 추구하고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이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자세가 너무나 경박하고 버릇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 분이 주신 말씀에 대하여서 너무 경외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은 죄짓기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신앙생활을 잘 감당하게 만듭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건전한 두려움을 갖고 산다면 그 날이 장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속에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들은 율법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즐기라고 준 것이 아니라 율법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삶의 지침이요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둘째로 율법은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선포하는 것은 그들에게 도덕적이고 의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따라 살 때 삶의 풍요와 번성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율법대로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약속의 땅에서 번성하고 오래 사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게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삶이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6장 4,5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지켜야 할 대계명입니다. 예수님도 주의 백성들의 기본적인 의무는 모든 것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골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며 섬겨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경외하고 고백하며 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곧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의지와 느낌까지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열정과 욕망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힘을 다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끼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힘은 종종 재산, 재물을 뜻하는데 곧 재물과 소유물을 다 사용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난 경외와 말씀대로 살려는 열망이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각인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앉으나 서나 말씀 생각만 해야 합니다. 말씀에 취해서 살아야 합니다. 집에 있을 때에든지 나가서든지 사회에 나가서도 말씀 아래에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과 자녀들의 마음에 무엇으로 가득합니까? 온통 스마트 폰과 영상매체 등 세상 것으로 가득 합니다. 온갖 세상적인 것들에 노출되어 있음으로 자연히 그런 것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녀들과 양들을 말씀에 노출시켜야 합니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수시로 줄기차게 생명 걸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본을 보이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풍요롭게 되었을 때 조심해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데 정작 축복을 받고 나면 언제 간구했냐며 그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풍요로움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나태해지고 음란해지기 쉽습니다. 자기 힘과 지혜로 부요하게 된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 의에 빠져서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 복을 주신 분을 잊지 않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예배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오직 그분만 경배하고 순종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한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운 신은 여호와이기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충성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온 세상의 절대적인 권위자로 인정하고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여기서 의로움은 행위로 말미암은 의로움이라기 보다는 언약관계 속에서 언약에 대한 충성을 의미합니다. 창15: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듯이 우리의 의로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지킴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신 유일하신 분이시고, 우리를 계속해서 복 주기 위해서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사랑해야 하며 그 증거로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된 인생을 사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진정한 에덴의 축복을 회복하는 길이요, 하나님 나라, 축복의 세계로 들어가는 비결입니다.
첨부파일
-
14Deu3.hwp (31.5K)
0회 다운로드 | DATE : 2015-02-01 13:50:3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