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슥6강(11,12장)/내가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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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스가랴 제 6 강 177
말씀 / 스가랴 11:1-12:14
요절 / 스가랴 12:10
내가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두 목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즉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동시에 우리도 예수님을 배워서 선한 목자들로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선한 목자입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우리가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체험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두 목자(11:1-17)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지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도다.” 이 말씀은 레바논과 바산에 산불이 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백향목은 나무의 왕이라고 합니다. 반듯하게 쭉쭉 뻗은 이 나무는 질도 매우 단단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건축 자재로서 매우 좋은 나무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레바논에서 값비싼 백향목을 얻어다가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백향목은 힘과 영광과 호화로움을 상징합니다(겔31:2). 잣나무는 그보다 못하나 크고 장대한 나무요 바산의 상수리나무도 그 크고 강한 힘으로 유명합니다. 백향목과 잣나무, 상수리 나무가 불에 탄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지도층, 견고한 왕권, 종교 제도 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영화로운 것이 훼멸됨을 인해서 목자가 곡을 합니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였음이로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목자였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심판을 당하게 됩니까? 우리는 이런 가운데 선한 목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선한 목자는 양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 떼를 먹이라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잡힐 양떼란 도살될 양을 말합니다. 조류 독감에 걸린 닭, 광우병에 걸린 소들을 살처분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처분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메시야 예수님께 너는 잡힐 양 떼를 먹이라고 하십니다. 병들어 도살하게될 양은 얼마나 가련합니까? 잠시 후에 죽어야 하는 양을 쳐야 하는 목자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우리는 가끔 위암, 폐암 등에 걸려서 죽어가는 가족을 돌보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사형수를 돌보는 어느 간수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멸망해 마땅한 인생들을 위해서 선한 목자를 보내신 하나님은 참으로 그 택한 자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요, 소망의 하나님이시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왜 도살될 양떼를 먹이라고 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벌에 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이 당장 내일 죽음에 이르게 될지라도 우리는 복음을 전해서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이 많습니다. 선한 목자는 도살될 양떼들의 상처난 마음,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둘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꼴로 먹입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 목자는 부지런히 양들을 꼴로 먹입니다. 진리의 꼴, 풍성한 말씀의 꼴로 먹입니다. 일대일로, 특강으로, 메시지로, 때마다 앉으나 서나 말씀의 꼴을 먹입니다. 잘 먹어야 건강해지고 은혜의 살이 오르게 됩니다. 병든 양을 치료하는 길은 기본적으로 잘 먹여야 됩니다. 체하면 죽을 쑤어주고, 허약해지면 보양식을 해주고, 편식을 하지 않도록 구약, 신약에서 두루 두루 먹여야 합니다. 입맛을 잃어버리면 특식을 해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건강한 양으로 자라게 하려면 규칙적으로 먹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반면에 그들이 선한 목자를 배척하게 되면 악한 목자가 그들을 먹이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선한 목자를 싫어하면 악한 목자가 그들을 맡게 됩니다. 악한 목자는 양들을 어떻게 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하고” 악한 목자는 먹이지 않고 방치해 둔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너무 바빠서, 세상 욕심에 끌려서 방황할 때에도 악한 목자는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부지런히 생명의 꼴로 먹입니다.
셋째, 선한 목자는 서로 연결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잡힐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선한 목자는 두개의 막대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은총”이라는 막대기이고, 다른 하나는 “연락”이라는 막대기입니다. “연락”이란 ‘연결한다’, ‘연합한다’는 의미입니다. 선한 목자는 먼저 사람으로 은혜를 받게 한 다음, 은혜 받은 개인개인이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이미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만든 다음에 그 은혜 받은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켜서 그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세우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 형편에서는 분열 되어 있던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을 연합되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선한 목자 그리스도는 분열되었던 자들이 다시 연합되게 해 주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과 불화관계에 있던 자들이 하나님과 연합하게 해 주시고 원수가 되어 싸우던 형제들이 사랑으로 연합되게 해 주십니다. 남남이던 자들을 영적 가족으로 연합되게 해 주고,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이 연합하고,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연합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모두를 한 형제자매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분쟁과 분열이 없고 화평과 사랑만이 있게 됩니다.
반대로 악한 목자는 어떻게 합니까? 선한 목자가 서로를 연결시킨다면 악한 목자는 분열을 시키는 것입니다. 악한 목자는 자꾸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여 흩어 놓습니다. 이런 악한 지도자의 두목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이간질시키는 자, 참소자의 뜻이 있습니다. 마귀는 자꾸 참소해서 인간 관계를 파괴시키고 단절시키고 흩어 놓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자가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사람을 연합시켜 주는 사람, 세워주는 사람, 은혜를 끼치고 공동체에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여 견고하게 만드는 사람이 선한 목자입니다.
넷째, 선한 목자는 흥하게 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악한 목자는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합니다. 양들이 흩어져도 찾지 아니하고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합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강건한 자라도 열심히 먹여야 합니다. 그러나 게으름과 부주의로 인해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그 굽을 찢습니다. 양 떼를 버린 악한 목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반대로 선한 목자는 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흥하게 하는 자, 강건하게 하는 자, 살찌게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을 한꺼번에 완성할 분이십니다. 그는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리고 선지자로서 말씀을 가르치거나 예언을 하고,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시켜 주기 위해서 죄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공평과 정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는 영생에 이르도록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났습니다. 그는 죄문제로 고통하는 인생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야이셨습니다. 우리에게 선한 목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과 평화와 공의로 다스려 주시는 그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520년 전에 예언을 했는데 너무나 정확하였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그 백성들에게 오셨지만 그들의 마음에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배척하는 자들을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십니다(9). 그리고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라 버리십니다(10). 그리고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여 버리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에서 끊어지게 되면 죄인들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지면 율법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조금도 봐주는 것이 없이 법대로 처분합니다. 대책이 없는 사람들이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은혜가 없는 삶은 죽을 맛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울해지고 병들고 생명이 끊어지고 험악해 집니다. 빼빼 말라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연합할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지게 되면 마귀의 다스림을 받고 더욱 미움과 완고함과 죄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웃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거절하고 팔아먹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고가’는 ‘품삯’을 말하는데 선한 목자는 그 백성들에게 자신의 수고에 대해서 품삯을 달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를 위해서 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섬김에 대한 품삯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고가를 달라고 한 것은 선한 목자의 섬김에 대해서 양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것입니다. 즉 그 그리스도의 섬김을 좋게 여기고 그들의 선한 목자로 인정하는가, 그 선한 목자를 보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불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은 삼십을 달아 주었습니다. 은 삼십은 노예의 몸값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이 말씀이 누구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까? 가룟 유다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가룟 유다가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용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은 삼십에 팔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다는 것은 매우 모욕적인 말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선한 목자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너무 낮은 것을 보고 그것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평가가 잘못된 것으로서 메시야를 너무나 업신여겼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을 때 그들은 로마의 침입을 받아 A.D. 70년에 멸망하고 2000년간 전 세계에 흩어져 유리 방황하며 수치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는 개개인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목자를 여전히 예비하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닮아 우리도 작은 목자로 하나님이 쓰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팔리게 된 양들을 먹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러나 작은 목자의 삶은 쉬운 과정이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겪으셔야 했던 거절과 핍박과 십자가의 고난을 감내해야 합니다. 목자로 살아가고자 할 때 지불해야 할 대가, 희생이 있습니다. 사서 해야 할 고생이 있습니다. 양을 얻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매주 꾸준히 기초공부를 준비해서 섬겨야 합니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양을 기다리는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양육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을 감내해야 합니다. 양의 변화되지 않는 내면으로 인해서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목자의 수고를 업신여기고 떠나가는 양에게 배반을 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자신이 거절될 것을 아시고도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에게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마침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 수 있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수고를 통해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거절과 핍박의 십자가를 감당해야겠습니다.
II.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자(12장)
12장은 예루살렘의 승리 즉 교회의 승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하십니다. 적들이 예루살렘을 먹어 버렸는데 삼키고 보니까 자기들이 취해서 비틀거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공격하고 손해보았다는 뜻입니다. 또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하십니다. 당시에 장정들은 힘을 자랑하기 위해서 무거운 돌을 번쩍 들어올리는 게임을 즐겼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은 무거운 돌을 그만 떨어뜨려 자기 발등을 찍기도 하고 허리가 상하기도 하고 눌려버리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모습을 3절이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적군들은 오히려 자기 발등만 찍혀서 상처를 입고 물러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날에 예루살렘을 혼취케 하는 잔과 무거운 돌과 같이 삼으셔서 공격하는 사람이 오히려 그것 때문에 파멸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두목들은 심중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5). 또한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할 것입니다. 즉 불같은 기세로 적들을 파멸시키고 승리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무장시키심으로 적들은 파멸되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날입니다. 초림으로 승리가 시작되어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복음 전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교회가 모든 불신앙과 죄악과 마귀의 권세들을 이기고 왕성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영적인 전쟁을 하지만 이미 이긴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이기고 자기 자랑을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유다 장막에 거하는 사람을 다윗의 집, 예루살렘 거민보다 먼저 구원하십니다.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는 승리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는 약한 자들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힘입어 다윗 같겠고 하나님의 사자같이 될 것입니다. 이런 승리가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심령”이란 단어는 ‘성령’이란 말입니다. 달리 말해서 은총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되 특별히 성령님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또 우리를 얼마나 구원하기를 원하시는지, 우리를 얼마나 축복하기를 원하시는지 등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간구케 하는 영이십니다. 은혜를 주신 성령께서는 이제 무언가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담의 교만의 죄를 타고난 인간은 자기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지 않습니다. 죄사함의 은총도 구하지 않고, 자녀양육이나 직장을 얻는 일이나, 제자 양성하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잘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 은총과 간구하는 영을 주십니다. 여기서 간구는 문맥상 그냥 간구가 아니라 ‘회개’의 간구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그 다음에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해야 은혜를 받지만, 은혜를 받아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회개가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이번 학생 연합 수련회에서도 말씀의 은혜를 받자 저절로 깊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개는 우리의 내면을 깨끗하게 만들어줍니다. 간구하는 영은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하며 땅바닥을 뒹굴며 간청하고,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간절히 구하는 영입니다.
성령께서 은혜와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실 때 우리는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게 하며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게 하십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죄에 대해서 깊은 통찰력을 갖게 되고 죄에 대해서 애통하게 됩니다. 자기의 죄를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한다는 말은 진정한 슬픔, 깊은 슬픔을 의미합니다. 내 죄가 죄없는 예수님을 죽인 일에 대하여 진정한 슬픔을 가질 때 진정한 영적 희열을 체험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경험할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경험할 때 영적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경험할 때 죄의 결박에서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여기에 “따로”라는 말이 열한 번 나옵니다. 회개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공동체의 회개가 있지만 그것도 따로 따로 이루어집니다. 누가 내 대신 회개해 줄 수 없습니다. 진정한 공동체의 회개라도 개인적으로 책임을 자각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내가 잘못했다. 바로 내 책임이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눈물은 우리의 눈을 맑게 합니다. 자기 죄로 인해서 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요 진정으로 웃는 자가 될 것입니다. 눈물은 내 영혼의 창을 닦는 세척제입니다. 내 더러움, 내 마음과 내 삶의 오염과 찌꺼기를 씻어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애통한 것이 언제였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와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주님은 선한 목자로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풍성한 꼴을 먹이십니다. 또한 우리를 연합하게 하시며 흥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회개하고 간구하는 영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승리하는 하루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스가랴 11:1-12:14
요절 / 스가랴 12:10
내가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두 목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즉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동시에 우리도 예수님을 배워서 선한 목자들로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선한 목자입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우리가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체험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두 목자(11:1-17)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지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도다.” 이 말씀은 레바논과 바산에 산불이 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백향목은 나무의 왕이라고 합니다. 반듯하게 쭉쭉 뻗은 이 나무는 질도 매우 단단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건축 자재로서 매우 좋은 나무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레바논에서 값비싼 백향목을 얻어다가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백향목은 힘과 영광과 호화로움을 상징합니다(겔31:2). 잣나무는 그보다 못하나 크고 장대한 나무요 바산의 상수리나무도 그 크고 강한 힘으로 유명합니다. 백향목과 잣나무, 상수리 나무가 불에 탄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지도층, 견고한 왕권, 종교 제도 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영화로운 것이 훼멸됨을 인해서 목자가 곡을 합니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였음이로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목자였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심판을 당하게 됩니까? 우리는 이런 가운데 선한 목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선한 목자는 양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 떼를 먹이라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잡힐 양떼란 도살될 양을 말합니다. 조류 독감에 걸린 닭, 광우병에 걸린 소들을 살처분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처분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메시야 예수님께 너는 잡힐 양 떼를 먹이라고 하십니다. 병들어 도살하게될 양은 얼마나 가련합니까? 잠시 후에 죽어야 하는 양을 쳐야 하는 목자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우리는 가끔 위암, 폐암 등에 걸려서 죽어가는 가족을 돌보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사형수를 돌보는 어느 간수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멸망해 마땅한 인생들을 위해서 선한 목자를 보내신 하나님은 참으로 그 택한 자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요, 소망의 하나님이시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왜 도살될 양떼를 먹이라고 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벌에 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이 당장 내일 죽음에 이르게 될지라도 우리는 복음을 전해서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이 많습니다. 선한 목자는 도살될 양떼들의 상처난 마음,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둘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꼴로 먹입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 목자는 부지런히 양들을 꼴로 먹입니다. 진리의 꼴, 풍성한 말씀의 꼴로 먹입니다. 일대일로, 특강으로, 메시지로, 때마다 앉으나 서나 말씀의 꼴을 먹입니다. 잘 먹어야 건강해지고 은혜의 살이 오르게 됩니다. 병든 양을 치료하는 길은 기본적으로 잘 먹여야 됩니다. 체하면 죽을 쑤어주고, 허약해지면 보양식을 해주고, 편식을 하지 않도록 구약, 신약에서 두루 두루 먹여야 합니다. 입맛을 잃어버리면 특식을 해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건강한 양으로 자라게 하려면 규칙적으로 먹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반면에 그들이 선한 목자를 배척하게 되면 악한 목자가 그들을 먹이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선한 목자를 싫어하면 악한 목자가 그들을 맡게 됩니다. 악한 목자는 양들을 어떻게 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하고” 악한 목자는 먹이지 않고 방치해 둔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너무 바빠서, 세상 욕심에 끌려서 방황할 때에도 악한 목자는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부지런히 생명의 꼴로 먹입니다.
셋째, 선한 목자는 서로 연결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잡힐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선한 목자는 두개의 막대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은총”이라는 막대기이고, 다른 하나는 “연락”이라는 막대기입니다. “연락”이란 ‘연결한다’, ‘연합한다’는 의미입니다. 선한 목자는 먼저 사람으로 은혜를 받게 한 다음, 은혜 받은 개인개인이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이미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만든 다음에 그 은혜 받은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켜서 그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세우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 형편에서는 분열 되어 있던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을 연합되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선한 목자 그리스도는 분열되었던 자들이 다시 연합되게 해 주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과 불화관계에 있던 자들이 하나님과 연합하게 해 주시고 원수가 되어 싸우던 형제들이 사랑으로 연합되게 해 주십니다. 남남이던 자들을 영적 가족으로 연합되게 해 주고,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이 연합하고,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연합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모두를 한 형제자매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분쟁과 분열이 없고 화평과 사랑만이 있게 됩니다.
반대로 악한 목자는 어떻게 합니까? 선한 목자가 서로를 연결시킨다면 악한 목자는 분열을 시키는 것입니다. 악한 목자는 자꾸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여 흩어 놓습니다. 이런 악한 지도자의 두목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이간질시키는 자, 참소자의 뜻이 있습니다. 마귀는 자꾸 참소해서 인간 관계를 파괴시키고 단절시키고 흩어 놓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자가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사람을 연합시켜 주는 사람, 세워주는 사람, 은혜를 끼치고 공동체에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여 견고하게 만드는 사람이 선한 목자입니다.
넷째, 선한 목자는 흥하게 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악한 목자는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합니다. 양들이 흩어져도 찾지 아니하고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합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강건한 자라도 열심히 먹여야 합니다. 그러나 게으름과 부주의로 인해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그 굽을 찢습니다. 양 떼를 버린 악한 목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반대로 선한 목자는 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흥하게 하는 자, 강건하게 하는 자, 살찌게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을 한꺼번에 완성할 분이십니다. 그는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리고 선지자로서 말씀을 가르치거나 예언을 하고,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시켜 주기 위해서 죄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공평과 정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는 영생에 이르도록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났습니다. 그는 죄문제로 고통하는 인생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야이셨습니다. 우리에게 선한 목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과 평화와 공의로 다스려 주시는 그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520년 전에 예언을 했는데 너무나 정확하였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그 백성들에게 오셨지만 그들의 마음에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배척하는 자들을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십니다(9). 그리고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라 버리십니다(10). 그리고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여 버리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에서 끊어지게 되면 죄인들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지면 율법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조금도 봐주는 것이 없이 법대로 처분합니다. 대책이 없는 사람들이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은혜가 없는 삶은 죽을 맛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울해지고 병들고 생명이 끊어지고 험악해 집니다. 빼빼 말라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연합할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지게 되면 마귀의 다스림을 받고 더욱 미움과 완고함과 죄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웃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거절하고 팔아먹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고가’는 ‘품삯’을 말하는데 선한 목자는 그 백성들에게 자신의 수고에 대해서 품삯을 달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를 위해서 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섬김에 대한 품삯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고가를 달라고 한 것은 선한 목자의 섬김에 대해서 양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것입니다. 즉 그 그리스도의 섬김을 좋게 여기고 그들의 선한 목자로 인정하는가, 그 선한 목자를 보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불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은 삼십을 달아 주었습니다. 은 삼십은 노예의 몸값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이 말씀이 누구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까? 가룟 유다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가룟 유다가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용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은 삼십에 팔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다는 것은 매우 모욕적인 말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선한 목자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너무 낮은 것을 보고 그것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평가가 잘못된 것으로서 메시야를 너무나 업신여겼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을 때 그들은 로마의 침입을 받아 A.D. 70년에 멸망하고 2000년간 전 세계에 흩어져 유리 방황하며 수치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는 개개인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목자를 여전히 예비하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닮아 우리도 작은 목자로 하나님이 쓰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팔리게 된 양들을 먹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러나 작은 목자의 삶은 쉬운 과정이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겪으셔야 했던 거절과 핍박과 십자가의 고난을 감내해야 합니다. 목자로 살아가고자 할 때 지불해야 할 대가, 희생이 있습니다. 사서 해야 할 고생이 있습니다. 양을 얻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매주 꾸준히 기초공부를 준비해서 섬겨야 합니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양을 기다리는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양육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을 감내해야 합니다. 양의 변화되지 않는 내면으로 인해서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목자의 수고를 업신여기고 떠나가는 양에게 배반을 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자신이 거절될 것을 아시고도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에게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마침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 수 있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수고를 통해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거절과 핍박의 십자가를 감당해야겠습니다.
II.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자(12장)
12장은 예루살렘의 승리 즉 교회의 승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하십니다. 적들이 예루살렘을 먹어 버렸는데 삼키고 보니까 자기들이 취해서 비틀거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공격하고 손해보았다는 뜻입니다. 또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하십니다. 당시에 장정들은 힘을 자랑하기 위해서 무거운 돌을 번쩍 들어올리는 게임을 즐겼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은 무거운 돌을 그만 떨어뜨려 자기 발등을 찍기도 하고 허리가 상하기도 하고 눌려버리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모습을 3절이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적군들은 오히려 자기 발등만 찍혀서 상처를 입고 물러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날에 예루살렘을 혼취케 하는 잔과 무거운 돌과 같이 삼으셔서 공격하는 사람이 오히려 그것 때문에 파멸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두목들은 심중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5). 또한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할 것입니다. 즉 불같은 기세로 적들을 파멸시키고 승리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무장시키심으로 적들은 파멸되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날입니다. 초림으로 승리가 시작되어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복음 전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교회가 모든 불신앙과 죄악과 마귀의 권세들을 이기고 왕성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영적인 전쟁을 하지만 이미 이긴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이기고 자기 자랑을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유다 장막에 거하는 사람을 다윗의 집, 예루살렘 거민보다 먼저 구원하십니다.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는 승리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는 약한 자들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힘입어 다윗 같겠고 하나님의 사자같이 될 것입니다. 이런 승리가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심령”이란 단어는 ‘성령’이란 말입니다. 달리 말해서 은총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되 특별히 성령님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또 우리를 얼마나 구원하기를 원하시는지, 우리를 얼마나 축복하기를 원하시는지 등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간구케 하는 영이십니다. 은혜를 주신 성령께서는 이제 무언가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담의 교만의 죄를 타고난 인간은 자기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지 않습니다. 죄사함의 은총도 구하지 않고, 자녀양육이나 직장을 얻는 일이나, 제자 양성하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잘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 은총과 간구하는 영을 주십니다. 여기서 간구는 문맥상 그냥 간구가 아니라 ‘회개’의 간구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그 다음에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해야 은혜를 받지만, 은혜를 받아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회개가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이번 학생 연합 수련회에서도 말씀의 은혜를 받자 저절로 깊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개는 우리의 내면을 깨끗하게 만들어줍니다. 간구하는 영은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하며 땅바닥을 뒹굴며 간청하고,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간절히 구하는 영입니다.
성령께서 은혜와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실 때 우리는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게 하며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게 하십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죄에 대해서 깊은 통찰력을 갖게 되고 죄에 대해서 애통하게 됩니다. 자기의 죄를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한다는 말은 진정한 슬픔, 깊은 슬픔을 의미합니다. 내 죄가 죄없는 예수님을 죽인 일에 대하여 진정한 슬픔을 가질 때 진정한 영적 희열을 체험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경험할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경험할 때 영적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경험할 때 죄의 결박에서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여기에 “따로”라는 말이 열한 번 나옵니다. 회개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공동체의 회개가 있지만 그것도 따로 따로 이루어집니다. 누가 내 대신 회개해 줄 수 없습니다. 진정한 공동체의 회개라도 개인적으로 책임을 자각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내가 잘못했다. 바로 내 책임이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눈물은 우리의 눈을 맑게 합니다. 자기 죄로 인해서 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요 진정으로 웃는 자가 될 것입니다. 눈물은 내 영혼의 창을 닦는 세척제입니다. 내 더러움, 내 마음과 내 삶의 오염과 찌꺼기를 씻어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애통한 것이 언제였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와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주님은 선한 목자로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풍성한 꼴을 먹이십니다. 또한 우리를 연합하게 하시며 흥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회개하고 간구하는 영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승리하는 하루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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