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스가랴2강(3,4장)/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페이지 정보

본문
2003년 스가랴서 공부 제 2 강
말씀 / 스가랴 3:1-4:14
요절 / 스가랴 4:6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우리는 지난 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듣고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돌아와 모든 것을 회복시키신다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기 원하시며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통해 세계 만민을 구원하고 복주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성전 재건이 지연됨으로 지쳐있는 두 지도자를 격려하시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격려를 받으며 성전 재건을 이루는데 귀히 쓰임 받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I. 여호수아를 세우시는 하나님(3장)
스가랴 선지자는 네 번째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단은 리더십 킬러로서 하나님의 종, 지도자들을 공격합니다. 사단은 검사와 같이 여호수아의 개인적인 허물과 죄에 대해서 조목조목 지적했을 것입니다. 욥1:9-12을 보면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라면서 욥을 고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축복된 날에는 복된 날대로 사단의 공격은 끊임없이 밤낮 지속되었습니다. 계12:10절은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검사라면 예수님은 변호사이십니다. 하나님의 사자이신 예수님은 여호수아를 변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여호수아는 우리 모든 신자의 대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부르시고, 우리도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모든 신자는 제사장입니다. 만민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단의 그 고소에 대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두 번씩이나 책망하셨습니다.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사단의 고소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아무도 송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하나님께서 쓰고자 부르신 것입니다.
사실 여호수아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았습니다. 그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64:6절을 보면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선함도 사실은 근원적인 악을 숨기고 있는 기만인지도 모릅니다. 요한 웨슬레는 자신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6세 때 교회 목사관에서 잠을 자다가 화재가 났는데 이웃집에 살던 사람이 뛰어들어 극적으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는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모양도 시꺼멓습니다. 완전히 타 버리면 숯으로 쓸 수 있는데 그슬린 나무는 쓸 수가 없습니다. 불에 타다 꺼낸 부지깽이는 정말로 볼품이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우리 모두를 대표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우리의 모습이 불구덩이에서 꺼낸 나무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정죄하지 아니하십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보배피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입고 있던 더러운 옷을 벗기고 그 죄과를 제하여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십니다. 깨끗한 옷, 의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하얗게 빛나는 세마포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셨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배피로 깨끗하게 씻어주시며 의롭다고 하십니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정한 관을 썼다는 것은 제사장으로 취임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종도 사람입니다. 허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여 쓰십니다. 이스라엘이 노예백성이었지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벧전2:9). 우리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 쓰임 받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같이 부족한 자들을 택하여 쓰심으로 그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며 감사하게 하고자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수아를 택하여 세우고 나서 그에게 격려사를 주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제사장에게 구할 것은 그 입술에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자신이 먼저 그 말씀대로 행하고 가르칠 때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며 성전 뜰을 지킬 것이며 또 하나님과 거룩한 무리와 함께 교제하게 하십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거룩한 무리와 영적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다윗은 시 84:10절에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과 같은 왕이 이런 고백을 한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집 뜰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그 동료들을 예표의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8). 그들은 메시야와 그 시대를 상징합니다.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8b,9)” 순은 메시야를 상징합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매우 부드럽고 깨끗하고 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슬린 나무에서 순이 나오게 하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순에는 성장점이 모여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작고 연약하지만 자라면 강하고 크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의 역사입니다. 우리 가운데 마태 팀이나 JBF가 바로 순의 역사입니다.
또한 그는 강하고 견고한 돌의 이미지를 갖고 계십니다. 메시야는 돌처럼 강하고 견고할 것입니다. 그는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되어 교회의 기초가 되는 머릿돌이 되십니다. 더 나아가 메시야는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실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속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할 것입니다(10).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가져오게 될 평화로운 삶, 풍성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II. 스룹바벨에게 주시는 환상(4장)
스가랴가 본 다섯 번째 환상은 ‘순금 등대’에 관한 것입니다. 4장 2,3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여기서 순금 등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일곱 촛대는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빛을 비추는 등대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래 빛은 예수님이십니다(요8:12). 신자는 그리스도에 연합된 사람, 그리스도에게 붙은 사람, 그리스도께 소속된 사람으로서 빛이신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었습니다. 감람나무는 기름을 냅니다. 감람나무는 등대가 지속적으로 빛을 발하도록 기름을 공급하는 무한한 공급의 원천을 상징합니다. 여기에 나타난 두 감람나무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왕과 제사장으로서 장차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스룹바벨은 BC537년에 1차 바벨론 포로 귀환 시에 돌아왔습니다.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으로서 영적인 지도자라면 스룹바벨은 총독으로서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 재건을 하고자 했지만 반대에 부딪쳤습니다(스4:1, 스4:4). 대적들이 일어나서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고 그 건축을 방해 했습니다. 대적들은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모반을 한다는 거짓 고소를 했는데 그로 인해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습니다(스4:21). 성전 재건이 흐지부지되자 16년 동안 백성들의 마음은 세속적인 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스룹바벨도 한 풀 꺾였습니다. 그는 성전 재건이 자기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은 자기 일에 힘을 쏟고 있었고 재건되던 성전은 흉물스럽게 방치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여기서 “힘”은 이 세상에 속한 각양 세력 즉 금력, 병력, 인력 등이고, “능”이라는 것은 스룹바벨 개인의 능력, 추진력, 조직력, 지혜, 담력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스룹바벨은 성전 재건이 되지 않는 것이 자기가 정치 권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에게도 복음 역사가 안 되는 이유가 많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시대 상황이 어렵기 때문이고 내적으로는 개인의 영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시대 문화를 이해하고 시각적인 자료들을 활용하고 그들을 이끌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더라도 여호와의 신이 없으면 괜히 부산만 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역사도 여호와의 신으로 된다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신은 자기를 비우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여호와의 신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영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롬8:26)”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고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고 우울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보실 때 성령께서 동정하시고 그의 속사람을 자신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조용하게, 보이지 않게, 그러면서도 넘치는 동정심으로 우리를 효력있게 도우십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성령의 도우심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이런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20).” 성령은 열매 맺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령은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풍성케 하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각양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안에 거할 때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주의 성령께서 날마다 저를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날마다 성령을 의지할 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강력한 능력을 덧입고 복음을 전하며 양육하고 훈련하여 성서 한국과 세계선교 사명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때가 되자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격려하시고 다시 일하게 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의 마음을 담대하게 하십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큰 산은 장애물입니다.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반대와 같은 정치적인 장애물, 돈이 부족한 경제적인 장애물, 주변국들의 방해와 같은 환경적인 장애물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의 장애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쾌락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쾌락의 물이 불을 꺼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장애물들이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자기 이름을 넣고 믿음으로 외쳐봅시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엘리야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에게 능력을 주시고 격려하사 능히 성전 재건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담대하게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큰 산이라도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2-24).”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연구하기보다 주의 영을 연구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을 덧입고 도전하는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 모양의 장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성전이 재건될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은총으로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산을 평지같이 만드시며 모든 역사를 이루게 하실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캠퍼스에서 일대일 성경 공부를 통해서 제자 양성을 하고 한국과 세계를 감당할 영적 리더들을 키우고자 합니다. 이 일을 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장래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안일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처한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능히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기 위해서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담대하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학생 목자들을 세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우리가 먼저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로 자라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것을 믿고 말씀에 순종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번 주에 바이블 아카데미를 갖는 가운데 새 양들을 얻고 이들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이 시작한 성전 건축이 완성될 것을 어떻게 확신시켜 주셨습니까? 8-1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스룹바벨이 성전을 짓기 위한 기초를 놓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마치게 하실 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스룹바벨이 성전 건축을 시작할 때는 모든 것이 너무 미미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스3:12)”였습니다. 하지만 작은 일을 보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고 전능하신 눈이 보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이 재개된 지 4년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주전 536년에 처음 시작하였는데 주전520년에 다시 시작하여 주전516년에 마쳤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전 재건이 곧바로 이루어지도록 하지 않으셨을까요? 무엇보다 그들이 성전 재건을 이루고 나서 내 능력과 내 손으로 이것을 이루었다고 교만을 떨까봐 원수들의 방해를 허용하셨습니다(신8:14).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할 만한 영적인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그들이 더 순수해져야하고 더 담대해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영적인 준비를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원수들의 방해 공작으로 그들을 연단하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영광을 볼 때 지금의 우리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기 쉽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는 일들이 미천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통해서 이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성전 재건이 완수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곱은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기뻐하리라(10)” 이는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공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성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임이 몇 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두고 계십니다. 우리가 담대한 마음을 갖고 포기치 말고 복음 전도와 제자 양성 역사를 섬겨야 합니다. 내가 포기치 않는 한 이 모임은 소망이 있습니다.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었는데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입니다. 그들은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입니다. 이들은 제사장과 왕입니다.(레21:10; 삼상10:1). 이들이 “주 앞에 모셔 섰다”함은,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에 즉각 순종하려고 대비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킵니다. 이 둘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성령의 은혜를 풍성히 받아 하나님의 교회에 공급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전 재건은 두 사람의 연합된 힘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발과 등잔을 연결하는 금관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기도하면 성령 충만으로 기름 부어지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름이 공급되면 금촛대가 환한 빛을 발합니다. 기름의 역할은 다양합니다. 따뜻하게 하고 사람을 치유하고 부드럽게 하고 맛을 냅니다. 기름의 역할은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게서는 아름다운 빛이 나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하고, 사람들을 부드럽게 하고,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쓰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사람을 쓰십니다. 성령 충만 다음에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도자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합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이끌어 갈 때 그 공동체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지도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도력이 성장할 때 우리가 돕는 양들이 성장합니다. 우리가 성령이 충만한 종들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고, 우리 편에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장애물을 극복하고, 맡은 바 사명을 완수하며 열매맺는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스가랴 3:1-4:14
요절 / 스가랴 4:6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우리는 지난 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듣고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돌아와 모든 것을 회복시키신다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기 원하시며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을 통해 세계 만민을 구원하고 복주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성전 재건이 지연됨으로 지쳐있는 두 지도자를 격려하시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격려를 받으며 성전 재건을 이루는데 귀히 쓰임 받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I. 여호수아를 세우시는 하나님(3장)
스가랴 선지자는 네 번째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단은 리더십 킬러로서 하나님의 종, 지도자들을 공격합니다. 사단은 검사와 같이 여호수아의 개인적인 허물과 죄에 대해서 조목조목 지적했을 것입니다. 욥1:9-12을 보면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라면서 욥을 고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축복된 날에는 복된 날대로 사단의 공격은 끊임없이 밤낮 지속되었습니다. 계12:10절은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검사라면 예수님은 변호사이십니다. 하나님의 사자이신 예수님은 여호수아를 변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여호수아는 우리 모든 신자의 대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부르시고, 우리도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모든 신자는 제사장입니다. 만민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단의 그 고소에 대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두 번씩이나 책망하셨습니다.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사단의 고소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아무도 송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하나님께서 쓰고자 부르신 것입니다.
사실 여호수아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았습니다. 그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64:6절을 보면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선함도 사실은 근원적인 악을 숨기고 있는 기만인지도 모릅니다. 요한 웨슬레는 자신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6세 때 교회 목사관에서 잠을 자다가 화재가 났는데 이웃집에 살던 사람이 뛰어들어 극적으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는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모양도 시꺼멓습니다. 완전히 타 버리면 숯으로 쓸 수 있는데 그슬린 나무는 쓸 수가 없습니다. 불에 타다 꺼낸 부지깽이는 정말로 볼품이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우리 모두를 대표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우리의 모습이 불구덩이에서 꺼낸 나무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정죄하지 아니하십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보배피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입고 있던 더러운 옷을 벗기고 그 죄과를 제하여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십니다. 깨끗한 옷, 의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하얗게 빛나는 세마포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셨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배피로 깨끗하게 씻어주시며 의롭다고 하십니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정한 관을 썼다는 것은 제사장으로 취임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종도 사람입니다. 허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여 쓰십니다. 이스라엘이 노예백성이었지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벧전2:9). 우리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 쓰임 받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같이 부족한 자들을 택하여 쓰심으로 그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며 감사하게 하고자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수아를 택하여 세우고 나서 그에게 격려사를 주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제사장에게 구할 것은 그 입술에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자신이 먼저 그 말씀대로 행하고 가르칠 때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며 성전 뜰을 지킬 것이며 또 하나님과 거룩한 무리와 함께 교제하게 하십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거룩한 무리와 영적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다윗은 시 84:10절에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과 같은 왕이 이런 고백을 한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집 뜰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그 동료들을 예표의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8). 그들은 메시야와 그 시대를 상징합니다.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8b,9)” 순은 메시야를 상징합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매우 부드럽고 깨끗하고 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슬린 나무에서 순이 나오게 하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순에는 성장점이 모여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작고 연약하지만 자라면 강하고 크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의 역사입니다. 우리 가운데 마태 팀이나 JBF가 바로 순의 역사입니다.
또한 그는 강하고 견고한 돌의 이미지를 갖고 계십니다. 메시야는 돌처럼 강하고 견고할 것입니다. 그는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되어 교회의 기초가 되는 머릿돌이 되십니다. 더 나아가 메시야는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실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속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할 것입니다(10).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가져오게 될 평화로운 삶, 풍성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II. 스룹바벨에게 주시는 환상(4장)
스가랴가 본 다섯 번째 환상은 ‘순금 등대’에 관한 것입니다. 4장 2,3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여기서 순금 등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일곱 촛대는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빛을 비추는 등대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래 빛은 예수님이십니다(요8:12). 신자는 그리스도에 연합된 사람, 그리스도에게 붙은 사람, 그리스도께 소속된 사람으로서 빛이신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었습니다. 감람나무는 기름을 냅니다. 감람나무는 등대가 지속적으로 빛을 발하도록 기름을 공급하는 무한한 공급의 원천을 상징합니다. 여기에 나타난 두 감람나무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왕과 제사장으로서 장차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스룹바벨은 BC537년에 1차 바벨론 포로 귀환 시에 돌아왔습니다.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으로서 영적인 지도자라면 스룹바벨은 총독으로서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 재건을 하고자 했지만 반대에 부딪쳤습니다(스4:1, 스4:4). 대적들이 일어나서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고 그 건축을 방해 했습니다. 대적들은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모반을 한다는 거짓 고소를 했는데 그로 인해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습니다(스4:21). 성전 재건이 흐지부지되자 16년 동안 백성들의 마음은 세속적인 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스룹바벨도 한 풀 꺾였습니다. 그는 성전 재건이 자기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은 자기 일에 힘을 쏟고 있었고 재건되던 성전은 흉물스럽게 방치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여기서 “힘”은 이 세상에 속한 각양 세력 즉 금력, 병력, 인력 등이고, “능”이라는 것은 스룹바벨 개인의 능력, 추진력, 조직력, 지혜, 담력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스룹바벨은 성전 재건이 되지 않는 것이 자기가 정치 권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에게도 복음 역사가 안 되는 이유가 많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시대 상황이 어렵기 때문이고 내적으로는 개인의 영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시대 문화를 이해하고 시각적인 자료들을 활용하고 그들을 이끌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더라도 여호와의 신이 없으면 괜히 부산만 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역사도 여호와의 신으로 된다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신은 자기를 비우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여호와의 신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영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롬8:26)”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고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고 우울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보실 때 성령께서 동정하시고 그의 속사람을 자신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조용하게, 보이지 않게, 그러면서도 넘치는 동정심으로 우리를 효력있게 도우십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성령의 도우심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이런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20).” 성령은 열매 맺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령은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풍성케 하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각양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안에 거할 때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주의 성령께서 날마다 저를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날마다 성령을 의지할 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강력한 능력을 덧입고 복음을 전하며 양육하고 훈련하여 성서 한국과 세계선교 사명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때가 되자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격려하시고 다시 일하게 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의 마음을 담대하게 하십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큰 산은 장애물입니다.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반대와 같은 정치적인 장애물, 돈이 부족한 경제적인 장애물, 주변국들의 방해와 같은 환경적인 장애물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의 장애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쾌락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쾌락의 물이 불을 꺼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장애물들이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자기 이름을 넣고 믿음으로 외쳐봅시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엘리야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에게 능력을 주시고 격려하사 능히 성전 재건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담대하게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큰 산이라도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2-24).”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연구하기보다 주의 영을 연구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을 덧입고 도전하는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 모양의 장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성전이 재건될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은총으로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산을 평지같이 만드시며 모든 역사를 이루게 하실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캠퍼스에서 일대일 성경 공부를 통해서 제자 양성을 하고 한국과 세계를 감당할 영적 리더들을 키우고자 합니다. 이 일을 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장래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안일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처한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능히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기 위해서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담대하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학생 목자들을 세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우리가 먼저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로 자라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것을 믿고 말씀에 순종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번 주에 바이블 아카데미를 갖는 가운데 새 양들을 얻고 이들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이 시작한 성전 건축이 완성될 것을 어떻게 확신시켜 주셨습니까? 8-1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스룹바벨이 성전을 짓기 위한 기초를 놓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마치게 하실 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스룹바벨이 성전 건축을 시작할 때는 모든 것이 너무 미미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스3:12)”였습니다. 하지만 작은 일을 보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고 전능하신 눈이 보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이 재개된 지 4년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주전 536년에 처음 시작하였는데 주전520년에 다시 시작하여 주전516년에 마쳤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전 재건이 곧바로 이루어지도록 하지 않으셨을까요? 무엇보다 그들이 성전 재건을 이루고 나서 내 능력과 내 손으로 이것을 이루었다고 교만을 떨까봐 원수들의 방해를 허용하셨습니다(신8:14).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할 만한 영적인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그들이 더 순수해져야하고 더 담대해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영적인 준비를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원수들의 방해 공작으로 그들을 연단하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영광을 볼 때 지금의 우리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기 쉽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는 일들이 미천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통해서 이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성전 재건이 완수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곱은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기뻐하리라(10)” 이는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공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성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임이 몇 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두고 계십니다. 우리가 담대한 마음을 갖고 포기치 말고 복음 전도와 제자 양성 역사를 섬겨야 합니다. 내가 포기치 않는 한 이 모임은 소망이 있습니다.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었는데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입니다. 그들은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입니다. 이들은 제사장과 왕입니다.(레21:10; 삼상10:1). 이들이 “주 앞에 모셔 섰다”함은,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에 즉각 순종하려고 대비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킵니다. 이 둘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성령의 은혜를 풍성히 받아 하나님의 교회에 공급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전 재건은 두 사람의 연합된 힘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발과 등잔을 연결하는 금관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기도하면 성령 충만으로 기름 부어지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름이 공급되면 금촛대가 환한 빛을 발합니다. 기름의 역할은 다양합니다. 따뜻하게 하고 사람을 치유하고 부드럽게 하고 맛을 냅니다. 기름의 역할은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게서는 아름다운 빛이 나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하고, 사람들을 부드럽게 하고,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쓰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사람을 쓰십니다. 성령 충만 다음에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도자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합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이끌어 갈 때 그 공동체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지도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도력이 성장할 때 우리가 돕는 양들이 성장합니다. 우리가 성령이 충만한 종들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고, 우리 편에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장애물을 극복하고, 맡은 바 사명을 완수하며 열매맺는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1068941887/03슥2.hwp (0byte)
139회 다운로드 | DATE : 2003-11-16 08:40: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